프로야구 KIA 타이거즈의 최형우는 리그최고 타자다. 좌타자 최초로 4연속 시즌 100타점을 돌파했다. 전인미답의 4연속 시즌 3할-30홈런-100타점에도 도전하고 있다. 프로입단 15년차인 그는 정규시즌 MVP를 차지한 적이 없다. 1인자의 자리에 한번도 오르지 못한 것이다. 최형우는 지난달 “영원한 2인자로 남겠다”고 했다. 1인자가 되겠다는 꿈을 접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욕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영원한 2인자로 좋은 성적을 올리자고 생각하니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그가 편 ‘2인자론’은 새겨들을 만하다.

2인자는 서럽다. 1인자의 그늘에 가려 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가 총애한 궁정악장이었던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걸출한 음악가였다. 하지만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공연을 보고 난 뒤 절망의 늪에 빠져들었다. 방탕하고 오만한 모차르트에게 ‘천상(天上)의 음악’을 실현할 수 있는 천재성을 부여한 신을 저주하기도 했다. “신은 내게 음악에 대한 열정만 주셨고, 모든 재능은 모차르트의 몫이었다.” 2인자의 설움은 1인자를 향한 적의로 돌변하기도 한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파멸시키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 것도 2인자가 겪는 절망감의 표출일 수도 있다.

최지성 전 삼성 미래전략실장이 25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2인자는 열등감의 포로가 되기도 한다. 30여년간 전두환의 위세에 눌려 지냈던 노태우가 그랬다. 육사 11기 동기였지만 노태우는 전두환의 뒷길만을 좇았다. 전두환에게 인수인계받은 직책만도 육참총장 수석부관, 경호실 작전차장보, 보안사령관, 민정당 총재,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5개나 된다. 민주주의를 짓밟고 헌정을 유린한 1979년 12·12 쿠데타, 1980년 5·18 광주학살 때도 전두환이 앞장서고, 노태우가 뒤따랐다. 노태우가 전두환에게 가졌던 우월감이 있긴 하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해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에 선출된 전두환과 달리 자신은 국민들의 직접투표로 당선됐다는 것이다. 노태우는 언론인터뷰에서 “만약 내가 (전두환의) 2인자로 행동했다면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전두환은 지난 4월 펴낸 <전두환 회고록>에서 “간접선거로 대통령이 되려 했던 노태우를 수차례 설득한 끝에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겠다는 답변을 얻어냈다. 그때까지도 노태우는 내 그늘에 가려져 있는 2인자 이미지를 벗지 못했다”고 기술했다.

재벌기업 2인자의 말로는 비참하다. 총수의 방패막이가 돼야 하는 게 재벌기업 2인자의 운명이다. 최지성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이 그랬다. 마케팅 전문가인 그는 삼성전자 대표이사를 거쳐 2012년 미래전략실장이 됐다. 비서실-구조조정본부-전략기획실-미래전략실로 이름이 바뀌어온 삼성그룹 컨트롤타워의 수장이 된 것이다. ‘이재용의 가정교사’로 불렸던 그는 총수 일가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다. 2014년 이건희 회장이 쓰러지자 수시로 병실을 찾았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작업을 주도했다. ‘실세 중의 실세’라는 세간의 평가가 있긴 했지만 실권은 쥐지 못했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복심(腹心)’으로 불렸던 소병해 비서실장이나 이건희 회장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과 달리 ‘관리형 2인자’에 그친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뇌물공여 혐의’로 기소됐던 최 전 실장은 재판과정에서 ‘1인자 전략’을 썼다. 그는 “이재용 부회장은 그룹의 최종 의사결정권자가 아니다”라고 강변했다. 이 부회장도 “식사를 하든 회의를 하든 제가 한 번도 상석에 앉은 적이 없다”고 했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를 ‘이재용 바보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이 부회장을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 만들고, 모든 책임을 최 전 실장에게 떠넘기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 전 실장은 재판과정에서 짜놓은 각본이 있는 것처럼 진술했다. 그룹 후계자 예우 차원에서 필요한 정보를 선별적으로 제공해 이 부회장이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미르재단 출연금, 정유라 승마지원 등에 대해선 전혀 몰랐을 것이라고 강변한 것이다. 그는 “책임을 묻는다면 판단력이 흐려진 제게 물어 달라”고 읍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1심 법원은 이 부회장에게 징역 5년, 최 전 실장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최지성 1인자, 이재용 바보 전략’이 통하지 않은 것이다.

