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 7월11일, 미국 독립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했던 미국 정치가 토머스 제퍼슨은 프랑스대혁명의 와중에서 런던으로 긴급하게 편지 한 통을 쓴다. 수신인은 이후 프랑스대혁명의 정당성을 치밀하게 논증하는 글인 <인권>을 쓰게 되는 토머스 페인이었다. 

제퍼슨은 이 편지에서 국민의회가 지금 “낡은 정부를 무너뜨리고 이제 새로운 정부의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는데 그를 위한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자연적이고 소멸될 수 없는 인간의 권리 선언”을 정초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바로 이 선언이 1789년 8월에 반포된 그 유명한 프랑스인권선언,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이다. 이 선언은 이후 공화국 프랑스의 구성과 운영의 원리를 정초하는 문서로 자리 잡게 된다.

물론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선언만큼 프랑스대혁명의 근본 의미를 명확하게 밝혀놓고 있는 문서도 없을 것이다. 

프랑스대혁명은 1789년 시작되어 1875년 제3공화국 헌법제정으로 비로소 종결되는 100년의 장기혁명이었다. 그 장기혁명의 근본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신념을 국가구성의 원리로 삼았다는 점이다. 프랑스대혁명 이전 인간의 권리는 출생에 따라서 불평등하게 배분되어 왔다. 

그 혁명은 국가의 출현 이후 수천년을 이어왔던 신분제, 즉 인간의 불평등 위에 구축된 정치질서를 혁파한 혁명, 철옹성과도 같은 기득권을 누려왔던 이들의 완고한 저항을 타도한 혁명이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은 시민들의 힘을 통해 혁명의 정신과 결과, 곧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국가의 토대에 기입한 공적 문서였다.

2017년 대한민국에 몰아치는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에 맞선 시민들의 촛불은 아직도 타오르고 있다. 

지난해 늦가을 시작되어 봄을 바라보는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는 촛불항쟁의 의미는 무엇일까? 단지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으로만 그 의미를 축소할 수 있을까? 

한반도에서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국가체제로서 민주공화국을 만들고자 했던 시도는 적어도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60년 4·19혁명, 1979년 부마항쟁과 1980년 광주항쟁, 1987년 6월항쟁과 7·8·9월 노동자대투쟁, 2008년 촛불집회를 지나 2017년 광화문 대로를 가득 채운 지금의 촛불항쟁은 바로 1945년 이후 시작된 자유와 평등의 민주공화국 수립을 위한 과정의 분기점들이다. 민주공화국을 향한 우리의 역사 역시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역사적 투쟁의 성과를, 승리의 결과를 어떤 방식으로 남겼을까? 우리의 현대사는 아직 인권과 민주적 권리를 시민의 힘으로 공인한 권위 있는 공적 문서를 갖지 못했다. 1960년 4월의 승리도, 1987년 6월의 승리도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권리를 아로새긴 공적 문서를 남기지 못했다. 

매주 10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모여 민주주의와 시민의 권리를 외친 집회는 우리 현대사만이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드문 혁명적 사건이다. 지금 우리는 이 나라를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민주공화국으로 만들기 위한 장구한 투쟁의 결정적 국면에 서 있다. 이 국면에서 무엇을 남겨야 할까?

지난 18일 2000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장충체육관에 모여 ‘촛불권리선언을 위한 시민대토론회’를 열었다. 

촛불집회 이후 대한민국, 모든 시민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민주공화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민주적 시민헌장, 혹은 권리선언의 내용을 토론하는 자리였다고 한다. 이 토론의 과정과 결과가 2017년 촛불시민혁명의 의미와 정신을 제대로 밝히는 시민들 공적 선언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시민의 행동과 실천으로 세우는 민주공화국의 기초를 시민들이 선언하는 공인된 권리선언을 우리도 이제 가질 때가 되지 않았는가? 그러한 승리의 권리선언이 2017년 촛불시민혁명이 남겨야 할 중요한 성과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정정훈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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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서울시청 앞은 태극기를 든 노인들로 가득 찼다. 연단에 오른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은 부당하게 탄핵됐고, 국정농단은 조작된 사건이며, 언론이 거짓 선동했다고 되풀이했다. 국정농단이 아니라 ‘고영태와 그 일당의 금품사기 사건’이라고 했다. 박근혜와 최순실은 사기 피해자라는 것이다. 국회·검찰·언론은 깨부숴야 할 탄핵 3적으로 불렸다. 대형 스피커에서 울리는 ‘탄핵기각’ ‘대한민국 만세’ 구호가 찬바람에 섞여 귓전을 때렸다. ‘계엄령뿐, 군대여 일어나라’는 팻말을 목에 건 노인이 보였다. 지방에서 올라온 관광버스 앞 유리엔 ‘박사모 대구본부 12호차’ ‘박사모 경기 평택지회’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물어봤다. 왜 나왔느냐고. “촛불세력이 대한민국을 공산화하려 한다” “민주노총, 전교조가 나라를 장악해선 안된다는 생각에 힘을 보태러 나왔다”고 했다. “대통령이 최순실에게 속은 게 죄지, 땡전 한 푼 챙긴 게 뭐가 있느냐”고도 했다. 

이들의 심리는 일종의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으로 보인다고 심리학자들은 분석했다. 촛불집회를 보는 두려움과 걱정으로 인한 반대 행동이라거나, 경제·사회적으로 배제된 노인들이 마지막 남은 자신들의 시대와 가치까지 말살된다고 느껴 저항에 나선 것이란 분석도 있다. 엊그제 여론조사 결과 탄핵 찬성은 79%, 반대는 15%였다. 콘크리트처럼 완강한 15%다. 이들은 다른 세계에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 다른 세계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다. 예비군복을 입혀놓으면 멀쩡한 사람도 확 달라진다. 정상인에게 내재된 광기(狂氣)는 건강한 상식과 합리적인 이성으로 통제가 가능하다. 하지만 광기가 집단화될 때는 마녀사냥, 나치, 문화대혁명, 매카시즘 같은 잔혹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정신분석학자 멜라니 클라인은 말했다(<정상인의 은밀한 광기> 중).

12일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서 보수단체 회원 등이 탄핵무효 등을 촉구하며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결과가 발표되고 박근혜가 단상에 올랐다. “저 박근혜 경선 패배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경선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합니다. 경선 과정의 모든 일들을 다 잊어버립시다. 하루에 잊을 수가 없다면 몇날 며칠이 걸려서라도 잊읍시다.”

이명박·박근혜 양자 대결에서 많은 사람들이 경선 후 파국을 예견했다. 박근혜는 혼돈과 우려를 말끔하게 정리하고 지지자들의 상심을 달랬다. 사람들은 전율이 느껴졌다고 했다. 지금 15%의 광기를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은 박근혜뿐이다. 그럴 가능성은 0%다. 10년 전 박근혜는 후일을 도모하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의 박근혜는 내일이 없다. 그래서 감동의 연설도, 참회의 이벤트도 필요없다. 박근혜 정부 비서실장, 장차관, 수석, 비서관 18명이 구속됐다. 현대 민주국가에서 이런 나라는 없다. 대통령 자리에서 진작에 물러나야 했지만 박근혜는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자백과 증거로 확인된 사실도 “엮였다”고 했다. 잡범들은 일단 도망가고, 잡히면 부정하고, 그래도 안되면 ‘빽’을 쓴다. 도망칠 수도, ‘빽’을 쓸 수도 없는 대통령은 부인(否認)을 택했다.   

박근혜의 전략은 3단계다. 특검 수사는 부인과 모르쇠로 대응한다. 헌법재판소 심리는 최대한 지연시킨다. 목표는 기각이다. 기각 이후 최종 시나리오는 이른바 ‘질서 있는 퇴진’이다. 이정미 재판관이 퇴임(3월13일)한 뒤 헌재 재판관 7명 중 2명만 반대하면 기각이다. 자신이 임명한 재판관이 둘 있고, 평생 대구에서만 근무한 향판(鄕判) 출신 재판관도 한 명 있다. 박근혜는 지금 3월13일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필요한 것은 탄핵 반대 여론을 키우는 것뿐이다. 이른바 태극기집회를 촛불집회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촛불과 태극기의 대결 구도만 세우면 성공이다. 또 국민 갈라치기다. “태극기를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 심정”이란 발언은 총동원령의 신호탄이었다. 국정원 댓글도, 세월호 위기도 다 이렇게 넘겼다.

진보는 앞으로 나아가자는 것이고, 보수는 전통적인 걸 지키자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는 나라의 틀을 크게 보고 아우르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독일의 보수주의자 비스마르크는 빈부격차와 계층 갈등이 커지기 전에 사회보장제도를 최초로 만들었다. 복지의 대명사인 사회안전망은 보수 정치인 영국의 처칠이 만든 제도이다. 책임과 희생과 헌신은 보수의 행동원칙이다. 대한민국의 가치를 훼손한 박근혜와 최순실을 옹호하면서 국기를 흔드는 노인들은 지금 무엇을 지키려는 것이냐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태극기에 겹쳐 성조기를 흔들고 펼치는 모습은 더 비루하다. 나라 망신은 대통령 한 명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박래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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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보도와 특검 수사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전모가 드러나고 있지만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씨는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지 않고 애먼 시민이 목숨을 끊는 일이 일어났다. 설인 지난 28일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60대 ‘박사모’ 회원 조모씨가 투신해 사망했다. 조씨는 탄핵 반대 집회에서 사용하는 손태극기 2개를 든 채 몸을 던졌고, 태극기에는 ‘탄핵가결 헌재무효’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경찰은 “박사모 활동 때문에 가족과 불화가 있었다. 유족을 상대로 경위를 확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이달 7일 박근혜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에서는 한 스님이 박 대통령 체포 등을 요구하며 분신했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두 사람의 극단적 선택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지만,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의 죽음은 박 대통령 탓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대통령이 비리를 저지르지 않고 정상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박 대통령 지지자로 보이는 조씨의 투신에는 설 직전 박 대통령이 “최순실 사태는 거짓말로 쌓아올린 거대한 산”이라며 허위 내용으로 극우 언론인과 인터뷰한 것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박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박사모의 탄핵 반대 집회를 ‘태극기 집회’라고 표현하며 자신의 대통령직 유지를 국가 수호와 연계하는 극단적인 메시지를 던졌다. 그러나 국가와 정부는 다르다. 정부는 국가와 주권자인 시민을 연결하는 매개체에 불과하다. 박 대통령이 물러나 박근혜 정부가 중도에 해체되더라도 주권자가 선거를 통해 새로운 정부를 세우면 된다. 이것이 민주주의다.

