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민주주의란 것이 민의를 표현하기 전에 먼저 대리인을 자처하는 자들의 수준을 끝없이 확인해야 한다는 것은 고역이다. 더구나 과연 이것이 민주적인가? 민의와 상관없이 그 민의를 대표할 대리인들이 선정되는 것이. 무엇이 저들을 대선후보라고 정했는가? 여론조사? 지지율? 과연 그것이 민의를 얼마나 반영할까? 한국의 정치인 지지율 조사가 얼마나 그릇되고 조작되고 바람몰이용인지는 이미 지난 18대 대선에서 충분히 폭로된 바 있다.

결국 대의민주주의로 불리기도 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선출된 자들(the elected) 가운데 고르기 게임이다. 즉 ‘자격 갖춘 자들’(the elite) 중에서 고르는 정치게임. 1987년 헌법으로 재개된 대통령 직선제도 마찬가지다. 내 주권은 선거일과 선거일을 앞둔 얼마 동안만 작동한다. 그리고 그 이전에 나는 내가 원하는 후보감이 없는 것도 참아내야 하고, 내가 주인이라는 사실도 잊어야 한다. 지금도 이른바 주권자들은, 어느새 촛불 든 자발적이고 다양하며 역동적인 시민들에서 촛불 든 방청객이 되고 있다. 주말마다 촛불 들고 광화문 콘서트에 모이는 관중들. 일부에서 제도권과 촛불권력, 혹은 의회권력과 시민권력의 관계를 두고 ‘이중권력’으로 개념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국회와 사법권력, 그리고 촛불권력이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시너지효과를 내야 한다는 규범적인 언명에 불과하다. 왜 규범적이냐면? 현실의 정치사를 보면, 제도정치와 사회운동정치, 아니면 의회권력과 ‘민중권력’, 지금은 또 이름을 바꿔 의회권력과 ‘시민권력’이라는 양대 정치가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관계를 맺거나, 양자가 유지 존속하면서 상호 성장한 경우는 거의 찾기 어렵다. 양자는 대립 혹은 경쟁적인 동원의 관계다. 이것은 사회운동론이 주로 규명해온 수수께끼이기도 하다.

1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주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 참가자가 노란 리본이 깃봉에 달린 태극기를 들고 있다. 이준헌 기자

그리고 이 점이 더 중요한데, 그렇게 되는 이유가 바로 양자 동원체제의 효과나 작동기제 탓이 아니라 그들이 터를 두고 있는 민주주의의 성격 탓이라는 점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를 거세하면서 의회민주주의라는, 한때는 반민주적 장치로 불렸던 정당정치에 기초한 대의제를 유일한 민주주의로 만들어낸 정치체제다. 그렇게 자유주의를 민주주의가 안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민주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지금 의회민주주의의 신봉자들이 광장권력과 제도정치의 시너지와 이중권력 상태를 유지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불가능한 테제이며, 혹은 광장권력을 통해 의회권력을 장악하거나 의회권력으로 진출하려는 욕망의 정치적 표현일 뿐이다. 그래야 대중은 스스로 주권자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스스로를 정치적 주체로 동원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동원은 선거로 이어주는 동력이고, 선거는 대중의 주권을 제도적 대리자들의 대의정치로 전화시키고, 대중은 다시 장외로 퇴출되거나 아니면 제도화된다. 벌써부터 정권교체 이후 ‘대중’의 동원이 불러올 혼란과 환멸을 걱정하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온다.

그렇다면 촛불 이후에 올 것들은 무엇일까? 여러 얘기가 가능하겠지만 미국의 오큐파이운동에 대한 지젝의 인용으로 마무리하련다.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는 길로 빠지지 마십시오. 우리는 지금 유쾌한 순간을 맞고 있지만, 축제를 여는 데는 그렇게 돈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중요한 건 축제가 열린 그 다음날입니다. 우리가 저마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무언가 변화돼 있을까요?”

지금 특검의 마지막 브리핑에 귀를 쫑긋하고, 다음주 헌법재판소의 탄핵인용 여부로 세상을 행과 불행으로 나누고자 한다면 당신은 많이 불행하고 자괴감에 빠질 것이다. 환멸과 희망은 한 끗 차이다. 어느 쪽으로 풀썩 넘어지는가, 아니 풀썩 넘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버틸 것인가? 촛불이 촛농으로 흘러내려 지저분한 얼룩이 되지 않으려면 촛불은 버텨야 한다. 투표함이 아니라 이 광장에서. 그리고 나아가야 한다. 99%가 사는 길은 법관의 판결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둘러싼 투쟁이다.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1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탄핵 찬반 집회가 동시에 열렸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찬성하는 촛불과 탄핵에 반대하는 세력이 태극기를 들고 청와대로 행진했다. 3·1운동은 민족 전체가 계급·지역·이념·종교를 초월해 일으킨 독립운동이었다. 선열들은 한마음으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대동단결했다. 꼭 98년이 지난 지금 서울 도심에선 3·1정신과는 정반대되는 장면이 펼쳐졌다. 안타까운 일이다.  

일견 3·1절은 둘로 쪼개진 것처럼 비친다. 하지만 현 시국을 촛불과 태극기 대결 구도로 몰아가는 건 올바른 평가가 아니다. 촛불은 박 대통령과 최순실 일당이 헌법질서를 무너뜨린 데 대한 시민의 분노에서 시작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우리 사회 불평등·불공정·불의에 대한 좌절과 분노를 폭발시킨 기폭제였을 뿐이다. 촛불민심은 국치(國恥) 주범들의 단죄만 요구한 게 아니다. 촛불집회는 국정농단 세력에 대한 심판을 계기로 특권과 반칙이 없는 나라,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헌법을 유린한 피의자 대통령을 지키겠다는 탄핵 반대 집회를 이와 같은 반열에 놓을 수는 없다. 박근혜 구하기에 나선 수구세력들이 나라의 상징인 태극기를 흔들었다고 해서 ‘태극기집회’라고 명명하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

제98주년 3·1절인 1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거대한 경찰 차벽으로 나뉜 두 집회가 각각 열렸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인용을 요구하는 집회(오른쪽)와 기각을 촉구하는 집회 참가자들이 차가운 빗줄기 속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사진공동취재단

광장의 두 집회는 보수와 진보, 여와 야의 이념이나 진영의 대결이 아니다. 촛불이 이뤄낸 탄핵을 사회개혁, 국가개조의 출발점으로 삼자는 세력과 이를 막으려는 수구 기득권 세력이 광장에서 만났을 뿐이다. 가치의 충돌도 아니다. 미래의 대립도 아니다. 촛불은 무너진 민주공화국을 복원하고 시민주권시대를 열자는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는 탄핵 반대가, 보호하고 지킬 가치일 수는 없다. 촛불은 구체제 적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나아가자는 미래의 꿈과 희망을 담고 있다. “아스팔트가 피로 덮일 것”이란 협박과 선동이 우리의 미래일 수는 없다. 이것이 본질이다. 보수세력이 기계적 중립이란 허울 아래 탄핵 촉구와 반대, 촛불과 태극기가 경쟁하고 대립하는 관계에 있는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공정한 태도가 아니다.

자유한국당이 촛불을 폄훼하고,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특검 연장을 거부하고, 친박계 의원들이 탄핵 불복을 공언하고 나선 건 탄핵 이후, 대선 이후에도 보수층을 결집해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자구(自救)의 몸부림이다. 한술 더 떠 박 대통령은 3·1절 집회를 하루 앞두고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진심으로 고맙다”는 감사 메시지를 보냈다. 탄핵 반대 맞불을 키워 지지층을 모으려는 술수에 불과하다.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한 작태다.

매주 이어지는 두 집회를 놓고 걱정하는 의견이 적지 않다. 걱정할 것 없다. 대다수 시민들은 알고 있다. 탄핵이 인용되면 반대 세력의 반발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어느 정도의 혼란은 불가피할 것이다. 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다.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수구세력의 반동과 퇴행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막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보다 더한 일도 겪었다. 나라를 빼앗기고 전쟁과 외환위기 속에서도 오늘의 자유와 번영을 이뤄냈다. 박 대통령 탄핵은 혼란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헌법과 정의와 역사와 미래를 바로 세우는 첫걸음이다. 누구도 오는 봄을 막을 수는 없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1789년 7월11일, 미국 독립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했던 미국 정치가 토머스 제퍼슨은 프랑스대혁명의 와중에서 런던으로 긴급하게 편지 한 통을 쓴다. 수신인은 이후 프랑스대혁명의 정당성을 치밀하게 논증하는 글인 <인권>을 쓰게 되는 토머스 페인이었다. 

제퍼슨은 이 편지에서 국민의회가 지금 “낡은 정부를 무너뜨리고 이제 새로운 정부의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는데 그를 위한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자연적이고 소멸될 수 없는 인간의 권리 선언”을 정초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바로 이 선언이 1789년 8월에 반포된 그 유명한 프랑스인권선언,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이다. 이 선언은 이후 공화국 프랑스의 구성과 운영의 원리를 정초하는 문서로 자리 잡게 된다.

물론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선언만큼 프랑스대혁명의 근본 의미를 명확하게 밝혀놓고 있는 문서도 없을 것이다. 

프랑스대혁명은 1789년 시작되어 1875년 제3공화국 헌법제정으로 비로소 종결되는 100년의 장기혁명이었다. 그 장기혁명의 근본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신념을 국가구성의 원리로 삼았다는 점이다. 프랑스대혁명 이전 인간의 권리는 출생에 따라서 불평등하게 배분되어 왔다. 

그 혁명은 국가의 출현 이후 수천년을 이어왔던 신분제, 즉 인간의 불평등 위에 구축된 정치질서를 혁파한 혁명, 철옹성과도 같은 기득권을 누려왔던 이들의 완고한 저항을 타도한 혁명이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은 시민들의 힘을 통해 혁명의 정신과 결과, 곧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국가의 토대에 기입한 공적 문서였다.

2017년 대한민국에 몰아치는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에 맞선 시민들의 촛불은 아직도 타오르고 있다. 

지난해 늦가을 시작되어 봄을 바라보는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는 촛불항쟁의 의미는 무엇일까? 단지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으로만 그 의미를 축소할 수 있을까? 

한반도에서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국가체제로서 민주공화국을 만들고자 했던 시도는 적어도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60년 4·19혁명, 1979년 부마항쟁과 1980년 광주항쟁, 1987년 6월항쟁과 7·8·9월 노동자대투쟁, 2008년 촛불집회를 지나 2017년 광화문 대로를 가득 채운 지금의 촛불항쟁은 바로 1945년 이후 시작된 자유와 평등의 민주공화국 수립을 위한 과정의 분기점들이다. 민주공화국을 향한 우리의 역사 역시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역사적 투쟁의 성과를, 승리의 결과를 어떤 방식으로 남겼을까? 우리의 현대사는 아직 인권과 민주적 권리를 시민의 힘으로 공인한 권위 있는 공적 문서를 갖지 못했다. 1960년 4월의 승리도, 1987년 6월의 승리도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권리를 아로새긴 공적 문서를 남기지 못했다. 

매주 10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모여 민주주의와 시민의 권리를 외친 집회는 우리 현대사만이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드문 혁명적 사건이다. 지금 우리는 이 나라를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민주공화국으로 만들기 위한 장구한 투쟁의 결정적 국면에 서 있다. 이 국면에서 무엇을 남겨야 할까?

지난 18일 2000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장충체육관에 모여 ‘촛불권리선언을 위한 시민대토론회’를 열었다. 

