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권이 벌인 ‘관제 데모’ 실상이 드러났다. 청와대가 기획하면 재벌을 대변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자금을 대고, 극우단체가 움직이는 구조다. 세월호 유족을 조롱하는 집회와 역사교과서 국정화 찬성 집회 등이 이런 식으로 열렸을 가능성이 높다. 이 같은 공작을 주도한 인물은 다름 아닌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다.

경향신문 보도를 보면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전직 청와대 직원으로부터 김 전 실장이 2013년 말에서 2014년 초 극우단체에 자금 지원을 지시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김 전 실장의 지시에 따라 정무수석실은 전경련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고, 전경련은 극우단체에 차명으로 돈을 보냈다. 진보 성향의 문화예술계 인사를 탄압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극우단체를 키운 것이다. 특검은 김 전 실장 등이 2014년 6월 극우단체를 동원해 세월호 유가족을 비난하는 집회를 열게 한 구체적인 정황도 포착했다. 단식 농성 중인 유가족들 앞에서 ‘폭식 투쟁’을 벌인 극우단체의 패륜에 시민들이 충격을 받고 의아해했는데 이제야 의문이 풀린 것이다. 정권의 꼭두각시 노릇을 한 극우단체 대표들은 최근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도 적극 참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과 관리에 관여한 혐의를 받고 있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이 15시간이 넘는 고강도 특검 조사를 받았다. 김기춘 전 실장(왼쪽)이 15시간이 넘는 조사를 받은 뒤 18일 새벽 서울 강남구 특검 사무실을 나선 뒤 차량에 탑승해 있다. 조윤선 장관도 21시간 가까이 조사를 받은 뒤 이날 오전 6시께 특검 사무실을 나선 뒤 차량에 탑승해 있다. 연합뉴스

국내 최대 보수단체인 한국자유총연맹이 청와대 지시로 역사교과서 국정화 찬성 집회를 벌인 정황도 있다. 뉴시스에 따르면 자유총연맹의 관제 데모를 지시한 사람은 허현준 국민소통비서관실 행정관이다. 허 행정관은 2015년 하반기 자유총연맹 고위 관계자에게 ‘세월호 진상조사 반대 집회’와 ‘국정교과서 찬성 집회’를 열어달라고 연락했다고 한다. 허 행정관은 전경련을 통해 극우단체 어버이연합 차명계좌에 수억원의 자금을 지원하고, 참가자 1인당 2만원씩 줘 관제 데모를 열게 한 배후자로도 지목받고 있다.

권력과 돈으로 민의를 왜곡하고 여론을 조작한 관제 데모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심각한 사안이다. 그것도 김 전 실장 등과 청와대가 조종했다니 어이가 없다. 그런데도 김수남 총장 체제의 검찰은 손을 놓고 있다. 서울중앙지검은 전경련이 어버이연합에 돈을 대고 청와대가 시위를 사주했다는 의혹을 지난해 4월부터 수사하고 있지만 지금껏 감감무소식이다. 추선희 어버이연합 사무총장의 동생이 김 총장 부속실에 근무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관제 데모 의혹 역시 특검이 풀 수밖에 없다. 청와대와 전경련, 극우단체 간 유착 관계를 밝히고, 검찰의 직무유기 행위도 파헤쳐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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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개혁과 의료개혁은 여러 측면에서 공통점이 많다. 우선 대형병원과 동네의원, 그리고 재벌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불공정한 관계가 거의 흡사하다. 불공정한 재벌경제가 중소기업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경제 생태계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재벌 총수 일가가 소규모 골목 상권을 침탈해서 빵, 맥주, 두부, 콩나물까지 팔고 있는 지경이다. 대형병원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10년 동안에 대형병원 수입에서 외래진료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증했다. 동네의원에서도 충분히 진료할 수 있는 경증 외래환자들을 마치 블랙홀처럼 대형병원이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정부는 전국의 43개 대형병원을 상급종합병원으로 지정해서, 다른 의료기관과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해도 더 높은 수가를 주는 특별대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대형병원이 지난 한 해 동안 외래로 진료한 ‘의원역점질환’ 환자들이 무려 90만명에 이른다. 의원역점질환은 대형병원에 굳이 갈 필요가 없다고 정부가 지정한 감기, 배탈, 고혈압 등 52개 질환을 일컫는다. 대형병원더러 이런 일 하라고 특별대우를 해 준 것은 아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렇게 한번 대형병원으로 간 환자는 동네의원으로 다시 돌아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대형병원에서 진료를 마치고, 동네의원으로 되돌아 온 의원역점질환 대상 환자는 600명 중 1명에 불과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동네의원의 경영 여건이 예전 같지 않다. 최근에 이상한 짓을 해서, 사회적 질타를 받는 동네의원이 늘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이다.

