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하지 못한 흑백 화면 속, 커다란 구덩이에 여성 시신 수십 구가 버려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불과 19초에 지나지 않는 영상이지만, 정의를 요구하며 수십 년간 계속된 투쟁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중국 윈난성에서 촬영된 것으로 알려진 이 영상은 1932년부터 2차대전 종전까지 지속된 일본군 성노예제 역사의 한 장면을 담고 있다. 이 영상은 2018년 2월 서울시와 서울대학교 인권센터가 공개한 이후 전 세계 언론에서 널리 보도됐지만 일본 정부는 이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 근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일본 정부는 여전히 자국의 전쟁 기록에 직면하기를 거부하고, 보상 문제에 대한 합의는 끝났다고 주장하며 잔혹행위가 자행됐다는 사실도 부인하고 있다.

이처럼 과거의 잔혹행위, 특히 여성에게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일본의 태도는 오늘날 일본 사회의 여성관에도 그대로 스며들어 있다. ‘위안부’라는 조직적인 전쟁범죄의 피해자들은 끊임없이 정의를 요구하고 있지만, 생존자들을 “직업적 창부”로 지칭하거나 증언 및 증거의 타당성을 공격하는 등 이를 부인하고, 비하함으로써 (성노예제를)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여전히 만연하고 있다.

일본군 성노예제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그 뿌리는 일본의 분쟁과 점령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서 기원한다. 당시 일본이 성노예제를 고안하고, 운영하고, 확장시킨 방식 역시 일본의 뿌리 깊은 젠더 불평등과 타 국민 차별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지난 70여년 동안 일본에서 여성의 지위는 극적인 수준으로 상승했지만, 여전히 일본 사회가 갈 길은 멀다. 2017년 세계경제포럼 조사 결과 일본은 성평등에 있어서는 144개국 가운데 114번째로 최악의 수준이었다. 정부 및 공공, 민간기관에서 여성이 요직을 차지한 경우는 충격적이리만치 드물다. 일본 여성은 사회 각계각층에서 일상적으로 성폭력과 차별에 시달리며, 세계적으로 여성 운동이 힘을 얻고 있는 지금도 이 문제는 좀처럼 주목받지 못한다. 최근 오사카국제대학교 조사 결과 정부부처, 경찰, 언론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성폭력 피해 사실을 밝힌 사례도 150건에 달했다.

젠더 고정관념이 팽배하며, 성차별적 태도는 여성들의 일상생활에 끊임없이 영향을 끼친다. 일본 형법에서 규정하는 강간의 정의는 그 범위가 지나치게 좁고, 부부강간을 명확히 범죄로 규정하지 않는 등 국제기준에 따르지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20세기 초부터 2차대전 종전까지 한반도, 중국 등지에서 일본에 강제 징용된 피해자들의 후손 역시 여전히 차별에 시달리고 있다. 소위 ‘자이니치’라 불리는 한국계 일본인에 대한 공격도 만연하다. 한국계 학교는 고등학교 학비 면제 대상에서도 제외된다. 혐오를 지지하는 목소리는 거의 매일같이 위협으로 다가온다.

실제로 벌어진 잔혹행위의 규모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일본군에 성노예로 끌려간 여성, 처형된 여성이 총 몇 명인지도 결코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여성들이 감금되어 있던 ‘위안소’의 위치와 수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모두 파기되었다. 최근 성노예제에 관한 문서와 영상자료를 공개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전쟁범죄를 은폐하려는 시도에 대항하고, 지금도 국가의 손으로 자행되는 불의를 입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범죄 사실을 인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더욱 넓은 범위의 개혁과 재발 방지 보장이 필요하다.

생존자 대부분은 현재 90대 노인으로 그 수가 계속 줄고 있어 직접적 증언은 점점 더 확보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이분들에 대한 배상에 관한 문제 해결도 더욱 시급하다.

일본군 성노예제처럼 일정 기간 동안 여성을 대상으로 강간을 자행하도록 국가가 직접 조직한 제도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조직적 폭력이 일본만의 특이한 역사라고 보기는 어렵다. 구 유고슬라비아, 르완다, 콩고민주공화국, 과테말라 등 최근 역사를 통해 우리는 여성폭력이 불러온 암울한 결과를 여러 차례 목격해 왔으며, 오늘날 미얀마에서도 목도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이러한 폭력의 책임을 인정하고 책임자 처벌과 피해자에 대한 실질적 배상을 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여기에 이러한 범죄의 기저에 있는 여성 차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포괄적인 개혁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과거의 인권침해를 바로잡는다면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과 소수자의 상황을 개선하고, 성노예제와 같은 끔찍한 범죄가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막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히로카 쇼지 | 국제앰네스티 동아시아 조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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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지금 대한민국은 여성들이 주도하는 커다란 운동의 물결에 휩싸여 있습니다. 서지현 검사의 검찰 내 성폭력 피해 폭로 이후, 전방위적으로 여성들의 고백과 지지, 동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한 달여간 제가 가장 많이 받았던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이 지면을 빌려 답하면서 운동의 의미를 살펴보려 합니다.

