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겨울올림픽이 시작되었다. 여자아이스하키에서 남북 단일팀이 출전하듯이 대화와 협상의 실마리가 잡혀 평창이 ‘평화올림픽’으로 역사에 남기를 누구나 소망한다.

그러나 최근 국내외 강경파의 도를 넘는 북핵 관련 발언은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그들의 문제를 일일이 짚을 여유는 없지만 강경론이 공유하는 암묵적 전제, 즉 미국의 선제예방타격을 포함한 효과적인 제한 전쟁이 가능하다는 전제는 냉정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목숨이 걸린 터에 설령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마땅히 따져 봐야 할 일이며, 모두가 합리적이고 온당한 결론을 찾아내야 할 관심사이다.

실제로 선제타격이 벌어지면 북한은 과연 어떻게 나올까? 전면전으로 번지지 않으려면 북한도 재래식 무기로 제한적인 응전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통제된 무력충돌도 휴전선 이남에서는 군사적 피해 외에 증시 폭락과 환율 급상승, 외국인의 국외 탈출 소동 등 감당하기 힘든 사태로 이어질 위험이 높다.

1994년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의 영변 핵시설을 선제타격하려 했을 때 목표물은 단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의 미군은 다수의 목표를 동시에 파괴해야 한다. 이동식 미사일 발사대나 지하 요새의 특성 때문에 목표물의 숫자와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겠지만, 여하튼 스텔스 폭격기와 크루즈 미사일은 복수의 군사목표를 해치워야 한다.

여기서 꼭 던져야 할 물음이 있다. 선제타격이 제한적이라고 미국이 공언한들 공격당한 북한군 지휘부가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최첨단 무기가 자신의 군사 시설 여러 곳에 한꺼번에 퍼부어질 때, 이를 국지전으로 간주하고 자제할 수 있는 군대는 지구상 어느 나라에도 없다. 파괴할 목표가 하나뿐이었음에도 1994년 미국이 공격을 단념한 까닭을 돌아봐야 한다.

북한은 민간인 살상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2010년 연평도에 수백발의 포탄을 퍼부었고, 실제로 해병대원 외에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선제공격을 당하고 얌전히 참을 정권이 아니다. 장사정포나 스커드 미사일 등 재래식 무기만이 아니라 생화학 무기와 핵미사일의 사용 가능성까지 열릴 것이다. 선제타격은 개방된 산업국가인 대한민국 경제가 마비되고 말 각본이며, 전쟁의 승패는 무의미해진다.

한반도에서 선제 군사행동은 전면전을 부른다. 정확히 말하면 1953년 7월에 겨우 중지한 전쟁이 60년도 더 지나 다시 시작되는 비극이 벌어진다. 여기까지는 굳이 군사나 국제관계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불 보듯 훤하다.

그러면 트럼프 대통령과 주변 인물들의 날선 위협은 그냥 엄포일까? 아니면 추가 무기구입을 압박하거나 FTA 재협상에서 큰 양보를 얻으려는 ‘북한 카드’에 불과할까? 그것도 아니면 남의 땅에서 벌어질 엄청난 살상극은 미국 영토 밖이라서 상관없는 걸까? 미 본토에 대한 핵 위협 문제까지 논의해야 할 이 대목부터는 전문적 판단이 필수이지만, 방귀가 잦으면 어찌 된다는 우리 속담이 떠오른다. 행동에 옮기지 못할 엄포도 반복하며 수위를 높이다보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 수 없다. 미국의 전문가 중에도 예방타격을 반대하는 강한 목소리가 나오는 상황을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더구나 양국 언론이 믿을 만한 취재원을 통해 우리 정부의 아그레망까지 마친 사실을 다 확인한 후에 느닷없이 주한미국대사 내정자의 지명을 철회하는 유례없는 불협화음마저 거듭되면 불안정한 한반도는 예측 불가능한 쪽으로 흘러가게 된다.

우리 국민의 안전과 국가의 안위를 평화적인 방법에 기대는 것은 상식이며 외길 수순이다. 물론 겉으로는 아무도 대화와 협상을 부정하지 않지만, ‘비핵화를 전제로 한 대화’와 ‘조건 없는 대화’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하지만 평화적 방식만이 유일한 길이라면 조건 없는 북·미대화(와 다자간대화) 또한 유일한 길이다. 이렇게 외길뿐인데도 미국의 강경 기류에 맞장구치며 무책임한 발언을 쏟아내는 국내의 일부 정치인, 언론과 지식인을 보노라면 혀를 차지 않을 수 없다. 촛불시민혁명의 거센 파도 앞에 궤멸에 직면한 수구냉전세력이 대규모 무력충돌이 가져다줄 정세 역전의 헛된 단꿈을 꾸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여야 정치권이 어느 쪽의 선제 군사행동도 용납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포함하여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의지를 재확인하는 만장일치의 국회 결의안이라도 채택할 때이다. 국가안보와 국민의 안녕에 대해 책임있는 입장을 널리 세계에 알려야 할 엄중한 시기인 것이다. 사회적 책임의식이 있다면 언론도 같은 길을 가야 한다. 국회 결의안은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와도 모순되지 않고 북의 교활한 전술에 휘말리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김명환 서울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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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산골 리조트 마을 다보스라는 곳에는 매년 1월 말이 되면 세계 주요 정상, 장관, CEO, 사안별 전문가, 그리고 유명 언론인들이 다 모여든다. 이들은 이곳 다보스에서 서로 만나 사업 협상도 하고, 세계의 주요 흐름을 살피기도 하고, 정부의 입장을 발표하기도 하는데 그러한 플랫폼을 제공하는 포럼이 세계경제포럼(다보스 포럼)이다. 작년 다보스 포럼에서는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이 개막연설을 통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미국제일주의’와 일방주의에 대하여 중국이 책임지고 자유무역과 다자주의로 대표되는 국제질서를 수호해 갈 것을 선언하였고, 그로 인해 세계의 리더십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는 서막이 올랐다고 언론에서 대서특필하기도 하였다.