1인자만 기억하고 대접하는 세상에서 2인자가 설 땅은 좁다. 2인자가 겪는 비애와 좌절은 1인자가 되겠다는 욕심을 버리지 못했거나 ‘일인지상 만인지하(一人之上 萬人之下)’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일 수 있다. 높은 곳은 좁고 위태롭지만, 낮은 곳은 넓고 평안하다. 이런 이치를 아는 2인자는 많지 않다. 안분지족(安分知足), 세상의 모든 2인자들이 갖춰야 할 덕목이다.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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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1심에서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이 블랙리스트 무죄, 위증 유죄라며 석방되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서 삼성의 뇌물 공여 혐의가 드러나면서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용에 대한 특검의 구속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고 있지만, 변호인단은 경영권 승계자인 이재용만 모르게 이건희 회장과 삼성 미래전략실 차원에서 경영 승계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 블랙리스트 재판에 조윤선이 없고, 삼성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 이재용이 없다. 각본 없는 드라마가 아니라 주인공 없는 법정이 이들의 목표로 보인다.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서유럽 역사를 살펴보면 합스부르크와 부르봉 가문 등 몇몇 주요 가문이 여러 국가를 분봉하여 통치했다. 당시 사람들은 왕족과 귀족은 평민과 달리 ‘푸른 피(Blue Blood)’를 지녔다고 생각했다. 세습에 의한 ‘혈연 엘리트(Blood Elite)’의 통치는 근대 시민혁명 이전까지 당연한 일이었고, 수천년간 의심받지 않았다. 특별한 피를 이어받아야만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권리(주권)가 있다는 왕권신수설을 넘어, 평범한 시민이 공화국의 주인이 되기까지 인류는 오랜 세월에 걸쳐 투쟁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 사진)과 박영수 특별검사가 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결심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김기남기자 kknphoto@kyunghyang.com·연합뉴스

우리 역시 1987년 민주화와 노동자 대투쟁으로부터 2017 촛불혁명에 이르는 힘든 과정을 통해 비로소 민주공화국 시민의 정체성과 자의식을 획득할 수 있었다.

지난 30년 동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권력에 대한 비판과 성찰을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제대로 된 비판이나 성찰 없이 꾸준하게 최고의 권력을 누려온 것이 바로 기업 권력이다. 아니, 온갖 비판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국가권력과 언론권력을 길들이며 불가침의 성역이 되었다.

국가권력과 부당하게 야합하여 결과적으로 외환위기를 자초했지만, 이 시기를 전후하여 비판지성의 생산지가 되어야 할 서울의 일류대학들은 앞다퉈 재벌 기업 총수들을 불러들여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기업 총수들은 보답으로 자신의 이름이나 기업명을 딴 신축 건물을 지어주었다. 기업권력을 비판하고 감시해야 할 언론 역시 재벌이 쥐여주는 광고의 단물에 취해 감시를 소홀히 하고 기업의 나팔수가 되었다.

특히 삼성은 ‘삼성이 하면 뭔가 다르다’는 대중의 인식과 자본에 길들여진 언론의 비호 속에서 그들이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정도에 비해 과도한 지위를 누려왔다. “삼성이 국가 성장을 견인할 뿐만 아니라 국가경영을 주도한다”는 삼성이데올로기는 민주화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초래한 국가적 위기상황 속에서 하나의 신앙이 되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삼성을 비롯한 재벌기업들이 경영권을 대물림하면서 국가공동체의 가치 실현을 위한 어떤 책임 있는 태도를 지녀왔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가 불러온 삶의 위기 속에서 대중은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삶의 척박함, 생존의 어려움은 대중의 분노를 자아냈지만, 이 분노는 연대를 통한 극복이 아닌 자기계발과 계층상승을 통한 각자도생으로 향했다. 기업지배사회가 된 대한민국은 이후 어떤 윤리적 규범이나 규칙에 구애받지 않고 오직 ‘부’의 욕망을 추구하는 자들의 세계가 되었다. CEO의 영웅화가 초래한 참혹한 실상은 ‘갑질공화국’으로 나타났다. 2007년부터 2017년까지 10년 동안 언론에 등장한 기업 CEO들의 대표적인 갑질만 언급해도 지면을 다 채울 지경이다.

어느덧 3세, 4세에 이르게 된 경영권 승계자들은 자신의 뛰어난 능력으로 지금의 지위를 누리게 된 것일까? 과연 기업은 대한민국의 권력 구조, 경제시스템, 서민과 중소기업의 희생을 강요하는 정책과 무관하게 오로지 그들의 노력과 혁신으로 성공한 것일까? 신자유주의 이후 우리는 “국가와 국민을 위한 기업이 아니라 기업을 위한 국가”에서 살아가는 기업국가의 국민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 민주화 없는 국가의 민주화는 불가능하며, 주권을 능가하는 경영권에 대한 노동자의 참여와 시민의 감독이 필요하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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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수 특별검사팀 수사 결과 박근혜 대통령에게 뇌물 등 5개 혐의가 추가됐다. 검찰이 밝힌 기존 8개 혐의를 더하면 총 13개에 이른다. 최순실씨 등 비선 실세에 의한 국정농단, 그에 따른 국민주권주의와 법치주의 훼손 등 박 대통령 탄핵 사유는 이로써 더욱 분명해졌다. 특검 수사의 최대 성과는 박 대통령이 최씨와 공모해 삼성그룹으로부터 433억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가 확인됐다는 점이다.

특검은 433억원의 성격과 관련해 박 대통령이 공권력과 국가 기구를 동원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원활한 합병 등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도운 대가라고 못 박았다. 헌법재판관 출신으로 박 대통령 대리인단의 핵심인 이동흡 변호사는 “삼성 관련 소추 사유가 뇌물수수에 해당한다고 입증되지 않는 이상 파면 사유가 되기는 어렵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법원은 뇌물 공여자인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박 대통령 등이 시킨 대로 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국민연금을 동원한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다. 뇌물죄는 뇌물을 준 사람보다 받은 사람의 죄를 훨씬 무겁게 묻는다. 박 대통령은 삼성 뇌물만으로 탄핵감이라 할 수 있다.

