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째 아내는 발뒤꿈치가 아파 제대로 걷지 못했다. 족저근막염이라고 진단이 나왔는데 집에서도 발바닥이 편한 운동화를 신어야 한다. 촛불집회에 나가지 못해 좀이 쑤시던 아내가 내게 따져 물었다. “100만 촛불이니 230만 촛불이니 하지만 거리에 나간 촛불만 세는 건 아니라고 봐. 광화문에 나가진 못해도 마음속에 촛불을 켜는 나 같은 사람들은 왜 빼놓는 건데.” 듣고 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다. 집, 가게, 공장에서 타오른 ‘국민 촛불’까지 염두에 두면 숫자는 무의미해진다.

탄핵소추안 통과 이후 촛불의 방향에 대한 제안이 쏟아지고 있다. 지역 민회를 구성하자는 움직임도 있고, 국회의원 국민소환제와 국민발안제 도입을 내세우는 쪽도 있다. 촛불 시민혁명의 역사적인 의의를 짚는 토론도 시작됐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결국 하나의 물줄기로 모일 것으로 보인다. 촛불로 응집된 민심을 한국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모순과 부조리까지 바로잡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촛불은 비정형이며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해 보인다. 이번 촛불을 ‘녹색 촛불’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시종일관 유지된 비폭력과 집회 후 쓰레기를 청소하는 시민들의 배려심 때문만은 아니다. 녹색은 독점과 배제, 뻔뻔함과 거짓, 오만과 독단과 상극을 이룬다. 국가권력의 사유화와 정경유착에 분노하는 촛불, 국민이 공화국의 주인임을 밝히는 촛불은 그 자체로 생태적이다. 촛불은 스스로 제 몸을 태워 세상을 밝힌다. 100만분의 1이라도 되겠다고 추위에도 아이들 손을 잡고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바로 그 모습이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대통령 퇴진 촉구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촛불과 휴대전화로 빛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촛불이 녹색인 이유는 더 있다. 그건 광장 바깥에서 켜졌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촛불을 보면 안다. 대표적인 사례는 전국 최악의 대기오염물질 배출 지역인 충남 당진에서 켜진 촛불이다. 지난 5일 시민들은 신규 석탄화력발전소 유치 찬반 주민투표를 추진하겠다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주민투표를 ‘기업 이익을 위해 주민의 생명과 건강을 등한시한 채 몇 푼의 가산금으로 지역을 분열시키고 주민을 현혹하는 정부의 불통행정에 맞선 주민자치운동’으로 규정한 점이 눈에 띈다. 이 촛불은 재작년과 작년에 연이어 진행된 삼척과 영덕의 원전 유치 찬반 주민투표에서 켜졌던 촛불이 옮겨붙은 것이다.

또 다른 녹색 촛불은 지난 1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켜졌다. 장병완 의원이 대표 발의한 전기사업법 일부개정 법률안을 가결한 것이다. 법률안은 “전기판매사업자는 발전원별로 전력을 구매하는 우선순위를 결정할 때 경제성, 환경 및 국민안전에 미치는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야 한다”고 명시했다. 전력시장은 그동안 연료비가 가장 싼 발전소부터 가동하는 경제급전 방식에 따라 원전, 석탄, LNG 순으로 발전소를 가동해 왔다. 법사위와 본회의를 통과하면 안전성이나 미세먼지 등 환경영향에 눈감아 온 부조리한 관행을 뿌리 뽑을 수 있게 된다.

국회에 켜진 녹색 촛불은 또 있다. 지난달 14일 홍영표 의원은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의 획기적인 감축을 위한 ‘미세먼지 대책 4대 패키지 법안’을 발의했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석탄발전설비의 발전량을 국내 총발전량의 30% 이내로 제한하는 전기사업법 개정안이 단연 눈에 띈다. 현재 40%가 넘는 석탄발전 비중을 낮춰 미세먼지와 탄소 배출을 줄이자는 것이다.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이후 촛불이 동력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그럴 가능성이 커 보여 조바심이 들기도 한다. 언젠가는 광장에서 촛불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광장이 빈다 해도 쓸쓸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다. 이미 국민들의 마음속에 켜진 수천만개의 녹색 촛불이 있으니 말이다.