박 대통령이 궤변으로 혹세무민하며 버티기에 들어가면서 나라는 더욱 엉망이 되고 있다. 시민들의 피로감과 스트레스도 임계치에 이르렀다. 설 연휴 모처럼 일가 친척이 모인 자리의 대화 주제도 국정농단 세력에 대한 분노와 나라 걱정이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과 최씨는 ‘내가 무슨 죄가 있느냐’며 적반하장으로 나오고 있다. 특검과 헌법재판소에 출석하지 않으면서 수구 보수층을 내세워 재기를 모색해보려는 꼼수에 시민들은 억장이 무너진다. 특검은 청와대 압수수색 등 수사에 더욱 속도를 내고, 헌재는 탄핵 결정을 앞당겨 하루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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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놀랍다.” 이 말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인상을 물어보면 가장 자주 듣는 말이다.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가장 못사는 나라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을 사용하는 세계 10대 교역국으로 변신한 한국의 발전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한다. 그런데 요즘 듣는 말은 ‘한국인은 놀랍다’이다. 수십만명의 군중이 한꺼번에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는 것도 놀라운데 그것도 주말인 토요일에 하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인이 매번 왜 그렇게 시위를 자주 하는가에 대해 가장 놀란다.

해외 언론들은 그저 놀랍다고 표현했지만 그 놀라움이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한국은 얼마나 부패했길래 저렇게 시위를 계속하겠는가라는 놀라움의 의문을 풀기 위해 해외 언론은 더욱 상세한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 미국 시사주간 타임은 한국인이 대통령 탄핵을 축제처럼 기뻐할 일은 아니라고 꼬집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인이 촛불집회를 한 덕분에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됐지만 민주주의의 승리는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 매체는 한국인이 수만번의 시위를 해왔지만 시위만으로는 구조적인 개혁을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 이유로 쉽게 끓어 올랐다 쉽게 식어버리는 냄비근성, 법률 위에 존재하는 ‘떼법’, 실력보다 학연·지연 등을 우선하는 ‘인맥 문화’,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로 ‘뿌리 깊은 정경유착’을 지목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재벌은 경제에서 특권화된 자리를 지켜줄 정당과 정치인들에게 기부를 한다”고 지적했다. 영국 BBC는 새해 전날 토요일에도 계속된 집회를 보도하면서 삼성 계열사의 합병을 위해 국민연금공단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구속을 상세히 설명했다.

미국 CNN방송에서 보도한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집회 관련 뉴스. CNN뉴스 캡처

실제로 해외 기업들은 우리 기업들과의 관계에서 직무윤리와 준법서약을 강화하고 있고 관련 사안에 대해서는 정확한 해명을 요구하기도 한다. 국내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사태로 인해 한국 기업은 부도덕한 이미지로 글로벌 경쟁시장에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특히 사회적 책임투자를 요구하는 프로젝트에는 치명적일 것이며 참여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우리는 분풀이를 계속하기보다는 박 대통령 퇴진 이후 다음 사회를 준비해야 한다. 이번 사태로 인해 대한민국이 치러야 할 총비용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위기를 기회로 전환할 수 있는 다음 사회를 준비해야 한다.

지금 당장 보이지는 않지만 대한민국은 이미 많은 경제적·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다. 국가부패지수가 높아졌고 신용등급은 하향 조정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기적으로는 큰 손실이겠지만 장기적으로 다음 사회에서는 더 큰 이득으로 돌아올 것이다. 단, 그것은 정부와 기업들이 이번 사태를 구조조정의 기회로 삼고 국가의 모든 구성원들이 제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시민의식 개혁의 기회로 전환할 때 가능하다.

김성택 넥스트소사이어티 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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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측이 5일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탄핵심판 변론에서 촛불집회 참가 시민들을 종북세력으로 규정했다. ‘촛불’은 민심이 아니라는 말도 했다. 박 대통령 대리인단의 서석구 변호사는 “광화문 대규모 촛불집회를 주도한 곳은 민중총궐기투쟁본부인데, 이를 주도한 곳은 민주노총”이라고 언급한 후 “민주노총이 김일성 주체사상을 따르는 이석기를 석방하라고 행진하는 것을 볼 때 민심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서 변호사는 “북한 노동신문이 ‘김정은 명령에 따라 남조선 인민이 횃불을 들었다’고 했다”는 말도 했다.

박 대통령은 촛불민심에 색깔론을 덧씌우면 탄핵을 모면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대통령이 정경유착 비리를 저지르고 비선의 국정농단을 부추겨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이에 대한 시민의 비판을 북의 지령 때문이라니 그가 국가 지도자이기는커녕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인지 의심스럽다. 시민 모독 차원을 넘어 그 자체로 반민주적이고 반헌법적이다. 박 대통령은 또 서 변호사의 입을 빌려 “소크라테스도 사형됐고, 예수도 군중재판으로 십자가를 졌다”면서 자신을 박해받은 성인들에 비유했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7년 1월6일 (출처: 경향신문DB)

박 대통령 대리인단은 검찰이 정치적으로 편향됐다며 수사 기록을 증거로 쓰면 안된다는 주장도 했다. 서 변호사는 “박 대통령을 수사한 검찰 특별수사본부장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청와대 사정비서관이었다”며 “정치적 중립성에 의심을 받을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소가 웃을 일이다. 이영렬 지검장은 박근혜 정부에서 가장 많은 인사혜택을 받고 차기 검찰총장 후보로 거론되던 인물이다. 그리고 검찰 수사를 받겠다고 말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박 대통령 자신이다.

박 대통령 측은 박영수 특검팀에도 딴지를 걸었다. 야당이 특검을 추천해 정치적 중립성에 위반된다는 논리지만 박 대통령의 불법행위가 증거로 채택되는 것을 막기 위한 술수에 불과하다. 박 대통령 측은 탄핵심판을 지연하기 위한 꼼수도 부렸다. 증인신문이 예정됐던 안봉근·이재만 전 비서관은 법정에 출석하지 않았다. 헌재는 이들이 종적을 감추는 바람에 출석요구서를 전달하는 데 실패했다. 국회 청문회 출석을 기피했던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쓰던 방식과 닮은꼴이다. 헌재의 요구에도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당일 7시간 행적에 관한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 탄핵 사유와 당위성은 이미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헌재가 신속히 판단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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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21일 유명 영화감독과 배우의 스캔들이 한 매체 보도로 불거졌을 때, 그날 하루 네이버에 오른 관련 기사는 403건이다. 경향신문은 지면에도 온라인에도 내보내지 않았다. 나와 편집자는 온라인에 ‘무엇을 쓸 것인가’ 못지않게 ‘무엇을 쓰지 않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는 사안을 두고 의견을 나누다  “쓰지 맙시다” 할 때가 많다.

대량생산체제의 한국 온라인 뉴스시장에서 ‘우라까이’(베껴쓰기를 가리키는 일본어로 언론계 속어)든 ‘인용보도’든 수분이면 뚝딱 만들어 수천에서 많게는 수만 뷰를 보장하는 뉴스거리를 포기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양적인 트래픽을 유지·상승시키는 것도 팀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은 정론을 표방하고, 독자들은 그 실천을 주문한다. 트래픽과 저널리즘의 동시 수행이라는 언뜻 불가능한 과제를 마주한 채 고민할 때가 많다.

경향신문 현장 기자들이 모든 온라인 이슈를 거르기는 힘들다. 온라인에서 불붙는 타지의 단독보도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이슈를 받을지를 판단하는 건 모바일팀 일이다. 신뢰할 만한 언론사 또는 사람(단체)인가, 단독보도나 주장에 물적 증거가 있는가를 들여다본다. 유명인의 사생활을 쓸지 말지를 판단하는 것보다 까다롭다.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어떤 소문·의심·비난·주장·추정을 담은 것이라도 기득권을 비판하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르거나 정의를 구현하는 (듯한) 내용을 두고서다. ‘○○신문·방송이 보도했다’로 내보내곤 했다. 일하면서 찜찜한 부분이었다.

온라인 저널리즘 문제와 대안을 물었을 때, 박재영 고려대 교수가 우려한 부분도 이것이다. “검증하지 않은 센세이셔널한 정보가, 검증한 밋밋한 정보를 몰아내는 경향성이 온라인에서 더 강하게 나타날 겁니다.” 그는 조기대선을 치를 가능성이 높은 올해 미확인 정보가 전례 없이 온라인을 휘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한국 언론의 희망과 절망이 교차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보도에서 경향신문과 한겨레, JTBC와 TV조선 등 여러 언론사의 실증 탐사보도는 언론사의 개가였다고 박 교수는 평가한다. 그러나 언론 전반으로 확대해보면, 과가 공을 앞질렀다. 다른 언론사의 단독보도, 유명인의 SNS 발언을 두고 사실 확인과 검증 없이 받아쓰는 ‘카더라’ ‘아니면 말고’ 식의 기사가 ‘디지털뉴스팀’ ‘온라인뉴스팀’ 이름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정보 불충분, 이해집단의 대결구도화, 마구잡이 비판은 각각 오해, 갈등, 냉소를 부추기며 언론을 증오와 독설의 배설구로 전락시킬 수 있다고 박 교수는 말한다.

‘정통 저널리즘’을 강조하는 김세은 강원대 교수는 온라인 팀·기자의 과제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유혹에서 벗어나라.” 품은 적게 들이면서 트래픽은 많이 뽑을 수 있는 기삿거리에 매달려선 안된다는 말이다. 현장 기자들이 공들여 취재한 기사를 전면에 배치해 승부수를 띄우는 게 시급한 일이라고 말했다.

검증·확인의 저널리즘을 수호할지는 민주주의와 관련된 문제다. 김세은·박재영 두 학자도 참여한 <한국 언론의 품격> 책 머리말엔 “신뢰할 수 있는 뉴스가 지속적으로 공급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비틀거린다”는 월터 리프먼(1889~1974)의 말이 적혀 있다. 지난 미 대선 때 페이스북에 트럼프 관련 가짜 기사를 써온 폴 호너라는 사람은 대선이 끝난 뒤 가짜 기사가 널리 퍼진 이유를 두고 “트럼프 지지자들이 사실 확인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저널리즘의 수행은 언론 몫이자 책임이지만 시민 역할도 중요하다. 다행히 한국엔 언론 비판에 적극적인 시민들이 많다. 언론의 자정 능력은 약하다. 촛불집회 과정에서 여러 언론사의 자성은 시민들의 질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대선에서 시민들이 지속적으로 사실보도 기준을 갖고 언론을 감시·독려해야 할 이유도 여기 있다.

모바일팀 | 김종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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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마지막 날에도 광화문광장은 시민들로 가득 찼다. 그들이 왜 그곳에 모였는지 우리는 더 이상 묻지 않는다. 12월31일 광장에 가지 않은 이들도 이유를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간 그곳에 있지 않으면 독감처럼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파고드는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어서라는 걸. 광장에서 외치고 토론하고 노래하지 않으면 악귀가 달라붙은 것 같았던 끔찍한 한 해를 차마 떨치지 못한 채 새해를 맞을 수 있다는 불길함이 엄습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2016년은 국가가 산적한 난제들과 씨름하며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간 시간이 아니라 멈춘 시간이었다. 아니, 지난 4년 전체가 동결된 시간이었고 2016년은 그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4년 동안 우리는 공익을 위한 제도, 권한, 법적 절차, 그리고 공공에 헌신한 대가로 공직자에게 주어지는 빛나는 명예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하릴없이 지켜봐야 했다. 국가의 단단한 껍질이 깨지면서 드러나는 썩어 문드러진 속살들, 그 속에 득시글거리는 해충과 기생충들, 그것들이 풍기는 악취를 꼼짝없이 지켜보고 냄새 맡아야 했던 우리 시민은 포르노 극장의 관객이었다. 국가라는 이름의 아우라에서 느껴지는 권위와 도덕이 땅에 떨어지면서 국가의 우산 아래 모여들었던 ‘국민’은 완전히 벌거숭이가 되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세상 앞에 강제로 발가벗겨진 것 같은 느낌, 즉 견딜 수 없는 수치와 모멸감을 안겨줬다.

