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5.03.11 종북완장 찬 사회
  2. 2013.04.19 새롭다는 건

요즘 사실 조금 겁이 난다. 10년 전에 금강산관광을 다녀왔고, 또 얼마 전 대학 강단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강연한 적이 있는데, 혹시 종북주의자로 몰리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기 때문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1930년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언급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김일성이 한번인가 언급했기 때문에, 통합진보당이 이 용어를 쓴 것은 바로 종북 정당이 된다는 가설이 성립하는 사회라는 점 때문에 더욱 놀랍다. 하여튼 ‘종북’이 굉장히 문제가 많다고 하는데, 종북의 정의는 어떻게 내려야 하는지, 종북과 친북의 차이는 무엇인지, 종북 숙주와 종북 좌파는 같은 뜻인지, 종북몰이는 왜 그렇게 자주하는지, 도통 그놈의 ‘종북’ 때문에 정신이 헷갈린다.

종북,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북한을 쫓아간다’ ‘북한을 추종한다’이다. 종북의 사전적 정의는 북한의 김일성 주체사상과 북한 정권의 노선을 따르는 것을 말할 것이다. 좀 더 보완한다면 종북은 남한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궁극적으로 북한 정권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이다. 그래서 종북주의자로 몰리면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 있다. 이미 국민소득에서 남한에 30배 이하로 뒤떨어져 있는 사회, 김일성주의를 종교화한 사회, 유니세프 보고서에서도 인간개발 하위국에 올라있는 국가, 그러한 절대적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사회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과연 얼마나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더욱이 전쟁 위협과 공포정치, 그리고 핵개발로 버티며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북한의 정치엘리트들을 믿고 따르는 세력이 한국에 정말 있는지, 정확히 알아보았으면 한다.

물론 과거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주체사상에 경도되었거나, 북한의 대남 혁명전략노선을 베끼기에 급급했던 운동가들이 있었겠지만, 현재 이들이 한국사회에서 설 수 있는 자리는 이미 없다. 그만큼 남북간의 경제적, 사회적 차이가 뒤집을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이다. 오히려 북한사회가 개방된다면, 북한 정권 담당자들은 종북이 아니라 종남(從南)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독일이 통일되기 전 동독 국민들이 서독과 합치는 것을 찬성한 것은 바로 서독의 현저한 경제력 우위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연일 ‘종북’은 정치권에서 뜨거운 감자로 달아오르는가. 우리는 1945년부터 한반도를 갈라놓았던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이념논쟁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북한에는 좌익정권이 들어서고, 남한은 보수 우익정권이 차지하면서, 남북은 미국과 소련을 대리한 체제 경쟁에 돌입했고, 각자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구축했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하에서의 냉전반공주의는 권력의 생존논리였다. 반공주의에 도전하는 세력이 있다면, 이들은 바로 반체제 인사로 간주되었다.

197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남한이 앞서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자들은 반공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북한변수는 한국의 보수세력이 그 기득권을 공고히하는 데 적절히 활용되었으며, 사상의 자유와 민주주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도구로도 활용되었다.

서울 여의도 국회앞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규탄' 집회에서 어버이연합 회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출처 : 경향DB)


한동안 잠잠했다가 때 아니게 냉전반공주의 유물로 다시 등장한 종북, 박정희 정권의 유산을 물려받은 박근혜 정부에 와서 그 기승을 부리고 있다, 종북 완장을 차고 모두 엎드리라고 호령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종북이 아닙니다. 결백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종북을 막는 확실한 방법은 민주주의를 신장시켜, 이제는 경제력뿐만 아니라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한 사회가 바로 대한민국임을 우리 스스로에게, 그리고 북한에 보여주는 길이 아닐까 한다.


유용화 |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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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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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왕’ 조용필의 ‘바운스’가 싸이의 ‘젠틀맨’을 제치고 한국 음원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했다. 흥미로운 것은 기존 팬들은 물론이고, 젊은 세대까지도 그의 신곡에 열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용필이라는 이름 석 자의 의미를 아는 이들이라면 이런 현상이 그렇게 색다르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가 누구인가? 거의 모든 음악 장르를 소화해낼 수 있다고 해서 ‘가왕’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가요계의 어른’이 아닌가? 