안병옥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시민환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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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앞 자유발언대 트럭에 선 초등학교 5학년 아이와 진주의 19살 젊음이의 명징한 정치발언, 민회나 시민평의회 논의 등을 보면 오늘의 광장은 촛불만 밝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보지 못한 정동(情動)의 정치가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요즘 일본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담론화되고 있는 ‘스트리트의 사상’(모리 요시타카), 그리고 분노의 정동이 자본과 권력에 의한 ‘하이재킹 당하는’(이토 마모루) 국면과도 다르다. 타격 대상에 대한 즉각적인 정치적 단죄를 이루고 아래로부터 정치사회를 구성해 가고자 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직접정치 실험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돌이켜보면 박근혜 수구체제는 ‘잘살아보세’의 유신망령과 허구적 복지담론을 한국 사회가 허용한 결과이다. 미국발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권이 신자유주의 자본축적 체제를 강화하고 민중적 삶을 보편적 피해상황으로 내몰았지만 한국 사회는 대안체제를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 국정농단 사태가 아니더라도 노동자 민중과 청년실업 등 경제적 불평등 문제는 이미 사회적으로 깊을 대로 깊어진 상태였다. 촛불의 분노가 정유라 이화여대 입시부정이라는 차별과 배제의 문제에서 촉발됐듯이 신자유주의적 착취구조의 모순이 정치적 주체의 신체에 각인된 가운데 촛불항거는 일시에, 그리고 순식간에 확산됐다. 따라서 국민의 95%가 지지하는 광장의 정치는 박근혜의 탄핵과 보수정권의 해체는 물론 그 정치구조와 신자유주의체제 자체의 극복을 지향한다.

지금 세계 자본주의는 전후 체제의 재편이라고 할 만큼 위기를 맞고 있다. 공황이 노동자 민중의 보편적 고통으로 전가되면서 각지에서는 광범위한 투쟁이 전개되고 있다. 시리아 내전 이후 국제 난민이 급증한 가운데 전후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그리하여 2008년 이후 불타오른 세계적인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불길과 그 정치적 조직화 사례들은 오늘 광장정치의 미래에 중요한 참조체계가 되고 있다.

특히 스페인의 포데모스는 파업과 광장의 투쟁을 거리에서 정치적으로 조직해 낸 중요한 실례이다. 광화문광장 투쟁을 주도하는 1500개 시민사회단체들은 물론 지역시민들은 포데모스를 모델로 시민평의회 구성을 기반으로 한 방안을 헌법으로 제정할 것을 요구하는 기획을 가시화하고자 한다. 광장을 천막으로 발랄하게 점거한 예술행동진영은 국민권력 시대를 요구하며 다양한 공론장을 열고 있다. ‘성토 공간’에서는 페미니즘과 소수자 정치의 요구를 ‘사소한’ 일로 간주하는 낡은 가르침의 반복을 끊고 해방의 자리를 펼쳐내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광장의 요구를 민주노총 주도의 사회헌장으로 명시해낼 필요성도 제기됐다. 당면 투쟁을 정치적으로 조직화하고, 대선을 매개로 한 정치적 수렴구조를 광장연대와 같은 유연한 정치형태로 실현해가고자 하는 좌파정당의 움직임도 있다. 전 국민의 95%가 함께 분노한 정치적 경험이 만들어낸 아래로부터의 새로운 정치사회, 그것은 보다 치열한 생산적 쟁론을 통해 더욱 단단해질 수 있을 것이다.

탄핵소추안 통과 다음날 중국 광저우에서 열린 ‘일대일로, 창의와 전 지구화의 새로운 모델’ 회의에 갔다. 광저우 사회과학원 주최로 5대륙 학자들이 함께한 자리에서 왕샤오밍 교수는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사고 수준을 넘지 않으면 일대일로는 전도를 열 수 없다고 단언했다. 나는 경제적 세계전략으로서의 일대일로의 사상적 기초가 무엇인지를 캐묻는 한편 새로운 국제질서는 다원평등한 구조가 되어야 하며, 그를 위해 주변 국가가 안고 있는 정치사회의 문제인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한국의 사드 배치로 중국이 경제제재를 가하고 있지만 오늘의 광장정치가 새로운 민주정치의 경로를 열어낼 수 있다면 관계의 전화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은 말할 나위가 없다.

백원담 | 성공회대 교수·국제문화연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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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을 계기로 헌법을 다시 볼 기회가 생겼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전에는 헌법 문구들을 당위적으로 대했다. 이번엔 사뭇 달랐다. 조항을 읽을 때마다 촛불을 켜는 정성이 생각나고 광화문 거리를 걸었던 해방감이 밀려왔다. 촛불파도가 넘실거리듯, 단어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몇 번의 촛불 참여가 이러한데 처음 민주공화국을 외치며 쓰러져간 사람들은 어땠을까? 복지국가도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국민은 행복추구권과 인간다운 생활권을 지니고 국가는 이를 보장해야 한다는 조항들, 헌법의 명령이 바로 복지국가였다.