새해가 밝았지만, 세상은 아직 어둡습니다. 지난해 세밑까지 촛불을 들었을 때 시민들은 비로소 자신의 그림자라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촛불은 ‘여기 사람 있다’고 외치는 목소리였습니다. 암흑에 빠져 있던 민초들을 꺼내야 한다는 구조 신호였습니다. 새 세상에 대한 염원이었습니다. 새해에는 굳이 촛불을 켜지 않아도 대지와 광장의 목소리들이 곳곳에 퍼져나갔으면 합니다. 사진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2016년을 보내고 2017년을 맞은 새해 첫날 새벽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입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마르크스는 역사가 두 번 반복된다고 했다. 한번은 비극으로, 또 한번은 희극으로. 프랑스혁명의 공화국 정신을 무너뜨린 나폴레옹의 제정이 비극이라면 오직 삼촌의 명성 덕으로 권력을 차지한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등장은 희극으로 본 것이다. 4월혁명으로 탄생한 민주정부를 붕괴시키고 영구집권을 꿈꾼 박정희의 시대가 비극이었다면 아버지 덕에 집권한 박근혜 4년의 역사적 반동 역시 희극이다. 그러나 희극의 엑스트라가 되고 싶지 않았던 우리는 박 대통령이 우리를 호명했던 ‘국민’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했다. 광장으로, 광장으로 주말마다 몰려갔다. 그것만이 박 대통령이 지배했던 국가에서 벗어나는 길이었고, 뼛속 깊숙이 침윤했던 치욕을 털어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우리는 비로소 그곳에서 ‘자유로운 시민’이 되었다.

광장에는 동료 시민들 간 우애와 연대, 배려와 협동이 있었다. 가족, 친지, 동료와 혹은 홀로 나와서도 낯선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의견을 나누고 공감하고 춤췄다. 그곳에서는 여성, 청소년, 소수자들이 존중받았다. 중·고등학생도 시민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발언했다. 시민의 발견이었다. 광장은 정치적 각성의 장이었고 주말학교였으며 박근혜의 국가가 준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이었으며 따뜻한 공동체였다. 그런 의미에서 2016년은 최악의 시절이자 최고의 시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어리석음의 시대이자 지혜의 시대였다. 불신의 세기이자 믿음의 세기였다. 절망의 겨울이었지만 희망의 봄이기도 했다. 우리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았지만 결국 이렇게 한자리에 모였다. 

그러나 광장을 떠나면 우리는 다시 고립된 개인으로 돌아간다. 광장의 우의와 연대는 광장 밖의 경쟁과 이기심으로, 배려와 협동은 차별과 배제로 대체된다. 광장 밖은 정글이며 정글에서는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광장을 떠난 시민은 더 이상 시민이 아닌, 원자화된 개인으로 살아간다. 이는 한국인의 오래된 트라우마를 떠올린다. 4월혁명, 6월 민주항쟁, 2008년 촛불집회는 기성 체제의 복귀로 끝났다. 기득권 세력은 시민이 광장에 있는 동안은 숨죽이고 있지만 광장을 떠나는 순간 바로 고개를 든다. 시민이 광장을 떠나는 날은 바로 그들의 세상이 다시 열리는 날이다.

다시 한국 사회가 광장과 광장 밖으로 양분된다면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시민 떠난 텅 빈 광장이 우리의 일상이라면 그 빈자리는 선출되지 않은 재벌, 검찰, 국정원, 관료, 족벌언론, 기득권의 차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민의 이름을 도용해서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하거나 함부로 국익이라고 정의한 사익을 위해 자신들의 금력과 권력을 동원할 것이다. 우리는 시민의 부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악행이 저질러질 수 있는지 박근혜 정권을 통해 똑똑히 목격했다. 우리가 계속 투표하는 노예로, 유권자이기는 하지만 시민은 아닌 존재로 남아 있다면,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는 시인 김수영의 56년 전 한탄을 되풀이할 수 있다. 사실 지난 4년도 고립된 개인이 아무런 매개 없이 국가와 맞닥뜨린 결과였다. 개인과 국가 사이의 넓은 공간을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기들의 놀이터로 바꾸어 놓은 결과였다. 그런 사태를 다시 겪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어디서라도 시민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가정, 직장, 학교, 동네에서도 시민적 권리를 보유한 당당한 주인으로서 발언하고 협동하며 용기와 우애를 보여야 한다. 우리는 동창회, 향우회 활동은 열심히 해도 노동조합원으로, 시민단체 회원으로, 자원봉사자로, 정당의 당원으로 참여하는 일에는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노동자가 참여하는 노동조합, 시민 참여가 활성화된 시민단체, 당원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정당 활동은 이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기득권을 위축시킨다. 

잊지 말자. 불의한 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은 광장에서 서로 연결된 시민의 힘이었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이것이 꼭 물리적 광장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민적 공동체가 있다는 자각만 있다면, 그런 인식이 삶의 모든 측면에 스며든다면 우리는 우리의 주권을 지킬 수 있다. 박근혜 정권이 탄생하고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이 4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배경의 하나도 시민으로서의 주권적 자각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유독 박 대통령의 무능과 실수, 실패에 관대했다. 선의를 어느 정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옥으로 가는 길이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걸 알아야 했다. 시민의 참여와 감시 견제가 없는 어떤 권력도, 어떤 선의도 박근혜 정권처럼 될 수 있다. 정권 교체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 박근혜라는 인물이 대통령이 아닐 때도 한국 사회가 특별히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떠난다고 자동적으로 검찰과 방송이 바로 서고, 재벌 독점 경제가 사라지고 사회 양극화와 불평등이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정권 교체는 여러 번 있었지만 별로 나아지지 않았고, 어떤 경우는 더 나빠지기도 했다. 

생쥐나라가 있다. 검은 고양이로 구성된 정부를 선출했다. 고양이는 좋은 법을 통과시켰다. 물론 고양이에게 좋은 법이다. 쥐구멍이 고양이의 발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커야 한다는 것이었다. 생쥐의 삶은 힘들어졌다. 마침내 더 참을 수 없었던 생쥐들은 검은 고양이를 퇴출시키고 흰 고양이를 뽑았다. 흰 고양이는 네모난 쥐구멍을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네모난 쥐구멍은 둥근 쥐구멍의 두 배로 커졌고 생쥐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 그러자 참을 수 없었던 생쥐들은 다시 검은 고양이를 선출했다가 퇴진시키고 또다시 흰 고양이를 뽑았고, 심지어는 반은 희고 반은 검은 고양이를 뽑기도 했다(토미 더글러스의 1962년 캐나다 의회 연설).

이 우화는 국가가 시민을 대표하지 않는 한, 국가를 구성하는 제도들이 시민의 통제와 감시하에 있지 않는 한 정권 교체는 지배 엘리트의 교체로 끝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은 정권 교체를 넘어서는 일이다. 사실 새로운 세상이 뜻밖의 선물처럼 오는 법은 없다. 낡은 것들은 발이 없어서 스스로 물러설 줄 모르지만 손은 있어서 해가 바뀌어도 우리 발목을 잡고 버틸 줄 안다. 아마 새해는 낡은 것들과 대결하는 해가 될 것이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은 우리가 살고 싶어하는 나라가 아니다. 이게 중요하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바꾸는 것이다. 시민적 결의만 있다면 못할 게 없고 두려울 것도 없다. 광화문에서 보여준, 황소처럼 센 시민의 힘을 기억하자.     

그래도 만에 하나 흔들린다면 광화문의 밤을 밝힌 12월31일 촛불의 바다를 떠올리자. 그리고 각자의 가슴에 촛불을 켜두자. 그러면 우리는 후퇴 없는 행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시위를 떠난 화살이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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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경남 창원에서 열린 촛불집회 연단에 24세 청년이 올라왔다. 유튜브를 통해 본 영상에서, 그는 20세에 취직해 4년째 최저임금을 받고 있는 전기공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세금 떼고 나면 손에 쥐는 월급이 120만원인데, 방세와 교통비, 식비, 공과금을 내고 나면 저축을 할 돈이 남지 않는다고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지만, 지금의 월급으로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궁금해서 촛불집회에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박근혜 퇴진 이후에 자기 삶이 나아질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고 했다. 1987년에도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고, 그다음에 노동자들이 대투쟁을 해서 임금도 오르고 삶이 나아졌다고 알고 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건지 궁금하다고 했다. 이 청년노동자의 소망처럼, 이번 촛불은 우리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 수 있을까? 유튜브에 떠 있는 자유발언 영상들을 보면, 이런 희망 섞인 기대들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반면 하루하루 밝혀지는 대한민국의 민낯은 참담하기만 하다. 소설가로 알려진 대학교수가 ‘정유라’에게 학점을 주기 위해 부정행위를 서슴지 않았다는 뉴스가 나온다. 국회에서는 태연하게 ‘최순실을 몰랐다’고 잡아떼던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사실은 최순실·정유라에게 수백억원을 지원하라고 직접 지시했다는 뉴스도 나온다. 힘과 돈을 가진 이들이 나라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런 나라를 바로잡겠다고 알바비 7만원을 포기하고 왕복교통비까지 들여서 촛불집회에 나왔다는 청소년이 있는 게 이 나라의 기막힌 현실이다.

