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박근혜’ 하나로 돌리면서 우리의 정치의식은 또 후퇴하고 있었다. 단 하나의 예만 들어보자. 밀양의 송전탑이 박근혜의 작품인가, 또 박근혜 아닌 전임정부들은 정말 물리력을 동원하지 않았을까? 김대중은, 노무현은? 그렇다면 농민시위에서 경찰에 맞아죽은 농부는, 태안반도는 어찌 가능했을까?

이명박 정부하에서 우리는 전임 정부와의 연속성에 대해 자각하게 됐다. 괴물정부 하나의 존재에 분노하면서, 그들이 하는 수많은 일들이 전임정부에서 결정되고 후임 이명박 정부에서 집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명박의 실정을 비판하는 것은 그 이전의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실정과 반민주성을 비판하는 것과 같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그렇고, 제주 해군기지가 그렇고 정보통신법이 그렇고 자본 통상법이 그렇고 나아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그렇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며 지난해 10월29일부터 시작된 촛불집회 1주년을 맞아 지난 28일 서울 광화문광장 등 전국에서 이를 기념하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시민들이 광화문광장에 나란히 놓아둔 종이컵들에서 촛불이 타오르는 가운데 한 시민이 ‘촛불은 계속된다’고 적힌 종이컵을 놓고 있다. 이준헌 기자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은 유신의 악령이 깃든, 웬 야만과 변종의 지도자 박근혜와 그의 옆에 인의 장벽을 치고 있는 꼴통 소수가 문제였다. 새누리당도 들러리인 양 취급됐다. 그리고 심지어, 자본들- 박근혜의 배후에서 박근혜 정부의 경제와 노동정책을 좌지우지했던 자본은 눈에서 멀어졌다. 노동자 투쟁만이 자본의 그림자를 언뜻언뜻 보여줄 뿐이다. 그런 현실에 대한 쉬운 표현이 바로 ‘적폐’란 단어다. 아이러니는 이 단어를 세월호 참사 이후 박근혜씨가 처음 쓰고 우리는 그 단어의 사용을 조롱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지금 그 단어가 전부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프레임이 향할 방향은 어디인가? 이명박 시절에 그 전임 김대중·노무현의 자유주의정부의 공과를 깨닫게 됐다면, 박근혜 시절에서는 고작 차라리 전임 이명박이 더 낫다거나(실제로 그런 말도 했었다) 혹은 그러니 박근혜와 그 정치일당이 아니면 다 괜찮다는 앙상한 결론이면 될까?

내가 박근혜 정부하에서 바란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전과 14범 이명박 전 대통령 앞에서 처절하게 선거민주주의의 한계를 목도했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가 바로 앞선 자유주의정부의 공과를 함께한다는 점도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각성과 절망의 상태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 어떻게 할 것인가와 누가 주체가 될 것인가는 더욱 오리무중이었다. 자유주의정치가 민주주의를 배반했던 30년의 역사를 꿰뚫어보면 희망의 그림자는 더욱 멀어져갔다.

우파와 자유주의 세력이 함께 망친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적인 민주주의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바꾸어 나갈, 즉 민주주의의 민주화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들이 주체라는 믿음은 없었다. 그것이 노무현 정부의 말기였다. ‘진보개혁세력의 위기.’

그리고 박근혜 정부가 들어섰다. 우리는 이제 알 만큼 안다. 우파의 국가통치철학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선거만 민주주의가 얼마나 무늬만 민주주의인지. 민중과 노동과 결합하지 않은 정치엘리트, 선거엘리트, 운동엘리트들이 얼마나 위선적인지. 그러니 박근혜 정부에서 내가 기대했던 것은 이것이었다. 박근혜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그래서 유신체제만 벗어나면 된다는 생각으로 다시 1980년, 혹은 87년을 재탕하지 말길. 좌절과 절망을 모아 그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잡길. 진정 민중과 노동자와 서민의 이해가 정치적인 힘이 되길.

하지만 촛불이었다. 짱돌도 아니고 스크럼도 아닌 촛불을 들자고 했다. 촛불은 절묘하게 법과 제도와 타협하면서 박근혜를 퇴진시켰다. 그 프레임은 결국 우려한 대로, 박근혜를 모든 ‘적폐’의 화신으로 삼는 것이었다. 이제 박근혜가 남긴 적폐를 청산하자고 한다. 그러나 집권세력은 구자유주의세력이 공유하는 적폐에 대해선 무관심하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와 한·미 FTA에 대한 모호함, 노동에 대한 모호함, 미국에 대한 모호함으로 나타나고 있다. 촛불은 자유주의정치를 위기에서 구출하였다. 그러나 과연 민주주의는 위기에서 구출하였을까? 촛불 1주년을 맞아, 의문은 이 지점이다.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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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그 열망과 성실이 사랑 아니면 뭘까? 두근거리며 약속 시간을 기다리고, 다음번엔 어떻게 만나게 될까 또 기대에 부풀고, 피곤해도 또 달려 나갔다. 함께 노래하고 웃고 함성을 외치고, 잘못 될까 염려하고, 혹 너무 추울까 바람 불어 꺼질까 걱정하고, 금이야 옥이야, 일상에 찌들면서도 마음은 거기 있었다. 촛불의 광장과 사람들 말이다. ‘혼밥’ 하는 각자도생, 열정 없는 쳇바퀴 같은 일상. 촛불항쟁은 불연속의 시간이자 장삼이사·‘개·돼지’들의 지성과 힘으로 역사가 진짜 변하고, 순간이 영겁이 되는 시간이었다.

