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국가인권위원회의 위상 강화를 지시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사문화된 인권위의 대통령 특별보고를 부활하고, 정부 부처에 인권위 권고 수용률을 높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국가기관과 기관장 평가 항목의 하나로 인권위 권고 수용지수 도입 등 구체적인 실현 방안도 제시했다. 이번 조치를 계기로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잃고 인권 지킴이로서의 본령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인권위가 인권 견인차로서 거듭나기 바란다.

국가인권위는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의 침해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국가기관이다. 권력에 대한 인권적 감시와 견제가 주요 활동이기 때문에 권력에 대한 독립성이 필수적이다. 김대중 정부 때 출범한 인권위는 왕성한 활동으로 성과가 높았다.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과 사형제 폐지, 국가보안법 폐지, 고용허가제 도입, 초등학생 일기장 검사 폐지 등을 권고하고 의견표명을 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인권위 위상은 급격히 추락했다. 조직은 축소되고 예산은 삭감됐다. ‘인권 문외한’인 현병철 위원장과, 뉴라이트 및 비리검사 출신 등 일부 상임위원에 대한 자질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용산참사 사건 재판 등 사회적 현안에 침묵하고, 공권력의 잘못을 옹호하는 반인권적 조치가 잇따랐다. 그 결과 세계 인권기구 연합체인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로부터 잇따라 3차례나 등급보류 결정을 받는 수모를 당했다. 인권 선진국이 단 몇년 사이에 인권 후진국으로 전락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가인권위원회의 위상 제고를 천명한 25일 서울 중구 나라키움 저동빌딩의 국가인권위원회 모습. 이준헌 기자

인권위의 위상 추락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인권 무시는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은 물론 시민 삶의 질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관심과 지시에만 의존해서는 안된다. 이번 조치는 자생력을 상실한 인권위를 소생시키기 위해 필요한 일이지만 어디까지나 한시적인 처방에 그쳐야 한다. 특히 대통령이 인권위에 힘을 실어줄 수도 있지만 자칫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을 핵심으로 하는 인권위의 존재 의의를 저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인권위가 부끄러운 과거를 딛고 인권의 보루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인권 친화적 인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더 이상 현병철 위원장은 없지만, 아직도 인권 문외한이나 동성애 혐오론자 등 부적절한 인사들이 남아 있다면 인권위의 위상을 높이기 어렵다. 정권의 시녀 역할에 익숙해진 조직 문화도 뜯어고쳐야 한다. 인권위는 최후의 인권 지킴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스스로 자기 역할을 되찾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야 한다. 인권위의 분발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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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수년 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할 때다. “그들이 온다!”고 하면 비상이 걸렸다. 인권위 건물을 점거무대로 삼은 장애인들이었다. 칼날 같은 주장과 거친 몸싸움에 엘리베이터를 점거하고 밤샘농성도 불사했다.

왜 저럴까? 조용하고 침착한 목소리가 더 호소력이 있지 않을까? 과격하면 거부감만 더 커진다는 것을 왜 모를까? 그런 선입견이 작동하면 그들의 울부짖음의 내용은 잘 들리지 않게 된다.

나중에 하나하나 살펴보니 구구절절 옳지 않은 주장이 없었다. “장애인도 공부하고 싶다.” “제발 지하철 타고 다닐 수 있도록 하라.” “규율이 지배하는 시설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살고 싶다.” “우리도 사람이다. 1급, 2급으로 등급 매기지 마라.”

주장은 과격하지 않았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최소한의 것에 불과했다. 장애는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눈감고 귀 막은 비장애인에게 있었다. 존중받지 못하니 목청이 높아지고 차츰 분노가 쌓이며 쇳소리가 날 수밖에.

들어주고 만나주지 않으니 행동은 더 과격해질 수밖에 없다. 혹 아는가? 장애인들이 쇠사슬로 몸을 묶고 버스 바퀴 밑으로 몸을 던진 뒤에야 휠체어로 오르내릴 수 있는 저상버스가 이 땅에 도입되었다는 것을.

[장도리]2017년 1월 2일 (출처: 경향신문DB)

광장의 일렁이는 촛불과 함께 정유년 새해가 밝았다.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희망을 염원하던 사람들은 이제 촛불을 들고 탄핵 이후의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촛불혁명의 목표는 정권교체에 머무르지 않는다. 대한민국을 새롭게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나라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광장의 목소리는 다양하다. 혹자는 재벌개혁을, 누군가는 특권과 부패 척결을, 어떤 이는 갑질과 학벌주의와 남성중심사회의 청산을 주장한다. 나는 평등과 정의,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이 구체제와 낡은 질서 대신에 들어서야 할 사회의 중심적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는 중에 인권위를 찾아오던 장애인들이 자꾸 떠올랐다. 탄핵과 정권교체를 외치던 광장의 사람들은 탈시설 장애인들과 함께 살아갈 지역사회 공동체를 만들자는 주장에도 한목소리를 낼까? 터무니없는 임금과 비인격적 대우를 받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화하거나 처우 수준을 높이자고 하면 받아들일까? 인종차별을 견디며 온갖 허드렛일을 감당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이민을 허용하자고 하면 어떨까? 성소수자를 차별·혐오하는 대신 존중하고 연대할 수 있을까? 그 밖에도 많다. 미혼모와 노숙인과 독거노인과 양심적 병역 거부자와 신용불량자와 난민에게도 존엄하게 살 수 있도록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하면 과연 얼마나 수용될 수 있을까?

사회적으로 중대한 국면에 부딪힐 때면 흔히 간과되는 것이 소수자와 약자의 문제다. 소수자의 문제는 ‘사소한’ 문제나 ‘골치 아픈’ 문제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지금은 단결이 우선이고 분열되어서는 안되니 우선 좀 참으라고 한다.

상황은 선거 국면에 접어들면 훨씬 더 나빠진다. 다수의 표를 얻기 위해 뛰는 자들에게 소수자의 목소리는 간과되고 묵살된다. 그래서 소수자는 보이지 않는 존재이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된다.

한국의 인권상황이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맞고 한편으론 염려스럽다. 자신의 인권에 대해서는 민감성이 드높아졌지만 이웃의 인권 침해나 차별에는 무심하거나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장애인, 이주노동자, 성소수자가 아니니 소수자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권침해의 경사에 놓인 바위는 멈추지 않고 굴러떨어진다. 소수자를 위협하던 인권침해는 곧 나의 인권을 위협한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는 소수자이고 약자이다.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비유 중에 아흔아홉 마리의 양과 길 잃은 한 마리의 양 이야기가 있다. 목자는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다. 얼핏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흔아홉 마리의 양 입장에서 한번 보자. 언젠가 길 잃은 양이 될지도 모르는 그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신뢰하게 되고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 목자를 믿고 따르지 않을까?

소수자와 약자는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곁가지로 사소하게 취급되어서는 안되며 우선적으로 보호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인권의 가치인 자유와 평등은 따뜻한 연대를 통해 비로소 충만해진다.

촛불광장은 다양한 소수자의 목소리로 채워져야 한다. 작은 목소리를 내도록 격려하고, 광장에 나오지 않는 소리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세상은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촛불이 되고, 서로의 목소리가 되어주는 것이리라.

문경란 | 서울연구원 초빙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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