박영수 특별검사가 6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특검 사무실에서 열린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 ‘수사 결과 대국민 보고’에서 소회를 밝히고 있다. 김기남 기자

박 대통령이 최씨에게 연설문이나 인사 자료를 유출해 국정 개입을 허용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특검 수사로 더 많은 범죄 사실이 확인됐다. 최씨의 마수는 문화체육관광부 외에 외교부까지 뻗쳤다. 최씨는 미얀마 공적개발원조사업의 이권을 챙기기 위해 내정된 인사까지 밀어내고 유재경 주미얀마 대사와 김인식 한국국제협력단 이사장을 앉혔다. 청와대 의료시스템이 붕괴 상태였던 것도 드러났다. 박 대통령은 최씨 소개로 불법 의료업자들로부터 시술을 받고 공식 자문의가 아닌 김영재씨로부터 ‘비선 진료’를 받았다. 일급 기밀인 대통령의 혈액 등 건강 관련 정보가 새나가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문제의식이 없었다. 박 대통령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도 관여하고, 최씨 민원을 받아 KEB하나은행의 인사에 부당하게 개입한 혐의도 확인됐다. 청와대 지시로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극우 단체에 지원해 ‘관제 데모’를 유도한 사실도 추가로 드러났다. 박 대통령은 주권자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이렇게 남용했다.

여권의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민낯도 드러났다. 황 대행은 청와대 압수수색 등이 이뤄지도록 특검팀을 지원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거꾸로 나왔다. 특검의 수사기간을 연장할 수 없다면 하루라도 빨리 이를 공표해야 했다. 그래야 특검이 남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 대행은 알량한 법 지식을 이용해 결정을 미루면서 국회와 특검을 능멸했다.

박 대통령과 청와대, 황 대행의 조직적인 방해에도 특검이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주말마다 광장에서 촛불을 든 시민들 덕분이다. 한국 사회의 고질인 정경유착을 뿌리뽑지 않고서는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없다는 특검 수사팀의 의지도 작용했다. 청와대는 “특검의 수사 결과는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심리의 증거로 인정될 수 없다”고 말했지만 이는 헌재가 판단할 일이다. 한겨레와 조선일보의 어제 여론조사 보도를 보면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는 의견이 각각 75.7%와 73.3%다. 탄핵심판 선고가 일주일 안으로 다가왔다. 헌재는 법과 원칙에 따라 박 대통령 탄핵 여부를 결정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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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79년 만에 처음으로 삼성그룹의 총수가 구속되었다고, ‘삼성 불구속 신화’가 깨졌다고 거의 모든 언론이 보도하고 있다. 물론 합법적으로 구속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약간 다른 각도에서 역사를 바라보면, 이미 삼성그룹의 회장은 한 차례 권력에 의해 붙잡힌 후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바 있다. 1961년 5월28일, 일본에서 귀국한 이병철 회장이 박정희 장군을 ‘만났다’는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박정희는 쿠데타에 성공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기업인들을 ‘부정축재자’로 지적하고 체포했다. 그런데 그 시점에 이병철은 일본에 있었고 한 박자 늦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감옥에 갈 줄 알았던 그는, 삼성그룹 비서실에 몸담았던 손병두 전 전경련 상근부회장의 증언에 따르면, 메트로호텔이라는 곳에서 박정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온 어떤 ‘신화’가 이어진다. 박정희는 자신이 경제를 잘 모르므로 어떻게 해야 하냐고 이병철에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이병철은 박정희에게 기업인들을 석방해달라고 직언한 후, 일본의 일본경제인연합회(게이단렌)를 모델로 삼아 오늘날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된 한국경제인연합회를 창설하였으며 국가중심의 경제개발 전략 수립에 일조했다는 것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9일 오전 대치동 특검사무실로 구속된 이후 이틀 연속 소환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적잖은 이들이 박정희 신화, 혹은 한국의 재벌 신화를 윤색하는 과정에서 이 사건을 일종의 평화로운 회의처럼, 혹은 이병철의 ‘돌직구’가 한국 경제 성장의 방향을 제시한 사업 설명회인 양 포장하곤 한다. 하지만 이병철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계엄 상황이고, 상대는 바로 그 쿠데타의 주인공이다. 형무소가 아니라 호텔에서 만났다 해도 실질적으로 구금 상태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박정희의 요구를 받아들이거나 박정희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큰 이익을 안겨줄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야만 할 상황이다. 박정희를 오래도록 보좌해온 누군가를 익명으로 인터뷰한 후 다니엘 튜더는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병철은 모종의 방법으로 귀국하라는 설득을 받았고, 돌아오자마자 서울 모처에 감금됐다. 그러나 재능 있는 사업가이자 설득력 있는 화술의 소유자였던 이병철은 박정희 장군과의 협상 끝에, 그가 지닌 대부분의 재산을 국가에 ‘기부’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다른 기업가들이 박정희가 제시하는 경제개발 전략에 따르도록 설득하겠다는 안을 내놓았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이병철은 오늘날까지 존속하며 기업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36쪽)