(출처: 경향신문DB)

그래서 이번에는 ‘박근혜’라는 한 사람이 물러나는 것으로 끝낼 일이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쌓여 있는 이 나라의 적폐를 청산하는 것과 함께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것이 없지는 않다. 많이 훼손되어 왔지만, 소중한 대한민국만의 유산도 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국을 떠나,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독립운동가들이 꿈꿨던 나라의 모습이 여러 문서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 문서들을 보면, 대한민국의 참된 헌법정신, 건국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은 ‘고르게 인간답게 사는 민주공화국’이다. 무슨 근거로 이런 얘기를 하느냐고 묻는다면, 1941년 11월2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포했던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보라고 말하고 싶다. 이 문서에서 독립운동가들은 ‘삼균주의(三均主義)’를 표방하고 있다. 조소앙이 이론적 기반을 세웠던 삼균주의는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의미한다. 보통선거를 통해 정치의 균등을, 토지 국유를 통해 경제의 균등을, 무상교육을 통해 교육의 균등을 도모하고, 불평등을 해소한다는 것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이 꿈꿨던 나라는 이런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런 내용은 1948년 제헌헌법에도 반영된다. 제헌헌법은 이승만 세력, 한민당 등 우파로 분류되는 집단들도 참여해서 만들어졌지만, ‘대한민국 건국강령’의 연장선상에서 ‘만민균등주의’를 기본정신으로 택했다. 그래서 ‘모든 영역에서 사람들의 기회를 균등히 한다’는 것이 헌법 전문에 담겨 있다. 헌법 제정 과정에서 많은 역할을 했던 법학자 유진오는 “대한민국 헌법의 기본정신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적·경제적 민주주의의 조화를 꾀하는 데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제헌헌법이 만민균등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좀 더 구체적으로 규정한 내용도 있다. 대표적으로 노동자에게 이익균점권을 보장했다. 사기업의 근로자가 기업의 이익 분배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이익균점권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그만큼 제헌헌법을 만들 당시에는 만민균등주의에 대한 공감대가 존재했던 것이다. 만약 이런 정신만 실현되고 있다면, 24세 청년노동자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낫지 않았을까?제헌헌법은 토지 자체를 국유로 하지는 않았지만, 광물 등 지하자원은 국유로 한다고 규정했고, 운수·체신·금융·보험·전기·수도·가스 등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는 규정도 두었다. 농민이 농지를 가질 수 있도록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정했고, 이 조항을 근거로 이승만 정권도 농지개혁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과정은 끊임없는 헌법정신의 훼손이었다. 노동자 이익균점권은 5·16쿠데타 이후인 1962년 삭제되었다. 공공성 있는 기업을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는 조항은 그보다 앞선 1954년 삭제되었다.

물론 지금 이런 조항을 단순히 부활시키자는 얘기를 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조항을 두었던 헌법의 기본정신을 복원하자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이, 그리고 제헌헌법이 꿈꿨던 나라는 ‘고르게 인간답게 사는 나라’였던 것이 분명하다. ‘헬조선’은 헌법정신과는 정반대의 결과이다.

그래서 박근혜 퇴진은 정경유착과 특권·기득권 구조의 퇴진이 되어야 하고, 제헌헌법의 정신을 부활시키는 강력한 개혁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선거제도 개혁, 재벌 개혁, 검찰 개혁, 관료기득권 개혁, 중앙집권적 국가구조의 개혁이 필요하다. 일하는 사람에게는 정당한 대가가 보장되고, 누구나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비빌 언덕’이 권리로 보장되어야 한다. 이런 나라를 이제는 만들어야 한다.

하승수 |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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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서 개헌론이 분출하고 있다. 여당의 분당으로 신4당 체제로 정치권 구도가 재편되면서 개헌을 매개로 한 대선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개헌론자들의 주장은 박근혜 게이트처럼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이 문제가 되니 개헌을 통해 이를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시키자는 주장,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고치자는 의견도 있다. 1987년 체제 이후 강화된 시민의 정치·사회적 권리를 헌법에 반영해야 한다는 논리도 있다.

하지만 지금 제기되는 개헌론은 생각해봐야 할 점이 많다. 우선 정치권이 당장 개헌 논의를 시작하면 모든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그런데 이번 촛불집회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시민들의 요구는 단순한 개헌이 아니다. 특권과 반칙으로 점철된 구체제의 개혁과 일신이다. 개헌론자들은 개헌에 이런 개혁 과제들을 담아낼 수 있다고 하지만 실현 가능성이 의심된다. 당장 대선 정국과 맞물려 개헌의 본래 취지는 뒷전으로 밀리고 개헌파와 비개헌파로 나뉘어 권력을 잡는 일로 날을 지새울 게 뻔하다.

개헌론은 특히 대통령에 대한 권력 집중을 문제점으로 지적한다. 하지만 한국 정치가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는 것은 헌법 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 헌법의 문제에 앞서 민주주의의 기본 프로세스 자체가 작동하지 않은 탓이 크다. 기존 헌법에도 책임총리제 등 권력 분산의 요소가 다 들어있다. 더구나 촛불시민들의 요구대로 개혁을 한다면 대통령에 대한 권력 집중과 부정부패 등은 충분히 해소할 수 있다. 개헌까지 갈 것도 없이 여야 정치권과 검찰, 언론이 제 기능을 다한다면 제왕적 대통령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경향신문DB

설령 권력 체제를 개편한다 해도 내각제나 대통령제, 이원정부제 가운데 무엇이 최상인지 합의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내각제와 대통령제가 다 문제라면 이번에는 이원정부제를 도입해야 하는데 현대정치에서 내치와 외치를 구분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대통령의 권력이 너무 강하다고 해서 권력해체에만 집착하면 또 다른 폐해를 낳을 수 있다. 대통령이 권한을 가지고 책임있게 국정을 운용할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가능성이 있다.

개헌의 또 다른 맹점은 정치세력들이 저지른 실책을 한꺼번에 덮어버린다는 것이다. 대선은 지금까지 어느 정치세력 또는 어떤 정치인의 잘잘못을 가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개헌은 모든 것을 제도의 결함으로 치부하기 때문에 모든 대선후보를 동일선상에 놓아버린다. 여당과 그 지도자의 실정에 대한 심판이나 야당 정치인의 잘못된 정치적 선택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도 다 소용이 없어진다.

당초 개헌론은 지난 10월 수세에 몰린 박근혜 대통령이 제기했으나 정략적 접근이라는 비판으로 수그러들었다가 탄핵 가결 후 재등장했다. 여당은 물론 야당 일부까지 가세해 만병통치약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지금 개헌론은 개헌 그 자체보다 개헌을 매개로 자기 정파의 정치적 이득을 챙기는 데 목표가 있다. 현 정치 구도가 대선을 치르기에 불리하다고 판단한 정치인들이 개헌을 고리로 힘을 모아 상황을 바꾸려는 것이다.

지금 개헌안은 구체성이 결여돼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개헌이 가능하지도 않다. 개헌 방향에 대한 합의조차 없는데 언제 민감한 헌법 조항까지 합의해 통과시킬 수 있을 것인가. 대선 국면에서의 개헌은 시민의 참여 기회도 제약한다. 그래서 지금 개헌을 주장하는 것은 당략적 접근일 수밖에 없다. 정치인들만의 개헌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개헌은 시민의 뜻을 충분히 모아야 한다. 대선 공약으로 제시하고 심사숙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정치권은 이제 개헌론의 수렁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민들이 요구한 개혁 과제를 입법화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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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미국 노동운동의 지도자이자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던 유진 뎁스는 미국인들을 향해 말했다. “나는 설령 그럴 능력이 있더라도 여러분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내가 여러분을 그곳으로 이끌 수 있다면 다른 누군가는 여러분을 그곳에서 끌고 나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뎁스가 살아서 촛불집회를 본다면 자신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느낄 법도 하다. 그만큼 시민들은 특정한 정치 지도자나 정당이 감히 덤벼들지 못할 강력한 정국 주도권을 행사함으로써 국회가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하게 했다. 아직 확고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상황도 극히 유동적이지만, 주권자가 직접 나서서 기성 정치권이 나라의 새 기틀을 세우도록 강제하고 있는 현실을 혁명으로 부르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혁명이라 부르는 사건은 4·19혁명뿐이다. 물론 이 용어에 부정적인 이들도 아직 많고, 현행 헌법 전문도 ‘4·19 민주이념’이라는 표현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4·19는 결코 ‘의거’나 ‘봉기’에 머물지 않은 위대한 ‘미완의 혁명’이며, 1980년 5월 광주항쟁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역사적 경험을 거치며 끊임없이 전진하고 있다. 학자들은 뚜렷한 이념, 조직된 주체, 폭력적 권력 교체 등의 기준에 비춰 촛불집회에 혁명의 개념 적용을 꺼릴지 모른다. 그러나 이론은 현실을 뒤따라오는 법이다. 이화여대생의 끈질긴 농성 투쟁이 운동권의 관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음을 되돌아보라. 머지않을 미래에 정치적 변화가 고비를 넘는 순간, 이 땅이 새로운 정치이론의 탄생지가 될 수도 있다.

시인 김수영(1921~1968)은 4월혁명을 열렬히 지지하면서도 냉정을 잃지 않았다. 4·19가 터진 다음달에 그는 “물이 흘러가는 달이 솟아나는/ 평범한 대자연의 법칙을 본받아/ 어리석을 만치 소박하게 성취한”(‘기도’) 우리의 혁명을 끝까지 이룩하자고 노래했다. 그처럼 소박한 성취라면 그저 자연발생적인 봉기로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인은 4월의 혁명성을 정확히 꿰뚫어보는 동시에, 민중 역량의 취약함과 혁명을 훼방 놓을 세력의 건재함을 직시했다. 그런 복합적 인식 위에서 “혁명의 육법전서는 <혁명>밖에는 없으니까”(‘육법전서와 혁명’)라고 단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머지않아 헌법재판소가 결정을 내리면 이후 60일 안에 치러질 대선에서 새 대통령이 당선과 동시에 취임한다. 숨 가쁜 정치 일정 속에 시민혁명의 방향타를 주권자로부터 가로채려는 술수와 공작이 더 거세질 것이며, 야당들의 동요와 과욕이 부른 실책도 이어질 것이다. 그런 방해물들에 역사의 물길이 막히지 않도록 시민들은 대선 이전에라도 결선투표제 도입 등 선거제도를 바꾸고 검찰, 언론, 재벌 개혁을 서두르라고 외치는 중이다. 또한 권력 분점에 눈이 먼 졸속 개헌이 아닌 긴 안목의 차분한 개헌 논의를 요구하고 있다.

정치권이 민심에 충실한지를 가늠할 시금석 하나는 김수영의 깊은 인식과 한 몸인 살아 있는 언어 감각을 보여주느냐는 것이다. 박근혜·최순실의 헌정파괴에는 명백히 사법적 처벌 대상인 ‘공범’이 많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공범에 준하는 자들을 ‘부역자’라고 하는 일은 조심스럽다. 한국전쟁기의 참혹한 대립을 떠올리게 하는 이 단어는 우리 편이 아니면 곧 적이요, 적은 처단 대상일 뿐이라는 흑백논리에 오염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어느 대선주자가 말한 ‘국가 대청소’는 성급한 어휘 선택이며, 촛불집회의 자유발언에서 시민들이 거듭 강조한 ‘우리 안의 최순실’에 대한 성찰과 동떨어진 느낌이 짙다. 퇴행을 거듭해온 우리 사회를 갱신하려면 단지 선명한 구호가 아닌 자기갱신의 비전을 담은 창조적 언어, 혁명의 언어가 필요하다.