지난달 6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에 출석한 재벌총수들이 증인석에 대기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재벌이라고 다 같은 재벌이 아니고, 대형병원이라고 다 같은 대형병원이 아니라는 사실도 공통점이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30대 재벌의 총 자산에서 4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에 달한다. 범 4대 재벌을 제외한 중견 재벌의 경우, 셋 중 하나는 부실상태라고 한다. 재벌도 양극화되고 있는 것이다. 대형병원도 마찬가지다. 43개 상급종합병원 진료비 수입 합계에서 ‘빅5 병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3분의 1을 넘는다. 빅5 병원과 나머지 38개 대형병원의 병원별 진료비 수입 차이는 4배에 이른다. 예전에는 서울에 있는 병원 못지않게 잘나가던 지방의 유력 대형병원들이 동네병원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다.

정부 혜택이 재벌과 대형병원에 쏠리는 것도 공통점이다. 대기업은 전 국민이 가정에서 사용하는 것보다 더 많은 전기를 사용하지만, 전기료는 2조5000억원가량 덜 내고 있다. 각종 비과세·감면 혜택도 편중되어 있다. 예를 들면 연구·개발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 총액의 80% 이상이 10대 재벌에 돌아가고 있다. 대형병원도 비슷하다. 대형병원은 모두 대학병원이다. 병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개인병원이나 의료법인병원과는 달리 대학병원은 상속세, 특별부가세, 양도소득세 등이 부과되지 않는다. 같은 소득을 올려도 개인병원은 대학병원보다 더 높은 세율을 적용받고 있다. 이런 혜택을 주는 근거는 대학병원이 수행하는 공익적 활동이다. 그러나 지금의 대학병원들이 이런 혜택을 누릴 만큼 본연의 공익적 활동에 매진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재벌개혁과 의료개혁에 대한 국민의 양가 감정도 공통점이다. 재벌개혁의 필요성에는 대다수 국민이 동의한다. 그러나 재벌개혁을 하면, 경제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가지고 있다. 재벌을 욕하면서도 재벌 기업의 제품을 찾고, 자식이 재벌 기업에 취직하면 동네잔치를 연다. 대형병원 중심의 의료체계가 문제라는 점에 대해서도 대다수 국민이 동의한다. 대형병원에 환자가 몰리다보니 정작 위중한 환자들이 대형병원을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빈번하고, 진료비도 더 비싸다. 그러나 정작 본인이 아프면 동네의원을 외면하고 한사코 대형병원을 찾는다. 의료 종사자들이 대형병원 취업을 선호하는 것도 비슷하다.

선진적인 의료체계를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 나라들은 예외 없이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의료체계를 개혁했다. 경증환자가 대형병원에 가지 못하도록 제도적으로 차단했고, 대형병원은 제 역할을 할 때 제대로 보상받는 체계를 만들었다. 물론 이런 의료개혁이 단번에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짧게는 십수년에서 길게는 수십년이 걸렸다.

재벌개혁이 우리 시대의 과제로 다시금 부상하고 있다. 수십년에 걸친 재벌 적폐를 청산하지 않으면, 국민이 잘사는 경제를 이룰 수 없다는 절박성 때문이다. 그러나 재벌개혁을 단번에 이룰 수는 없다. 그렇게 하려다가는 몇 걸음도 못 가서 주저앉게 될 공산이 크다. 선명한 선언이 재벌개혁의 성공을 담보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어느 나라를 봐도, 재벌의 자발적 노력으로 개혁을 이룬 적은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이 재벌개혁과 의료개혁의 마지막 중요한 공통점이다.

