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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5.19 브랜드 내려놓기

‘소믈리에’라는 직업이 한국에서도 자리를 잡은 듯합니다. 협회도 있고 자격증까지 줍니다. 식당에서 와인을 추천하는 이 소믈리에들이 많아진 것은 와인 소비가 늘어난 현실을 반영합니다. 어느덧 ‘포도주’라고 부르기도 어색할 정도죠. 화이트와 레드를 구분하는 정도였던 와인에 대한 이해도 아주 깊어졌습니다. 이제는 호주산인지, 칠레산인지도 따지고 각종 브랜드와 생산연도까지 꿰차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격도 천차만별입니다. 5만원 밑에도 인기 있는 와인이 있지만 10만원을 훌쩍 넘기기도 하죠. 수십만원에서 100만원이 넘는 와인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겐 100만원은 고사하고 10만원만 넘어가도 쉽게 손이 가지 않죠. 어쩌다 비싼 와인을 마시게 되면 역시 다르구나 싶습니다. 조심스레 한 모금 넘기면 칭찬과 탄성이 튀어나옵니다. 비싼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 싶죠. 별 차이를 못 느껴도 내가 잘 모르는 것이겠지 싶어 술자리가 끝난 후 와인스쿨을 검색해 보게 됩니다.

하지만 정작 와인 전문가들도 막상 눈을 가리면 와인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실험 결과가 여럿 있습니다. 한 실험에서는 똑같은 와인을 마시고도 평가가 달라졌습니다. 고급 상표라고 여겼을 때 평가단은 찬사를 쏟아냈죠. 반대로 싸구려 와인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시큰둥한 반응을 내놓았습니다. 바로 상표에 대한 편견 때문이죠. 이런 편견은 사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명품 가방이 더 품위 있어 보인다거나 알프스 어디 물이 더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이 그런 예일 테죠.

짧지만 떠들썩했던 선거전을 치른 한국정치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 후보라는 상표를 좋아한 사람들은 그의 공약뿐 아니라 언행 하나하나에 열광했습니다. 미소 하나도 듬직하게 보았고 그의 공약을 보며 새로운 세상을 꿈꿨죠. 하지만 상대 후보는 늘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습니다. 음식을 넘기는 입 모양 하나도 꼴불견처럼 느껴졌고 그의 지지자들마저도 이상하게 쳐다봤습니다. 심지어 거의 같은 공약을 두고도 내 후보 것은 혁신적이라고 불렀고 상대방의 것은 엉터리로 믿었습니다.

사실 상표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가방을 다 뜯어보고 들어볼 수는 없습니다. 그 많은 와인을 다 마셔볼 수도 없죠. 모든 후보의 공약집을 다 읽어보고 비교 분석한 후 지지하는 후보를 결정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대북 외교, 경제 운용, 노동, 환경 등등 수많은 정책 이슈가 있습니다. 각각의 이슈를 들여다보면 많고 많은 정책이 있죠. 이들은 서로 얽혀있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합니다. 복잡하고 헷갈립니다.

유권자의 선택은 어려울 수밖에 없고 가이드라인에 기대게 됩니다. 여러 정보의 극단적 축약본인 ‘상표’는 이럴 때 요긴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명 브랜드를 믿고 사듯, 정책은 다 몰라도 정치 이데올로기를 보고, 후보 이름을 보고 판단하게 되는 것이죠.

복잡한 현대정치에서 이런 선택은 어쩔 수 없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지지하는 후보의 정책에 대해 잘 모르는 것도 부작용을 낳는 것 중 하나죠. 그러니 정책에 대한 논쟁은 쉽지 않습니다. 대신 토론은 외모나 말투에 국한되고 그럴수록 서로 간의 소통은 고통스러워집니다. 불편한 소통 대신 우리끼리 모여 함성을 지르며 선거를 치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드디어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갖게 됐습니다. 정치 이데올로기를 옆에 두고, 브랜드를 무시하고 좀 더 차분히 지켜볼 여유가 생겼죠. 문재인 후보가 좋아서 그를 지지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좋다고 정부 정책을 감싸기만 해서는 안될 테죠. 한쪽에선 벌써 대통령을 지키겠다는 각오가 들립니다. 이해가 가지만 한편으로 걱정이 됩니다. 조건 없는 지지는 조건 없는 명품 소비보다 훨씬 더 위험할 수 있으니까요. 내가 문재인 브랜드를 접어놓고 대통령을 비판할 수 있어야 저쪽도 ○○○ 브랜드를 내려놓고 대통령을 지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사람 사는, 나라다운 나라에 우리는 한 발 더 다가가는 것이겠죠.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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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