급박한 변혁의 시기는 언어를 둘러싼 싸움의 나날이기도 하다. 농단, 탄핵, 인용 등 어려운 한자어가 빈번하게 쓰이는 시국에 ‘키친 캐비닛’ 같은 낯선 외국어가 오용되기도 한다. 세월호 희생자 중 아직 돌아오지 못한 학생의 어머니들이 9명의 실종자를 ‘미수습자’로 바꿔 부르게 한 사연을 정치권은 깊이 되새겨야 한다. 광장 안팎을 가득 메우는 자신의 실천이 혁명인지 아닌지에 별로 관심이 없는 촛불시민의 당당한 자세야말로 새로운 언어와 정치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김명환 서울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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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김무성·유승민 등 비박근혜계 의원 30여명이 어제 회동한 뒤 다음주 탈당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모임의 대변인인 황영철 의원은 “가짜 보수와 결별하고 진정한 보수 정치의 중심을 세우고자 새로운 길로 가기로 뜻을 모았다”면서 “패권주의를 청산하는 새로운 정치의 중심을 만들어 안정적·개혁적으로 운영할 진짜 보수세력의 대선 승리를 위해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다. 원희룡 제주지사 등도 탈당 의사를 밝혔다. 사상 처음으로 보수정당의 분당이 현실화한 것이다. 그만큼 보수 진영의 위기가 심각하고 새로운 보수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징표이다.

비박계의 탈당은 늦었지만 당연한 귀결이다. 새누리당 친박근혜 세력은 지난 4월 총선에 이어 국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 의결로 여론의 매서운 심판을 받았음에도 반성은커녕 민심을 거스르는 길만 걸어왔다. 이번 탄핵 정국에서도 뉘우치는 듯하다 틈만 보이면 이내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후안무치한 행태를 보였다. 막판에는 비주류에 비상대책위원장을 양보할 것처럼 하다가 뒤집는 치졸함까지 드러냈다. 총선이 3년 넘게 남았고, 촛불은 곧 사그라들 것이라는 근거 없는 기대감 등에 기댄 탓이다. 그러면서도 말로는 재창당 수준의 혁신과 변화를 통해 당을 재건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우택 원내대표가 탈당 의원들을 비판하면서 ‘유일 보수정당의 법통’ 운운한 것은 가히 시민에 대한 모독이다. 비박계의 탈당은 그나마 시민의 질타를 두려워하는 보수세력과 기득권에 젖은 비양심적 가짜 보수의 결별이다. 보수 내부의 싸움이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의 대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와 유승민 의원을 비롯한 비박계 의원들이 21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긴급 탈당 기자회견 후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이날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 31명이 '집단 탈당'을 결의하고. 탈당 시점은 오는 27일이다. 권호욱 선임기자

지난 총선과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은 반칙 없는 세상과 더불어 책임지는 정치를 요구했다. 극우적 세계관과 영남 지역주의를 벗어난 건강한 보수, 명예와 도덕이라는 보수적 가치를 중시하는 진정한 보수 정치세력을 시민들은 갈망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탈당파는 이 같은 새로운 보수에 대한 시민들의 욕구를 감지한 것으로 보인다. 수도권 의원들을 중심으로 부산·경남을 비롯한 전국 각 지역 의원들이 골고루 포진하고 있다. 수구적 이념과 지역의 한계를 넘어서는 진짜 보수당으로 발전하길 바란다. 앞서 탈당한 남경필 경기지사와 김용태 의원까지 가세하면 신당 추진은 더 탄력이 붙을 것이다. 탈당파가 중도보수 성향의 신당을 창당하면 정치권은 1990년 3당 합당 후 26년 만에 4당 체제로 바뀌게 된다. 다양한 정책의 대결과 함께 곧 있을 대선 정국에서 정책에 따른 연대 가능성도 커진다.

하지만 이들이 진짜 보수정당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과제를 풀어야 한다. 과거에도 보수당은 위기 때마다 새로운 보수, 진정한 보수를 표방했다. 이명박 정권 출범 전에는 뉴라이트라는 이름으로 보수의 혁신을 외쳤지만 결국 집권을 위한 한 편의 사기극으로 막을 내렸다. 보수의 정책과 가치에 충실한 정당이 아니라 파벌과 이권, 인물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구태의연한 모습을 연출했다. 이번 탈당도 대선용, 위기모면용이라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한국 정치사에서 보수당을 박차고 나간 정치세력이 성공한 예는 없다. ‘보수정당의 분열은 필패’라는 말이 있을 만큼 탈당과 신당 창당은 고난의 길이다. 그러나 낡은 체제의 극복과 진정한 보수정당의 필요성은 어느 때보다 크다. 흔들림 없이 보수의 가치를 추구하며 개혁을 한다면 한국 정치사를 새로 쓰는 진정한 보수세력으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막 닻을 올린 새누리당 탈당파의 실험을 주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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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차에 걸친 주말 촛불집회는 대통령 탄핵안 가결을 비롯해 많은 것을 이루어냈다. 지난 2개월간 정치는 여의도가 아니라 광화문광장에서 이루어졌다. 청와대와 부역자들이 여전히 파렴치하게 버티고 있으니 주말 촛불의 거센 파도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겨울의 한파를 뚫고 완전히 새로운 봄이 올 때까지 거침없이 나아가야 한다.

정치권은 여전히 그들만의 셈법으로 거센 파도의 끝자락에 슬며시 올라타 자신의 깃발을 꽂을 궁리를 하고 있으나, 광장의 시민이 4·19혁명, 1987년 6월항쟁의 한탄스러운 뒷마무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한 ‘죽 쑤어 뭣 주는’ 일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으리라 믿는다. ‘끝낼 때까지 끝나지 않은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촛불 이후에 대해 염려하고 있다.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중 하나는 ‘광장의 열기와 지혜를 어떻게 사회발전 동력으로 수렴할 것인가’이다. 지난 2개월간 광장정치의 특징은 3가지로 요약된다. ‘체제혁신에 대한 염원, 자기 조직화된 질서, 그리고 직접민주주의의 실험’이다.

제7차 촛불집회가 열린 지난 1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높이 8.5m의 촛불 트리가 세워졌다. 서성일 기자

첫째, 광장에서 표출된 체제혁신에 대한 불타는 염원은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참담한 과거에 대한 각성에서 온 것이다. ‘미래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아무도 생각하지 않고 이상적 미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미래는 갑자기 닥쳐와 삐거덕거리던 낡은 구조는 순식간에 작동을 멈추고 무고한 희생자가 양산될 것’이라는 섬뜩한 통찰로부터 온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속엔 세월호 참사, 사회 전반에 만연한 자살, 도탄에 빠진 청년들, 무한경쟁의 입시지옥, 그리고 나쁜 사람들이 출세하고 선한 사람들이 제거되는 구체제를 타파해야 한다는 열망이 불타고 있다. 광장의 혁신은 일상화되어야 한다.

둘째, 혁신에 대한 염원이 과거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한다면, 자기 조직화된 질서는 오늘의 지혜를 뜻한다. 평상시 같으면 동네 골목에서도 행인의 어깨를 거세게 밀치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광장에서는 약간의 실례에도 양해를 구한다. 빽빽한 지하철에서도 배낭을 등에 메고 남들에게 불편을 끼치던 사람들이 종각역, 광화문역에서는 배낭을 다소곳이 손에 든다. 어떤 힘이 광장을 특별하게 만든 것인가? 자발적으로 조직화된 열린 공간의 신성함,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 대한 존중, 그리고 사태가 이렇게 될 때까지 방치한 주권자로서의 자기 회한이 이런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관계의 질서와 지혜는 일상으로 침투해야 한다.

셋째, 대의정치에 대한 문제의식과 직접민주주의의 실험은 광장이 성취하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상이다. 광장에서는 ‘박근혜 퇴진’을 넘어서서 우리 자신과 후대의 삶을 어떻게 조직화할지에 관한 도발적이고 창의적인 제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광장과 주변의 열린 공간들은 정치, 문화, 교육, 복지, 통일 등 사회전반에 걸쳐 창발적인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을 강력하게 표출하고 있다. 직접적 참여도 일상화되어야 한다.

촛불 이후, 우리는 밑으로부터 창발한 광장정치의 특성들을 일상화, 내면화해야 한다. 광장에서 발아한 소중한 씨앗들을 우리의 삶 전반에 파종하자는 것이다. 박근혜와 부역자들이 물러나고 몇 가지 진실이 밝혀지면 된 것이라는 설익은 종결은 있을 수 없다. 민주주의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것이고, 늘 새로이 직조(織造)되어야 하는 것이다. 체제혁신에 대한 열망, 스스로 조직화된 질서, 직접민주주의의 거대한 실험을 계속할 수 있는 사회적 틀을 만들어내야 한다.

인구가 5000만명이 넘는 나라에서 직접적이고 지속적인 참여가 가능하겠느냐는 회의론이 있지만, 불가능할 것도 없다. 참여의 구조를 체계화하는 것은 고도로 발달한 우리의 네트워킹 기술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모든 시민이 삶의 1% 이상을 항상적으로 정치에 투자함으로써 올바른 정책을 제안하고, 실행에 관여하고 감시하며, 부패하고 무능한 자를 언제든지 소환하는 참여의 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삶의 1%를 미래에 투자하여 우리 아이들이 인간다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면 머뭇거릴 일이 있겠는가?

신좌섭 | 서울대 의대 교수·의학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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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만명이 연이어 나온 촛불집회에 참석했던 지인을 만났다. 지인은 필자에게 96%의 여론이 잘못을 지적하고 있음에도 박근혜 대통령의 잘못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 4%를 우연히 만난 경험을 이야기했다. 마치 아주 신기한 무엇을 만난 것처럼 소수의 고집스러움을 조롱하듯 이야기했다.

 

비슷한 이야기들은 지난 두 달여간 소셜미디어 등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여론조사에서 대통령을 비판하는 여론이 96%에 달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며, 나머지 4%의 고집스러운 단단함을 조롱하고 우리가 압도적 다수라는 자신감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일화들이다.

 

그런 이야기들을 접할 때마다 필자는 본능적으로 불편함을 느끼곤 했다. 압도적인 여론과 수백만명의 뜨거운 촛불로 나타난 시민들의 위대한 참여와 저항의 경이로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수 여론의 지지만으로 스스로의 옳음을 과도하게 확신하거나, 소수 여론을 조롱하는 현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들었다. 여론조사 결과가 그 자체로 우리의 정당성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촛불집회의 정당성, 그리고 박 대통령을 탄핵시키고 하야시켜야 한다는 주장의 정당성은 96%라는 여론조사 결과보다는 세월호 7시간의 문제, 지금까지 드러난 재벌과 정권이 결탁한 수많은 민주주의 파괴행위 등에 근거한다.

 

여론조사 결과는 현시점에서 우리의 주장과 의견이 얼마만큼 다수의 지지를 받는가를 확인해주는 참고자료일 뿐이다. 주제가 달라지면 언제든지 다른 숫자로 변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숫자’에 불과하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박 대통령은 60%에 가까운 지지를 등에 업은 지도자였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박근혜 정부가 추진했던 수많은 정책들이 정당한 것은 아니었음을 우리는 이제 너무 잘 알고 있다.