대한민국의 기업과 정부의 관계란 바로 이렇게 형성되었다. 정권을 손에 쥔 자는 기업의 목에 칼자루를 들이댈 힘을 갖는다. 기업은 정치인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며, 그 대신 정부의 경제발전계획에 따라 주요 사업에 참여할 권리와 더불어 해당 사업을 시작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시중 금리보다 훨씬 저렴하게 대출받을 수 있다. 물론 그 대출받은 돈 중 일부는 다시 정치인의 뒷주머니로 흘러들어가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재용 측에서 최순실 딸 정유라의 말 구입 및 승마 비용을 지불해놓고도 그것이 뇌물로 제공된 것이 아니라 협박을 받아 내놓은 것이라고 항변하는 것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강제로’ 돈을 내놓으면 권력으로부터 더 많은 이권을 얻어낼 수 있다는 기대하에 행동했을 따름이다. 1961년 이병철이 불법적으로 ‘구속’될 때부터 2017년 이재용이 합법적으로 구속될 때까지 이어져온 게임의 법칙을 따른 것이다.

‘삼성 불구속 신화’는 없다. 깨진 것이 아니라 원래 없었다. 다만 재벌과 정권의 결탁이 너무도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었기에 그런 신화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이제는 가짜 신화가 사라진 자리에 공정하고 민주적인 시장경제를 수립할 때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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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결정이 있었다. 그리고 이 결정이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일부 언론에 의해 잠깐 동안 제기됐다. 결론부터 이야기해서 이번의 영장 기각결정은 대통령 탄핵심판의 결론에 별 영향을 줄 수 없다고 본다. 심지어 구속영장이 기각됐다고 해서 그것이 이 부회장에 대한 무죄판결로 바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법원의 영장실질심사는 유무죄를 판단하는 절차가 아니라 원활한 수사를 위해 피의자를 구속해 신병을 확보해둘 필요성이 있느냐 여부를 판단하는 절차이다. 따라서 법원의 영장기각은 현재 상황에서 특검 수사를 위해 이 부회장의 구속이 필요한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되므로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하라는 정도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영장 기각결정이 이 부회장의 재판 결과에 미치는 영향도 이렇게 미미할진대, 제3자인 대통령의 탄핵심판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부회장의 뇌물공여 혐의가 인정될지, 이 혐의에서 뇌물수수 의혹을 받고 있는 대통령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등은 특검의 기소 이후 법원의 재판을 통해 결정될 부분이기 때문이다. 국회가 본회의에서 통과시킨 대통령 탄핵소추의결서에는 무려 13가지에 이르는 헌법 및 법률 위반의 소추사유들이 적시돼 있다. 그중의 하나가 형법상 뇌물죄 위반일 뿐이다. 설령 뇌물죄 부분에서 대통령의 뇌물수수 혐의가 없다고 헌재가 판단을 내리더라도 다른 12개의 탄핵소추 사유들 중 어느 하나에서라도 대통령을 파면할 정도의 혐의가 입증되면 헌재는 바로 탄핵 인용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지난 2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굵은 눈발과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앉아 있다.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그러면 이번의 영장기각 결정이 탄핵심판의 속도에는 영향을 줄 수 있을까? 탄핵심판의 결론에 영향이 없는 것과 똑같은 이유로 속도에도 영향이 없다고 본다. 오히려 탄핵심판 공개변론 과정에서 대통령 측 대리인단이 계속해서 지연 전략을 쓰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 측 대리인단은 탄핵심판 초기 첫 답변서에서 최순실씨 등 국정농단 연루자들의 법원 1심 판결도 나오지 않았다며 대통령에 대한 무죄추정의 원칙이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탄핵심판을 지연시키려 한 이래로, 여러 쟁점들에서 형사재판에나 적용되는 법리를 헌법재판의 하나인 탄핵심판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시간 끌기에 나서고 있다. 최근에는 안종범 전 수석이 작성한 수첩 중 11개가 수첩을 돌려주겠다는 검찰의 약속을 믿고 제출된 것인데 검찰이 이를 돌려주지 않고 압수영장을 청구해 확보한 위법수집 증거라고 주장하면서, 대법원 판례상의 독수독과원칙에 따라 위법수집 증거를 이용해 이루어진 안종범 전 수석의 진술을 담은 신문조서 등도 탄핵심판에서 증거로 사용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탄핵소추사유 중 하나인 대통령의 권한남용 사실을 입증할 결정적 증거에 대해, 형사재판에서, 그것도 구체적 상황에 따라 적용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법리를 들어 증거 채택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심리를 지연시키려 한 것이다. 다행히 헌재는 이에 대해 불법한 압수인지 아닌지는 헌재가 판단할 필요가 없으며 그것은 나중에 형사재판에서 다투라고 하면서 대통령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탄핵심판은 형사사건과 별개라고 본 것이다. 더욱이 바로 다음 날 법원은 안종범 전 수석의 형사재판에서 수첩 모두를 증거로 채택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헌재도 대통령 측 대리인단의 재판 지연 전략에 말려들지 않고 신속한 재판의 의지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헌재는 계속해서 이러한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해야 한다. 대통령 측 대리인단의 추가 증인신청도 시간 끌기를 위한 것으로 판단되면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중요한 쟁점의 심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됐으면 변론을 신속히 종결하고 이제 평의를 통해 결정을 내려야 한다. 헌재의 조속한 결정은 국익이나 국민의 뜻에 비춰봤을 때 꼭 필요하다. 또한 일부 재판관이 퇴임해서 8명이나 7명의 재판관이 탄핵결정을 내리게 되면 그 결정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9명의 결정이 아니라는 이유로 시비를 걸 수도 있다. 헌재 결정의 권위라든지 반대 측으로부터의 시비를 차단한다는 의미에서도 조속한 헌재 결정이 요구되는 것이다.

