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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3.05 [정동칼럼]미투 운동, 거대한 사회변혁의 파도

지금 대한민국은 여성들이 주도하는 커다란 운동의 물결에 휩싸여 있습니다. 서지현 검사의 검찰 내 성폭력 피해 폭로 이후, 전방위적으로 여성들의 고백과 지지, 동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한 달여간 제가 가장 많이 받았던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이 지면을 빌려 답하면서 운동의 의미를 살펴보려 합니다.

우선 한국의 ‘미투’ 운동이 할리우드발 ‘#MeToo’ 운동의 후속, 아류 혹은 변종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길게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부터 진행된 동등권운동, 반식민지독립운동, 짧게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 시기에 본격화된 진보여성운동 단체들의 형성과 반성폭력운동, 여성인권운동, 더 최근에는 ‘성폭력 피해 경험 말하기’, 2015년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진행된 ‘성폭력 필리버스터’, ‘#○○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여성운동의 오랜 역사를 먼저 봐야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돌출된 운동이 아니라, ‘관습’과 ‘문화’란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왔던 차별구조에 지속적으로 의문을 던지며 저항하고, 시대를 거슬렀던 여성들의 역사 속에서 이번 ‘미투 운동’을 맥락화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3·8 세계여성의날 기념 제34회 한국여성대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을 지지하고 성평등 실현을 촉구하는 집회와 행진을 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무엇보다 우리나라 여성들에 의해 주도됐으되 세계를 흔든 미투 운동의 원조는 일본군 성노예제로 고통당하셨던 김학순 할머니의 커밍아웃입니다. 가해자의 지속적인 부인에 분통을 터뜨리며 세상에 나왔다고 했던 할머니의 증언은 반세기 가까이 봉인되었던 끔찍한 성노예제의 실상을 폭로하며 전 세계 시민들을 무지의 늪에서 일깨웠습니다. 덕분에 국내는 물론 다른 나라의 피해자들 또한 앞다퉈 세상에 나왔지요.

가부장제와 식민주의 지배체제하에서 여성들에게 가해진 중층적 부정의와 싸우며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다시 활동가로 변화하던 할머니들의 모습 덕분에 우리 시민의식은 또 얼마나 많이 성장했던가요. 미국의 #MeToo 운동과 서지현 검사의 용감한 고백이 이번 미투 운동의 도화선 혹은 변곡점이 될 수는 있으되 원인이 아닌 이유입니다.

둘째, 남녀관계와 상관없는 ‘권력형’ 혹은 ‘갑질’ 성폭력의 문제일까요? 그저 “나쁜 손버릇” “자제하지 못한 성욕”, 개인의 “비도덕적 행위” “성추문” 혹은 특정 조직의 “특수문제”일까요? 남성지배사회에서 성별 권력관계와 무관한 권력형 성폭력이란 개념은 애초에 성립 불가능합니다.

1월 10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정기수요집회 26주년 기념 집회가 열리고 있다. 10일 서울 종로구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1317차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에 참석한 시민들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이준헌 기자

성별(gender) 자체가 권력관계를 내장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동등하되 이분법적으로 나뉜 남성성과 여성성, ‘적절히’ 배분된 역할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성별은 이미 존재하는 권력관계의 효과이며 새로운 권력관계를 생성하는 원인입니다. 남성(성)만 인간의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 여성(성)은 열등한 것, 부차적인 것, 성적인 것, 심지어 ‘낮은 사회적 지위’ 자체를 의미합니다. 중학교 남학생이 여성 교사를, 남성 환자가 여성 의사를 성희롱할 수 있는 이유이지요. 물론 그 남성과 여성은 성별 질서뿐 아니라 계급, 인종, 성적 정체성, 장애여부 등 다양한 차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폭력은 기본적으로 성별권력 관계에서 파생하지만, 다른 차별구조와 만나 더 심화되거나 약화되기도 합니다. ‘성폭력은 구조적 성차별의 문제’라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조직 및 집단 간 차이와 특수성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여성들의 ‘폭로’는 왜 지속될까요? 왜 개별적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있을까요? 물론 처벌은커녕 지속적으로 사실을 부인하고, “지금도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가해자, 심지어 피해자를 ‘꽃뱀’으로 몰며 사회적 타살을 감행한 남성들에 대해 쌓였던 개별적 분노가 폭발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피해자의 말에 귀 기울이기는커녕 가해자를 두둔하고 2차 가해를 일삼던 우리 모두에 대해, 구멍난 법과 제도조차 작동하지 않았던 현실에 대해 일제히 공분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믿을 구석이라곤 유사한 경험을 한 다른 여성들의 목소리와 지지밖에 없기에, 보이지 않는 피해자들을 지속적으로 호명하고 상호 말걸기를 시도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여성들은 “너무 어려서” “뭔지 몰라서” “말해도 소용이 없어서” “소문이 두려워” 잊고자 했던, 그 봉인된 기억과 마주하고 재해석하고, “치유된 줄(만) 알았던” 상처를 들여다보고, 쓰다듬고 치유하는 중이기도 합니다. 서지현 검사의 말대로 “내 잘못이 아니었다”고 다독이면서, 미처 생각지 못한 다른 이들의 상처도 다시 돌아보고 있습니다. 일본군 성노예제의 생존자들처럼 말이지요.

자, 이제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답할 차례입니다. 더 이상 피해자들에게 증거를 요구하지 마세요. 한두 사람, 한두 조직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습니다. 케케묵은 진영논리에 갇힌 ‘물타기’ 대신 일생을 통해 축적된 스스로의 가해 경험부터 성찰해 주세요. 미세한 세포조직처럼 곳곳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성차별적 의식과 구조를 개혁하는 데 동참해 주세요. 우린 이미 사회변혁 운동으로서 ‘미투 운동’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탔습니다.

<이나영 | 중앙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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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