우선 한국의 ‘미투’ 운동이 할리우드발 ‘#MeToo’ 운동의 후속, 아류 혹은 변종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길게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부터 진행된 동등권운동, 반식민지독립운동, 짧게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 시기에 본격화된 진보여성운동 단체들의 형성과 반성폭력운동, 여성인권운동, 더 최근에는 ‘성폭력 피해 경험 말하기’, 2015년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진행된 ‘성폭력 필리버스터’, ‘#○○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여성운동의 오랜 역사를 먼저 봐야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돌출된 운동이 아니라, ‘관습’과 ‘문화’란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왔던 차별구조에 지속적으로 의문을 던지며 저항하고, 시대를 거슬렀던 여성들의 역사 속에서 이번 ‘미투 운동’을 맥락화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3·8 세계여성의날 기념 제34회 한국여성대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을 지지하고 성평등 실현을 촉구하는 집회와 행진을 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무엇보다 우리나라 여성들에 의해 주도됐으되 세계를 흔든 미투 운동의 원조는 일본군 성노예제로 고통당하셨던 김학순 할머니의 커밍아웃입니다. 가해자의 지속적인 부인에 분통을 터뜨리며 세상에 나왔다고 했던 할머니의 증언은 반세기 가까이 봉인되었던 끔찍한 성노예제의 실상을 폭로하며 전 세계 시민들을 무지의 늪에서 일깨웠습니다. 덕분에 국내는 물론 다른 나라의 피해자들 또한 앞다퉈 세상에 나왔지요.

가부장제와 식민주의 지배체제하에서 여성들에게 가해진 중층적 부정의와 싸우며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다시 활동가로 변화하던 할머니들의 모습 덕분에 우리 시민의식은 또 얼마나 많이 성장했던가요. 미국의 #MeToo 운동과 서지현 검사의 용감한 고백이 이번 미투 운동의 도화선 혹은 변곡점이 될 수는 있으되 원인이 아닌 이유입니다.

둘째, 남녀관계와 상관없는 ‘권력형’ 혹은 ‘갑질’ 성폭력의 문제일까요? 그저 “나쁜 손버릇” “자제하지 못한 성욕”, 개인의 “비도덕적 행위” “성추문” 혹은 특정 조직의 “특수문제”일까요? 남성지배사회에서 성별 권력관계와 무관한 권력형 성폭력이란 개념은 애초에 성립 불가능합니다.

1월 10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정기수요집회 26주년 기념 집회가 열리고 있다. 10일 서울 종로구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1317차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에 참석한 시민들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이준헌 기자

성별(gender) 자체가 권력관계를 내장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동등하되 이분법적으로 나뉜 남성성과 여성성, ‘적절히’ 배분된 역할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성별은 이미 존재하는 권력관계의 효과이며 새로운 권력관계를 생성하는 원인입니다. 남성(성)만 인간의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 여성(성)은 열등한 것, 부차적인 것, 성적인 것, 심지어 ‘낮은 사회적 지위’ 자체를 의미합니다. 중학교 남학생이 여성 교사를, 남성 환자가 여성 의사를 성희롱할 수 있는 이유이지요. 물론 그 남성과 여성은 성별 질서뿐 아니라 계급, 인종, 성적 정체성, 장애여부 등 다양한 차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폭력은 기본적으로 성별권력 관계에서 파생하지만, 다른 차별구조와 만나 더 심화되거나 약화되기도 합니다. ‘성폭력은 구조적 성차별의 문제’라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조직 및 집단 간 차이와 특수성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여성들의 ‘폭로’는 왜 지속될까요? 왜 개별적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있을까요? 물론 처벌은커녕 지속적으로 사실을 부인하고, “지금도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가해자, 심지어 피해자를 ‘꽃뱀’으로 몰며 사회적 타살을 감행한 남성들에 대해 쌓였던 개별적 분노가 폭발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피해자의 말에 귀 기울이기는커녕 가해자를 두둔하고 2차 가해를 일삼던 우리 모두에 대해, 구멍난 법과 제도조차 작동하지 않았던 현실에 대해 일제히 공분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믿을 구석이라곤 유사한 경험을 한 다른 여성들의 목소리와 지지밖에 없기에, 보이지 않는 피해자들을 지속적으로 호명하고 상호 말걸기를 시도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여성들은 “너무 어려서” “뭔지 몰라서” “말해도 소용이 없어서” “소문이 두려워” 잊고자 했던, 그 봉인된 기억과 마주하고 재해석하고, “치유된 줄(만) 알았던” 상처를 들여다보고, 쓰다듬고 치유하는 중이기도 합니다. 서지현 검사의 말대로 “내 잘못이 아니었다”고 다독이면서, 미처 생각지 못한 다른 이들의 상처도 다시 돌아보고 있습니다. 일본군 성노예제의 생존자들처럼 말이지요.

자, 이제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답할 차례입니다. 더 이상 피해자들에게 증거를 요구하지 마세요. 한두 사람, 한두 조직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습니다. 케케묵은 진영논리에 갇힌 ‘물타기’ 대신 일생을 통해 축적된 스스로의 가해 경험부터 성찰해 주세요. 미세한 세포조직처럼 곳곳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성차별적 의식과 구조를 개혁하는 데 동참해 주세요. 우린 이미 사회변혁 운동으로서 ‘미투 운동’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탔습니다.

<이나영 | 중앙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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