며칠 전 빨라진 대선에 관해 토론하다 지인이 물었다. 복지시민단체는 무엇을 내세울 거냐고. 복지 쪽에선 어떤 요구가 있을지 궁금하고 획기적인 게 나올까 하는 의문이 담긴 질문으로 들렸다. 한두 해 전부턴 강연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복지국가가 시들해진 것 아닌가요?”라고 묻는다. 이때마다 대답들은 있다. 우선 복지재정이 부족하다. 박근혜 정부 들어 복지 공약이 축소되었고 누리과정예산 공방처럼 복지 확충보다는 복지 유지를 둘러싼 힘겨루기만 되풀이돼 왔다. 이러니 시민들이 복지국가를 향한 상상을 키우기보단 당장 ‘돈이 없는데 어떻게 복지를 늘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복지세력도 미약하다. 복지는 정치 영역에서 결정되기에 정당이 중요하건만 복지국가를 주창하면서도 ‘세금폭탄론’을 서슴없이 꺼내는 게 우리나라 정당이다. 서구에선 노동조합도 복지국가를 만드는 핵심 부대였다는데 우리나라 노동조합이 여기에 얼마나 힘을 쏟는지를 따지면 긍정적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등등.

헌법 문구에서 복지국가를 생각하다 문득 질문이 나에게로 향했다. 혹시 나도 기성체제이지 않았을까? 하루하루 ‘헬조선’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절박함과 제대로 호흡하고 있었을까? 재정이 없다고? 이미 시민들은 공적보험에 내는 보험료보다 더 많은 돈을 민간보험에 내고 있다. 빈약한 공적보험 탓에 어쩔 수 없이 민간보험에 가입하고 또 이 보험료 때문에 힘겹다고 토로한다. 그렇다면 민간보험료를 공적보험으로 돌리면 되는 일 아닌가? 월평균 1만원 정도 더 내서 민간보험 대신 ‘국민건강보험 하나로’로 병원비를 해결하자는 제안이 몇 년째 잠만 자고 있다. 민간보험료에 힘겨운 사람이 이리 많은데도 왜 이 운동을 힘있게 벌이지 않느냐며 헌법이 질타한다.

복지서비스 질은 어떤가? 아이의 보편 권리로 보육복지가 자리 잡은 건 큰 성과이다. 하지만 비용의 대부분을 공공재정으로 충당할 뿐 ‘믿음직한 안심 보육’이라 말하긴 어렵다. 장기요양 복지도 본인부담금은 줄었지만 지금과 같은 서비스에선 당사자 노인이나 자식들 모두 마음이 불편하다. 의료는 어떤가? 아프니 병원에 가지만 수익을 위해 과잉진료받은 건 아닌지 의구심을 지니며 병원을 나선다. 주거도 걱정 중 걱정이다. 공공임대주택에 들어갔으면 좋으련만 그림의 떡이고 전·월세 비용에 허리가 휜다.

이렇게 아우성이 높은데도 복지국가 이야기가 시들해졌다면 복지시민운동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무엇보다 양적 확대 논리에 얽매여 있었다. 다음에 또 무슨 복지를 추가할까 궁리하다 아동수당, 청년배당을 내놓는 방식이다. 사실 복지국가가 갖추어야 할 항목들은 이미 우리나라에 거의 도입돼 있다. 그런데도 시민들이 복지국가로 가는 길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복지구조 자체를 문제시해야 한다. 이는 국가재정이 투입되지만 사적 체제에 의존하기에 가계 지출이 여전하고 복지 질도 높지 못한 원인을 찾는 진단이다.

더 담대하게 복지국가를 말하자. 보육, 요양, 의료, 주거 복지는 공공인프라를 기반으로 해야 질 좋은 복지를 체험하고 가계 부담도 더 덜 수 있다. 지금까지 급식, 보육, 기초연금 등 양적 전면화를 추구하는 ‘선별복지에서 보편복지로’가 핵심 담론이었다면 이제는 복지구조를 혁신하는 ‘사적복지에서 공적복지로’로 가자. 이번엔 상대가 더욱 막강하다. 맞서야 할 주요 세력이 민간보험사, 종합병원, 건설사 등 재벌기업들이다. 결국 헌법에 명시된 민주공화국의 두 기둥,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는 모두 재벌체제와 정면 대응해야 하는 일이다.

모두가 촛불은 단지 대통령을 바꾸자는 데 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함께 사는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을 꿈꾼다. 우리 스스로를 일깨우고 손잡게 한, 비로소 헌법의 맥박을 뛰게 만든 촛불을 믿고 복지국가 길을 개척해 가자. 대통령을 끌어내릴 수 있다는 자신감, 우리가 주권자라는 자부심, 새로운 대한민국을 향한 열망이 우리에게 있지 않은가?