촛불집회 이후 대한민국, 모든 시민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민주공화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민주적 시민헌장, 혹은 권리선언의 내용을 토론하는 자리였다고 한다. 이 토론의 과정과 결과가 2017년 촛불시민혁명의 의미와 정신을 제대로 밝히는 시민들 공적 선언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시민의 행동과 실천으로 세우는 민주공화국의 기초를 시민들이 선언하는 공인된 권리선언을 우리도 이제 가질 때가 되지 않았는가? 그러한 승리의 권리선언이 2017년 촛불시민혁명이 남겨야 할 중요한 성과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정정훈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여자 나이 50부터 황금기야. 손자들 키워달라고 자식들이 매달리기 전까지가 누려볼 수 있는 마지막 자유시간이라니까….”

직장 다니는 딸 대신 손자들 돌보느라 여념이 없는 이웃의 선배 아주머니가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그 좋다는 ‘여자 나이 50’을 넘기는 2016~2017년, 나는 젊은 날 이후 잊고 지냈던 나의 ‘여성성’에 대해 새삼 고민하게 됐다.

나를 ‘50세 고민녀’로 만든 데 불을 댕긴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고 해서, 여성으로서 티끌 한 점 뭘 더 누려본 기억이 없는 내가 추운 겨울 박 대통령의 파면을 위해 광화문광장에 촛불을 들고 앉아 있어야 하는 상황까지는 기꺼이 견딜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집회에서 사회자가 박 대통령을 두고 “잡×”이라고 성별을 지칭한 상소리를 하는 순간, 나는 졸지에 오물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얼어붙었다.

‘촛불 든 당신 말고 박 대통령’에 대고 하는 얘기라고 주장하겠지만, 나 역시 어디서든 “잡×”이라고 불릴 가능성이 있는 여성이다. 박 대통령은 규탄하지만, 그 규탄에 여성혐오가 동원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이 양가적 감정과 불쾌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지 곤혹스러웠다.

그날 집회에 다녀온 이후 내 생애 최초로 한 여성주의자 그룹에 가입했다. 페이스북에서 마주친 ‘박근혜 하야를 만드는 여성주의자 행동’(박하여행)이라는 상큼한 이름의 단체였다. ‘박근혜 퇴진을 위해 행동하면서, 또한 현재의 흐름 속에 무작위로 일어나는 성차별 발언과 행동도 모니터링하고 시정한다’는 활동 취지가 내 혼란감을 콕 집어 해명하는 것 같아서였다.

온라인으로 가입만 해 두었다가 한 번도 함께 행동을 못했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참여한 것이, 미국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튿날 이에 반대해 열린 1월21일의 ‘세계여성공동행진 서울’이었다. 집회 장소는 지난해 5월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강남역 10번 출구 앞. 좌우를 둘러보아도 2000여명의 참가자 중 50대인 내가 최고령일 듯싶었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어색함을 애써 누르며 대열을 따라 걷고 있는데, 앞쪽에서 날카로운 고함이 터져 나왔다.

대열 밖에서 행진자들의 사진을 찍는 젊은 남성을 본 진행요원이 몸싸움이라도 할 기세로 거칠게 항의하고 있는 것이었다. 항의 정도가 격렬해서 잠시 어안이 벙벙했는데, 이유는 행진이 끝난 뒤 같은 모임 회원인 한 젊은 여성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찍은 사진으로 인터넷에 얼굴이 돌면, 거기에 페미×이라고 온갖 욕설 댓글이 다 붙고, 나체랑 합성해서 막 조리돌림 하거든요.”

그러니까, 순한 목소리로 “여권이 인권이고 인권이 여권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던 그 젊은 여성들은 사진 하나라도 인터넷에 오르는 날에는 어떤 온라인 테러를 당할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그 자리에 나온 것이었다. 30년 전 화염병과 최루탄이 날아다니던 그 투쟁의 공간만을 기억하고 있었던 나는 그간 모르고 살아왔던 또 다른 전장이 오늘 젊은 여성들의 일상공간이라는 것을 그날 처음 절감하고 나의 무지가 부끄러웠다.

정치민주화라는 긴급한 과제 앞에서 여성운동은 배부른 타령이라고 뒷전으로 밀리던 30년 전의 세월로부터 뚝 떨어져 나와 오늘의 페미니스트들을 만나는 나는 선배 세대로서의 부채감을 지울 수 없다. 과연 그때로부터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는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공중화장실에서 무참히 살해당할 수 있고,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온라인 테러를 당하고, 정치적 주장을 위해 성차별이 용인되고, 국가가 여성의 낙태권리에 개입하며, 낳은 아이를 어떻게 사회가 함께 기를 것인지에 대한 대안은 마련하지 못한 채 아이 셋의 젊은 공무원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모는 이 환경의 문제가 중년 여성인 나와는 관계없는가.

직장의 선배 여성, 혹은 곧 시어머니나 친정엄마, 장모가 되어갈 중년 여성 세대가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당면한 문제를 함께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성차별 체제의 일부가 되어 젊은이를 억압하는 노인들로 늙어가고 말 것이다. 여자 나이 50, 페미니즘에 대한 내 고민은 이제 시작인 것 같다.

정은령 | 언론학 박사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한국이 놀랍다.” 이 말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인상을 물어보면 가장 자주 듣는 말이다.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가장 못사는 나라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을 사용하는 세계 10대 교역국으로 변신한 한국의 발전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한다. 그런데 요즘 듣는 말은 ‘한국인은 놀랍다’이다. 수십만명의 군중이 한꺼번에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는 것도 놀라운데 그것도 주말인 토요일에 하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인이 매번 왜 그렇게 시위를 자주 하는가에 대해 가장 놀란다.

해외 언론들은 그저 놀랍다고 표현했지만 그 놀라움이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한국은 얼마나 부패했길래 저렇게 시위를 계속하겠는가라는 놀라움의 의문을 풀기 위해 해외 언론은 더욱 상세한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 미국 시사주간 타임은 한국인이 대통령 탄핵을 축제처럼 기뻐할 일은 아니라고 꼬집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인이 촛불집회를 한 덕분에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됐지만 민주주의의 승리는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 매체는 한국인이 수만번의 시위를 해왔지만 시위만으로는 구조적인 개혁을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 이유로 쉽게 끓어 올랐다 쉽게 식어버리는 냄비근성, 법률 위에 존재하는 ‘떼법’, 실력보다 학연·지연 등을 우선하는 ‘인맥 문화’,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로 ‘뿌리 깊은 정경유착’을 지목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재벌은 경제에서 특권화된 자리를 지켜줄 정당과 정치인들에게 기부를 한다”고 지적했다. 영국 BBC는 새해 전날 토요일에도 계속된 집회를 보도하면서 삼성 계열사의 합병을 위해 국민연금공단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구속을 상세히 설명했다.

미국 CNN방송에서 보도한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집회 관련 뉴스. CNN뉴스 캡처

실제로 해외 기업들은 우리 기업들과의 관계에서 직무윤리와 준법서약을 강화하고 있고 관련 사안에 대해서는 정확한 해명을 요구하기도 한다. 국내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사태로 인해 한국 기업은 부도덕한 이미지로 글로벌 경쟁시장에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특히 사회적 책임투자를 요구하는 프로젝트에는 치명적일 것이며 참여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우리는 분풀이를 계속하기보다는 박 대통령 퇴진 이후 다음 사회를 준비해야 한다. 이번 사태로 인해 대한민국이 치러야 할 총비용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위기를 기회로 전환할 수 있는 다음 사회를 준비해야 한다.

지금 당장 보이지는 않지만 대한민국은 이미 많은 경제적·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다. 국가부패지수가 높아졌고 신용등급은 하향 조정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기적으로는 큰 손실이겠지만 장기적으로 다음 사회에서는 더 큰 이득으로 돌아올 것이다. 단, 그것은 정부와 기업들이 이번 사태를 구조조정의 기회로 삼고 국가의 모든 구성원들이 제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시민의식 개혁의 기회로 전환할 때 가능하다.

김성택 넥스트소사이어티 재단 이사장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정치란 무엇인가? 대학 신입생 때 정치학개론 문제였다. 데모하느라고 결석을 밥 먹듯이 해 수업내용 대신 상식에 기대어 “만백성을 잘 먹고 잘살게 하는 것”이라고 썼다가 낙제점을 받았다. 이후 정치학 박사가 되고 30년 정치학을 가르치면서 같은 질문을 받으면 나는 “갈등조정의 제도화”라고 답한다. 다양한 사회적 갈등들을 국회와 같은 제도의 틀 내에서 조정하는 일이 바로 정치라는 이야기이다. 촛불혁명을 바라보면서 이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의 최고경쟁력은 민주화운동, 사회운동이다. 외국 학자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골리앗 투쟁, 촛불, 희망버스 등 우리의 운동을 너무 부러워한다. 그러면 나는 “이 운동들이 자랑거리가 아닐 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답한다. 그렇다. 치열한 거리 투쟁과 거리의 정치가 일상화된 것은 정치가 제도 내에서의 갈등조정이라는 제 기능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정치의 실패’, ‘정치의 직무유기’ 결과가 바로 ‘거리의 정치’이고 광장이다. 정치가 원래 해야 하는 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해 우리의 자랑거리인 거리의 정치가 사라지는 날은 언제나 오려는가?

이번 촛불혁명의 밑바닥에는 민의와 동떨어진 정치, 나아가 ‘헬조선’에 대한 분노가 깔려있다. 단순한 박근혜 퇴진을 넘어 ‘11월 촛불혁명’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필요조건은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정치의 발본적인 개혁이다. 이와 관련해 일부는 제왕적 대통령제 폐기 등 개헌을 주장하고 있다. 그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민심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고 있는 비민주적인 선거제도를 개혁하는 것이다. 다행히 광장의 힘, 그리고 새누리당의 분당으로 생겨난 1여4야의 5당체제는 이를 이룰 수 있는 사실상 유일무이의 기회이다. 공직선거법을 고쳐 이번 대선부터 결선투표제를 도입해야 한다. 현 제도는 30%대 지지율의 ‘소수파 대통령’을 양산해 왔다. 이는 대표성과 정통성에서 문제가 많다. 이제 결선투표제를 통해 과반수의 지지를 받는 ‘다수파 대통령’이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 여론조사에서 우위를 보이는 야권 대권주자의 경우 이에 부정적 내지 소극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국민 과반수의 지지를 얻을 자신이 없다면 그는 대통령 자격이 없다.

민의, 즉 득표율에 비례해서 의석수를 배분하는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한다. 그래야 거대보수지역정당들의 담합체제를 깨고 다양한 사회세력들이 제도정치로 나아가 거리가 아닌 제도 내에서 갈등들을 조정할 수 있다. 그것이 정치의 실패를 극복하는 첩경이다. 헌법재판소는 인구차이에 의해 표의 가치 차이가 3배 이상 나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정했다. 그러나 거대 정당들에 던지는 표는 군소진보정당에 투표하는 표의 4배로 계산되고 있다. 이를 교정하기 위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비례대표의 확대와 연동제 도입을 제안했지만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은 야합해 작년 총선에서 오히려 비례대표를 축소했다. 일각에서는 중대선거제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보여주었듯이 이는 돈이 많이 들고 정치신인의 진입을 막는 등 문제가 너무 많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유일하게 19세인 투표권 나이도 글로벌 스탠더드인 18세로 낮춰야 한다. 이번 촛불의 중심세력 중 하나는 중·고등학생들이고 이들은 자유발언 등을 통해 놀라운 정치의식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새누리당에서 분당한 바른정당이 이에 반대하는 것은 새 당이 여전히 수구정당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의 경고대로 이에 반대하는 정당은 촛불민심 역행 정당이다. 그러나 기이한 것은 우 원내대표가 막상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고 투표권 연령 인하와 함께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주장하고 있는 결선투표제와 독일식 연동제에는 침묵한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 결선투표제와 독일식 연동제에 반대하는 정당 역시 촛불민심 역행 정당임을.