 

생각해보면 진보정당의 당원인 필자도 각종 선거 때가 되면 5%인 소수 여론의 입장에 서게 된다. 소수 여론에 서 있다고 해서 필자를 비롯한 진보정당 지지자들의 주장과 생각이 어리석거나 고집스러운 무엇이 되지는 않는다. 한 사회가 더 발전하고 아름다워지기를 바라는 다양한 정치적 의견의 일부로 인정받기를 희망하는 우리의 소수 여론이 조롱받을 무엇이 되어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사회갈등의 당사자들은 언제라도 4%의 고집스러운 소수의 위치에 서는 경험을 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때로 그것은 노동자나 다양한 경제적 약자들의 권리에 대한 외침일 수도 있고, 더 평등한 사회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 곰곰이 역사를 돌아보면 공동체의 평등과 진보를 희망하던 목소리의 대부분은 4% 미만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4%는 후일 위대한 첫걸음이 된 경우가 많았다.

 

어쩌면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는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인류가 발명해낸 유용한 껍데기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전 대선후보에게 영감을 준 미국의 사회운동가 사울 D 알린스키는 저서 <급진주의자여 일어나라>(생각의힘)에서 ‘민주주의는 일종의 생활양식이지 젤리처럼 보존되어야 할 무엇이 아니다’라고 일갈했다.

 

그는 그리고 ‘반대파들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이의를 제기하고 숙고하지 않는 인생에 대한 소크라테스 금언의 참가치를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 진보를 향한 끊임없는 저항의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촛불로 지켜낸 민주주의라는 생활양식과 정치체제의 안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는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과 논쟁을 통해 결정된다. 지금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96%라는 여론조사 결과의 의미는 시민들이 지켜내고자 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어떤 형식과 절차일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그 형식과 절차의 내부를 채울 새로운 내용들을 결정하는 정치적 의견의 경쟁의 장에서 우리는 4%짜리 의견들에 더 주목해야 할지도 모른다. 마치 지난 몇 달간 각자의 촛불의 크기와 색깔이 모두 달랐던 것처럼.

 

시민들은 곧 다가올 대통령 선거에서 각각의 대선주자 지지율에 따라 자신들이 서 있는 곳의 여론지형을 새롭게 체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감히 분열이라 말하지 말자. 상대를 소수라고 비난하고 조롱하거나,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조금 더 다수라고 과도하게 자신하지 말자.

 

오히려 그 과정을 통해 언제든 우리가 공동체 내 여론의 소수일 수 있음을 깨닫고, 그럼에도 공동체를 더 아름답게 만드는 가치들을 키우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 열린 광장의 시민이 되기를 희망하자.

 

조성주 정치발전소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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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리우올림픽은 박태환에게 기회의 땅이 되지 못했다. 그는 주종목인 400m는 물론이고 200m와 100m에서도 예선 탈락하고 만다. 마지막 남은 1500m는 연습 부족을 이유로 기권했으니, 8명이 오르는 결선에는 단 한 번도 오르지 못한 채 귀국하는 신세가 된다.

다들 알다시피 그는 2014년 아시안게임을 두 달 앞두고 금지약물인 ‘네비도’를 투여받았고, 이 사실이 적발됨으로써 아시안게임 메달 박탈과 더불어 1년6개월간 국제대회 출전이 금지되는 징계를 당한다. 박태환은 줄곧 “비타민제인 줄 알았다”고 주장하고, 주사를 놔준 의사를 고소까지 하는데, 어려서부터 국제대회를 숱하게 치른, 그리고 올림픽 금메달까지 딴 선수가 네비도가 금지약물임을 몰랐다는 것을 난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박태환은 시종일관 억울하게 당했다고 주장한다. 그가 기자회견 때 눈물을 흘리며 했던 “고의성 여부를 떠나 대표선수로서 이런 결과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한다”는 말에는 정작 진심 어린 반성이 없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억울하게 당했는데 대체 뭘 반성한다는 것일까. 그럼에도 그는 이런 식의 언론플레이를 계속했는데, 이는 전적으로 우리 국민을 믿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몰랐다고 말하면 믿어주는 이들이 있을 테니까. 과연 그랬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대한체육회 규정 때문에 박태환의 리우행이 좌절될 위기에 처하자 여론이 들끓었다. 70%가 넘는 이들이 박태환에게 기회를 주자는 데 찬성했다. 재판 결과 의사에게 벌금형이 내려졌으니 박태환이 모르고 먹은 게 확실하며, 모르고 먹었는데 무슨 ‘약쟁이’냐는 게 그들의 논리였다. 약을 먹은 선수들이 하나같이 ‘몰랐다’고 주장하는지라, 국제수영연맹은 모르고 먹은 이도 공평하게 약쟁이로 규정하고 있다는 주장도 그들에겐 통하지 않았다. 화룡점정, 마지막 쐐기를 박기 위해 박태환은 올림픽을 석 달 앞둔 시점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바닥에 넙죽 엎드려 기회를 달라고 호소한다. 그는 그 이전에 이미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우리나라가 부당하게 선수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취지로 제소해 놓은 상태였기에 그런 퍼포먼스가 필요 없었지만, 그를 응원하는 국민들을 위해서 이는 꼭 필요한 행위였다.

그가 이렇게 해서까지 리우에 가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추정컨대 국가에 대한 봉사가 아닌, 개인의 명예회복이 더 컸을 것 같다. 리우에 못 가면 약쟁이로 은퇴해야 하지만, 올림픽에 나가 동메달이라도 따면 약을 먹은 전력은 인간승리의 멋진 재료가 되니까 말이다. 안타깝게도 박태환의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연습 부족도 이유가 되겠지만, 수영선수로서는 환갑에 달한 그의 나이로 보아 열심히 연습했다 하더라도 메달은 힘들었을 것이다. 리우에서 쓸쓸히 귀국하던 날 박태환은 여론의 뭇매를 맞아야 했다. 일부 언론이 보내주기만 하면 메달이라도 딸 것처럼 기대감을 높여놓은 탓이었다. 불세출의 수영영웅이 이렇게 퇴장하나 싶었지만, 그에게는 다시 한 차례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름하여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로, 최순실이 박근혜 대통령과 공모해 국정을 농단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워낙 광범위한 분야를 섭렵했지만, 최순실이 특히 공을 들인 분야는 자신의 딸이 활약하는 문화체육관광부였다.

“박태환 선수, 오해해서 미안해요.” 최순실과 특히 친한 김종 전 차관이 박태환에게 올림픽 출전 포기를 종용했다는 기사에 달린 댓글이다.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를 생각하면, 그리고 박태환이 그간 쌓은 업적을 생각하면, 이런 반응은 충분히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채널A의 보도에 따르면 박태환 측의 관계자가 “박태환 선수가 자신도 모르게 남성호르몬 주사를 맞게 된 게 최순실씨와 관련이 있는지 수사해 달라고 요청”했단다. 무슨 말일까? 최순실이 자기 딸 정유라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만들기 위해 의사를 매수해 박태환에게 네비도 주사를 놨다는 것이다. 심지어 김연아가 2014년 소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못 딴 것도 다 최순실의 음모라는 얘기까지 나돈다. 너무 어이없는 소설이라 웃어넘기려 하다가 주렁주렁 달린 댓글이 눈에 밟혔다. 눈물이 나려 한다느니, 못 지켜 줘서 미안하다느니, 수많은 이들이 저 루머를 믿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죄다 사실로 확인되고 있는 게 요즘 시국이긴 하지만, 이 루머는 너무 나갔다. 더 이해가 안 가는 건 박태환의 태도다. 자신이 기자회견장에서 보인 눈물에 일말의 진심이 담겨 있다면, 김 전 차관에게 협박당한 것과 자신이 맞은 네비도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해명해야 옳다. 하지만 그는 이런 루머에 기댐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단 한 순간도 사익을 추구한 적이 없다”고 한 박 대통령의 담화는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의 숫자만 늘어나게 했을 뿐, ‘사생활’을 중시하는 그녀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지 못했다. 박태환은 물론 박 대통령과 차원이 다른 사람이지만, 이것만은 깨달았으면 한다. 진정한 명예회복은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반성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말이다.

서민 | 단국대학교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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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을 훌쩍 넘어 계속되는 촛불집회에서 관심을 모으는 것 중 하나는 청소년의 참여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교복을 입고 집회에 참여하여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펼친다. 이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미안하다’고 되풀이하거나, ‘기특하다’거나 ‘어른들보다 오히려 낫다’고 격려한다. 그런데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청소년들 중에는 이런 이야기가 별로 기분 좋지 않다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왜 그런 것일까?

말한 사람이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청소년들에게는 이런 말들에 ‘너희는 아직 어리다’라는 의미가 깔려 있는 것으로 비쳤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청소년이 미성숙한 존재라고 강조해 왔다. 그래서 어른의 ‘지도’를 받아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 청소년이라고 여겨왔다. 촛불집회 참여 학생들이 말하는 것처럼 청소년은 3·1운동,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4·19혁명 등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을 확산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학교 역사교육은 이 사건들을 비중 있게 다루면서, 이에 참여한 청소년을 불의에 항거한 깨어있는 존재로 자랑스럽게 그린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청소년은 ‘미성숙한 존재’라고 인식되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정치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되며, 사회문제에 자기 의견을 내서는 안되는 존재로 여겼다. 학생들은 학교가 정해주는 교칙에 따르고, 대학 진학을 위해 밤늦게까지 야간자율학습에 열중하는 ‘모범생’이 되도록 요구받았다. 학교의 ‘정치’ 과목은 민주주의의 원리를 가르치고 참여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정작 민주사회를 만드는 데 청소년이 나서는 것은 ‘정치적’이라는 구실로 금기시했다. ‘청소년은 자기 삶의 주인이다. 청소년은 인격체로 존중받을 권리와 시민으로서 미래를 열어갈 권리를 지닌다. 청소년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며 활동하는 삶의 주체로서 자율과 참여의 기회를 누린다’는 청소년헌장의 내용은 문서 속에만 존재했다.

청소년단체인 ‘중고생연대’ 소속 회원 등 10대 청소년들이 지난 19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박근혜 대통령 하야 촉구 집회’를 열고 있다. 정지윤 기자

학교와 사회의 이런 태도는 많은 청소년으로 하여금 그들이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에 고등학생들이 참여했지만 계속 이어지지 못했고, 1987년 6월 민주항쟁에서도 청소년은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청소년들은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두 여중생이 깔려죽은 사건에 촛불을 들었고, 2008년 ‘광우병 파동’ 당시 촛불집회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도 성인들은 이들을 어리다는 이유를 들어 시민사회와 격리시키려고 했다.