이진석 | 서울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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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고 금수저인 박근혜 대통령과 재벌은 닮은 점이 많다. 무엇보다 한 줌도 안되는 지분으로 권력을 향유하고 있다. 지지율 4%에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로 직무정지 상태지만 박 대통령은 여전히 새누리당과 정치권을 쥐락펴락한다. 이정현 같은 친박계 의원들을 내세워 새누리당을 장악하고, 새누리당을 통해 입법·행정·사법부 관료조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이다. 재벌 총수들은 더 심하다. 지분율이 1%도 안되지만 순환출자를 이용해 그룹 계열사 전체를 지배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에버랜드 대주주로 등극한 뒤 에버랜드 보유 지분으로 삼성생명과 삼성전자 등을 지배했다.

형제자매와 연을 끊고 산다는 점도 비슷하다. 박 대통령 동생 지만씨는 “피보다 진한 물이 있다”는 말로 누나와의 관계를 표현했다. ‘진한 물’은 최순실씨다. 박 대통령 동생 근령씨의 남편 신동욱씨도 “아내가 해야 할 일들을 최순실씨가 했다. 최씨로 인해 형제간의 관계가 나빠졌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 삼남매는 어머니 고 육영수 여사가 세운 육영재단의 소유권을 놓고 다툼을 벌였다. 박 대통령이 처음 육영재단 이사장을 맡았던 1982년에는 최태민씨를 고문으로 임명했다는 이유로 근령·지만씨가 반기를 들었다. 이후 재단 이사장에 취임한 근령씨는 동생 지만씨와의 송사로 조용한 날이 없었다. 재벌 2·3세들도 유산 상속 등을 놓고 암투와 소송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삼성가 이맹희·건희 형제의 분쟁, 현대가 정몽구·몽헌 형제의 ‘왕자의 난’이 과거 일이라면 효성(조현준·현문), 금호(박삼구·찬구), 롯데(신동주·동빈)의 골육상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유산 다툼은 그 재산이 이들의 노력으로 형성되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6일 오전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최순실 게이트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두한 재벌 총수들의 모습을 TV를 통해 보고 있다. 이석우 기자

배신을 혐오하는 것도 박 대통령과 재벌의 공통점이다. 이들은 조폭 우두머리처럼 부하들에게 맹목적인 의리와 복종을 강요한다. 윤리나 도덕, 개인의 가치 판단이 끼어들지 못하게 한다.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차명 비자금 등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를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현대차는 승객 안전을 위협하는 에어백 센서 결함과 세타2 엔진 불량 문제를 경향신문 등에 제보한 김모 부장을 해고했다. 한화는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와 정권과 재벌의 유착을 비판한 주진형 전 한화증권 사장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다. 박 대통령이 유승민 의원을 내치고, 친박이 비박을 욕하는 것과 판박이다. 배신을 혐오하는 것은 자신이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배신자를 응징하는 것은 그만큼 배신이 두렵기 때문이다. 배신자가 늘면 이들이 쌓은 성은 저절로 무너진다.

박 대통령은 검찰에 당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 감옥에 갈 가능성이 높다. 박 대통령은 3개월 전만 해도 우병우 전 민정수석을 통해 검찰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생각했다. 국정농단 사건에 검찰 수사가 본격화하자 최고의 특수부 검사라는 평판을 들었던 최재경 전 인천지검장을 민정수석으로 앉혔다. 그러나 결국 김수남 검찰총장 지시에 따라 움직인 40여명의 검사들에게 탈탈 털렸다. 막강한 재벌 총수들도 검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경우가 있다. 평소 다양한 방법으로 검찰 수뇌부를 관리하고 수사가 시작되면 수십억원의 수임료를 줘가며 검사 출신 전관 변호사를 고용한다. 하지만 검사 비리 문제 같은 것으로 검찰이 코너에 몰린 상황이라면 도움이 안된다. 검찰은 재벌의 뒤통수를 치면서 한순간에 정의의 사도로 변신하는 신공을 발휘한다. 최태원(SK)·김승연(한화)·이재현(CJ) 회장이 그렇게 해서 감옥에 가게 됐다는 시각이 있다. 작년에는 포스코가, 올해는 롯데가 그런 이유로 검찰에 당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유죄 판결을 받더라도 전직 대통령은 화합을 명분으로, 재벌 총수는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이유로 사면을 받는다. 