지난 토요일, 함박눈이 내리는 영하의 날씨에도 광화문에서 열린 제13차 촛불집회에서 32만명의 시민들이 입을 모아 촉구한 것도 헌재의 ‘조기 탄핵’이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탄핵심판을 형사재판처럼 진행해서 시간을 지체할 거라면, 헌법재판관들은 헌재 대법정의 재판관석이 아니라 법원 형사법정의 판사석에 가서 앉아 있어야 할 것이다. 헌재라는 최고법원의 재판관에게 국민이 부여한 막중한 책임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는 말이다. 헌재의 조속한 결정을 다시금 촉구한다.

임지봉 |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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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씨 측에 433억원의 뇌물을 준 혐의를 받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어제 법원에서 기각됐다. 조의연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뇌물 범죄의 요건이 되는 대가관계와 부정한 청탁 등에 대한 현재까지의 소명 정도 등에 비춰 볼 때 현 단계에서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기각 사유를 밝혔다. 지금까지의 특검 수사 결과로는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 요건이 충분하지 않다는 취지이다.

사법부 판단은 존중하지만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인신 구속은 신체의 자유를 억압하는 등 개인에게 큰 피해를 주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 법원은 수사에 미진한 점이 있고 의심이 들면 마땅히 구속영장을 기각해야 한다. 그러나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 기각이 법과 원칙에 따른 것인지 의문이다. 수십명의 전관 변호사를 병풍처럼 세운 재벌 총수가 아닌 일반인이었어도 법원이 이처럼 결정했을까. 230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는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은 “법은 평등하지 않았고 상식은 또 한번 무너졌다”고 비판했다. 야당도 일제히 비판 성명을 냈다. 경제 위기론과 재계 및 보수세력의 압박에 법원이 무릎을 꿇었다는 지적도 있다. 당연한 반응이라고 본다.

지난 18일 서울중앙지법에서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받고 서울구치소에서 대기하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9일 새벽 영장 청구가 기각되자 구치소 밖으로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이 부회장의 핵심 혐의는 박 대통령 등에게 뇌물을 줬다는 것이다. 법원은 이 부회장이 박 대통령과 최씨 측에 건넨 433억원의 대가성이 명확하지 않다고 봤다. 이 부회장이 박 대통령과 최씨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돈을 냈다는 이른바 ‘피해자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당시 경영권 승계가 걸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건으로 박 대통령과 정부 도움이 절실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부정한 방법으로 국민연금공단의 지원이 이뤄진 정황이 있다. 특검은 이 부회장이 뇌물의 대가로 박 대통령에게 경영권의 안정적 승계라는 ‘부정한 청탁’을 한 것으로 규정했다. 특검은 “문형표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보건복지부 장관이던 2015년 6월 말 안종범 당시 경제수석 등을 통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이 성사될 수 있게 잘 챙겨보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를 전달받았다”고 밝혔다. 법원도 이를 인정해 문 이사장의 구속영장을 지난달 발부했다. 그래놓고도 이 부회장의 청탁과 이 부회장이 건넨 돈의 대가성은 인정하지 않았다. 법원 판단대로라면 일련의 사건이 모두 독립적으로 이뤄진 셈이다.

삼성은 미르·K스포츠 재단에 204억원 출연 외에도 최씨 모녀를 직접 지원했다. 재단 출연이야 다른 재벌·대기업도 했다지만 삼성은 승마 유망주 육성 명목으로 2015년 8월 최씨가 세운 독일의 페이퍼컴퍼니 코어스포츠(비덱스포츠의 전신)와 210억원 규모의 컨설팅 계약을 맺고 35억원가량을 송금했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최씨를 콕 집어서 지원한 것이다. 누가 봐도 비정상적이다. 법원은 이 과정에서도 부정한 청탁이 없다고 봤다. 이 부회장은 박 대통령에 대한 조사 없이 자신의 영장이 청구됐다는 점도 호소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수사 상황에 따라서는 뇌물 수수자보다 뇌물 공여자를 먼저 구속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이번 사건은 최종 타깃이 박 대통령인 만큼 특검 입장에서는 이 부회장 신병 확보가 절실했다.