청소년은 학생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시민이다. 어른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미성숙한 존재가 아니라 자기 생각을 가지고 행동을 하는 사회 구성원이다. 더 배우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 사회문제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존재라는 의미는 아니다. 시민으로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의견을 내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다. 그러기에 오히려 청소년이 사회적 관심을 가지고, 사회적 의사결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청소년은 사회의 미래’라는 말은 단지 그들이 연령이 높아져 앞으로 어른이 된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민주주의 훈련을 받은 청소년이 앞으로 합리적이고 비판적 사고를 바탕으로 사회를 이끌어 가리라는 기대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한 민주시민 교육을 받은 청소년들이 성장했을 때 한국사회의 진정한 민주주의는 이룩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 한국사회가 지금과 같은 문제에 부딪힌 원인 가운데 하나는 청소년 시기부터 사회참여를 위한 민주주의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촛불집회에 청소년의 참여가 늘자 새누리당의 일부 국회의원이나 보수우익 인사, 언론 등에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불순분자’의 개입이나 전교조 관련 단체의 동원을 들먹인다. 오로지 종북이나 좌편향, 전교조 탓으로만 돌리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이제 너무도 식상하다. 더 큰 문제는 청소년을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촛불집회에 참가한 청소년은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요구를 넘어서서 19세 이상에게만 선거권을 주는 어른들, 그리고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바꾸려고는 하지 않고 무한경쟁에서 이겨야만 살아남는다고 가르치는 사회에 분노를 표한다. 자신을 억압하는 사회와 주변 사람들에게 항의한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며,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함께 만들자고 요구한다. 이념과 좌편향 타령에만 매달리는 일부 어른들에 비하면, 훨씬 더 성숙한 사고이다.

김한종 |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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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낮이었다. 길을 걸으면서 한 낱말을 되뇌었다. 모르는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처음 들은 말인 양 계속 중얼거렸다. 머금다, 머금고, 머금으며…. 그러다 그만 턱이 진 길에서 발을 헛디뎠다. 등에 배낭을 멘 채 앞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두 무릎이 얼얼했다.

2014년 4월16일에 딸을 잃은 엄마로부터 “우리는 머금고 사는데…”라는 말을 듣고 헤어진 뒤였다. 그 말이 그렇게 힘들고 아픈 말일 줄 몰랐다.

그이는 ‘빈자리’도 말했다. 딸과 아들, 부부, 해서 늘 네 자리였다. 집에서 마주앉는 식탁에서도, 외식을 할 때도 네 자리. 그러나 그날 이후 다시는 채울 수 없는 빈자리가 생겼다. 빈자리는 물리적인 공간만이 아니다. 그 사람이 아니고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그 사람의 자리, 딸 자리, 누나 자리, 친구 자리…. 모든 자리가 사라졌다. 딸아이와 의견이 달라 부딪쳐도 먹는 입맛이 비슷해 금방 풀고, 함께 옷을 사러 가는 일도 즐거웠다는데 이젠 그럴 자리가 없다. 무엇보다 딸에게 “네 꿈을 활짝 펼쳐나가라”며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일이 행복했건만 딸 자리를, 엄마 자리를 빼앗겼다.

6차 촛불집회가 열린 3일 청와대에서 100m 떨어진 서울 종로구 효자치안센터 근처 경찰버스 차벽 앞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이 희생된 아이들의 얼굴이 새겨진 보자기를 두른 채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외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엄마는 ‘사소한 행복을 꿈꿨던 아이들’이라 말했다. 딸이 단짝과 함께 종이 가득 빽빽하게 적은 버킷리스트를 사람들에게 꼭 알리고 싶다고 했다. 사소한 행복을 꿈꾸던 아이들을 으스러뜨린 한국사회와 이 정부 모두에게.

한 아빠는 ‘가장 슬픈 사진’을 말했다. 스마트폰 대기화면에서 딸은 구명조끼를 입고 기다렸다. 차분했다. 당연히 구조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사진 속 학생들의 모습만 보아도 그때 거기, 구조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빠에게는 딸의 사진 가운데 가장 기쁜 사진과 가장 슬픈 사진이 있다 했는데 가장 슬픈 사진을 스마트폰 첫 화면에 담은 건, 어쩌다 잠시라도 잊지 않겠다는 약속일까.

어떤 엄마는 자신에게 ‘전부였던 아이’를 말했다. 전부인 아이가 가고 나니 세상을 온통 다 잃은 듯하다 했다. 세상에 대고 아이를 자랑하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남이 흉볼까 나중에 더 크면 해야지, 미뤄두고 참았건만 그 자랑, 전부를 쏙 앗겼다.

다른 엄마는 ‘생일’을 말했다. 돌아온 딸의 생일, 너무 힘들었다 말하는데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실컷 울면 좀 나을까 싶지만, 어린 막내가 볼까 맘껏 울 수도 없었다. 한 해 365일 하루하루는 세월호에서 희생된 304명이 세상에 왔던 하루하루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전율’이라 말했다. 딸을 잃은 딸은 부모 앞에서는 슬픔을 드러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가 잠든 추모공원을 찾아가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율을 하면서 울었다.” 그러고도 눈물이 차고 넘치는 날이면 딸은 새벽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다 눈이 퉁퉁 부은 채 출근했다.

할머니가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의 그리움을 말했다. “17년을 살면서 식구들과 떨어져 지낸 게 길어야 하루 이틀이고, 그럴 때도 집에 오고 싶다고 그랬던 아이인데, 이렇게 오래 가족 곁을 떠나 얼마나 식구들이 보고 싶겠어요, 집에 오고 싶겠어요.” 언제든 왔다 가라고, 잠시라도 쉬었다 가라고 손녀의 방문을 늘 열어둔다. 책상도, 책상 위 컴퓨터도, 책꽂이의 책도, 좋아하던 기타도, 액자 속 사진도, 서랍장 안 즐겨 입던 초록빛 스웨터도 다 그대로다. 주인 없는 빈방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부르며 달려 들어올 듯한 방이다.

어느 엄마는 ‘이름’을 말했다. 불러도 대답하지 않을 게 분명한데 불러보고 싶다 했다. 2015년 3월30일 월요일 오후 7시39분, 청와대 인근 청운동사무소 맞은편 푸르메재단 앞에서 연좌농성에 들어간 엄마, 아빠들이 몇 번이고 외쳤다. “내 새끼 보고 싶다!” 마지막 외침 뒤에는 다들 목메어 울었다.

지난주 토요일, 이제까지 가로막혔던 청와대 가는 길을 한 걸음 더 나아갔다. 304명을 구하지 않은 책임만으로도, 진실을 규명하라는 이들을 외면한 것만으로도 대통령은 옳지 않다. 6차 촛불집회, 여기저기 광장이 된 곳에서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말했다. “박근혜를 구속하라!”

박수정 |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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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반도 남쪽에서는 일찍이 세계정치사에서 본 일이 없는, 그리고 앞으로도 있을 것 같지 않은 시민혁명이 벌어지고 있다. 벌써 한 달이 넘게 매 주말 10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 새로운 정치질서를 외치고 있다. 입으로는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고 있지만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만약에 이 거대한 시위가 통치능력이 없는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면 한국인은 그저 데모나 잘하는 국민으로 세계사에 기록될 것이다.

지난 총선에서 국민은 야당을 다수당으로 만들어주었지만 이들이 집권한다고 해서 새로운 정치질서가 들어설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며칠 전에도 대통령이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려고 법리에도 맞지 않은 제안을 던지자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의원들을 보고 촛불민심은 믿을 게 자신뿐이란 것을 더욱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말이 국민의 대변자이지 사실은 기존의 정치구도 안에서 어떻게든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그야말로 악마와도 손을 잡는 무리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의원들도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척박한 환경 속에서 제 뜻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시나브로 사라지고 만다. 이런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집권당과 그 수족인 권력기관들은 야당을 마음대로 주물러가며 반세기 넘게 부패한 권력구조를 유지해 왔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정치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정치란 현실이고 타협”이라고 대답한다. 맞다. 문제는 너무 쉽게 원칙을 저버리고 타협한다는 것이다. 김영삼의 ‘3당 합당’이 그랬고, 김대중이 김종필의 손을 잡은 것이 그랬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면서 ‘삼김시대’가 끝났다고 말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제5차 민중총궐기대회가 열린 11월 2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보이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금 야당은 물론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중심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다 삼김의 정치적 적자이거나 그 문하생들이다. 물론 박정희를 비롯해 삼김은 모두 위대한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이다. 경제 강국 대한민국의 약진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피와 땀의 결정체이지만 그들의 리더십에 힘입은 바도 크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지나친 권모술수와 밀실야합, 지역할거 구도는 한국정치를 막다른 길로 몰아세우고 말았다. 모든 정보가 빛의 속도로 오고 가는 시대와는 도무지 맞지 않는 정치유산을 끌어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시민혁명이 일어난 배경이고 또 청산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사실 지금의 시민혁명 과정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제1야당의 문재인 전 대표이다. 공정한 선거관리가 이루어졌다면 어쩌면 그가 청와대의 주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어제 광주에서 “촛불을 계속 들어 시민혁명을 완성하자”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정작 촛불집회에 가서는 자유발언의 기회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미리 예언하지만, 이 작은 사건의 의미를 제1야당 지도부가 이해하지 못하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시민혁명이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시민혁명은 시민들의 힘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혁명 정세는 대단히 특이하다. 지난 세기에 있었던 혁명처럼 인민들이 피를 흘리며 싸워야 하는 분위기도 아니고, 국가의 공권력이 건드리면 무너질 정도로 허술한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다 짱짱한데 오직 정치적 리더십만 부재한 상황이다. 이 난국을 만든 책임이 있는 청와대와 집권여당은 재집권보다는 살아남기에 더 급급할 것이고, 야당은 탄핵만 성사되면 자동적으로 집권할 수 있으려니 하겠지만 촛불민심은 여야를 떠나 새로운 정치질서를 요구하고 있다.

문제는 이 순간 가장 강력한 권력인 촛불세력이 제도권 밖의 존재이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한시적인 집합체인지라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누구는 바람만 불면 꺼질 것이라고 하고, 누구는 거대한 쓰나미이니 거기에 얹혀 권력을 한 번 잡아보자고 한다.

다 틀렸다. 틀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나라의 정치발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은 관점이다. 만약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이 시민혁명의 의미를 정확히 읽어내어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어내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먼저 촛불시민 세력은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대의 또는 소통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이름이야 어떻게든 붙여지겠지만 일단은 그냥 ‘시민권력’이라고 하자. 의회는 여야 협상을 통해 시민권력을 국정의 파트너로 인정하는 한시적인 법을 제정해야 한다. 행정부와 사법부는 시민권력과 의회가 지정한 비상거국내각이 통할한다. 물론 이 아젠다는 시민들이 계속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온다는 가정하에 성립할 것이다.

지금의 촛불집회는 하루아침에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멀리는 4·19혁명에서 광주민주항쟁과 87년 6월 항쟁, 그리고 2008년 광우병 파동을 거쳐 진화를 거듭해 온 것이다. 한때 한국의 시위에는 화염병과 최루가스가 난무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비폭력 평화시위 기조가 확고히 자리 잡았다. 축제의 요소까지 곁들어져 외국인 관광객들도 안심하고 참여하는 문화상품으로 인식될 정도이다. 가히 한국의 시위문화는 세계 최고의 수준과 선진성을 자랑한다. 이러한 시위문화를 일궈낸 한국의 시민들이기에 비록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국면이 계속된다 하더라도 기어이 혁명을 완수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명언이 있지 않은가!