일상의 자유로움에서 박 대통령과 재벌을 능가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없다. 숙소에 누워 있어도 알아서 보고가 올라오고,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지시가 내려간다. 없는 듯하면서도 있고, 있는 듯하지만 확인할 수 없다. 이들은 오로지 질문을 할 뿐 답변은 하지 않는다. 누가 적어준 것을 그대로 읽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말을 하면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수천만 시민이 TV로 바라보고 있는데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한다. 이런 소소한 것까지 박 대통령과 재벌은 닮았다. 논어에 ‘인지장사 기언야선(人之將死 其言也善)’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죽음을 앞두면 선해진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이들은 나이를 먹어도 늙지 않고 치명적인 병에 걸려도 죽지 않는다. 스스로는 개과천선하기 어렵다. 바로 이것이 추운 겨울에도 시민들이 광장에서 촛불을 놓지 못하는 이유이다.

오창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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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불파불입(不破不立)이라는 말이 있다. 파괴가 없으면 새로운 건설도 없다는 의미이다. 지금까지 촛불혁명은 구체제에 균열을 내는 데 성공했다. 불립불파(不立不破)라는 말도 있다. 건설이 없으면 파괴도 없다는 뜻이다. 구체제에 균열을 내어도 새 체제 건설에 실패하면 죽 쒀서 개 주는 격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탄핵 결정까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다음의 질문을 서둘러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해야 새로운 체제를 건설할 수 있는가? 여러 측면에서 말기적 증상을 보이는 소위 ‘87년 체제’를 새로운 체제로 전환시키는 길은 무엇인가? 87년 체제는 1987년 헌법을 제도적 기초로 하기 때문에 개헌이 이를 위한 주요 수단으로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개헌안이 체제전환은 차치하고라도 정치제도라는 면에서 어떤 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체제전환의 핵심적 내용에 대한 진지한 논의 없이 수단과 관련한 논의만이 분분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제기되는 개헌론에 정치적 사심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단과 경로에 대한 논의에 앞서서, 체제전환의 목표와 과제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 속에서 개헌이 필요한지, 필요하다면 개헌의 핵심내용은 무엇인지를 논의할 수 있다. 지금의 87년 체제를 더 인간적이고 활력이 있는 체제로 전환시키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과제는 다음 세 가지이다.

첫 번째, 수구세력의 정치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동안 절차적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서구 정당정치의 모델을 한국정치에 적용시키려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분단체제로 인해 우리의 정치현실은 서구와 다르다. 수구세력은 최소한의 민주주의적 절차도 무시했고, 민주주의는 큰 위기에 빠졌다. 그 위기는 ‘광장의 정치’를 통해 극복되고 있다. 우리가 참여하고 목격하고 있는 광장의 정치는 정치의 낙후성만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광장의 정치는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가능성을 열고 있다. 그렇지만 수구세력의 통치기반에 대한 제도적·인적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또 다른 정치적 퇴행이 나타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두 번째, 불평등·불균형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담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그 실행에 나서야 한다. 경제영역에서는 최저임금 인상과 복지확충은 물론이고, 재벌에 의존하지 않는 경제시스템 건설을 공론화하고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재벌이 주도하는 한국경제의 성장모델이 붕괴 과정에 접어들고 있다는 조짐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과도한 중앙집권은 우리나라의 활력을 억누르는 주요 원인이다. 대통령으로의 권력집중을 우리 정치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보다 심각한 문제는 중앙으로의 과도한 권력집중이다. 비대한 중앙권력의 문제가 대통령으로의 권력집중 문제처럼 보이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연방제 수준으로 분권화를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제도개선 없이는 어떤 권력구조를 택하더라도 권력의 과도한 집중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정치적 불균등·불균형 해소도 중요하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선거법 개정이 시급하다. 국회의원 선출에서 비례성을 강화하고 주요 선거에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는 것을 통해 제도권 정치가 다양하고 폭넓은 민의를 대변할 수 있게 해야 한다. 87년 헌법 논의가 정치적 독재를 청산하기 위한 권력구조 개편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앞으로의 개헌논의는 불평등·불균형 해소를 핵심 의제로 삼아야 한다.