“멍청하긴, 문제는 경제야!” 잘 알려져 있듯이 1992년 미국 대선에서 40대 무명의 아칸소 주지사 빌 클린턴이 들고나와 이라크 전쟁 승리로 기고만장하던 조지 부시 대통령을 패배시킨 유명한 구호이다. 그러나 이는 반쪽의 진실만을 담은 반쪽짜리 구호이다. 정답은 “멍청하긴, 문제는 정치야!”이다. 문제가 경제라고 하더라도 바른 경제정책을 선택해 펼 수 있는 올바른 정치가 없다면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정치다. 박근혜 게이트도 다 정치가 잘못됐기 때문이며, 정치개혁, 선거개혁 없이는 박근혜 청산, 헬조선 청산도 없다.

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한다. 시민이 자신의 의사를 대표할 인물을 뽑는 선거는 주권자의 권리 행사라는 민주주의의 핵심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런 표현은 색이 바랬다. 정치를 향한 냉소는 커가고, 그에 반비례해 시민의 선거 참여도는 떨어지고 있다. 유권자들은 “찍어 봐야 바뀌는 것은 없다”며 한탄하기에 이르렀다. 그 끝판에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고, 그예 촛불혁명의 불이 붙었다. 이렇게 시민과 괴리된 정치가 가능한 것은 시민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선거제도 때문이다.

현 선거제도에서 가장 먼저 손봐야 할 문제는 ‘표의 비례성’을 바로잡는 것이다. 각 정당 득표율은 실제 의석수와 비례하지 않는다. 유권자의 선택과 다른 결과가 나오니, 결과적으로 시민은 선거에서 소외된다. 지역구에서 1표라도 더 얻은 최다 득표자가 당선되는 승자독식 구조 때문이다.

20대 총선에서 대구 지역구 전체 투표수 108만여표 중 새누리당은 47.9%인 52만여표를 얻었지만 12석 중 8석을 차지해 66.7%를 대표하는 셈이 됐다. 더불어민주당은 18.8%인 20만여표를 얻었지만 1석만 따내 8.3%에 불과했다. 광주 전체 71만여표 가운데 국민의당은 55.8%인 39만여표를 받고 8개 지역구 100%를 가져갔다.

비례대표는 그나마 낫다. 새누리당은 정당 득표에서 33.5%를 얻고 의석 47석 가운데 17석을 획득해 36.1%를 대표했다. 민주당과 국민의당은 각각 25.5%와 26.7%를 얻고도 27.7%인 13석씩 가져갔다. 정의당은 7.2% 득표에 8.5%인 4석을 얻었다.

(출처: 경향신문DB)

해결책으로 1개 지역구에 2명 이상을 뽑는 중·대선거구제 도입이 거론되지만, 토호만 발호하고 2개의 특정 지역 기반 정당이 해당 지역을 나눠먹을 우려도 여전하다. 전국을 6개 권역으로 나누고 권역 내에서 득표율을 기준으로 비례의석을 배분하는 권역별 비례대표제는 절차가 복잡하고, 거물들의 선거 안전판 역할로 작용할 수 있다.

현재로서 가장 현실적인 방안은 전국 명부 연동형 비례대표 확대다. 지역구는 현재 253석을 그대로 두되, 47석인 비례대표 정수를 120석 이상으로 늘리면 된다. 한국 국회의원 1인당 인구수는 16만7000명으로, 너무 많다. 평균 9만9000명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가운데 4번째로 많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지역구와 비례대표 정수를 2 대 1로 할 것을 권고한 바 있고, 한국국제정치학회는 국가 규모가 비슷한 OECD 국가와 비교했을 때 한국 의원 정수로 370명 안팎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비례대표 정수가 늘면 그나마 표의 비례성이 제고된다. 세가 약한 지역에서 고군분투하는 후보를 비례대표로 배려할 수 있다. 녹색당, 해적당, 청년당, 복지당 등 이념과 정책이 분명한 정당들도 의원을 배출해 국회에서 민의를 전달할 수 있다. 유권자들에게는 더욱 다양한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

의원 정수 확대의 가장 큰 걸림돌은 시민들 사이에 만연한 정치 혐오와 국회 불신이다. 그러나 국회 문이 좁을수록 정치 엘리트와 자산가, 지역의 세도가 등 기득권층에 유리하다. 시민들이 보고 싶어하는 참신한 인물, 전문가, 지역 봉사자들은 들어가기 어려워진다. 과도한 국회의원 특권을 폐지하고, 공천이 대권·당권을 쥔 계파의 전리품이 되지 않도록 투명성과 민주성을 보장하는 내부 절차를 만들면서 비례대표를 늘려야 한다.

선거운동 제한은 대폭 풀어야 한다. 선거가 시민의 축제라지만, 단속과 처벌의 장으로 전락해 있다. 투표 당일을 제외하고 호별 방문, 명함 배부, 전화·메시지 발송, 신문·방송 광고, 플래카드 게시 등을 전면 허용해야 한다. 선거 직전 여론조사 공표 및 언론사의 후보 비교·서열화 금지도 유권자의 알 권리를 막는 것이므로 해제해야 한다.

특히 선거운동 기간이라는 이유로 촛불집회에서 표출된 것과 같은 다양한 표현을 옥죄어서는 안된다. 금품 제공, 후보 매수, 허위사실 유포 등 부정행위가 아니라면 후보나 정당의 지지와 반대 등 자유로운 의견 표명을 보장해야 한다. 표현의 자유를 더욱 보장해야 할 선거 때 거꾸로 더 억압한다면 결코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할 수 없다.

선거권 연령도 현행 만 19세에서 18세로 낮추는 게 온당하다. 190개국 가운데 147개국은 선거연령이 18세 이하이고, OECD 회원국 중 18세를 초과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교육 수준의 향상, 소셜미디어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한 정보 교류로 고등학교 3학년생의 정치적 판단력은 부족함이 없다. 맑은 눈과 귀를 가진 그들이 탁한 기성세대보다 후보자 감별을 잘할 것이다. 고령화되는 한국 사회에서 젊은 세대의 정치적 의견이 미래 정책 결정에 더 반영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결선투표제를 도입해야 한다. 그간 이념과 지향이 다른데도 사표를 우려하며 자기가 원하는 후보 대신 다른 후보를 찍는 왜곡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 결선투표제는 인위적 후보 단일화의 폐해도 막을 수 있다. 무엇보다 투표자 과반 지지를 얻음으로써 당선자의 대표성이 강화된다.

촛불에 힘입어 선거제를 혁파할 천금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정치권이 그 뜻을 받들지 못하면 시민들이 직접 압박하고 요구할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수년 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할 때다. “그들이 온다!”고 하면 비상이 걸렸다. 인권위 건물을 점거무대로 삼은 장애인들이었다. 칼날 같은 주장과 거친 몸싸움에 엘리베이터를 점거하고 밤샘농성도 불사했다.

왜 저럴까? 조용하고 침착한 목소리가 더 호소력이 있지 않을까? 과격하면 거부감만 더 커진다는 것을 왜 모를까? 그런 선입견이 작동하면 그들의 울부짖음의 내용은 잘 들리지 않게 된다.

나중에 하나하나 살펴보니 구구절절 옳지 않은 주장이 없었다. “장애인도 공부하고 싶다.” “제발 지하철 타고 다닐 수 있도록 하라.” “규율이 지배하는 시설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살고 싶다.” “우리도 사람이다. 1급, 2급으로 등급 매기지 마라.”

주장은 과격하지 않았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최소한의 것에 불과했다. 장애는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눈감고 귀 막은 비장애인에게 있었다. 존중받지 못하니 목청이 높아지고 차츰 분노가 쌓이며 쇳소리가 날 수밖에.

들어주고 만나주지 않으니 행동은 더 과격해질 수밖에 없다. 혹 아는가? 장애인들이 쇠사슬로 몸을 묶고 버스 바퀴 밑으로 몸을 던진 뒤에야 휠체어로 오르내릴 수 있는 저상버스가 이 땅에 도입되었다는 것을.

[장도리]2017년 1월 2일 (출처: 경향신문DB)

광장의 일렁이는 촛불과 함께 정유년 새해가 밝았다.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희망을 염원하던 사람들은 이제 촛불을 들고 탄핵 이후의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촛불혁명의 목표는 정권교체에 머무르지 않는다. 대한민국을 새롭게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나라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광장의 목소리는 다양하다. 혹자는 재벌개혁을, 누군가는 특권과 부패 척결을, 어떤 이는 갑질과 학벌주의와 남성중심사회의 청산을 주장한다. 나는 평등과 정의,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이 구체제와 낡은 질서 대신에 들어서야 할 사회의 중심적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는 중에 인권위를 찾아오던 장애인들이 자꾸 떠올랐다. 탄핵과 정권교체를 외치던 광장의 사람들은 탈시설 장애인들과 함께 살아갈 지역사회 공동체를 만들자는 주장에도 한목소리를 낼까? 터무니없는 임금과 비인격적 대우를 받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화하거나 처우 수준을 높이자고 하면 받아들일까? 인종차별을 견디며 온갖 허드렛일을 감당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이민을 허용하자고 하면 어떨까? 성소수자를 차별·혐오하는 대신 존중하고 연대할 수 있을까? 그 밖에도 많다. 미혼모와 노숙인과 독거노인과 양심적 병역 거부자와 신용불량자와 난민에게도 존엄하게 살 수 있도록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하면 과연 얼마나 수용될 수 있을까?

사회적으로 중대한 국면에 부딪힐 때면 흔히 간과되는 것이 소수자와 약자의 문제다. 소수자의 문제는 ‘사소한’ 문제나 ‘골치 아픈’ 문제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지금은 단결이 우선이고 분열되어서는 안되니 우선 좀 참으라고 한다.

상황은 선거 국면에 접어들면 훨씬 더 나빠진다. 다수의 표를 얻기 위해 뛰는 자들에게 소수자의 목소리는 간과되고 묵살된다. 그래서 소수자는 보이지 않는 존재이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된다.

한국의 인권상황이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맞고 한편으론 염려스럽다. 자신의 인권에 대해서는 민감성이 드높아졌지만 이웃의 인권 침해나 차별에는 무심하거나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장애인, 이주노동자, 성소수자가 아니니 소수자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권침해의 경사에 놓인 바위는 멈추지 않고 굴러떨어진다. 소수자를 위협하던 인권침해는 곧 나의 인권을 위협한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는 소수자이고 약자이다.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비유 중에 아흔아홉 마리의 양과 길 잃은 한 마리의 양 이야기가 있다. 목자는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다. 얼핏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흔아홉 마리의 양 입장에서 한번 보자. 언젠가 길 잃은 양이 될지도 모르는 그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신뢰하게 되고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 목자를 믿고 따르지 않을까?

소수자와 약자는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곁가지로 사소하게 취급되어서는 안되며 우선적으로 보호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인권의 가치인 자유와 평등은 따뜻한 연대를 통해 비로소 충만해진다.

촛불광장은 다양한 소수자의 목소리로 채워져야 한다. 작은 목소리를 내도록 격려하고, 광장에 나오지 않는 소리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세상은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촛불이 되고, 서로의 목소리가 되어주는 것이리라.