오건호 |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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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간 감정싸움이 위험수위를 오르내리고 있다. 급기야 “박지원 원내대표는 총리 사심이 있다” “문재인 전 대표 측에서 박지원 총리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박 원내대표가 거절했다”며 진실공방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국민의당 박 원내대표는 13일 페이스북에 “문재인 전 대표 측 인사가 저의 지인을 통해 제가 총리 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해왔다”며 “한 칼에 딱 잘랐다”고 썼다. 촛불정국 와중에 민주당 문 전 대표 측이 총리 자리를 제안했지만 거절했다는 취지다. 문 전 대표 대변인 격인 김경수 의원은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다.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왼쪽)가 11일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정국 수습 방안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권호욱 기자

박 원내대표 주장은 문 전 대표 측근으로 알려진 노영민 전 의원의 당원 상대 강연 내용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노 전 의원은 지난 2일 충북지역 당원을 상대로 한 비공개 강연에서 “박지원 대표 본인이 꿈이 있다. 총리를 하고 싶어 하잖아”라며 “이 국면에서 그거 안 해주니까 저 난리를 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박 원내대표가 지난달 14일 민주당 추미애 대표의 영수회담 제안을 비판한 것은 ‘총리 사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기 대선을 앞둔 두 야당이 주도권 경쟁을 벌이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촛불혁명 성과를 사유화하려 이전투구를 벌이는 일이다. 촛불민심 꽁무니를 따라가기 급급했던 야당들이 마치 전리품이나 되는 양 총리 자리 문제를 입에 올리며 정쟁하는 건, 그 진위를 떠나 지켜보기 민망하다.

촛불은 박근혜 대통령뿐 아니라 그런 흉물스러운 정부를 배태한 구체제 전체를 향해 타오르고 있다.

야당들도 구체제 일부임은 물론이다. 일신하지 않으면 함께 촛불민심에 쓸려내려 갈 수 있다.

정제혁 | 정치부 jhj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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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되면 으레 한 해를 돌아보게 된다. 어떻게든 살아낸 스스로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해주고 싶어진다. 내년에도 상황이 더 나아질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지금보다 더 나빠질 리는 없을 거라는 생각에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보기도 한다. ‘당신이 놓쳤을지도 모르는 것들’이나 ‘올해가 가기 전에 꼭 해봐야 하는 것들’과 같은 리스트가 안도감을 주기도 하고 불안감에 휩싸이게 만들기도 한다. 나는 남들과 비슷한 속도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하다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 길을 지나다 초등학생 둘을 만났다. 기말고사를 치르고 나오는 모양이었다. 책가방이 유독 무거워 보이는 아이가 입을 열었다.

“시험 망쳤어. 이러려고 공부했나 자괴감 들어.”

옆에 있는 아이가 맞장구쳤다.

“나도 자괴감 들어! 밤새워서 공부했는데, 공부한 데서 하나도 안 나왔어.”

이렇게 자괴감에 사로잡힌 아이들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자괴감을 느껴야 할 대상은 정작 아무렇지 않은데 자괴감과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 아이들의 입에서 앞다투어 자괴감이라는 단어가 쏟아져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이 10월 25일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실에서 '최순실 의혹'에 관해 대국민 사과를 하기 전 원고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자괴감은 올해 하반기에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단어일 것이다. “이러려고 대통령 하려고 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라는 담화문 속 대통령의 말은 국민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이러려고 주식투자 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이러려고 직장인 했나 피로감 들고 괴로워”처럼 자기 자신과 관련된 토로부터 “이러려고 대한민국 국민 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이러려고 세금 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처럼 정부를 향한 따끔한 일침까지 곳곳에서 패러디가 이루어졌다. 패러디의 끝에는 해학이 남아야 하는데 이상하게 뒤끝은 늘 씁쓸했다.

자괴감은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대통령은 이 단어를 원뜻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한 것 같다. 하긴 담화는 본디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상황을 상정하는 것인데, 대통령은 일체의 질의응답을 허용하지 않은 채 자기 말만 하고 들어가 버리지 않았는가. 나는 대통령이 담화문을 읽을 때 자괴감이라는 단어를 ‘부끄러움’이 아닌 ‘분노’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은 분명 화가 나 있었다. 자기 자신이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여기저기서 칼끝을 겨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 때문에 정작 자괴감을 느낀 것은 국민들이었다.

인간이 자괴감을 품을 수 있다는 점은 인간을 비로소 인간답게 만들어준다.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 없이 어찌 진심 어린 사과를 할 수 있겠는가, 자괴감을 건너지 않고 어떻게 자부심에 가닿을 수 있겠는가. 부끄러움은 다음을 기약하게 해주는 마음이다. 부끄러움이 있어야 반성을 할 수 있다. 조금 더 떳떳하고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괴감은 ‘앞으로’를 내다보는 마음이다. 대통령의 자괴감은 앞이 아닌 뒤를 향해 있었다. 그래서 대통령은 억울하고 화가 난 것이다.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양심이 없는 사람 아니면 양심에 거리낄 게 없는 사람이다. 나는 대통령의 자괴감을 인정하지 못하겠다.