세 번째, 한반도 평화를 위한 남북 및 국제 협력을 진전시켜야 한다. 현재처럼 남북이, 북·미가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쉬운 과제는 아니다. 이 의제는 수구세력에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민주개혁세력에 불리하다고 생각할 일만은 아니다. 대북정책에 대한 수구적 노선과 태도가 안보를 오히려 위협하는 상황을 낳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우려가 국민 여론 속에서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기들을 잘 활용하면 안보담론을 평화, 안전, 생명 담론으로 재구성해 갈 수 있다. 이 작업의 진전에 따라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이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을지가 결정될 것이다.

새 체제로의 전환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성장을 위해 재벌에 의존하거나 분단에 대해 체념하는 태도 등과 같은 구체제 중독에서 벗어날 각오를 다져야 한다. 우리는 정말 중요한 전환기에 서 있다.

이남주 |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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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거짓의 가면을 쓰고 ‘망국의 춤’을 췄다. 비선 실세와 문고리 3인방은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청와대 경제수석은 경제정책이 아닌 ‘기업 목조르기’를 설계했다. 일부 고위 관료들은 권력놀음에 취해 ‘최순실 부역자’를 자처했다. 재벌은 부패한 정권에 뒷돈을 대며 정경유착의 검은 고리를 찾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그런 지난 4년은 야만의 시절이었다.

박근혜는 거짓으로 무너졌다. 2012년 대선 당시 “경제민주화와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는 공약부터 거짓이었다. 경제민주화는 취임 6개월도 안돼 폐기됐다. 기초연금·반값 등록금·4대 중증질환 100% 보장 등 복지공약은 파기 또는 축소했다. 대통령 취임 이후엔 틈만 나면 규제완화를 주술처럼 외쳐댔다. “규제는 암덩어리다. 단두대에 올려 규제 혁명을 이루겠다”고 했지만 그것도 거짓이었다. 겉으로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속셈은 ‘기업 삥뜯기’를 위한 밑밥 깔기였다. ‘노동개혁 5법’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원샷법’ ‘규제프리존법’ 등은 규제완화의 외피를 두른 ‘대기업 민원 해결법’에 다름 아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대국민사과를 하며 흘린 눈물도, “필요하다면 특검을 통해서라도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낱낱이 밝히겠다”는 말도 거짓이었다. “세금이 많이 들어간다”며 세월호특조위 활동기한을 연장하지 않은 것은 ‘7시간 미스터리’가 밝혀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터이다. 국정을 농단하고, 헌정질서를 파괴한 게이트의 주범이란 사실이 밝혀진 뒤 2차 대국민담화를 하면서 보인 눈물도 거짓이었다. “모든 사태는 저의 잘못이다. 검찰 조사는 물론 특별검사의 수사까지 수용하겠다”고 하더니 검찰의 대면조사를 거부하고 190만 촛불에 포위돼 섬처럼 고립된 청와대에서 장기농성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3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한 뒤 기자회견장 뒤편으로 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에 맡기겠다”고 밝힌 3차 대국민담화에서도 끝내 거짓의 가면을 벗지 않았다. 국회를 분열시켜 탄핵을 모면하려는 간교한 정치적 술수를 감춘 채 “단 한순간도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변명만 늘어놨다. 거짓으로 쌓은 사상누각(沙上樓閣)이 무너졌는데도 또 다른 거짓의 성(城)을 쌓으려는 대통령을 시민들은 마음속에서 탄핵한 지 오래다.

재벌들의 도덕성은 정권과의 부당거래로 무너졌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재벌과 대통령이 한 몸이 돼 재단 출연금이란 명목의 뇌물을 주고받은 부당거래 사건이다.

재벌들은 청와대와 최순실의 압박이 두려워 미르·K스포츠 재단에 뒷돈을 댄 ‘강제모금의 피해자’가 아니다. 권력에 협조한 뒤 각종 현안을 해결하려 한 ‘자발적 공범’이다. 미르·K스포츠 재단에 204억원을 낸 삼성은 국민연금의 지원을 받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성사시켰다. SK는 배임죄로 두 번씩이나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 중이던 총수가 사면으로 풀려났다. 롯데는 면세점 사업자 선정에서 탈락한 뒤 K스포츠재단에 추가로 70억원을 냈다가 되돌려 받았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다.