법원이 영장을 기각했다고 해서 이 부회장이 무죄라는 의미는 아니다. 특검도 이 부회장에 대한 수사 의지를 밝혔다. 이규철 특검 대변인은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 결정은 매우 유감이나 필요한 조치를 강구해 흔들림 없이 수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특검은 추가 증거가 확보되는 대로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을 재청구해야 한다. SK·롯데·CJ 등 다른 재벌 총수의 뇌물 공여 의혹 수사도 계속돼야 한다. 특검의 분발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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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경남 창원에서 열린 촛불집회 연단에 24세 청년이 올라왔다. 유튜브를 통해 본 영상에서, 그는 20세에 취직해 4년째 최저임금을 받고 있는 전기공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세금 떼고 나면 손에 쥐는 월급이 120만원인데, 방세와 교통비, 식비, 공과금을 내고 나면 저축을 할 돈이 남지 않는다고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지만, 지금의 월급으로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궁금해서 촛불집회에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박근혜 퇴진 이후에 자기 삶이 나아질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고 했다. 1987년에도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고, 그다음에 노동자들이 대투쟁을 해서 임금도 오르고 삶이 나아졌다고 알고 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건지 궁금하다고 했다. 이 청년노동자의 소망처럼, 이번 촛불은 우리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 수 있을까? 유튜브에 떠 있는 자유발언 영상들을 보면, 이런 희망 섞인 기대들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반면 하루하루 밝혀지는 대한민국의 민낯은 참담하기만 하다. 소설가로 알려진 대학교수가 ‘정유라’에게 학점을 주기 위해 부정행위를 서슴지 않았다는 뉴스가 나온다. 국회에서는 태연하게 ‘최순실을 몰랐다’고 잡아떼던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사실은 최순실·정유라에게 수백억원을 지원하라고 직접 지시했다는 뉴스도 나온다. 힘과 돈을 가진 이들이 나라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런 나라를 바로잡겠다고 알바비 7만원을 포기하고 왕복교통비까지 들여서 촛불집회에 나왔다는 청소년이 있는 게 이 나라의 기막힌 현실이다.

(출처: 경향신문DB)

그래서 이번에는 ‘박근혜’라는 한 사람이 물러나는 것으로 끝낼 일이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쌓여 있는 이 나라의 적폐를 청산하는 것과 함께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것이 없지는 않다. 많이 훼손되어 왔지만, 소중한 대한민국만의 유산도 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국을 떠나,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독립운동가들이 꿈꿨던 나라의 모습이 여러 문서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 문서들을 보면, 대한민국의 참된 헌법정신, 건국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은 ‘고르게 인간답게 사는 민주공화국’이다. 무슨 근거로 이런 얘기를 하느냐고 묻는다면, 1941년 11월2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포했던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보라고 말하고 싶다. 이 문서에서 독립운동가들은 ‘삼균주의(三均主義)’를 표방하고 있다. 조소앙이 이론적 기반을 세웠던 삼균주의는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의미한다. 보통선거를 통해 정치의 균등을, 토지 국유를 통해 경제의 균등을, 무상교육을 통해 교육의 균등을 도모하고, 불평등을 해소한다는 것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이 꿈꿨던 나라는 이런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런 내용은 1948년 제헌헌법에도 반영된다. 제헌헌법은 이승만 세력, 한민당 등 우파로 분류되는 집단들도 참여해서 만들어졌지만, ‘대한민국 건국강령’의 연장선상에서 ‘만민균등주의’를 기본정신으로 택했다. 그래서 ‘모든 영역에서 사람들의 기회를 균등히 한다’는 것이 헌법 전문에 담겨 있다. 헌법 제정 과정에서 많은 역할을 했던 법학자 유진오는 “대한민국 헌법의 기본정신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적·경제적 민주주의의 조화를 꾀하는 데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제헌헌법이 만민균등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좀 더 구체적으로 규정한 내용도 있다. 대표적으로 노동자에게 이익균점권을 보장했다. 사기업의 근로자가 기업의 이익 분배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이익균점권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그만큼 제헌헌법을 만들 당시에는 만민균등주의에 대한 공감대가 존재했던 것이다. 만약 이런 정신만 실현되고 있다면, 24세 청년노동자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낫지 않았을까?제헌헌법은 토지 자체를 국유로 하지는 않았지만, 광물 등 지하자원은 국유로 한다고 규정했고, 운수·체신·금융·보험·전기·수도·가스 등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는 규정도 두었다. 농민이 농지를 가질 수 있도록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정했고, 이 조항을 근거로 이승만 정권도 농지개혁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과정은 끊임없는 헌법정신의 훼손이었다. 노동자 이익균점권은 5·16쿠데타 이후인 1962년 삭제되었다. 공공성 있는 기업을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는 조항은 그보다 앞선 1954년 삭제되었다.

물론 지금 이런 조항을 단순히 부활시키자는 얘기를 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조항을 두었던 헌법의 기본정신을 복원하자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이, 그리고 제헌헌법이 꿈꿨던 나라는 ‘고르게 인간답게 사는 나라’였던 것이 분명하다. ‘헬조선’은 헌법정신과는 정반대의 결과이다.

그래서 박근혜 퇴진은 정경유착과 특권·기득권 구조의 퇴진이 되어야 하고, 제헌헌법의 정신을 부활시키는 강력한 개혁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선거제도 개혁, 재벌 개혁, 검찰 개혁, 관료기득권 개혁, 중앙집권적 국가구조의 개혁이 필요하다. 일하는 사람에게는 정당한 대가가 보장되고, 누구나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비빌 언덕’이 권리로 보장되어야 한다. 이런 나라를 이제는 만들어야 한다.