국민들의 자괴감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 혼란스러운 정국 때문에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주말을 반납하고 광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자책감을 느끼고 배신감을 참을 수 없어 일상이 무너진 사람들도 보인다. 무너지고 난 후에야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힘든 상황일수록 그것을 지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절절히 깨닫게 된다. 자괴감이 심화되면 심한 자책이나 자포자기 상태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포기하고 돌아보지 않는 상태 말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촛불을 들고 광장에 다시 모였다. 역설적으로, 이 또한 우리가 자괴감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다음 세대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직면하지 않도록, 우리는 촛불을 더 높이 들었다.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던 날, 우리는 입을 모아 외쳤다. 촛불이 이겼다고,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 침묵은 진실을 덮을 수 없다고. 이기는 경험을 했다는 것, 다음을 기약해도 된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경험이다. 희망이 아직 남아 있음을 온몸으로 깨닫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 나라가 이렇게 돌아가고 있었다는 자괴감이, 내가 바로 이 나라의 국민이라는 자괴감이 만들어낸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다. 자괴감 이후에 찾아오는 것은 성찰의 시간이다. 우리는 광장에서 작년과는 다른 우리의 존재감을 이미 재확인했다. 국민들은 자괴감을 직면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괴감이라는 말 뒤에 숨어 있는 대통령과 얼마나 다른 품격인가.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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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회, 시민권력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면서 이 용어에 대해 촛불 현장에서 친구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문제가 된 단어는 ‘권력’이었다. 권력이 시민의 손에 있다고 하면 괜찮을까. 우리는 둘 다 시민권력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는 얘기를 했다.

대중의 환호를 받고 등장한 권력이 대중의 원망을 사고 몰락해간 역사는 많다. 이는 ‘선한 권력’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권력 자체의 속성이 스스로를 강화하고 지배권역을 확장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권력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권력을 쥐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커야 한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을 보면서도 권력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덧없음에 대권행보를 중지하고 물러나는 대권주자는 아직 없다.

권력의 흡인력은 무지막지해 보인다. 이전 권력의 비참한 말로가 뻔히 보이는데도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타인에게 미치고자 하는 권력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는다.

지난 10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7차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청와대 인근인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폭죽을 쏘아올리고 있다. 이준헌 기자

현대국가는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겹으로 있다. 그러나 권력은 촘촘한 견제장치와 감시망도 뚫고 확대된다. 덜 나쁜 권력은 있어도 좋은 권력은 없는 걸까.

지난 주말에 청와대 100m 앞까지 갔다. 처음 가보는 통인동과 청운동. 오후 5시쯤 되었을까. 행렬이 마지막 진로에 세워진 차벽 앞에서 멈추고 돌아나오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인도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와글와글하는 소란이 한동안 일더니 점차 “박사모는 물러가라”는 구호로 바뀌었다.

군중 사이로 태극기가 언뜻 보였다. 대한민국의 태극기가 어느새 극우단체의 전유물처럼 된 지는 오래다. 태극기가 안보와 반공과 반북의 이미지로 굳어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서 가까이 가봤다. 소음 사이로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던, 태극기를 든 분의 첫마디는 “문재인은 간첩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국회가 해산되어야 한다고 했다.

촛불들의 선동에 놀아난 국회가 돈 한 푼 받은 적이 없는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했다는 주장은 앞서 오후 2시쯤 광화문광장의 세월호 천막 앞에서도 들었다. 우리도 며칠 전에 국회 해산을 놓고 설왕설래했던 터라 그들의 국회 해산 구호는 듣기가 묘했다.

박사모 회원 등으로 여겨지는 보수단체 회원들이 촛불행사를 방해할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낮에 세월호 천막 바로 앞에서 소란을 피웠는데 이렇게 행렬을 따라다니며 반대 구호를 외치는 그들이 놀라웠다.

그런데 내 우려는 문재인이 간첩이라는 황당한 구호 때문이 아니었다. 무모하게도 수천, 수만명의 촛불 행렬 사이로 들어와서 ‘깽판’을 놓고 있는 저분들이 혹시 다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촛불집회에서 폭행사태가 일어나면 안된다는 조바심이라기보다 그들이 어떤 주장을 하든 안위가 위협당해서는 안된다는 소박한 마음이었다.