황대권 | 생명평화마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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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적으로 정의한다면, 정치란 사적 이익을 공적 이익으로 포장 또는 승화하는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역으로 공적 이익을 사적 이익으로 만들었다. 적과 동지를 가르는 이분법의 정치에만 몰두했던 박근혜 대통령은 최소한의 포장마저 걷어냈다. 공인 박 대통령이 추구했던 사적 이익이 날것으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3차 대국민담화에서 박 대통령은 “이번 일”이란 애매한 말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얼버무렸다. “단 한순간도 저의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고 작은 사심도 품지 않고 살아왔”다고 말하는 대통령이, 왜 자신의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다고 하는지 담화문에서는 그 이유를 알기 어렵다. 대통령직의 최대한 연장 또는 구속을 면하는 안전한 퇴진을 위해, 즉 무엇보다도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 시간 벌기를 하겠다는 말로 읽힌다. 다시금 사적 이익에 골몰하는 공인 박 대통령이 아닌 사인 박근혜를 보게 된다.

지금 여기서 진행되는 국가권력의 사유화에 저항하는 시민혁명의 와중에 정치에 대한 냉소적 정의를 부르게 된다. 광장에 모인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정치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려는’ 또는 ‘못하는’ 우리 시대 혁명의 한 특징 때문이다.

일단, ‘않으려는’에 주목한다. 100만명 이상이 참여하는 비폭력 평화시위는 인류역사에서 상상하기 힘든 사건이다.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정치적 시위가 곧 축제가 되는 전변이 계속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촉구 '6차 촛불집회'가 열린 3일 횃불과 촛불을 든 시민들이 서울 광화문 광장과 시청광장 일대를 출발해 청와대로 향하고 있다. 정지윤기자

2008년의 촛불집회처럼 전위와 대중, 지식인과 민중, 활동가와 시민의 이분법도 없다. 주최 측이 있다면, 광장의 정치를 준비하는 일꾼들이지 그들이 자유로운 개인들의 대표는 아니다. 그들을 대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표가 있어야 광장이 탄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광장에 참여하지 못하거나 또는 광장에서 사적 이익의 실현을 고민하는 낡은 보수·진보세력뿐이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네트워크인 ‘반(反)국가적 국가’ ‘시민국가’ 만들기라는 미답의 길을 우리는 걷고 있다.

그러나 ‘못하는’의 한계가 암초처럼 우리의 항해를 방해하고 있다. 시민혁명이 외치는 공인 박 대통령의 퇴진은, 대통령이 스스로 사의를 표명하는 사적 결정이 아니라 제도적 절차를 거쳐야 하고, 따라서 제도정치를 통과해야 한다. 사인 박근혜는 3차 대국민담화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지점을 예리하게 인지하고 있다. 선출된 권력인 대통령의 직무를 중단케 하는 결정은 선출된 대표기관인 의회의 탄핵이어야 한다. 명예로운 퇴진은 정치적 수사일 뿐이다. 여야 담합을 통해 대통령의 퇴진을 결정하는 것은 탈법적인 정치적 행위다. 탄핵이 의제로 강제되자 다양한 정치세력들은 사적 이익을 고려하며 정치적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시민혁명이 새 헌정을 창출하려 하지 않고 그 능력도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 계산기만이 작동한다.

박 대통령의 퇴진을 상수로 해서 자신들의 정치권력 장악이란 사적 이익에 유리한 정치일정을 공학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우리는 이 공학의 난무를 목도한다. 각당 내 다기한 세력들의 셈법이 매일매일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물론 나는 이 욕망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려 한다. 그러나 어떤 세력이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공적 이익으로 잘 포장하고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시민혁명의 명령을 의회가 거부할 경우, 시민혁명은 의회를 탄핵하는 강을 건널 것임을 그들은 알아야 한다. 박 대통령이 직무정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한·일 군사협력과 같은 사익 추구적 정책을 결정하는, 광장의 시민과 완벽하게 유리되어 작동하는 또 하나의 ‘비선국가’의 작동을 막기 위해서도 대통령 탄핵은 필수적이다.

지금 여기서 시민혁명의 최소 공통분모는 박 대통령의 퇴진이다. 우리는 시민혁명을 관전하며 지배연합의 재편성을 통해 시민혁명의 성과를 약탈하려는 세력에 맞설 수 있어야 한다. 반국가적 국가, 시민국가를 지향하는 광장의 자유로운 개인들이 대통령 퇴진 이후를 위한 반걸음, 아니 100분의 1 정도의 앞선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면, 모든 혁명의 다음이 그렇듯 반동을 맞이하게 된다.

박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하는 ‘박근핵닷컴’만큼 탄핵 이후를 생각하는 ‘박근혜이후닷컴’을 준비할 수는 없을까. 형식주의적이어도 좋다. 이른바 지도를 자임하는 낡은 세력들이 위에서 아래로 부과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지향하는 바를, 시민혁명의 정수를, 시민혁명의 최소 공통분모를 간결한 몇 가지 원칙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해 본다.

구갑우 |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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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6차 촛불집회에 230만명이라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원이 참석했다. 자발적으로 나온 시민들이 서울과 부산 등 전국 67곳의 거리를 가득 메웠지만 불상사는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지난 10월29일 2만명으로 시작한 촛불집회가 1987년 6월항쟁을 뛰어넘는 규모로 커졌고, 갈수록 더 크게 타오르고 있다. 평화와 질서를 지키면서 대통령과 정치권을 질타하는 한국 시민들의 촛불집회를 전 세계가 경탄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6차 주말 촛불집회가 열린 3일 오후 촛불을 든 시민들이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를 가득 메우고 있다. 이날 집회를 주최한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은 이날 오후 9시30분까지 서울에 170만명, 전국적으로는 232만명이 운집했다고 밝혔다. 사진공동취재단

촛불의 지향은 분명하다.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와 불평등, 그리고 정치의 비효율과 무능 등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다. 당면 과제인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넘어 낡은 체제의 교체를 시민들은 요구하고 있다. 이런 집회가 사상 최대 규모로 커진 것은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 한 절대 촛불을 끌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촛불집회의 성과는 이미 현실화됐다. 무능한 정치권을 대신해 정치를 선도하고 있다. 정치적 타산에 젖은 야당의 대오를 하나로 묶어내고, 탄핵과 명예퇴진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새누리당 비박근혜계를 다잡고 있다. 새누리당 비주류는 어제 기존 입장을 바꿔 박 대통령이 내년 4월 퇴진을 못 박아도 9일 탄핵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촛불 시민들은 또한 경찰 등 공권력이 제약해온 집회·시위의 자유도 이끌어냈다. 자발적인 통제로 평화집회를 이뤄내며 수십년간 봉쇄당했던 청와대 앞 집회를 실현했다. 이런 시민의식이라면 박 대통령 탄핵 이후 무질서를 걱정하는 것은 기우다. 국정 공백이나 경제에 미칠 악영향 등도 충분히 넘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쳐난다. 6차 집회에서 시민들은 박 대통령을 향해 새로운 구호를 외쳤다. 즉각 퇴진에서 한발 더 나아가 대통령의 구속을 요구했다. 임기단축이라는 꼼수로 공을 국회로 떠넘기고, 대구 서문시장 방문을 통해 정치적 복귀를 꾀한 데 대한 응징이다. 과오를 반성하지 않는 최고권력자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을 거침없이 표출했다. 보수 대오를 유지하면서 대선을 준비할 시간을 벌어보겠다는 새누리당을 향해서는 즉각 해체를 요구했다. 새누리당은 어제 뒤늦게 “열번이고 백번이고 끝없이 반성하고 국민에게 사과와 용서를 구한다”고 했다. 이 역시 촛불의 힘이다. 대안세력이 되지 못하는 무능한 야당도 날서게 비판하고 있다.

국회의 국정조사와 특검의 개시, 탄핵안 표결 등 한국의 정치를 바꿀 운명의 한 주가 시작됐다. 촛불 앞에서 얄팍한 정치적 계산은 무의미하다. 시민들의 뜻은 박 대통령을 한시도 더 이상 그 자리에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이 금주중 퇴진 시기를 명확히 밝히면 탄핵안 가결이 불투명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탄핵안 부결은 곧 박 대통령에 대한 면죄부가 될 것이고, 그러면 특검의 조사도 무력화된다. 그때 촛불 민심이 어떻게 표출될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제도권 정치가 모두 불신임당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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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유가족들이 청와대 100m 앞까지 다가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세월호 사건 진실 규명과 박근혜 대통령 퇴진 구호도 외쳤다. 지난 3일 열린 6차 촛불집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유가족들의 청와대 앞 시위는 사건 발생 이후 처음이다. 이날 전국에서 촛불을 든 230만 시민이 유가족들의 든든한 원군이었다. 전명선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은 “그동안 한번도 못 온 곳인데 시민들과 함께할 수 있어 기쁘다.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가족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한 것에 답변 한번도 없다. 그에 대한 사과, 꼭 받아내겠다”고 말했다. 유가족들은 그동안 박 대통령 면담 등을 요구하며 광화문 일대에서 수백일간 농성을 하고 집회를 열었지만 경찰에 가로막혔다.

6차 촛불집회가 열린 3일 청와대에서 100m 떨어진 서울 종로구 효자치안센터 근처 경찰버스 차벽 앞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이 희생된 아이들의 얼굴이 새겨진 보자기를 두른 채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외치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박 대통령은 그동안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해 무성의와 외면으로 일관했다. 박 대통령은 참사 당시 진도 팽목항을 찾아가 유가족들 앞에서 마지막 한 사람까지 구해내겠다며 눈물을 흘렸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유가족이 원하면 언제든지 면담을 하겠다고 했지만 이 역시 말뿐이었다. 사건 발생 한 달 뒤인 2014년 5월16일 유가족 대표와의 면담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후로는 오히려 유가족들을 사회적으로 따돌림하는 일에 골몰했고 세월호특별법과 특별조사위원회도 무력하게 만들었다. 유가족들의 마지막 바람이라 할 수 있는 세월호 선체 인양은 언제 이뤄질지 기약도 없다.

세월호 사건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불가분의 관계다. 게이트 정점에 참사 당일 박 대통령의 7시간 행적 의혹이 있다. 전 국민이 TV 생중계로 배가 가라앉는 장면을 보고 있었지만 박 대통령은 출근도 않고 숙소인 관저에서 시간을 보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 참모들도 공범이나 다름없다. 박 대통령이 짧게는 3분, 평균 20분 간격으로 쉼없이 상황을 점검하고 필요한 지시를 내렸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그랬다는 박 대통령은 7시간 만에 나타나 “구명조끼를 학생들이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 하는 뚱딴지같은 말을 했다.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수첩을 보면 김 전 실장은 ‘대리기사 폭행’ 건에 검찰의 엄정 수사를 주문하는 등 유가족과 야당 의원을 범죄자로 내몰아 상황의 반전을 꾀했다. 박영수 특별검사는 박 대통령의 7시간 의혹도 수사 대상이라고 말했다. 당연한 판단이다. 유가족들의 한과 시민들의 트라우마를 해소하지 못하는 수사는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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