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괴감'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7.01.26 자존감과 자괴감
  2. 2016.12.14 자괴감의 두 얼굴

얼마 전 일부 누리꾼들이 걸그룹 멤버 수지(배수지)의 화보집 속 사진 몇 장에서 매춘과 로리타 콘셉트가 보인다고 지적했다. 늘 그렇듯 당사자의 입장은 알 길 없고 소속사에서 법적 대응을 한다는 둥 으름장이다. ‘뭘 새삼스럽게…’ 하고 관심을 거두다가, 문득 그 화보집의 제목에 눈이 갔다. <하루라도 젊을 때>. 그러고 보니 ‘하루라도 젊을 때’(‘한 살’도 아니고 ‘하루’다)는 우리 사회에서 이미 관용어처럼 쓰이고 있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라는 실용주의적 처세의 논리가 일상의 정치를 장악한 결과일 것이다. 어쨌거나 자존심 따위는 내버린 듯한 그 화보집의 제목은 문제가 된 화보 이미지들과는 별개로 보는 이에게 민망함을 안겨주었다.

2002년 어느 신용카드 회사의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카피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신자유주의적 경쟁사회로 급격히 변모하고 있었다. 신용카드를 내밀며 부자 되라고 덕담을 건네는 부조리도 문제였거니와, ‘빈락(貧樂)’을 논하던 전통적 삶의 품위와 자존심이 상실되는 징후로 보였기 때문이다. 15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일이기도 하다.

이제 ‘부자 되세요’ 정도의 말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 ‘금수저’든 ‘흙수저’든 부자로 살기 위해 ‘노오력’하면서 자존심 따위는 접어두는 것이 오늘날 ‘헬조선’의 풍경이다.

가수 겸 배우 수지가 출연한 화보

총체적으로 자존심을 잃어버린 한국 사회의 반영일까? 최근 들어 ‘자존감’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자존감을 다루는 심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듯 ‘높은 자존감’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부자 되세요’라는 구호가 유행할 무렵이었을 것이다. 식당에서 난동을 부리는 꼬마를 주변 손님이 타이르면 오히려 그 손님에게 “아이 기죽이지 말라”고 득달같이 따지던 부모들이 있었다. 그 아이들은 높은 자존감을 가지며 자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인을 존중하는 일에 무능한 이들이 자기에 대한 존중에 유능할 리 없다. “아이 기죽이지 말라”며 생떼를 부리던 부모들은 정작 ‘기죽어 살았던’ 이들일 가능성이 높다. 군사독재 시기,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적나라하게 묘사되었던 교육 현장의 무자비한 폭력들. 힘센 자들의 폭력에 길들여져 자존감이 결핍된 이들이 상상할 수 있는 자존감이란 겨우 그 비합리적 권력자를 모델로 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뻔뻔스러워지는 것,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높은 자존감은 사실상 자존감의 결핍에 다름 아니다. 진정한 자존감에 전제되는 도덕 감정이 여기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도 그렇다. 국회의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뒤 발표한 대국민담화에서 그는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라는 뜻의 ‘자괴감’이라는 단어조차 ‘후회’나 ‘억울한 마음’이라는 뜻으로 썼다.

박 대통령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일까? 어린 시절부터 청와대에서 공주 대접을 받으며 자라 왔으니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 박정희의 폭력적 권력 남용을 자존감의 모델로 삼고 있었다. 그렇게 왜곡 형성된 자의식으로부터 성찰과 부끄러움을 아는 진정한 자존감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충격적인 국정농단 사태가 드러난 지 3개월이 되도록 스스로 책임지고 나서는 이가 단 한 명도 없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자괴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눈을 돌려보면, 어떤 부당한 지시에도 순응하는 공무원들, 소속사에 대한 순종과 복종을 당연시하는 아이돌 멤버들이 이 시대 젊은이와 청소년들에게 성공의 표상이 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제 섬뜩하기까지 한 일이다. 한국인의 잃어버린 자존감을 되찾는 방법은 무엇일까? 자존감을 지키는 삶이란 어떤 방식의 개인적 삶을 택하는가에 달려 있기보다는 이 사회를 어떤 방식으로 바꾸어내는가에 달려 있다. 저 촛불의 광장에 기대를 품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광장에 봄이 찾아올 무렵 한국인의 잃어버린 자존감도 다시 꽃필 수 있으리라는.