지난 1월22일부터 26일까지 열린 다보스 포럼은 작년의 시진핑 주석의 기세를 이어 인도의 모디 총리가 지난해 시진핑 주석의 선언과 맥을 같이하는 개막연설을 하였고, 영국, 독일, 프랑스의 정상들도 모두 한목소리로 개방경제와 다자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하였다. 세계의 주요 흐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다보스에서는 그만큼 개방경제와 다자주의의 위기와 이를 지키려는 각국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를 의식한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폐막 연설 참석을 깜짝 발표하면서 폐막 연설에서 미국제일주의가 미국만 좋은 것이 아니라 세계에도 좋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돌아갔다. 다보스라는 글로벌 무대에서 이어지는 미국에 대한 공격에 대응한 수비 연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용은 여전히 미국제일주의이지만 수사는 개방경제와 다자주의를 의식한 연설이었다. 그만큼 개방경제와 다자주의로 대표되는 지금의 국제질서 속에서는 나름대로 이탈자에 대한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거시적인 국제질서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곳이 다보스라면, 세계가 바라보는 한국을 읽을 수 있는 곳도 다보스다. 거리에서 우연히 한국 아이돌 그룹 레드벨벳의 ‘피카부’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가는 다보스의 소녀들을 만나면서 여기까지 뻗어 온 한류의 위력을 느낄 수 있는 반면, 북한 핵 문제와 한반도 안보 문제에 대한 세계의 우려를 역시 만날 수 있었던 곳이 이번의 다보스였다. 북한 문제에 관하여 다보스 포럼 측에서 갖는 관심을 반영하듯 관련 세션도 여러 개 열렸고, 세계의 언론도 이 문제에 주목하고 있었다.

나도 관련된 대부분의 세션에 참여하였고 참석자들의 발언을 면밀히 관찰하였는데, 다보스에서 알 수 있는 한반도에 대한 세계의 관심은 “평창 올림픽 이후의 북한 핵 문제”라고 잘라 말할 수 있다. 세계의 안보 문제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평창 올림픽 이후에도 과연 이 지역이 안정적으로 잘 관리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올림픽이야 어떻게든 성공적으로 치러지도록 국제사회가 한국을 도와주겠지만, 올림픽이 끝나면 핵을 포기하지 않는 북한과 군사훈련을 재개하는 미국, 그리고 국제사회의 제재는 그대로 이전의 모습으로 재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평창 올림픽으로 인하여 북한과 미국과 국제사회가 핵 문제와 관련하여 변한 것이 없을 터인데, 잘못하면 우리만 변하지 않는 북한에 호의적인 정권으로 비쳐 미국의 신뢰를 잃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세계의 우려는 현실이다. 핵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김정은과 최대 압박을 통하여 핵을 포기시키려는 트럼프라는 두 강성 지도자가 다시 맞붙는다면 긴장 수위가 계속 높아져 한반도의 미래는 그야말로 예측 불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전 부시 대통령의 2002년 “악의 축” 연설을 상기시키는 북한에 대한 경고를 1월30일 연두교서에 포함시켰다. 부시 행정부는 그 연설 이후 실제로 이라크 침공을 감행한 바 있다.

그 다음날인 1월31일에는 미국의 북한 예방타격을 반대하는 주한 미국대사 내정자 빅터 차 교수의 임명을 철회하였다. 북한에 대한 강성 메시지를 연거푸 보내고 있다. 우리 정부가 평창 올림픽을 평화올림픽으로 만들어 그 모멘텀을 유지시키려면 겨우 재개된 남북대화를 통하여 북핵 문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미국과 북한의 대화를 성사시켜야 한다.