23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 에서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 기록기념위원회 관계자들이 촛불 1주년 선포 기회자회견을 하고 있다. 23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촛불 1주년(10월29일)’ 선포 기자회견에서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 기록기념위원회 관계자들이 활동 보고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스물 세 번의 촛불집회를 기억하고 1주년을 기념하고 싶다. 폭발적으로 군중이 늘어났던 11월12일, 청와대 앞길을 꽉 채우고 전국에서 200만명이 넘게 모였던 12월3일, ‘송박영신’ 12월31일의 광화문과 부산 평화의소녀상 제막식의 열기, 1월21일 혹독한 추위에도 재벌 본사 건물들 앞에서 정경유착 철폐를 외치던 시민들, 그리고 3월10일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던 인용의 순간을.

세월호 유가족과 이화여대 학생들, ‘혁명’ 깃발을 들고나왔던 청소년들, ‘차별 없는 민주주의’를 외치던 여성들·장애인·성소수자들, 광화문 텐트촌의 문화예술인들과 퇴진행동·민주노총·전농들은 마중물이자 엔진이 되었다.

그 힘과 장수풍뎅이연구회, 민주묘총, 전국아재연합, 민트당 같은 깃발을 들고나왔던 ‘보통의 존재’인 시민들은 함께 추억을 쌓고, 서로 가르치고 배웠다.

촛불이 한 일은 현대 민주주의의 기준을 재차 확인한 것이다. 어떤 위정자나 강력한 정당도 주권 인민의 단호하고도 끈질긴 저항보다 셀 수 없음을, 합법적 절차를 통해 대통령을 쫓아내는 데 무엇이 필요한가를, 또 삼권분리제도의 모든 것, 즉 헌재·검찰 등의 사법과 의회와 대통령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밑바닥까지 들여다보았다. 또 21세기형 항쟁의 미디어와 조직방식에 대해, 시민의 상호 주체화·자력화(empowerment)의 경로에 대해 알게 되었다. 촛불은 유례없는 방법으로 전개됐다. 조직-비조직 대중의 상호작용, 축제와 항쟁이 섞인 복합 스타일, 온건하고 단순한 행진이었지만 질긴 반복과 수의 헤게모니로써 쟁취되었다.

그래서 촛불이 해낸 일은 위대한 새로움이고 세계적 자랑이다. 그 자부심은 독일 인권재단의 상보다는 훨씬 크다. 불과 1년3개월 전인 2016년 7월 미국의 세계적인 정치외교학 잡지라는 ‘포린폴리시’는 “한국은 독재로 회귀하는가”라는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이제 미국민들에게 민주주의의 본질과 나쁜 대통령의 악영향에 대해 가르칠 수 있는 건 누구일까? 촛불은 금권정치와 혐오가 대의민주주의를 목 조르는 ‘초국적 트럼프 월드’에서도 공화주의와 민주주의가 유효함을 실증해보였다.

그런데 조금 마음이 헛헛하기도 하다. 연인원 2000만의 촛불은 광장을 떠나 뿔뿔이 헤어졌다. 혹자들은 과장해서 ‘촛불혁명’이라 부르지만, 여러 학자들의 지적처럼 촛불은 어떤 독자적 정치조직을 남기지 못했고 과제를 문재인 정부에 일임하다시피 했다.

촛불이 혁명이려면 근본적인 개혁을 위한 뭔가가 더 힘있게 진행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촛불이 아직 추억이 될 수 없는 진행 중인 투쟁임을 박근혜와 태극기 시위자들이 보여준다. 또 일부 보수 정치세력은 성찰과 변화는커녕 정쟁과 발목잡기에 몰두하고 있다. 언론·경제·종교·관료·사법 등의 특권동맹 안에도 촛불 이전의 시간을 사는 세력이 여전히 많지만, 지난 정권하에서 구성됐던 보수적 의회권력은 촛불의 제도화를 가로막는 결정적인 장애다.

누구와 무엇이 ‘촛불’인가? 양극화의 극복(경제민주화), 사회정의의 회복(적폐청산), 차별 없는 민주주의 등 세 가지가 기준이라 생각한다. 항쟁의 과정에서 시민들이 선을 넘지 않고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 이유는, 기득권 구조와 극우세력이 얼마나 강한지, 또 민주정부가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자체로 촛불의 결실이자 도구다. 그 정당성의 원천은 촛불에 있어, 그 소명은 하나밖에 없다.

나라를 근저에서 바꿔 살 만한 세상을 만들자는 청년·여성·노동자·소수자들의 열망을 잇고 살려 다음 시대로 전달하는 매개가 되는 일이다. 시민들은 문재인 정부가 모든 것을 다할 수 없다는 것은 안다. 조금 더 기다리며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다. 지역, 직장, 학교를 바꾸려는 시민·노동자와 정부는 ‘갈등하는 협력’ 관계에 놓일 것이다. 천천히 가도 신뢰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촛불이 켜진다. 1주년, 우리는 기약 없는 해산을 한 것이 아니다.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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