문경란 | 서울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2016년 마지막 날에도 광화문광장은 시민들로 가득 찼다. 그들이 왜 그곳에 모였는지 우리는 더 이상 묻지 않는다. 12월31일 광장에 가지 않은 이들도 이유를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간 그곳에 있지 않으면 독감처럼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파고드는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어서라는 걸. 광장에서 외치고 토론하고 노래하지 않으면 악귀가 달라붙은 것 같았던 끔찍한 한 해를 차마 떨치지 못한 채 새해를 맞을 수 있다는 불길함이 엄습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2016년은 국가가 산적한 난제들과 씨름하며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간 시간이 아니라 멈춘 시간이었다. 아니, 지난 4년 전체가 동결된 시간이었고 2016년은 그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4년 동안 우리는 공익을 위한 제도, 권한, 법적 절차, 그리고 공공에 헌신한 대가로 공직자에게 주어지는 빛나는 명예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하릴없이 지켜봐야 했다. 국가의 단단한 껍질이 깨지면서 드러나는 썩어 문드러진 속살들, 그 속에 득시글거리는 해충과 기생충들, 그것들이 풍기는 악취를 꼼짝없이 지켜보고 냄새 맡아야 했던 우리 시민은 포르노 극장의 관객이었다. 국가라는 이름의 아우라에서 느껴지는 권위와 도덕이 땅에 떨어지면서 국가의 우산 아래 모여들었던 ‘국민’은 완전히 벌거숭이가 되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세상 앞에 강제로 발가벗겨진 것 같은 느낌, 즉 견딜 수 없는 수치와 모멸감을 안겨줬다.

새해가 밝았지만, 세상은 아직 어둡습니다. 지난해 세밑까지 촛불을 들었을 때 시민들은 비로소 자신의 그림자라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촛불은 ‘여기 사람 있다’고 외치는 목소리였습니다. 암흑에 빠져 있던 민초들을 꺼내야 한다는 구조 신호였습니다. 새 세상에 대한 염원이었습니다. 새해에는 굳이 촛불을 켜지 않아도 대지와 광장의 목소리들이 곳곳에 퍼져나갔으면 합니다. 사진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2016년을 보내고 2017년을 맞은 새해 첫날 새벽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입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마르크스는 역사가 두 번 반복된다고 했다. 한번은 비극으로, 또 한번은 희극으로. 프랑스혁명의 공화국 정신을 무너뜨린 나폴레옹의 제정이 비극이라면 오직 삼촌의 명성 덕으로 권력을 차지한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등장은 희극으로 본 것이다. 4월혁명으로 탄생한 민주정부를 붕괴시키고 영구집권을 꿈꾼 박정희의 시대가 비극이었다면 아버지 덕에 집권한 박근혜 4년의 역사적 반동 역시 희극이다. 그러나 희극의 엑스트라가 되고 싶지 않았던 우리는 박 대통령이 우리를 호명했던 ‘국민’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했다. 광장으로, 광장으로 주말마다 몰려갔다. 그것만이 박 대통령이 지배했던 국가에서 벗어나는 길이었고, 뼛속 깊숙이 침윤했던 치욕을 털어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우리는 비로소 그곳에서 ‘자유로운 시민’이 되었다.

광장에는 동료 시민들 간 우애와 연대, 배려와 협동이 있었다. 가족, 친지, 동료와 혹은 홀로 나와서도 낯선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의견을 나누고 공감하고 춤췄다. 그곳에서는 여성, 청소년, 소수자들이 존중받았다. 중·고등학생도 시민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발언했다. 시민의 발견이었다. 광장은 정치적 각성의 장이었고 주말학교였으며 박근혜의 국가가 준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이었으며 따뜻한 공동체였다. 그런 의미에서 2016년은 최악의 시절이자 최고의 시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어리석음의 시대이자 지혜의 시대였다. 불신의 세기이자 믿음의 세기였다. 절망의 겨울이었지만 희망의 봄이기도 했다. 우리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았지만 결국 이렇게 한자리에 모였다. 

그러나 광장을 떠나면 우리는 다시 고립된 개인으로 돌아간다. 광장의 우의와 연대는 광장 밖의 경쟁과 이기심으로, 배려와 협동은 차별과 배제로 대체된다. 광장 밖은 정글이며 정글에서는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광장을 떠난 시민은 더 이상 시민이 아닌, 원자화된 개인으로 살아간다. 이는 한국인의 오래된 트라우마를 떠올린다. 4월혁명, 6월 민주항쟁, 2008년 촛불집회는 기성 체제의 복귀로 끝났다. 기득권 세력은 시민이 광장에 있는 동안은 숨죽이고 있지만 광장을 떠나는 순간 바로 고개를 든다. 시민이 광장을 떠나는 날은 바로 그들의 세상이 다시 열리는 날이다.

다시 한국 사회가 광장과 광장 밖으로 양분된다면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시민 떠난 텅 빈 광장이 우리의 일상이라면 그 빈자리는 선출되지 않은 재벌, 검찰, 국정원, 관료, 족벌언론, 기득권의 차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민의 이름을 도용해서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하거나 함부로 국익이라고 정의한 사익을 위해 자신들의 금력과 권력을 동원할 것이다. 우리는 시민의 부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악행이 저질러질 수 있는지 박근혜 정권을 통해 똑똑히 목격했다. 우리가 계속 투표하는 노예로, 유권자이기는 하지만 시민은 아닌 존재로 남아 있다면,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는 시인 김수영의 56년 전 한탄을 되풀이할 수 있다. 사실 지난 4년도 고립된 개인이 아무런 매개 없이 국가와 맞닥뜨린 결과였다. 개인과 국가 사이의 넓은 공간을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기들의 놀이터로 바꾸어 놓은 결과였다. 그런 사태를 다시 겪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어디서라도 시민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가정, 직장, 학교, 동네에서도 시민적 권리를 보유한 당당한 주인으로서 발언하고 협동하며 용기와 우애를 보여야 한다. 우리는 동창회, 향우회 활동은 열심히 해도 노동조합원으로, 시민단체 회원으로, 자원봉사자로, 정당의 당원으로 참여하는 일에는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노동자가 참여하는 노동조합, 시민 참여가 활성화된 시민단체, 당원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정당 활동은 이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기득권을 위축시킨다. 

잊지 말자. 불의한 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은 광장에서 서로 연결된 시민의 힘이었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이것이 꼭 물리적 광장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민적 공동체가 있다는 자각만 있다면, 그런 인식이 삶의 모든 측면에 스며든다면 우리는 우리의 주권을 지킬 수 있다. 박근혜 정권이 탄생하고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이 4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배경의 하나도 시민으로서의 주권적 자각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유독 박 대통령의 무능과 실수, 실패에 관대했다. 선의를 어느 정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옥으로 가는 길이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걸 알아야 했다. 시민의 참여와 감시 견제가 없는 어떤 권력도, 어떤 선의도 박근혜 정권처럼 될 수 있다. 정권 교체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 박근혜라는 인물이 대통령이 아닐 때도 한국 사회가 특별히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떠난다고 자동적으로 검찰과 방송이 바로 서고, 재벌 독점 경제가 사라지고 사회 양극화와 불평등이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정권 교체는 여러 번 있었지만 별로 나아지지 않았고, 어떤 경우는 더 나빠지기도 했다. 

생쥐나라가 있다. 검은 고양이로 구성된 정부를 선출했다. 고양이는 좋은 법을 통과시켰다. 물론 고양이에게 좋은 법이다. 쥐구멍이 고양이의 발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커야 한다는 것이었다. 생쥐의 삶은 힘들어졌다. 마침내 더 참을 수 없었던 생쥐들은 검은 고양이를 퇴출시키고 흰 고양이를 뽑았다. 흰 고양이는 네모난 쥐구멍을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네모난 쥐구멍은 둥근 쥐구멍의 두 배로 커졌고 생쥐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 그러자 참을 수 없었던 생쥐들은 다시 검은 고양이를 선출했다가 퇴진시키고 또다시 흰 고양이를 뽑았고, 심지어는 반은 희고 반은 검은 고양이를 뽑기도 했다(토미 더글러스의 1962년 캐나다 의회 연설).

이 우화는 국가가 시민을 대표하지 않는 한, 국가를 구성하는 제도들이 시민의 통제와 감시하에 있지 않는 한 정권 교체는 지배 엘리트의 교체로 끝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은 정권 교체를 넘어서는 일이다. 사실 새로운 세상이 뜻밖의 선물처럼 오는 법은 없다. 낡은 것들은 발이 없어서 스스로 물러설 줄 모르지만 손은 있어서 해가 바뀌어도 우리 발목을 잡고 버틸 줄 안다. 아마 새해는 낡은 것들과 대결하는 해가 될 것이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은 우리가 살고 싶어하는 나라가 아니다. 이게 중요하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바꾸는 것이다. 시민적 결의만 있다면 못할 게 없고 두려울 것도 없다. 광화문에서 보여준, 황소처럼 센 시민의 힘을 기억하자.     

그래도 만에 하나 흔들린다면 광화문의 밤을 밝힌 12월31일 촛불의 바다를 떠올리자. 그리고 각자의 가슴에 촛불을 켜두자. 그러면 우리는 후퇴 없는 행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시위를 떠난 화살이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어디 있는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세밑이다. 한 해를 마감하기 사흘 전에 찾은 광화문광장에 부는 바람은 찼다. 하지만 가을 끝자락에서 겨울로 진입하던 때 뜨겁게 달궈졌던 광장의 열기는 칼바람에도 식지 않았다. 작가 최인훈은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고,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두 공간의 어느 한쪽을 가두어버릴 때 인간은 살 수 없다”고 했다. 그가 옳았다. 광장의 촛불은 밀실의 어둠을 몰아냈다. 죽어가던 민주주의를 살려낸 광장은 위대했다. 1000만개의 촛불로, 질서 있는 분노로, 저항의 함성으로 가득 찼던 광장은 명예혁명의 산실이었다. 헌정파괴와 국기문란을 일삼은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 열차에 올려 태운 광장의 명령은 준엄하고도 단호했다. 세밑 광장은 앙시앵레짐(구체제)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작을 간구하는 외침으로 가득 차 있다. 70년간 쌓인 적폐를 걷어내고,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외침이다.

그런 광장이 막혔다면? 촛불시민은 역사의 패배자로 남고, 세상은 불의와 부패, 부정이 판치는 기득권 세력의 놀이터가 됐을 게 뻔하다. 끔찍한 일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최고의 통치자는 백성에게 자신의 존재만 알게 하고(太上下知有之), 최악의 통치자는 백성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其次侮之)”고 했다. 그가 옳았다. 연설문 작성과 관료 인선, 정책 결정을 비선 실세에게 맡긴 대통령은 무능·무지·무책임했다.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의 휴대전화 녹음파일을 복구한 검찰은 “(최순실과 박근혜의 통화 내용을) 10분만 들으면 ‘대통령이 어떻게 저 정도로 무능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독재자 아버지의 허상에 기대 권력욕만 키운 대통령은 비선 실세와 측근들에게조차 조롱의 대상이 됐다.

지난 10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7차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청와대 인근인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폭죽을 쏘아올리고 있다. 이준헌 기자

문화계 황태자로 불린 차은택은 국정조사 청문회에 나와 “최순실과 박 대통령은 동급으로, 공동정권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40년 지기 최순실은 “아직도 지(박근혜)가 공주인 줄 아나봐”라는 말을 자주 했다. 검찰도 국정농단 주범들의 관계를 ‘지시하는 가부장적 남편’(최순실), ‘아내’(박근혜), ‘사촌’(문고리 3인방)으로 명료하게 정리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대통령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고, 저 혼자만 똑똑하고 나머지는 다 병신들”(김종필 전 총리)로 여길 정도로 오만했다. 그런 최악의 통치자를 업신여기지 않을 시민이 있다면? 아마 ‘혼이 비정상’일 게다.