하승수 |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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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고 금수저인 박근혜 대통령과 재벌은 닮은 점이 많다. 무엇보다 한 줌도 안되는 지분으로 권력을 향유하고 있다. 지지율 4%에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로 직무정지 상태지만 박 대통령은 여전히 새누리당과 정치권을 쥐락펴락한다. 이정현 같은 친박계 의원들을 내세워 새누리당을 장악하고, 새누리당을 통해 입법·행정·사법부 관료조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이다. 재벌 총수들은 더 심하다. 지분율이 1%도 안되지만 순환출자를 이용해 그룹 계열사 전체를 지배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에버랜드 대주주로 등극한 뒤 에버랜드 보유 지분으로 삼성생명과 삼성전자 등을 지배했다.

형제자매와 연을 끊고 산다는 점도 비슷하다. 박 대통령 동생 지만씨는 “피보다 진한 물이 있다”는 말로 누나와의 관계를 표현했다. ‘진한 물’은 최순실씨다. 박 대통령 동생 근령씨의 남편 신동욱씨도 “아내가 해야 할 일들을 최순실씨가 했다. 최씨로 인해 형제간의 관계가 나빠졌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 삼남매는 어머니 고 육영수 여사가 세운 육영재단의 소유권을 놓고 다툼을 벌였다. 박 대통령이 처음 육영재단 이사장을 맡았던 1982년에는 최태민씨를 고문으로 임명했다는 이유로 근령·지만씨가 반기를 들었다. 이후 재단 이사장에 취임한 근령씨는 동생 지만씨와의 송사로 조용한 날이 없었다. 재벌 2·3세들도 유산 상속 등을 놓고 암투와 소송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삼성가 이맹희·건희 형제의 분쟁, 현대가 정몽구·몽헌 형제의 ‘왕자의 난’이 과거 일이라면 효성(조현준·현문), 금호(박삼구·찬구), 롯데(신동주·동빈)의 골육상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유산 다툼은 그 재산이 이들의 노력으로 형성되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6일 오전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최순실 게이트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두한 재벌 총수들의 모습을 TV를 통해 보고 있다. 이석우 기자

배신을 혐오하는 것도 박 대통령과 재벌의 공통점이다. 이들은 조폭 우두머리처럼 부하들에게 맹목적인 의리와 복종을 강요한다. 윤리나 도덕, 개인의 가치 판단이 끼어들지 못하게 한다.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차명 비자금 등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를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현대차는 승객 안전을 위협하는 에어백 센서 결함과 세타2 엔진 불량 문제를 경향신문 등에 제보한 김모 부장을 해고했다. 한화는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와 정권과 재벌의 유착을 비판한 주진형 전 한화증권 사장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다. 박 대통령이 유승민 의원을 내치고, 친박이 비박을 욕하는 것과 판박이다. 배신을 혐오하는 것은 자신이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배신자를 응징하는 것은 그만큼 배신이 두렵기 때문이다. 배신자가 늘면 이들이 쌓은 성은 저절로 무너진다.

박 대통령은 검찰에 당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 감옥에 갈 가능성이 높다. 박 대통령은 3개월 전만 해도 우병우 전 민정수석을 통해 검찰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생각했다. 국정농단 사건에 검찰 수사가 본격화하자 최고의 특수부 검사라는 평판을 들었던 최재경 전 인천지검장을 민정수석으로 앉혔다. 그러나 결국 김수남 검찰총장 지시에 따라 움직인 40여명의 검사들에게 탈탈 털렸다. 막강한 재벌 총수들도 검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경우가 있다. 평소 다양한 방법으로 검찰 수뇌부를 관리하고 수사가 시작되면 수십억원의 수임료를 줘가며 검사 출신 전관 변호사를 고용한다. 하지만 검사 비리 문제 같은 것으로 검찰이 코너에 몰린 상황이라면 도움이 안된다. 검찰은 재벌의 뒤통수를 치면서 한순간에 정의의 사도로 변신하는 신공을 발휘한다. 최태원(SK)·김승연(한화)·이재현(CJ) 회장이 그렇게 해서 감옥에 가게 됐다는 시각이 있다. 작년에는 포스코가, 올해는 롯데가 그런 이유로 검찰에 당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유죄 판결을 받더라도 전직 대통령은 화합을 명분으로, 재벌 총수는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이유로 사면을 받는다. 

일상의 자유로움에서 박 대통령과 재벌을 능가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없다. 숙소에 누워 있어도 알아서 보고가 올라오고,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지시가 내려간다. 없는 듯하면서도 있고, 있는 듯하지만 확인할 수 없다. 이들은 오로지 질문을 할 뿐 답변은 하지 않는다. 누가 적어준 것을 그대로 읽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말을 하면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수천만 시민이 TV로 바라보고 있는데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한다. 이런 소소한 것까지 박 대통령과 재벌은 닮았다. 논어에 ‘인지장사 기언야선(人之將死 其言也善)’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죽음을 앞두면 선해진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이들은 나이를 먹어도 늙지 않고 치명적인 병에 걸려도 죽지 않는다. 스스로는 개과천선하기 어렵다. 바로 이것이 추운 겨울에도 시민들이 광장에서 촛불을 놓지 못하는 이유이다.

오창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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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국정조사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날, 더불어민주당 안민석 의원은 “대통령과 단둘이 만나 무슨 얘기를 했냐”고 물었다. 이 부회장은 창조경제에 대해 30~40분간 대화를 나눴다고 대답했다. 안민석 의원이 말한다.