그런데 실상이 이렇기 때문에 이번 현상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운스’에 대한 찬사가 아이돌 스타들에게서 시작되었다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의견들을 종합해보면, 대체로 이 곡이 표현하고 있는 ‘젊은 감각’에 대한 경이로움이다. 사랑의 설렘을 경쾌하게 노래했다는 점에서 이 노래는 젊은 세대의 감수성에도 호소력을 갖추었다는 평가다. 한마디로 나이 지긋한 ‘가요계의 어른’이 젊은 세대와 소통할 수 있는 곡을 불렀다는 신선함에 많은 이들이 주목하는 것이다.


(경향DB)


물론 이런 ‘젊은 감각’만을 이 노래의 특성으로 꼽을 수는 없다. 가사에 담겨 있는 내용은 요즘 세태와 사뭇 다르다. “사랑이 남긴 상처들도 감싸줄게”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노래는 어린 사랑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상처를 많이 간직한 사랑에 대한 것이다. 일방적인 사랑의 감정을 노래하는 것과 다른 차원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특징 때문에 ‘바운스’를 조용필이라는 ‘낡은 가수’가 불렀지만 지금까지 누구도 부르지 않았던 새로운 노래로 들리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사랑이든 무엇이든, 세파에 지쳤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익숙한 위안을 전혀 새로운 형식에 담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바운스’는 새로움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게 만든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지난 선거에서 새로움은 한국 사회의 화두였다. 원래 혁신과 창조라는 용어는 좌파의 전유물이었는데, 이제는 우파가 이 말을 더 자주 사용하고 있다. 이상한 일이지만, 좌파든 우파든 혁신과 창조를 제대로 실천만 한다면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두 번의 선거를 통과하면서 스스로 변화했고, 또 변화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한국의 보수가 최근 들어 보이고 있는 모습은 그동안 내걸었던 혁신과 창조를 무색하게 만든다.


보수가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태생적으로 보수는 새로운 것보다도 옛것을 존중하고 숭상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기 때문이다. 초가삼간이라도 지킬 것이 있어야 보수다. 이렇게 보수와 새로운 것을 연결시킨 장본인이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지만,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이야말로 일찍이 ‘새마을’이나 ‘뉴타운’이라는 구호를 통해 보수와 새로움을 ‘훌륭하게’ 하나로 만들어놓은 전력이 있다. 이런 까닭에 솔직히 한국의 보수는 지킬 것이 없는 보수인지도 모른다.


지킬 것이 없으니, 한국의 보수는 언제나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 왔다.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사이에 냉전이 한창일 때 한국의 보수는 특별한 고민없이 그냥 반공주의만 지지하면 됐다. 문제는 냉전이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철천지원수가 우방으로 간주되는 반전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이 상황에서 여전히 무너지지 않는 북한은 일부 한국의 보수에게 그나마 정체성의 혼란을 덜어주는 역할을 했다. 그나마 북한이라도 있으니,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은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종북 논쟁은 이런 보수의 위기의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증상이라고 이 자리에서 논의한 적이 있다. 정작 지킬 것이 없으니, 이미 자유진영에서도 포기한 냉전의 논리를 부여잡고 낡아빠진 수사만을 늘어놓고 있는 형편이다. 레퍼토리가 동일해서 젊은 세대에게 아무런 감흥을 줄 수가 없다. 그렇게 종북주의에 문제가 많다면,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장삼이사에게 호소력 있는 ‘젊은 감각’을 선보여야 할 것이다.말로만 혁신과 창조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조용필의 ‘바운스’처럼 실질적으로 ‘젊은 감각’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조용필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고초를 겪었다. 1975년 박정희 정권은 가요정화 조치라는 이름으로 청년문화의 상징이던 록과 포크를 탄압했는데, 대마초 사건이 그 빌미였다. 조용필도 그 사건에 연루되어 공안당국에 끌려가서 인간 이하의 고문을 당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렇게 대중문화가 초래하는 개방성을 참을 수 없었던 당사자들이 지금 한국에서 보수를 자처하고 있는 이들 중 일부다. 이런 보수가 혁신과 창조를 말해봤자 그 의미는 퇴색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보수가 제대로 자신의 의미를 정립하겠다고 한다면, 이런 어두운 과거로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과거처럼 힘으로 대중의 욕망을 억누르고,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려 드는 낡은 방식으로 한국의 보수는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이다. ‘바운스’ 현상이 한국의 보수에게 말해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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