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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1.26 우리 모두 고개를 돌려 보자

얼마 전 마트에 갔다가 대여섯 살쯤으로 보이는 여자애가 울먹이면서 “엄마는 거짓말쟁이야”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그 옆에 있던 엄마는 몸을 낮춰 어린 딸의 손을 잡아주면서 당황한 목소리로 “그래, 엄마가 나빴어. 엄마는 거짓말쟁이야”라고 달랬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이 모녀를 바라보았다. 여자애는 더 크게 “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시잖아”라고 울먹였다. 어쩌면 아이이기에 가능한 정직하다 못해 당돌할 만큼 순수한 언어였다.

마침 그날 나는 정직을 언급한 격언을 모아놓은 글을 읽었던 터라 더욱 심란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순간에도 떠오르는 글귀는 정직은 훌륭한 유산이라는 둥 가장 큰 위안이라는 둥 지혜의 시작이라는 둥 하나마나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녀에게 정직이 최상의 방책이라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으려면 먼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정직하게 만들어야 한다”라던 버나드 쇼의 것이었다. 아마도 여자애는 살아가면서 이 세계가 어른들에게 들었던 것만큼 정직하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될 테고 환멸을 느끼며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이 세계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이라는 덕목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신념을 지닌 채 실천하며 살아가려 한다면 아마도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 등장하는 바틀비만큼이나 쓸쓸한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

바틀비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진부한 사람은 아니다. 그는 월스트리트의 어느 변호사 사무실에서 문서를 필사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여느 필경사와 다를 바 없이 흔한 인물이지만 자신의 신념과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단호히 거부할 줄 아는 보기 드문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부당하다고 느끼는 요구들에 대해 ‘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때는 마음이 조마조마해진다. 아, 저러다 잘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무리한 요구도 아닌데 적당히 타협하지. 이렇게 바틀비를 채근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매번 묵살되고 바틀비의 집요한 거부가 오만함으로 여겨지면서 씁쓸해지는데 그 씁쓸함의 정체는 내가 하고 싶었으나 감히 하지 못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바틀비의 용기에 대한 질투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다 읽은 뒤에도 바틀비가 진정으로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기는 어렵다. 다만 그가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려 애쓰면 애쓸수록 몰락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결국 허먼 멜빌이 그려낸 이 음울한 19세기 중반의 인물한테서 한때 내가 지녔으나 이제는 나와 무관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마트에서 우연히 목격하게 된 어느 모녀의 사소한 말다툼에서 왜 이 세계가 완벽하게 타락할 수 없는지를 깨달은 기분이었다.

작가 허먼 멜빌 (출처 : 경향DB)


어린 딸의 정당한 분노에 당황하던 엄마와 마찬가지로 그들 모녀를 바라보던 뭇사람들의 시선에서 내가 느낀 것만큼이나 강렬한 곤혹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그 짧은 순간의 곤혹스러움은 그이들의 내부에 아주 미미한 균열을 일으켰을 뿐이지만 그이들은 내가 그렇듯이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을 것이며, 앞으로도 살아가면서 당돌하지만 너무나 정직하기에 그 말의 의도 따위를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슬픔에 잠길 수밖에 없는 순간들을 되풀이해서 겪게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우리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돌려 이 세계의 모순을 응시하는 뜻밖의 순간이 찾아올 테고 그 순간 우리가 알던 세계는 무너지고 우리가 바라는 세계가 들어서게 될 것이다.


손홍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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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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