알제리의 식민해방투쟁가 프란츠 파농은 “어리석은 권력은 민중의 목소리를 거부하다가 끝내 자멸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가 옳았다. 국가권력을 사유화한 대통령은 친일·독재를 미화한 국정 역사교과서, 굴욕적인 한·일 위안부 합의, 동북아 신냉전을 불러온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남북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 폐쇄 등을 일방적으로 강행했다.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게이트의 주범이면서도 자신의 책임은 털끝만치도 인정하지 않았다. 간교한 정치적 술수로 ‘막판 뒤집기’만을 노리다 자멸의 길로 들어섰다. 그런 대통령을 시민들은 ‘죄의식 없는 확신범’으로 여길 뿐이다.

영국의 신학자 스티븐 체리는 “용서는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옆구리에 깊숙이 박힌 창을 내 손으로 뽑아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게 용서”라고 했다. 그가 옳았다. 세월호 침몰 당일 304명의 고귀한 생명이 수장될 때 올림머리를 하느라 90분을 허비한 대통령을 용서할 수 있을까. 구의역 19살 노동자와 백남기 농민이 죽어갈 때, 청년들이 ‘헬조선’을 외치며 신음할 때, 서민들이 생활고로 절망할 때 청와대 관저에서 미용주사를 맞고 ‘혼밥’을 먹으며 TV를 보던 대통령을 용서할 수 있을까.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탄핵심판 답변서에 “최순실 국정 관여 비율은 1% 미만” “세월호 참사 때 청와대에서 정상 근무” “측근비리가 발생한 역대 대통령도 탄핵 대상”이란 막가파식 논리를 편 대통령을 용서할 수 있을까. 그런 대통령을 옆구리에 깊숙이 박힌 창을 뽑아내는 고통을 견디며 용서할 시민이 있다면? 아마 ‘박사모’ 회원일 게다.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은 해가 바뀌어도 잊지 못할 이름들이 있다. 지금은 우리 곁에 없는 이들의 이름은 ‘1분 소등’ 시위 때 광장에 울려 퍼졌다. “최강서, 이운남, 이호일. 박근혜 당선 직후 목숨을 끊은 노동자들의 이름입니다. 고창석, 이영숙, 권혁규, 박영인, 남현철, 허다윤, 조은화, 양승진, 권재근. 세월호에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분들의 이름입니다. 김관홍, 최종범, 염호석, 한광호, 송국현, 백남기, 김주영. 박근혜 정권에서 희생된 분들의 이름입니다.” 촛불항쟁의 길을 터준 이들의 이름은 산산이 부서지고, 허공에 흩어졌어도 시민들은 설움에 겹도록 부르고 또 부를 것이다. 잊지 못할, 결코 잊혀져서는 안될 이름이기에….

박구재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최순실 국정농단에서 비롯한 대통령 탄핵 정국이 촛불에서 횃불로 옮겨붙었다. 부문별, 계열별 전문가 집단이나 협회, 단체들의 자잘한 이해관계를 넘어서 대한민국의 기틀을 혁신하려는 이 도도한 흐름은 국민·시민 주체가 만들어내는 촛불공론장이다. 그렇다고 해서 국민이나 시민이라 불리는 주체들이 단일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따로따로 존재하지만 서로 강고하게 연대한 개별주체들이다. 이렇듯 파편화한 개인들을 엮어주는 공론장은 소셜미디어로 무장한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일궈내고 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거대한 퍼포먼스와 섬세한 몸짓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내는 시민운동가와 문화예술인들의 역할도 매우 크다.

탄핵안 가결 이후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리는 동안 변혁의 에너지를 지켜내는 일은 100만 촛불의 몫으로만 남겨진 것은 아니다. 그 힘을 연결해주는 매개자들의 지속적인 대화와 협업이 더욱 중요한 시점이다. 한겨울 추위가 강해질수록 현장을 지키는 문화예술인들의 강단있는 활동이 도드라져 보인다. 단 한 명의 입건 사례 없이 평화롭게 이어온 촛불집회는 공연을 매개로 한 정서적 공감의 장이다. 그것은 장르와 세대를 넘어 정신적 가치를 공유하게 만드는 예술의 역할을 재확인시켜준다. 민중가요와 대중가요가 공존하는 촛불문화제는 투쟁의 장을 축제의 장으로 확장시켜 놓고 있다.

문화예술인들이 12일 서울 대치동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검 사무실 앞에서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과 관련해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을 특검에 고발하기에 앞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여기에 더해서 시각예술가들의 다양한 표현물들이 집회장을 풍요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이들은 텍스트 작업은 물론 걸개그림과 포스터, 깃발, 퍼포먼스, 스티커, 조형물에 이르기까지 풍자와 비판정신 가득한 작품들로 광화문광장을 예술의 거리로 만들고 있다. 100만의 촛불파도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퍼포먼스여서 예술적 이벤트로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최근에는 광장의 갤러리 ‘궁핍현대미술광장’을 열고 개관전 ‘내가 왜’를 시작했다. 촛불이 만들어내는 감동의 공론장을 기록하고 그것을 재해석하고 확산하는 예술적 소통공간이다.

이제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마음은 국가위기에 대한 정서적 공감을 넘어 이성적인 합의로 진화하고 있다. 이번 일의 초기부터 광장에 자리 잡고 광화문텐트촌을 꾸리고 있는 예술인들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고 있다. 집회 현장의 공연 및 전시 프로그램을 통하여 광장의 에너지를 집결하는 한편, 그 너머 새로운 사회를 열망하는 문화예술 개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언론 보도가 아무래도 비리의 폭로에 주력하느라 차분한 성찰과 대안 논의가 부족하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들의 광장토론은 성숙한 시민사회의 힘을 실감하게 한다.

이번 국정농단 사건이 특히 문화체육관광부의 정책과 사업 분야에 집중해 있다는 점에서 문화예술인들이 느끼는 자괴감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섰다. 예술위원회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가 돌았다. 민관협치 개념으로 출범했던 예술위원회는 오작동을 연발했다. 공공기관의 인사 문제 또한 무방비로 농단의 무대로 전락했으며, 문화융성의 이름으로 깨알 같은 사익편취가 만발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는 동안 문체부의 행정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다. 행정적 과실 유무 여부를 떠나서 공직자 윤리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참담하기 그지없으니, 이제 문화예술의 영역에서도 대한민국의 기틀을 다시 논의할 때가 왔다.

국가단위 행정을 지자체단위 행정으로 세분화·지역화하고, 아카데미와 시장과 행정이 주도하는 제도예술과 그 바깥 비제도예술의 공존과 균형을 맞추며, 예술위원회를 되살려 민관협치를 복원하고, 기관장 인선 관련 전문성 강화 및 국정농단의 비리 관련 부역행위에 관한 행정적·윤리적 책임을 묻는 일 등 무수한 사안들이 있다. 나아가 국정 전반에서 문화예술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에 대해 매우 근본적인 재구조화 논의가 절실하다. 지금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최순실은 현 정권의 비선 실세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도처에 똬리 틀고 있는 모순덩어리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김준기 | 제주도립미술관장·미술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일반 칼럼 > 문화와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의  (0) 2017.01.12
듣는 어른이 되기 위하여  (0) 2017.01.05
촛불공론장과 문화예술  (0) 2016.12.27
경주 폐사지에서 보낸 순간  (0) 2016.12.22
하지 않은 일  (0) 2016.12.15
문화정치 1번지 제주와 성북구  (0) 2016.11.29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지난 12일 여야 3당은 내년 1월부터 6개월간 국회 개헌특위를 운영키로 합의했다. 위원은 새누리당 8명, 민주당 7명, 국민의당 2명, 비교섭단체인 정의당 1명 등 총 18명으로 구성하고, 위원장은 새누리당이 맡기로 했다.

탄핵 시국에서 개헌 추진 자체에 대한 논란도 있고 개헌 내용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분출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떠한 방향으로 개헌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에 앞서 개헌 논의를 국회에만 맡겨둬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개헌의 방향에 대한 여야 간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고, 같은 당 안에서도 생각의 차이가 있는 상황에서 개헌안 마련을 의석수에 비례한 국회 특위에 맡길 경우 과연 가능할까. 국회는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선거구획정조차 입장 차이로 법정시한을 넘겨 처리했다. 선거구를 넘어서서 권력구조 변동을 다룰 수밖에 없는 헌법개정안을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대안으로 헌법개정 시민의회를 제안한다. 아일랜드는 2012년 12월 헌법 8개 조항을 검토하기 위한 ‘헌법회의’를 1년4개월 동안 운영한 바 있다. 헌법회의는 의원 33명과 성, 연령, 지역을 감안해 추첨으로 선발된 시민 66명, 임명직 의장 1명 등 100명으로 구성됐다. 헌법회의는 전문가 집단과 8주간 회합 뒤 각 참가자들의 의견 개진, 지역별 회합, 인터넷으로 실시간 중계된 총회, 건의 내용 제시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와 온타리오주도 선거법 개정을 위해 전원 추첨으로 구성한 시민총회를 1년여 동안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우리의 헌법개정 시민의회는 국회가 운영주체가 되며 성, 연령, 지역을 감안한 추첨을 통해 뽑힌 시민으로 구성한다. 국회 의석이 있는 정당은 자체 헌법개정안을 준비해 시민의회에 제출하고, 시민사회도 일정수 이상의 국민 서명을 받아 개정안을 청원할 수 있다. 개정안을 제출 또는 청원한 정당 및 시민대표들은 시민의회에 출석해 당위성을 설명한다. 시민의회는 헌법 및 각 분야 전문가 의견을 경청한다. 인터넷 홈페이지, 각 시민의원들 등을 통해 국민 여론도 수렴한다. 최소 6개월 운영 후 시민의회가 최종 개정안을 마련하면 국회 본회의에 바로 상정해 수정 없이 찬반 투표로 처리하거나, 국회 헌법개정특위 차원에서 논의해 본회의에 상정하면 된다. 후자의 경우 국회의원들이 상정된 안에 거부감이 있다고 하더라도 시민의회 결정을 전적으로 무시하기 어려울 것이다. 본회의에서 통과되면 국민투표에 부친다.

촛불로 표출된 우리 시민들의 시민혁명에 경외감을 쏟아내면서도 헌법개정은 국회에서 정당들끼리 알아서 하겠다고 하는 것은 촛불 민심에 대한 배신이다. 그럴 경우 촛불이 대통령을 넘어서 국회, 정당으로 향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말로만 깨어 있는 시민을 찬양할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제1조의 정신에도 부합하는 헌법개정 시민의회를 제도화할 것을 정치권에 촉구한다.

이지문 | 연세대 SSK 연구교수·정치학 박사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지난 토요일 전국적으로 70만명이 모인 9차 주말 촛불집회에서는 ‘대통령 퇴진’과 함께 헌법재판소의 신속한 심판 진행을 통한 ‘조기 탄핵’을 외치는 국민들의 함성이 높았다.

헌재의 탄핵결정이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는 무수히 많다. 첫째, 대통령의 ‘즉각 퇴진’은 대다수 국민들의 일관된 민심이다. 국회의 탄핵소추 직전에 ‘국회가 여야 합의로 퇴진 일정을 정해주면 거기에 따르겠다’는 대통령의 말에 일부 정치권은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국민들은 미동도 없었다. 대다수 국민들은 대통령 스스로의 하야가 됐건, 헌재에 의한 파면결정이 됐건 박근혜 대통령과는 함께할 수 없음을 일관되게 밝혀오고 있는 것이다. 헌재가 행사하는 헌법재판권도 헌법 제1조의 국민주권주의 원리에 의해 주권자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이다. 헌법을 유린하고 민주헌정을 중단시킨 대통령에 대한 ‘즉각 퇴진’ 요구는 즉흥적이고 가변적인 여론이 아니지 않은가. 주권자 국민들이 상당기간 일관되고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민심이다. 헌재에서는 이러한 민심을 잘 살펴 신속한 탄핵결정을 내려야 한다.