시장에서의 공정한 경쟁보다 정권의 비호와 묵인 속에 다른 경제주체의 몫을 빼앗으며 몸집을 키워온 게 한국 재벌의 어제이자 오늘이다. 재벌들은 영화 <부당거래>에 나오는 대사처럼 “(정권의)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 4년간 한국 사회는 박근혜 정부의 실정(失政)으로 무너졌다. 시중에 떠도는 “임금은 착취이고, 세금은 수탈이고, 물가는 갈취이고, 일자리는 노예이고, 부동산은 거품이고, 복지는 생색이고, 안전은 재앙”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청와대에 한 대당 5만~10만원짜리 백옥·마늘·감초·신데렐라 주사가 반입될 때 서민들은 가계부채와 주거난으로 무너졌다. 노동자들은 ‘쉬운 해고’로 일자리를 잃고 무너졌다. 청년들은 돈도 실력으로 여기는 금수저들의 반칙으로 무너졌다. 교육계는 비선 실세와 결탁한 교수들의 교육농단과 복면 집필진이 밀실에서 만든 친일·독재 미화 국정 역사교과서로 무너졌다. 문화예술계는 검열과 블랙리스트로 무너졌다. 의료계는 길라임 대통령과 최순실 자매의 대리처방으로 무너졌다. 체육계는 비선 실세와 협작한 ‘왕차관’의 미운털 찍어내기로 무너졌다.

무너진 사회는 주권자인 시민들이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역사가 증명하듯 야만의 시절에 종지부를 찍고, 변혁을 일궈온 것은 시민들이다. 수백만 촛불민심은 거짓의 가면을 벗기고, 망국의 춤도 멈추게 할 것이다. 그게 나라도 살고, 시민도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야만의 시절을 견뎌온 시민들에게 대통령의 버티기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고통과 능욕의 시간만을 늘릴 뿐이다.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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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의 시작을 알리는 2000년은 한국 재벌사에도 인상적인 해다. 100년 역사의 재계 판도가 뒤집힌 날이기도 하다. 서열 1위인 현대그룹이 이른바 ‘왕자의 난’을 거치며 삼성에 1위 자리를 내줬다. 현대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인 경영권 분쟁은 재벌의 숨겨진 속살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기자회견장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서울 계동 사옥 본관 문을 걸어 잠근 채 상대방 진영의 출입을 차단한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한 편의 코미디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친필 서명을 둘러싼 위·변조 논란도 여론의 입방아에 올랐다.

수십조원의 판돈이 걸린 경영권 분쟁은 피도 눈물도 없는 정치권력의 세계와 다를 게 없다. 승자독식 구조라는 속성을 감안하면 당대에 끝나는 싸움도 아니다. 어디 현대그룹뿐이랴. 형제간에 우애가 좋기로 유명했던 두산그룹도 경영권 분쟁을 거치며 재벌 총수가 스스로 삶을 마무리하는 비극을 연출했다. 40대 재벌그룹 중 17곳이 경영권 분쟁을 겪었다는 통계도 있다. 거의 2곳 중 한 곳꼴이다. 현대 이후 14년이 지난 지금도 총성 없는 전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국내 재벌 총수들이 오찬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다음달 CJ 이재현 회장의 선고 공판을 앞두고 범삼성가에서 이 회장의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했다는 소식이 재계의 화제다. 삼성과 CJ는 앙숙이라 불릴 정도로 수십년간 분쟁에 시달려왔다. 근자에도 삼성의 이 회장 미행 사건과 사상 최대 규모의 소송전으로 관심을 끌었다. 이번 탄원서를 계기로 양가가 해묵은 앙금을 털고 화해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반가운 일이다. 한국의 대표기업이 당대의 경영권 분쟁을 다음 세대로 이어가며 소모전을 벌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대기업 분쟁은 한낱 집안싸움으로 치부하기엔 후유증이 너무 크다. 우리 경제는 지금 경기 침체와 청년실업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 이를 해결하는 것은 결국 기업의 몫이다. 국가경제를 위해 헌신해야 할 기업 총수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은 볼썽사나운 일이다. ‘형제의 난’ ‘왕자의 난’ 같은 단어는 없어져야 할 유물이다. 가뜩이나 기업 총수들의 잇단 구속과 법정 다툼으로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한국 경제를 위해서도 재계가 하루빨리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박문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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