서너 명 되는 분들이 어찌나 극성스럽게 군중들과 대거리를 하는지 무슨 난리가 난 줄 알고 헬멧을 쓴 경찰들이 일렬로 군중을 헤치고 들어와서 그들을 에워쌌다. 만약의 불상사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인데 꼭 그들만을 보호한다기보다 촛불 군중들을 폭력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하는 측면도 있으리라. 이쪽저쪽을 따지지 않고 시민의 안위에 대한 보호조치를 할 정도는 되는 경찰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보수단체 회원들은 경찰이 보호막을 쳐주자 더 기세를 올리는 것이었다. 이때도 나는 군중들이 겹으로 에워싸고 있는 경찰들의 머리 위로 뭘 집어던지면 저들이 다칠 거라는 걱정을 놓을 수가 없었다.

상당한 시간 동안 소란이 계속되었지만 군중들은 ‘박사모는 물러가라’는 말 외에는 어떤 위력행위도 하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는 유인물이나 두꺼운 종이팻말을 던지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과 같은 보폭으로 걸으면서 ‘물러가라’는 말 외에는 욕지거리도 위협도 안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권력 또는 힘이라는 것은 견제받고 통제되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제할 수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울 것이다.

전희식 | 농부·‘삶을 일깨우는 시골살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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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지난 대통령 선거 이틀 뒤였다. 2012년 12월21일 한진중공업 노조원 최강서가 자살했다. 이어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해고자 이운남, 한국외대 노조위원장 이호일, 기아자동차 사내하청 해고자 윤주형, 현대차 비정규 노동자 박정식의 죽음이 이어졌다. 왜 노동자들은 대선 직후 자살했을까? 노동자들 죽음의 행렬을 초래할 만큼 선거가 중요했나?

하지만 다음 선거를, 5년 뒤를 기약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죽지 않았다. 지금 당장 조금의 미약한 훈풍이라도, 그 어떤 여지라도 기대했던 노동자들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정작 그 선거로부터 건질 것이 가장 적었던 노동자들이 죽음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선거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선거 국면에서 정리해고 철폐와 비정규직 폐지를 외치며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던 노동자들의 기대는 속절없이 무너졌고 여전히 배제된 자들인 노동자들에 대한 제도정치권의 외면은 결국 노동자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지난 9일, 나는 어쩔 도리 없이 최강서를 생각했다. 그의 유서를 생각했다. “나는 회사를 증오한다. 자본, 아니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심장이 터지는 것 같다. … 박근혜가 대통령 되고 5년을 또 … 못하겠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촛불들의 이른바 ‘시민혁명’은 과연 노동과 만날 수 있을까? 박근혜씨가 대통령이 됐을 때 조그만 기대조차 무너져 목숨을 버려야 했던 사람들을 기억해줄까? 가장 먼저 박근혜 퇴진을 외치고, 그 체제의 귀퉁이에서 가장 먼저 절망했던 사람들 말이다.

단지 죽은 자들만이 아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시민들이 다음 선거를 기다리고 있을 동안에도 이 사회의 거리거리에는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박 정권하에서 가장 먼저 탄압당했고, 가장 먼저 떨쳐 일어났다. 이천 하이디스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되어 거리로 나섰고, 구미 아사히글라스 비정규 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든 지 한 달 만에 쫓겨나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비슷한 처지의 11개 군소 사업장 노동자들이 모여 ‘노조파괴, 민생학살, 박 정권 퇴진을 위한 노동자 공동투쟁’을 만들었고, 박근혜 퇴진을 가장 먼저 외쳤다.

아마 박근혜 탄핵이 최종 결정되면 정치적 민주주의로 족한 사람들은 거리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촛불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 땅 거리에 남아 있어야 하는 사람들은 여기 있을 것이다. 한국의 협소한 정치적 민주주의가 담아내지 못하는 노동, 민중생존권, 반제국주의의 문제들을 두고 싸워야 하는 이들은 그다음 닥쳐올 질서잡기의 역풍을 고스란히 맞아야 할지도 모른다.

과연 촛불은 최강서를 기억해줄까? 촛불 안에 있는 다양한 차이들, 특히 여성, 청소년, 장애인, 노인 등 사회적 소수자들도 포용할 수 있을까? 촛불엔 아직 박근혜를 향한 분노 말고는 공통분모가 없다. 시민혁명이라는 거대 담론 뒤안에는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그 목소리조차 평등하지 않은 사람들의 긴 그림자가 있다. 이른바 시민혁명의 주체는 여전히 비어 있다. 그리고 시민혁명의 주체는 대문자 ‘시민’이 아니라 이제 다양한 사회적 주체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렇게 시민이 다양화하고 분기해서 자신들의 사회적 이해를 드러내고 그것의 연합 속에서 조직되어 ‘사회정치적 동맹’을 만들어 나갈 때, 이 사회는 단지 권력의 우두머리 하나를 교체하는 것 이상의 것들, 사회를 재편하고 헌법을 다시 쓰는, 말 그대로 새로운 민주주의 혁명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는 대통령 탄핵을 두고 “로도스가 저기다, 뛰어내려라”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우리’가 가야 할 로도스는 아직 시계 제로다. 그 섬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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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혁명, 시민혁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혁명은 체제(시스템)의 교체를 의미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결의안이 통과되었지만, 아직 탄핵이 된 것도 아니고 박근혜·최순실을 만든 시스템도 여전히 그대로다. 그래서 샴페인을 터뜨리기에는 너무 빠르다. 아직은 혁명이 아니다.