둘째, 국익을 위해서도 신속한 탄핵결정이 꼭 필요하다. 대통령 권한대행에 의한 국정수행은 임시적이고 비정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안으로는 경기 침체로 경제위기가 도래하고 있고 밖으로는 미·중·러의 대립과 북핵 문제로 여러 외교·국방상의 현안들이 쌓여가고 있다. 새 대통령을 뽑아 적극적인 국정수행으로 이러한 국내외의 위기들을 돌파해 나가야 하는 절박한 시점에 비정상적인 권한대행 체제로 아까운 시간들을 보내서야 되겠는가.

지난 22일에 헌재에선 제1차 준비절차기일이 열렸다. 3명의 수명 헌법재판관들은 5번이나 ‘신속한 진행’을 강조했다고 한다. 문제는 대통령 측의 태도다. 대리인단을 통해 시간 끌기 전략을 구사하고 있음이 역력하다. 답변서에서 13가지 탄핵소추 사유 전부에 대해 부인하고 철저한 사실조사를 요구했다고 한다. 탄핵심판을 사실조사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형사재판처럼 끌고 가서 시간을 벌겠다는 의도가 읽힌다. 끝까지 민심과 국익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탄핵심판은 형사재판과 다르다. 헌법재판의 하나이면서 ‘파면’을 통해 일종의 징계책임을 묻는 탄핵심판은 징역형 등의 형사처벌을 통해 형사책임을 묻는 형사재판과 그 심판절차에 있어서도 같을 수 없다. 징역과 같은 형사처벌을 내리는 형사재판에서는 징역 몇 년으로 할 것인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라도 철저한 사실조사를 통해 합리적 의심을 넘어서는 엄격한 혐의 입증이 필요하지만, ‘파면’이라는 징계책임을 묻는 탄핵심판에서는 그 정도로 철저한 사실조사와 혐의 입증이 필요 없다. 개략적인 사실조사를 통해 13가지 중 어느 하나의 탄핵소추 사유에서라도 대통령이라는 막중한 지위에서 국민이 선거를 통해 부여한 신임을 박탈할 정도의 위헌 혹은 위법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하면, 바로 파면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박 대통령의 형사상 유무죄를 가리는 철저한 사실조사는 탄핵인용결정으로 대통령이 파면된다면, 그 후 기소돼 형사재판에 넘겨졌을 때 하면 된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재판을 하고, 형사재판은 법원이 하면 되는 것이다.

헌재의 탄핵결정은 1월 말 박한철 소장의 퇴임 전까지 내려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권한대행에게는 헌재소장이나 헌법재판관과 같은 중요한 인사를 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1월 말 박 소장 퇴임, 3월 중순 이정미 재판관 퇴임 후의 후임자 선출은 당분간 어렵다고 봐야 한다. 9명 헌법재판관들이 모두 있을 때 결정이 내려져야 한다. 서두르면 충분히 가능하다.

특검도 대통령에 대한 대면조사를 서둘러야 한다. 불응하면 진실규명을 위해 강제수사도 가능하다. 헌법 84조가 대통령의 원활한 직무수행을 위해 재직 중인 대통령에게 부여한 것은 ‘기소’ 면제의 특권이다. 기소 이전의 수사단계에서 특검이 ‘실체적 진실규명’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얼마든지 영장을 신청해 강제수사에 나설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국회의 탄핵소추의결로 권한행사가 정지된 대통령은 직무수행을 하고 있지 않으므로 형사상 특권이 적용되어야 할 이유가 더더욱 없다. 대통령으로서의 직무수행 자체가 없는데 원활한 직무수행을 위한 형사상 특권을 보장해주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특검의 수사 결과는 헌재의 파면결정에 추가적인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법언이 있다. 지금 국민들이 헌재를 향해 외치고 있다. ‘지체된 탄핵결정은 정의가 아니다’라고 말이다.

임지봉 |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20세기 초 미국 노동운동의 지도자이자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던 유진 뎁스는 미국인들을 향해 말했다. “나는 설령 그럴 능력이 있더라도 여러분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내가 여러분을 그곳으로 이끌 수 있다면 다른 누군가는 여러분을 그곳에서 끌고 나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뎁스가 살아서 촛불집회를 본다면 자신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느낄 법도 하다. 그만큼 시민들은 특정한 정치 지도자나 정당이 감히 덤벼들지 못할 강력한 정국 주도권을 행사함으로써 국회가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하게 했다. 아직 확고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상황도 극히 유동적이지만, 주권자가 직접 나서서 기성 정치권이 나라의 새 기틀을 세우도록 강제하고 있는 현실을 혁명으로 부르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혁명이라 부르는 사건은 4·19혁명뿐이다. 물론 이 용어에 부정적인 이들도 아직 많고, 현행 헌법 전문도 ‘4·19 민주이념’이라는 표현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4·19는 결코 ‘의거’나 ‘봉기’에 머물지 않은 위대한 ‘미완의 혁명’이며, 1980년 5월 광주항쟁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역사적 경험을 거치며 끊임없이 전진하고 있다. 학자들은 뚜렷한 이념, 조직된 주체, 폭력적 권력 교체 등의 기준에 비춰 촛불집회에 혁명의 개념 적용을 꺼릴지 모른다. 그러나 이론은 현실을 뒤따라오는 법이다. 이화여대생의 끈질긴 농성 투쟁이 운동권의 관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음을 되돌아보라. 머지않을 미래에 정치적 변화가 고비를 넘는 순간, 이 땅이 새로운 정치이론의 탄생지가 될 수도 있다.

시인 김수영(1921~1968)은 4월혁명을 열렬히 지지하면서도 냉정을 잃지 않았다. 4·19가 터진 다음달에 그는 “물이 흘러가는 달이 솟아나는/ 평범한 대자연의 법칙을 본받아/ 어리석을 만치 소박하게 성취한”(‘기도’) 우리의 혁명을 끝까지 이룩하자고 노래했다. 그처럼 소박한 성취라면 그저 자연발생적인 봉기로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인은 4월의 혁명성을 정확히 꿰뚫어보는 동시에, 민중 역량의 취약함과 혁명을 훼방 놓을 세력의 건재함을 직시했다. 그런 복합적 인식 위에서 “혁명의 육법전서는 <혁명>밖에는 없으니까”(‘육법전서와 혁명’)라고 단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머지않아 헌법재판소가 결정을 내리면 이후 60일 안에 치러질 대선에서 새 대통령이 당선과 동시에 취임한다. 숨 가쁜 정치 일정 속에 시민혁명의 방향타를 주권자로부터 가로채려는 술수와 공작이 더 거세질 것이며, 야당들의 동요와 과욕이 부른 실책도 이어질 것이다. 그런 방해물들에 역사의 물길이 막히지 않도록 시민들은 대선 이전에라도 결선투표제 도입 등 선거제도를 바꾸고 검찰, 언론, 재벌 개혁을 서두르라고 외치는 중이다. 또한 권력 분점에 눈이 먼 졸속 개헌이 아닌 긴 안목의 차분한 개헌 논의를 요구하고 있다.

정치권이 민심에 충실한지를 가늠할 시금석 하나는 김수영의 깊은 인식과 한 몸인 살아 있는 언어 감각을 보여주느냐는 것이다. 박근혜·최순실의 헌정파괴에는 명백히 사법적 처벌 대상인 ‘공범’이 많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공범에 준하는 자들을 ‘부역자’라고 하는 일은 조심스럽다. 한국전쟁기의 참혹한 대립을 떠올리게 하는 이 단어는 우리 편이 아니면 곧 적이요, 적은 처단 대상일 뿐이라는 흑백논리에 오염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어느 대선주자가 말한 ‘국가 대청소’는 성급한 어휘 선택이며, 촛불집회의 자유발언에서 시민들이 거듭 강조한 ‘우리 안의 최순실’에 대한 성찰과 동떨어진 느낌이 짙다. 퇴행을 거듭해온 우리 사회를 갱신하려면 단지 선명한 구호가 아닌 자기갱신의 비전을 담은 창조적 언어, 혁명의 언어가 필요하다.

급박한 변혁의 시기는 언어를 둘러싼 싸움의 나날이기도 하다. 농단, 탄핵, 인용 등 어려운 한자어가 빈번하게 쓰이는 시국에 ‘키친 캐비닛’ 같은 낯선 외국어가 오용되기도 한다. 세월호 희생자 중 아직 돌아오지 못한 학생의 어머니들이 9명의 실종자를 ‘미수습자’로 바꿔 부르게 한 사연을 정치권은 깊이 되새겨야 한다. 광장 안팎을 가득 메우는 자신의 실천이 혁명인지 아닌지에 별로 관심이 없는 촛불시민의 당당한 자세야말로 새로운 언어와 정치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김명환 서울대 교수·영문학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국내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아르바이트·단시간 일자리 등은 청년층으로 채워진 지 오래다. 낮은 임금, 낮은 고용의 질, 낮은 삶의 질 등은 청년층을 지칭하는 사회적 용어가 돼 버렸다. 소득양극화와 취업난, 주거난에 시달리는 청년층은 ‘N포 세대’를 넘어 ‘부모세대보다 가난한 첫 세대’가 될 것이란 암울한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통계청이 지난 21일 내놓은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에는 청년세대가 ‘헬조선’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을 외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지난해 30세 미만 저소득 청년 가구(하위 20%)의 한 달 소득은 80만7000원으로 집계됐다. 취업난으로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내몰린 탓이다. 한때 저소득 청년층을 일컫던 ‘88만원 세대’가 ‘77만원 세대’로 대체될 시점이 머지않은 것이다.

청년 가구의 소득불평등도 심화돼 최상위 20%와 최하위 20%의 연평균 소득 격차는 9.56배에 달했다. 가계빚도 2년 새 900만원 넘게 늘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20대 청년층 2명 중 1명꼴로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끊겼다고 체념하고 있다는 점이다.

청년 가구의 경제난은 출산율 하락과 맞물리면서 성장 잠재력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도 정부는 실효성 있는 청년고용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뒷짐만 지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고용률 70% 정책은 시간제 일자리를 늘리는 것으로 변질됐다. 청년고용할당제는 공공기관에서 민간기업으로 확대되지 않아 ‘반쪽 대책’에 그쳤다. 내년 최저임금을 고작 7.3% 오른 시급 6470원으로 결정한 정부는 미취업 청년들에게 최장 6개월간 일정액을 지급하는 서울시와 성남시의 청년수당·배당 사업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무능한 정부가 보인 옹졸함의 극치다.