문제는 북한은 항복하는 형식으로 북핵을 포기하는 대화에는 절대 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핵 문제에 항복하면 다른 문제도 끝까지 밀려서 결국에는 정권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는 자체진단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항복이 아닌 북핵 포기의 협상 구도를 어떻게 만들어내느냐가 우리의 숙제가 될 것이다.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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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태신앙이었다. 교회는 놀이터이자 유치원이었고, 성경책이 동화책이었다. 전도사님과 목사님은 선생님이었으며 하나님은 아버지였다. 입버릇 같던 ‘아버지하나님’에 분노한 아버지의 꾸지람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그래도 교회 가는 일이 즐거웠다. 어린 마음속의 예수님은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는 긴 머리를 휘날리며 늘 사회적 약자에게 손 내미는 의롭고 친절하며 우아하고 아름다운 분이었다. 부족하고 나약하고 어리석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으셨으며 심지어 삼일 만에 부활하신 분 아닌가. 나는 그분을 존경했고 사랑했으며, 매일 만나고 싶었다. 어머니들은 식당에서 밥을 퍼주며 아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교회의 주요 보직은 아버지들만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엔 너무 어렸고 무엇보다 젠더관념이 없었다.

성장한 이후 개인사에 변화가 생겨 천주교로 개종했다. 새롭게 외워야 할 복잡한 절차가 많았지만 학생운동을 하고 바티칸에 유학까지 다녀온 똑똑한 신부님의 말씀을 듣는 게 너무 좋았다. 세상을 따듯하게 바라보되 진지하게 비판할 수 있는 관점에 감명 받았다. 성당의 분위기는 엄숙했고 사람들은 경건했으며 겸손했다. 당시 나는 수사와 신부는 다 남성이고 여성은 왜 수녀만 되어야 하는지, 성당의 수많은 잡일들을 치르면서도 여성들은 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지 질문하지 못했다.

마음 한편 늘 꾸물거렸지만 해결되지 않았던 인생물음에 답을 구하고자 여성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는 왜 이렇게 이름 없는 존재로 살고 있나, 대학교육이 왜 여성들에겐 쓸모없는 것이 되는가, 왜 같은 인간인데 다른 평가와 처우를 받으며 당연하게 여기는가. 불공평한 세상의 근본적인 원인을 알고 싶었다. 성당은 그만 다니게 되었지만, 서구 여성운동뿐 아니라 한국의 여성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접하면서 종교가 기여한 많은 것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안다. 한국 사회에 평등과 인권 감수성을 도입하고 민주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투쟁해 온 기독교와 천주교의 역사를. 조선 말기부터 성차별, 신분차별을 넘어 동등한 교육기회를 마련하고자 했던 이들을 기억한다. 여성에 대한 노동착취, 성착취, 인신매매, 봉건적 관습에 대해 서슴없이 일침을 가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용감한 종교인들을 기억한다. 엄혹하던 박정희 독재정권하에서도 그들은 여성노동운동을 지원하며 원자폭탄에 의해 희생된 조선인 배상운동을 벌이고 일본 남성들의 기생관광에 반대하며 폭압적 독재정권에 맞섰다. 1980년대 민주화과정에서는 누구보다 앞장서 최루탄을 맞고 공권력의 피해자가 되었음에도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독재타도를 외치며 세상을 바꾸는 일에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한국의 민주화는 물론, 일본군 성노예제와 미군기지촌은 물론, 성폭력 당하고, 매매되고, 일상에서 두들겨 맞고 인권유린을 당하는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들리는 데 더 오랜 세월이 걸렸을 것이다.

그래서 가슴이 아프다. 특정 집단을 저주하고, 낙인찍고, 차별을 정당화하며, 법적 죄와 도덕적 책임까지 지우는 일에 앞장서는 이들이 바로 같은 종교를 믿는 자들이라는 사실에. 믿을 수가 없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두 팔 활짝 벌리던 그 장소, 경찰에 쫓기던 ‘운동권’ 학생들에게 문을 열어 주던 바로 그 자유와 해방의 장소에서, 똑같은 모자를 쓰신 분들이 여성억압을 정당화하는 서명지에 사인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분노한다. 성평등이 성소수자를 인정하는 용어라며 여성가족부에 난입해 농성을 벌이는 자들, 차별금지법은 동성애허용법이라며 온갖 반대집회를 개최하는 이들, 성관계를 통제할 수도, 아이를 낳을 수도, 안전하게 기를 수도 없는 세상에서 임신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을 범죄자로 만드는 데 앞장서는 자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사실에. 살아 있는 자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이들은 진정 종교인인가, 세속화되고 제도화된 이익집단인가, 약자를 탄압하는 권력집단인가. 아님, 이러한 현상 자체가 더 이상 본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소멸될 위기에 처한 종교의 역설적 위상을 증명하는 것인가.

종교가 단지 특정 집단의 이익만을 위해 존재할 때, 혐오집단을 등에 업고 사회적 약자들을 심판하고 버릴 때, 살아계신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실 것인가. ‘그때가 언제 올지 모르나’ ‘정의를 실천’하고 ‘항상 깨어 있으라’던 하나님의 말씀은, 더불어 살아감의 가치를 깨닫고 차별을 야기하는 불평등의 축을 바로잡으며, 공공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종교가 존재해야 함을 일깨우는 것 아닌가. 한국의 기독교와 천주교인들이 그런 의로운 역할을 수행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 왔다는 사실을 환기하면서, 불의에 맞서 정의를 실천하는 데 다시 앞장서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드린다.

<이나영 | 중앙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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