물론 탄핵소추가 성사된 것은 시민의 승리이다. 그러나 지금의 승리는 견고하지 못하다. 현재 상황을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시스템의 교체는커녕 정권교체도 이루지 못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1987년으로부터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다. 87년 6월 100만명이 거리에서 최루탄과 맞서서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쳤다. 그러나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겠다는 6·29선언이 나온 후에 상황이 급반전했다.

여당과 야당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8인회의’라는 것을 구성하고, 그 안에서 헌법개정안을 만들었다. 거리에 나왔던 시민들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헌법개정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했지만, 그해 12월 치러진 대선의 승리자는 군사정권의 한 축이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었다. 야당은 지리멸렬했고, 시민들이 만들어준 기회마저도 발로 차 버렸다.

10일 서울 청운.효자동사무소 앞에 모인 제 7차 촛불 문화제 참가자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구속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며 하늘로 폭죽을 쏘아올리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시위를 주도하던 세력의 한계도 있었다. 당시 민주화운동의 주류는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는 것에 집중했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 수 없었다. 더구나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하면서도, ‘결선투표제’처럼 당연히 필요한 제도를 논의하지도 못한 것은 결과적으로 큰 실책이 되었다. 대통령제를 택한 많은 국가들이 이미 도입하고 있었던 결선투표제만 됐더라도, 1987년 12월 대선에서 득표율 36.6%를 얻은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1987년 당시에는 국회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에 관한 논의도 없었다. 1970~1980년대에 민주화가 되었던 스페인, 포르투갈과 중남미의 많은 국가들은 정당득표율대로 국회의석을 배분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국회의원 선거제도로 택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논의 자체가 없었다. 결국 지역구 소선거구 선거제도를 택한 결과 국회는 지역주의 정당, 기득권 정당들이 채우게 되었다. 이들은 필요하면 정계개편과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이것은 정치에 대한 환멸과 냉소를 불러일으켰다. 결국 87년 6월 민주항쟁은 ‘미완의 시민혁명’으로 끝났다.

지금의 상황은 1987년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박 대통령은 물러나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집권세력 교체와 시스템 개혁의 전망은 매우 불투명하다.

벌써부터 정치권은 다음번 대통령을 누가 차지할 것인지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야당의 대선후보들은 자기중심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을 뿐, 집권세력 교체와 시스템 개혁의 전망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탄핵에 찬성함으로써 ‘박근혜 꼬리 끊기’를 한 새누리당 세력들은 재결집을 시도할 것이다. ‘개헌’을 매개로 한 정계개편의 불씨도 살아있다. 자칫 죽 쒀서 남 줄 상황이다.

따라서 이번 촛불이 또 다른 미완의 시민혁명이 되지 않으려면, 시민들이 긴장을 놓지 않아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특검의 수사와 헌법재판소의 탄핵심리가 신속하면서도 철저하게 진행되도록 하고, 황교안 국무총리 대행체제가 또 다른 국정농단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앞으로 우리가 어떤 대한민국을 만들 것인지에 대한 얘기다. 이번에 촛불을 들고나온 시민들의 공통된 마음은 ‘이게 나라냐’는 것이었다. 이제는 바꿔야 한다. 지금부터는 부패하고 낡은 국가 시스템을 어떻게 혁신할 것인지에 관한 얘기가 곳곳에서 토론될 필요가 있다.

국가 시스템의 근본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핵심을 잘 잡아야 하고 순서도 잘 세워야 한다. 시스템 개혁의 입구는 선거제도의 개혁이다. 그래야 정치판을 바꾸고, 내 삶에 도움이 되는 정치가 이뤄질 수 있다. 민주주의 역사를 볼 때, 정치판을 바꾸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선거제도 개혁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권고하고 있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고, 만 19세로 되어 있는 투표권 연령을 만 18세로 낮추는 것이 그 시작이 될 것이다.

한편 시스템의 개혁 과정에서 기득권 구조의 청산을 반드시 해야 한다. 재벌개혁, 검찰개혁, 행정·사법개혁이 필요하다. 개혁을 위해서는 시민들의 직접·참여민주주의를 도입하고 확대해야 한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국민소환제도, 국민발안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 중앙으로 집중된 권력을 분산시키는 지방분권도 시스템 개혁의 핵심이다.