일본 정부는 지난 20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기본급·상여금·수당 차별을 없애는 내용의 가이드라인을 내놨다. 일본 정부는 비정규직 임금을 정규직의 80% 수준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라고 한다. 비정규직의 저임금 문제를 해결해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삼으려는 일본 정부의 노력이 부러울 따름이다. 청년세대가 꿈을 잃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나라의 미래는 기대할 게 없다. 청년세대가 광장에서 촛불을 든 것은 불평등한 사회를 바꿔보려는 간절함 때문이란 것을 정부와 정치권은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시인 김해자는 미발표 근작시 ‘여기가 광화문이다’에서 “대통령 하나 갈아치우자고 우리는 여기에 모이지 않았다”고 일갈한다. 이것은 지금 주말마다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오는 수많은 시민들의 공통적인 심경일 것이다. 우리가 하던 일을 멈추고 “빛이 사방을 덮어 세상 곳곳으로 퍼진다는 광화문”으로 모이는 까닭은 명백하다. 세습권력들과 그들에게 빌붙어 충성해온 직업정치인, 관료, 언론, 각종 전문가들로 구성된 지배체제를 탄핵하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연민과 분배와 정의가 얼어붙은 사이/ 농촌은 해체되고 청년들은 미래를 빼앗기고 노동자들의 삶은 망가져버린” 나라를 다시 일으켜 “만인이 만인에게 적이 되고 분노가 되는 세상이 아니라/ 만인이 만인에게 친구가 되고 위안이 되는 세상을” 열자고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경이롭게도, 토요일의 광화문 풍경은 우리가 평소에 안다고 생각했던 그 한국 사회가 아니다. 거기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배려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들로 충만한 공간이다. 같은 목적을 갖고 나왔기 때문에 그곳이 환대의 장소가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엄청난 인파로 발 디딜 틈도 없는 공간 속에서 사람들이 서로의 안전을 배려하여 몹시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뭐든지 기꺼이 남에게 양보하려는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여기가 바로 어제까지 모래알처럼 흩어져 각자도생에 열중하던 사람들이 살던 곳이 맞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뿐만 아니다. 시위가 열리는 광장에는 개인 돈을 들여 마련한 촛불이나 핫팩을 참가자들에게 열심히 나눠주는 이들이 있고, 자기 장사는 접고 차와 음식과 떡볶이를 무료로 나눠주는 소상인들도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젊은 자원봉사자들은 여기저기서 임시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팻말을 들고 추위 속에서 몇 시간이고 서 있다.

놀라운 이야기는 이 밖에도 많다. 시위가 있는 날은, 가령 청와대 근처의 도로는 경찰차들이 철벽처럼 길을 막아놓고 있는 탓에 차량 통행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 동네, 특히 세검정 일대의 주민들은 시위에 참가하려면 걸어서 갈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그 중간에 자하문터널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몇몇 인근 주민들이 자신들의 승용차를 가지고 나와서 터널 구간을 무료로 태워주는 일종의 셔틀을 운행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내놓고 시위에 참가하고, 참가를 독려하는 이런 시민들의 이야기들을 들을수록 우리가 결코 ‘이상한’ 대통령 하나 때문에 광화문에 모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실감난다. 사람들의 열망은, 말할 것도 없이, 이제는 썩어문드러진 구체제를 제대로 청산하고 정말로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세상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 세상은 어렵고 복잡한 말로 묘사할 필요가 없다. 주말의 광장에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삶에 대한 비전과 지혜가 놀랄 만큼 선명하게, 풍부하게, 강력하게 분출되고 있다. 예를 들어 무대 위에 오른 어떤 밴드 가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마을운동이 아니라 옛마을운동”이라고 노래 불렀다. 그 노래의 뜻은 일찍이 박정희 정권이 앞장서서 유포시킨 ‘새마을정신’이란 실은 황금물신주의를 조장하고 (농촌)공동체를 와해시킨 원흉이었고, 따라서 지금은 사람들이 정을 나누며 서로 돕고 살았던 ‘옛마을’의 정신을 되살리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나라 정치인들이 ‘밥값을 못하고’ ‘서비스 정신’이 몹시 부족하다고 신랄하게 꼬집고, “서비스를 제대로 못하는 업체는 갈아치우는 게 당연하다”고 읊조렸다.

주말 광화문광장에서 듣는 발언은 실로 감동적인 게 한둘이 아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나라를 또박또박 설명하는 어린 학생들과 시골에서 온 할머니, 늙은 농민과 노동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 언급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등등. 너무나 수준 높고 품위 있는 언어가 표출되고 있는 이런 장면 앞에서 새삼 느끼는 것은 지금과 같은 형태의 대의 민주주의 정치는 이제 더는 다수 민중의 민주적 열망과 지혜를 담는 그릇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지금 광화문을 비롯해서 전국의 광장과 거리로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주장하는 게 있다. 즉, 나라의 주권은 ‘우리’에게 있지, 일시적으로 권력을 위임받은 자들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1987년 6월이나 2008년 광우병 파동 때의 시위 장면에 비해서 한결 더 구체화된 민주주의적 요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그 결정의 주체는 민중 자신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게 된 것이다.

지금 광장에서 울려나오는 구호 가운데는 쌀값문제, 노동탄압, 인권 및 환경문제 등등 개별적 이슈에 관련된 것들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대통령의 탄핵문제에 집중돼 있으며 그와 동시에 재벌문제 척결을 외치는 목소리가 크게 공감을 얻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제 대다수 시민들 사이에서는 오늘의 한국 사회가 ‘헬조선’으로 돼버린 것은 무엇보다 소위 정경유착, 즉 정치가 금권에 의해서 유린·농락되어왔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상식이 되었음을 뜻하는 게 아닌가? 정치뿐만이 아니다. 나라의 흥망을 좌우하는 윤리적 기초를 수호해야 할 언론, 학계, 사법부, 그리고 검찰이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했는지 이제 대다수 시민들은, 아이들까지도, 뼛속 깊이 알고 있다.

2016년 겨울, 우리의 최대 과제는 민주주의다운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는 일임이 분명하다. 시위나 봉기는 결국 일시적이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제도나 법을 만들어 민중의 민주적 열망이 지속적인 생명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제도와 법을 만들거나 개정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시민들 자신이어야 하며, 따라서 ‘시민의회’든 ‘시민주권회의’를 통해서든 ‘시민권력’의 힘으로 나라의 틀을 새로 짜는 것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게 지금 광장을 밝히는 촛불의 의미를 옳게 이해하는 방식일 것이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대한민국 최고 금수저인 박근혜 대통령과 재벌은 닮은 점이 많다. 무엇보다 한 줌도 안되는 지분으로 권력을 향유하고 있다. 지지율 4%에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로 직무정지 상태지만 박 대통령은 여전히 새누리당과 정치권을 쥐락펴락한다. 이정현 같은 친박계 의원들을 내세워 새누리당을 장악하고, 새누리당을 통해 입법·행정·사법부 관료조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이다. 재벌 총수들은 더 심하다. 지분율이 1%도 안되지만 순환출자를 이용해 그룹 계열사 전체를 지배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에버랜드 대주주로 등극한 뒤 에버랜드 보유 지분으로 삼성생명과 삼성전자 등을 지배했다.

형제자매와 연을 끊고 산다는 점도 비슷하다. 박 대통령 동생 지만씨는 “피보다 진한 물이 있다”는 말로 누나와의 관계를 표현했다. ‘진한 물’은 최순실씨다. 박 대통령 동생 근령씨의 남편 신동욱씨도 “아내가 해야 할 일들을 최순실씨가 했다. 최씨로 인해 형제간의 관계가 나빠졌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 삼남매는 어머니 고 육영수 여사가 세운 육영재단의 소유권을 놓고 다툼을 벌였다. 박 대통령이 처음 육영재단 이사장을 맡았던 1982년에는 최태민씨를 고문으로 임명했다는 이유로 근령·지만씨가 반기를 들었다. 이후 재단 이사장에 취임한 근령씨는 동생 지만씨와의 송사로 조용한 날이 없었다. 재벌 2·3세들도 유산 상속 등을 놓고 암투와 소송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삼성가 이맹희·건희 형제의 분쟁, 현대가 정몽구·몽헌 형제의 ‘왕자의 난’이 과거 일이라면 효성(조현준·현문), 금호(박삼구·찬구), 롯데(신동주·동빈)의 골육상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유산 다툼은 그 재산이 이들의 노력으로 형성되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6일 오전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최순실 게이트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두한 재벌 총수들의 모습을 TV를 통해 보고 있다. 이석우 기자

배신을 혐오하는 것도 박 대통령과 재벌의 공통점이다. 이들은 조폭 우두머리처럼 부하들에게 맹목적인 의리와 복종을 강요한다. 윤리나 도덕, 개인의 가치 판단이 끼어들지 못하게 한다.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차명 비자금 등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를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현대차는 승객 안전을 위협하는 에어백 센서 결함과 세타2 엔진 불량 문제를 경향신문 등에 제보한 김모 부장을 해고했다. 한화는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와 정권과 재벌의 유착을 비판한 주진형 전 한화증권 사장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다. 박 대통령이 유승민 의원을 내치고, 친박이 비박을 욕하는 것과 판박이다. 배신을 혐오하는 것은 자신이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배신자를 응징하는 것은 그만큼 배신이 두렵기 때문이다. 배신자가 늘면 이들이 쌓은 성은 저절로 무너진다.

박 대통령은 검찰에 당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 감옥에 갈 가능성이 높다. 박 대통령은 3개월 전만 해도 우병우 전 민정수석을 통해 검찰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생각했다. 국정농단 사건에 검찰 수사가 본격화하자 최고의 특수부 검사라는 평판을 들었던 최재경 전 인천지검장을 민정수석으로 앉혔다. 그러나 결국 김수남 검찰총장 지시에 따라 움직인 40여명의 검사들에게 탈탈 털렸다. 막강한 재벌 총수들도 검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경우가 있다. 평소 다양한 방법으로 검찰 수뇌부를 관리하고 수사가 시작되면 수십억원의 수임료를 줘가며 검사 출신 전관 변호사를 고용한다. 하지만 검사 비리 문제 같은 것으로 검찰이 코너에 몰린 상황이라면 도움이 안된다. 검찰은 재벌의 뒤통수를 치면서 한순간에 정의의 사도로 변신하는 신공을 발휘한다. 최태원(SK)·김승연(한화)·이재현(CJ) 회장이 그렇게 해서 감옥에 가게 됐다는 시각이 있다. 작년에는 포스코가, 올해는 롯데가 그런 이유로 검찰에 당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유죄 판결을 받더라도 전직 대통령은 화합을 명분으로, 재벌 총수는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이유로 사면을 받는다. 

일상의 자유로움에서 박 대통령과 재벌을 능가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없다. 숙소에 누워 있어도 알아서 보고가 올라오고,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지시가 내려간다. 없는 듯하면서도 있고, 있는 듯하지만 확인할 수 없다. 이들은 오로지 질문을 할 뿐 답변은 하지 않는다. 누가 적어준 것을 그대로 읽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말을 하면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수천만 시민이 TV로 바라보고 있는데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한다. 이런 소소한 것까지 박 대통령과 재벌은 닮았다. 논어에 ‘인지장사 기언야선(人之將死 其言也善)’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죽음을 앞두면 선해진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이들은 나이를 먹어도 늙지 않고 치명적인 병에 걸려도 죽지 않는다. 스스로는 개과천선하기 어렵다. 바로 이것이 추운 겨울에도 시민들이 광장에서 촛불을 놓지 못하는 이유이다.

오창민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광화문광장에 시민이 촛불을 들고 모였다. 시민은 당장에 대통령의 퇴진과 탄핵을 주장하나, 그 발언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바른 정치’에 대한 갈망이다. 안전한 대한민국, 공명정대한 대한민국, 만인이 법과 규범 앞에 평등한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은 대의 민주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니 광장에 나온 시민의 바람과 주장은 정치인을 향하는 것이다. 사실, 정치인들이 제각각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했다면 시민이 이 추운 겨울에 광장에 나와 목이 쉬어라 구호를 외칠 일도 없다. 그러나 지금의 이 난국을 그저 정치인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정치에 무관심했던, 나의 영역이 아니라 여겼던 내 탓은 아닌지 돌아봄 직도 하다.