“대통령의 머리로는 창조경제에 대해 30~40분 동안 이야기할 만한 그런 지식이 없으세요. 무슨 얘기 했습니까, 30~40분 동안?”

새누리당은 ‘금도를 넘는 인신공격’이라고 비난했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없다시피 했다. 안 의원의 발언에 대부분 동의했기 때문이리라. 대통령이 3차례에 걸친 대국민담화를 하면서 질문을 받지 않은 것, 그리고 가까운 시일 내에 기자들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도 질의응답을 통해 자신의 지적 수준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잖은가?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아는 게 없어도 대통령을 할 수 있다는 걸 박 대통령이 보여준 덕분일까. 고교생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 뒤 사인을 해줄 때 장래희망을 꼭 묻는데, 대통령이 꿈이라는 학생들이 요즘 들어 부쩍 늘었다. 나라를 잘 만들어 보겠다는 뜻을 가진 이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대통령만 한 ‘꿀직업’이 없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인 듯하다.

첫째,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관저에 있다가, 가끔 집무실에 나와서 남이 써준 원고를 읽기만 해도 2억1200만원의 연봉이 꼬박꼬박 입금된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통령은 일어나시면 그게 출근이고 주무시면 퇴근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관저에서 태반주사를 맞든 미용시술을 하든, 아니면 드라마를 보든 아무 상관이 없다. 이런 꿀직업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더 놀라운 것은 5년을 이렇게 놀아도 전직 대통령으로서 예우를 받는데, 그게 자그마치 1억5000만원에 달하는 연금과 비서관 3명, 운전기사 1명이다. 이쯤 되면 기를 쓰고 대통령 한번 해볼 만하지 않겠는가?

둘째, 충성스러운 부하가 많다. 세월호 침몰 당시 대통령의 대처는 크게 잘못됐다. 대통령의 지적 수준으로 보아 일찍부터 대책본부에 나와 있었다고 결과가 크게 달랐을 것 같지는 않지만, 최소한 국가적 재난 때라도 자리를 지키라고 그런 대우를 해주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7시간이나 자리를 비웠다면 욕을 먹어도 싼데, 그 공백을 입증해줄 수많은 증인들이 하나같이 입을 닫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다. 특히 청와대 대변인의 활약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을 지경인데, 그날 오후 대통령이 머리를 올리면서 보고를 받았다는, 자신도 안 믿을 말을 해명이랍시고 해대는 그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이쯤 되면 기를 쓰고 대통령 한번 해볼 만하지 않겠는가?

셋째, 지인에게 한턱 크게 쏠 수 있다. 친하게 지내는 지인에게 선물을 주면서 폼을 잡고 싶은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다. 하지만 그렇게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사정이 여의치 못하기 때문인데, 대통령이 되면 지인이 바라는 바를 다 들어줄 수 있다. 특히 좋은 점은 자기 돈을 전혀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나쁜 사람이라더라”는 한마디로 공직자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고, 관저로 재벌 총수를 불러서 몇 마디 하면 수십억, 아니 수백억원의 돈이 생긴다. 나중에 걸리면? 걱정하지 마시라. 몰랐다고 하면 그냥 넘어갈 수 있다. 이쯤 되면 기를 쓰고 대통령 한번 해볼 만하지 않겠는가?

넷째,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다. 매일이 휴가지만, 그래도 다들 휴가 가는 여름이 되면 또 놀러 가서 모래사장에 낙서를 하는 것, 이게 바로 대통령의 행복이다. 그뿐이 아니다. 미국을 비롯해 프랑스, 우즈베키스탄 등 원하는 나라는 어디든 갈 수 있다. 국내에서도 그랬듯이 외국에 간다고 특별히 하는 일은 없지만, 그래도 남들 눈에는 뭔가 하는 것처럼 보이니 일석이조다. 오고 갈 때 편안한 전용기를 타고 가는 것은 보너스다. 이쯤 되면 기를 쓰고 대통령 한번 해볼 만하지 않겠는가?

다섯째, 대통령은 임기 중 형사소추를 받지 않는다. 지금 감옥에 있는 이들 중 박 대통령만큼 큰 잘못을 한 사람을 찾는 것도 쉽지 않지만, 박 대통령은 감옥 대신 평소 좋아하던 관저에 머물고 있다. 이만한 죄를 짓고도 관저에 있을 수 있는 건 물론 자신이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통령은 종북에 관한 한 절대적인 권한을 갖는다. 남들은 빨간 옷만 입어도 종북으로 몰지만, 대통령은 김정일에게 매우 비굴한 편지를 보낸 게 드러나도 종북이 되지 않는다. 이쯤 되면 기를 쓰고 대통령 한번 해볼 만하지 않겠는가?

아이들마저 선망해 마지않는 이 자리를 대통령이 물러나기 싫어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대통령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던 3차 담화 때의 약속을 지키는 대신 영혼을 팔아치운 분들로 변호인단을 꾸리고 자신이 저지른 죄를 모조리 부인하고 있는 건 그 때문이다. 국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지만, 박 대통령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래야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대통령의 꿈을 심어줄 수 있으니까. 대통령의 건투를 빈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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