최유준 전남대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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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연말이 되면 으레 한 해를 돌아보게 된다. 어떻게든 살아낸 스스로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해주고 싶어진다. 내년에도 상황이 더 나아질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지금보다 더 나빠질 리는 없을 거라는 생각에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보기도 한다. ‘당신이 놓쳤을지도 모르는 것들’이나 ‘올해가 가기 전에 꼭 해봐야 하는 것들’과 같은 리스트가 안도감을 주기도 하고 불안감에 휩싸이게 만들기도 한다. 나는 남들과 비슷한 속도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하다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 길을 지나다 초등학생 둘을 만났다. 기말고사를 치르고 나오는 모양이었다. 책가방이 유독 무거워 보이는 아이가 입을 열었다.

“시험 망쳤어. 이러려고 공부했나 자괴감 들어.”

옆에 있는 아이가 맞장구쳤다.

“나도 자괴감 들어! 밤새워서 공부했는데, 공부한 데서 하나도 안 나왔어.”

이렇게 자괴감에 사로잡힌 아이들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자괴감을 느껴야 할 대상은 정작 아무렇지 않은데 자괴감과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 아이들의 입에서 앞다투어 자괴감이라는 단어가 쏟아져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이 10월 25일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실에서 '최순실 의혹'에 관해 대국민 사과를 하기 전 원고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자괴감은 올해 하반기에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단어일 것이다. “이러려고 대통령 하려고 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라는 담화문 속 대통령의 말은 국민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이러려고 주식투자 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이러려고 직장인 했나 피로감 들고 괴로워”처럼 자기 자신과 관련된 토로부터 “이러려고 대한민국 국민 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이러려고 세금 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처럼 정부를 향한 따끔한 일침까지 곳곳에서 패러디가 이루어졌다. 패러디의 끝에는 해학이 남아야 하는데 이상하게 뒤끝은 늘 씁쓸했다.

자괴감은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대통령은 이 단어를 원뜻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한 것 같다. 하긴 담화는 본디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상황을 상정하는 것인데, 대통령은 일체의 질의응답을 허용하지 않은 채 자기 말만 하고 들어가 버리지 않았는가. 나는 대통령이 담화문을 읽을 때 자괴감이라는 단어를 ‘부끄러움’이 아닌 ‘분노’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은 분명 화가 나 있었다. 자기 자신이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여기저기서 칼끝을 겨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 때문에 정작 자괴감을 느낀 것은 국민들이었다.

인간이 자괴감을 품을 수 있다는 점은 인간을 비로소 인간답게 만들어준다.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 없이 어찌 진심 어린 사과를 할 수 있겠는가, 자괴감을 건너지 않고 어떻게 자부심에 가닿을 수 있겠는가. 부끄러움은 다음을 기약하게 해주는 마음이다. 부끄러움이 있어야 반성을 할 수 있다. 조금 더 떳떳하고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괴감은 ‘앞으로’를 내다보는 마음이다. 대통령의 자괴감은 앞이 아닌 뒤를 향해 있었다. 그래서 대통령은 억울하고 화가 난 것이다.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양심이 없는 사람 아니면 양심에 거리낄 게 없는 사람이다. 나는 대통령의 자괴감을 인정하지 못하겠다.

국민들의 자괴감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 혼란스러운 정국 때문에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주말을 반납하고 광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자책감을 느끼고 배신감을 참을 수 없어 일상이 무너진 사람들도 보인다. 무너지고 난 후에야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힘든 상황일수록 그것을 지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절절히 깨닫게 된다. 자괴감이 심화되면 심한 자책이나 자포자기 상태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포기하고 돌아보지 않는 상태 말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촛불을 들고 광장에 다시 모였다. 역설적으로, 이 또한 우리가 자괴감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다음 세대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직면하지 않도록, 우리는 촛불을 더 높이 들었다.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던 날, 우리는 입을 모아 외쳤다. 촛불이 이겼다고,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 침묵은 진실을 덮을 수 없다고. 이기는 경험을 했다는 것, 다음을 기약해도 된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경험이다. 희망이 아직 남아 있음을 온몸으로 깨닫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 나라가 이렇게 돌아가고 있었다는 자괴감이, 내가 바로 이 나라의 국민이라는 자괴감이 만들어낸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다. 자괴감 이후에 찾아오는 것은 성찰의 시간이다. 우리는 광장에서 작년과는 다른 우리의 존재감을 이미 재확인했다. 국민들은 자괴감을 직면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괴감이라는 말 뒤에 숨어 있는 대통령과 얼마나 다른 품격인가.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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