 

일상이 정치이다. 내가 어떤 밥을 먹고 어떤 직장을 다니며 어떤 방송을 보는가 하는 문제가 다 정치와 관련이 있다. 연애와 결혼 그리고 출산의 문제도 정치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심지어 내가 숨 쉬는 공기의 질도 정치의 일이다. 우리 삶 그 자체가 정치이다. 그러나 대통령과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까지 뽑았으니 정치는 그들에게 맡기고 평소엔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정치는 정치인의 것’이라는 의식에서 정치인이 시민의 의지를 무시하고 제 잇속만 챙기는 기회가 만들어진다.

 

제7차 촛불집회가 열린 지난 1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높이 8.5m의 촛불 트리가 세워졌다. 서성일 기자

 

정치인의 권력은 본원적인 것이 아니다. 시민의 권력을 맡아 대행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여러 시민의 권력을 맡으니 정치인의 권력이 강해 보이며, 이 부분에서 착각들이 발생한다. 시민의 힘으로 정치인을 움직이게 하려면 정치인에게 주어진 권력이 애초 어디에서 온 것인지 되새겨줄 필요가 있다. 그 한 방법이 정치후원금이다.

 

정치에는 돈이 든다. 국가가 지원해주는 것 외에도 많이 필요하다. 누구에게 어떤 돈을 받는가에 따라 정치의 방향은 달라진다. 최악의 경우가 재벌의 검은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짜는 없다. 받았으면 그에 대응하는 그 무엇을 챙겨주게 되어 있다. 그러니 정치권력을 감시하는 방법으로 정치후원금이 유용하다. 정치후원금은 ‘내가 당신에게 돈을 냈으니 당신의 정치활동은 이제 나의 감시 안에 있다’는 신호로 작동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낱낱은 작다 하여도 이를 모으면 크고 강해지는 게 자연의 이치이다. 권력이 그렇다. 시민 낱낱의 권력은 작으나 이를 모아 쥔 정치인의 권력은 크고 강하다. 따라서 감시의 눈도 그만큼 크고 강한 것으로 붙여주어야 한다. 정치후원금은 금액이 많을 필요가 없다. 외려 적은 액수로 수많은 사람들이 후원하였을 때에 감시의 눈이 더 커질 수 있다. 10만원 이하이면 전액 세액공제가 되게 해놓은 것이 감시의 눈을 크게 만들자는 뜻일 것이다. 신용카드에 적립된 포인트로도 정치후원금을 낼 수 있다.

 

촛불은 감시의 불이기도 하다. 각자 시민이 갖고 있는 불은 작으나 광장에 모이면 어마어마한 불덩이가 될 수 있음을 우리는 확인했다. 광장에서 일상으로 돌아갈 때에 정치후원금이란 작은 촛불을 그들 앞에 밝혀두면 좋지 않을까 싶다.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전국에서 넘실대는 거대한 저항행동을 일단 ‘2016 촛불대항쟁’이라고 불러본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었던 한국을 경이로운 눈으로 다시 보게 한 것이 촛불대항쟁이었다. 바로 이 촛불시민이 야당은 야당대로 여당은 여당대로 주판알을 굴리던 국회를 내몰아 마침내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하게 했다. 촛불의 힘이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과 새로운 대한민국을 세우라는 촛불의 염원은 아직 미완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2016 촛불대항쟁은 이미 그 자체로 정치사적 의미가 되기에 충분하다. 외환위기 이후 점점 더 고단해진 시민의 삶은 민주주의를 아득히 잊어버린 듯했고 위임권력은 권력자들만의 것이 되었다. 이 황폐한 정치의 시대에 놀랍게도 2016 촛불대항쟁은 국민주권의 민주주의를 완전히 진화된 형태로 귀환시켰다. 그것도 세계적으로 진화를 멈춘 대의 민주주의의 출구를 열었다. 촛불대항쟁은 21세기 민주주의를 진화시킨 지구적 사건이 될 만했다. 그 특징을 몇 가지 들여다보자.

 

첫 번째, 촛불대항쟁은 제도로서의 민주주의 영역을 획기적으로 확장했다. 대규모 군중행동은 대개 불법적이고 비제도적 행동을 수반한다. 그러나 촛불대항쟁은 230만명의 군중이 완전한 자발성으로, 그리고 완전히 합법적인 방식으로 제도화된 저항행동을 보여줌으로써 가장 강력하고도 직접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나타냈다. 단 한 건의 체포나 연행 없이 자율적 군중의 민주적 활동반경을 넓힌 셈이며 대의적 영역을 넘어 직접참여의 민주주의를 확장한 효과를 얻었다. 두 번째, 거의 매일 그리고 매주말 열리는 거대 집회는 생활민주주의의 현장이 되었다. 생활민주주의는 삶의 다양한 영역에 참여적 정치양식이 결합된 질서를 말한다. 말하자면 개인의 삶을 공공적 쟁점으로 구성된 정치양식과 결합하는 생활공공성의 질서다. 2016 촛불대항쟁은 불법 없는 시민행동이라는 점에서 이제 확장된 정치제도요, 정치양식이 되었다. 적어도 촛불시민들은 대통령의 퇴진과 새로운 질서라는 공적 쟁점을 추구하고자 자신의 일상적 시간을 정치와 결합시키고 있다. 촛불대항쟁은 생활시민이 생활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공공적 정치양식이 되었다.

 

제5차 민중총궐기대회가 열린 2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보이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 번째, 촛불대항쟁은 자아실현의 민주주의이자 자기표현의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다. 이 거대한 집회는 일원적 질서로 움직이지 않고 거대투쟁조직이 일원적으로 시민을 동원해내는 구조도 아니다. 오히려 시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표현해내고 있다. 매주 새롭게 등장하는 깃발과 구호에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자기표현의 민주주의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얼룩말연구회, 한국고산지발기부전연구회, 독거총각결혼추진회, 노처녀연대, 행성연합 지구본부 한국지부, 장수풍뎅이연구회, 아이돌 팬의 깃발 등 대단히 다양하고 흥미롭다. 네 번째, 촛불대항쟁은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성을 반영한다. 2016 촛불대항쟁은 역사적인 시민항쟁의 누적된 학습효과를 갖는다. 1960년 4월의 민주주의와 1987년 6월의 민주주의가 모두 미완에 그쳤다. 시민의 힘으로 항쟁을 만들었으나 제도정치권이 받아내지 못했다. 2016년 촛불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시민들은 우리 시민혁명의 미완의 역사를 선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훨씬 더 차가운 이성으로, 훨씬 더 부릅뜬 눈으로 제도정치권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다섯 번째, 2016 촛불대항쟁은 한국 민주주의의 세대적 진화를 기대하게 한다.

 

현재까지 일곱 차례에 걸친 거대 집회에는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가 망라되어 있다. 심지어는 신혼부부들이 이 위대하고도 거룩한 역사의 현장에 함께하기 위해 유모차를 몰고 나온다. 또 아이들에게 지켜야 할 가치와 질서가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 자녀들을 데리고 나왔다고 말한다.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한국 민주주의의 진화를 떠올리게 하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2016 촛불대항쟁은 이미 문명사적 사건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 없는 위태로운 정치과제들이 남아 있다. 더 크고 맑고 차가운 촛불의 눈으로 정치권의 움직임을 뚫어지게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라고 외쳐야 한다. 완성된 시민혁명, 그것도 무혈의 명예혁명 한 번 해봤으면 더한 바람이 없겠다. 전국에서 출렁이는 촛불의 물결이 2016년 ‘촛불혁명’으로 기록되는 날을 그려본다.

 

조대엽 고려대 교수·사회학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몇 주째 아내는 발뒤꿈치가 아파 제대로 걷지 못했다. 족저근막염이라고 진단이 나왔는데 집에서도 발바닥이 편한 운동화를 신어야 한다. 촛불집회에 나가지 못해 좀이 쑤시던 아내가 내게 따져 물었다. “100만 촛불이니 230만 촛불이니 하지만 거리에 나간 촛불만 세는 건 아니라고 봐. 광화문에 나가진 못해도 마음속에 촛불을 켜는 나 같은 사람들은 왜 빼놓는 건데.” 듣고 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다. 집, 가게, 공장에서 타오른 ‘국민 촛불’까지 염두에 두면 숫자는 무의미해진다.

탄핵소추안 통과 이후 촛불의 방향에 대한 제안이 쏟아지고 있다. 지역 민회를 구성하자는 움직임도 있고, 국회의원 국민소환제와 국민발안제 도입을 내세우는 쪽도 있다. 촛불 시민혁명의 역사적인 의의를 짚는 토론도 시작됐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결국 하나의 물줄기로 모일 것으로 보인다. 촛불로 응집된 민심을 한국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모순과 부조리까지 바로잡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촛불은 비정형이며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해 보인다. 이번 촛불을 ‘녹색 촛불’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시종일관 유지된 비폭력과 집회 후 쓰레기를 청소하는 시민들의 배려심 때문만은 아니다. 녹색은 독점과 배제, 뻔뻔함과 거짓, 오만과 독단과 상극을 이룬다. 국가권력의 사유화와 정경유착에 분노하는 촛불, 국민이 공화국의 주인임을 밝히는 촛불은 그 자체로 생태적이다. 촛불은 스스로 제 몸을 태워 세상을 밝힌다. 100만분의 1이라도 되겠다고 추위에도 아이들 손을 잡고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바로 그 모습이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대통령 퇴진 촉구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촛불과 휴대전화로 빛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촛불이 녹색인 이유는 더 있다. 그건 광장 바깥에서 켜졌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촛불을 보면 안다. 대표적인 사례는 전국 최악의 대기오염물질 배출 지역인 충남 당진에서 켜진 촛불이다. 지난 5일 시민들은 신규 석탄화력발전소 유치 찬반 주민투표를 추진하겠다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주민투표를 ‘기업 이익을 위해 주민의 생명과 건강을 등한시한 채 몇 푼의 가산금으로 지역을 분열시키고 주민을 현혹하는 정부의 불통행정에 맞선 주민자치운동’으로 규정한 점이 눈에 띈다. 이 촛불은 재작년과 작년에 연이어 진행된 삼척과 영덕의 원전 유치 찬반 주민투표에서 켜졌던 촛불이 옮겨붙은 것이다.

또 다른 녹색 촛불은 지난 1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켜졌다. 장병완 의원이 대표 발의한 전기사업법 일부개정 법률안을 가결한 것이다. 법률안은 “전기판매사업자는 발전원별로 전력을 구매하는 우선순위를 결정할 때 경제성, 환경 및 국민안전에 미치는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야 한다”고 명시했다. 전력시장은 그동안 연료비가 가장 싼 발전소부터 가동하는 경제급전 방식에 따라 원전, 석탄, LNG 순으로 발전소를 가동해 왔다. 법사위와 본회의를 통과하면 안전성이나 미세먼지 등 환경영향에 눈감아 온 부조리한 관행을 뿌리 뽑을 수 있게 된다.

국회에 켜진 녹색 촛불은 또 있다. 지난달 14일 홍영표 의원은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의 획기적인 감축을 위한 ‘미세먼지 대책 4대 패키지 법안’을 발의했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석탄발전설비의 발전량을 국내 총발전량의 30% 이내로 제한하는 전기사업법 개정안이 단연 눈에 띈다. 현재 40%가 넘는 석탄발전 비중을 낮춰 미세먼지와 탄소 배출을 줄이자는 것이다.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이후 촛불이 동력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그럴 가능성이 커 보여 조바심이 들기도 한다. 언젠가는 광장에서 촛불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광장이 빈다 해도 쓸쓸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다. 이미 국민들의 마음속에 켜진 수천만개의 녹색 촛불이 있으니 말이다.

안병옥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시민환경연구소 소장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