한편 개헌논의도 국회에서 할 일이 아니다. 국회 중심의 개헌논의는 결국 대선을 염두에 둔 정략적인 논의가 될 수밖에 없다. 이번 개헌은 역사상 최초로 시민들이 참여하고 시민들이 주도하는 개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국회는 가만히 있으라. 국회에서 해야 할 일은 개헌의 내용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참여 개헌절차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추첨으로 뽑힌 시민들이 개헌의 내용에 대해 토론하고, 온·오프라인으로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밟아야 한다. 최근 이런 방식으로 개헌을 추진한 아일랜드, 아이슬란드의 사례도 있다.

이번에는 여기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미완의 시민혁명이 아니라, 부패한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만드는 시민혁명이 될 수 있다.

하승수 |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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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유명한 책의 서문을 빌려 지금의 대한민국을 나는 이렇게 규정하고 싶다. ‘하나의 유령이 대한민국을 떠돌고 있다. 세월호라는 유령이.’ 지금 대한민국 국가 시스템을 흔들고, 광장을 사람들로 메우고, 촛불과 횃불을 타오르게 만드는 것은 최순실의 국정농단 이전에 ‘세월호’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현재 열리고 있는 국정조사특별위원회는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라는 정식명칭이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들은 거듭 ‘세월호 7시간’을 추궁하고 있다. 매스컴도 연일 최순실 국정농단과 함께 세월호 7시간 미스터리에 대한 해부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2014년 4월16일 참사로부터 2년 반이 지난 현재, 왜 세월호는 자꾸 돌아오는가.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분석한 어느 글에서 이렇게 얘기한 바 있다. 햄릿이 우울증과 광기에 시달리는 것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애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햄릿은 아버지를 떠나보내지 못했고, 그는 유령이 되어 거듭 그 앞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아마도 하야와 탄핵을 외치는 촛불에 세월호 7시간의 민낯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우리 사회가 304명의 원혼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국가수반이자 책임자인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진심 어린 애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촌각을 다투는 국가 비상사태에 대한 대응을 진두지휘하기는커녕,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다는데 발견하기가 그렇게 힘든가요?”라는 황당무계한 질문을 던졌다. 이어 세월호 유가족에게 그가 보여준 냉대와 외면은 전 국민의 무의식을 곧장 우울증과 광기로 몰아넣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때로부터 한 시도 그 장면에서 떠날 수 없었다.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와 4·16연대 회원들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시국선언을 하고 있다. 이상훈 기자

세월호는 왜 자꾸 돌아오는가, 그리고 어떻게 돌아오는가. 누군가 좋아한다는 샤머니즘적으로 말하자면 세월호 아이들로 가득 찬 우주의 기운이 태블릿 PC를 찾아내 최순실을 꿇어 앉히고, 광장에 촛불을 밝히고, 셈이나 하고 있는 정치인들을 꾸짖고, 다시 촛불을 활활 타오르게 하고 있다. 인양되지 못한 선체처럼 전 국민의 저 깊은 곳에 내려앉은 세월호의 영령들이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으로 우리를 광장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어떤 끔찍한 사고를 당한 후 그 사건을 자꾸 되새기는 ‘반복강박’은 그 사건을 이해가능한 것으로 돌려놓고 안전한 것으로 처리하기 위한 방어적 심리기제이다. 처음 사고를 당했을 때 주체는 그 사건에 의해 압도되고 사로잡히지만 계속적인 추체험과 반복을 통해 그 괴물스러움은 이해가능한 것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반복강박의 효과이다. 세월호 사건에 대한 수백 번, 수천 번의 호명과 되새김은 희생자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우리가 미치지 않기 위해 수행하는 일종의 몸부림이다. 이 반복강박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작업, 그리고 집단적 우울과 광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애도의 첫걸음은, 정확한 ‘사실의 재구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이에 대해 제대로 얘기하지 않고 있다. 오보·괴담 바로잡기라는 청와대의 ‘이것이 팩트입니다’는 ‘굿판을 벌였다, 성형시술을 했다, 잠을 잤다’ 등등의 의혹에 대해 “아니다”라고 부정만 했을 뿐 그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는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팩트라며 밝힌 7시간의 일정표에 대통령의 육성과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는다. 국민을 상대로 무슨 스무고개라도 하자는 것인가. “아니다”라고만 말하는 그 끝에는 무엇이 있길래, 그토록 수많은 루머와 의혹에도 끝내 밝히지 못하는 것일까. 이제까지의 모든 의혹을 뛰어넘는 더 무시무시한 무엇이라도 있다는 것일까.

지난달 26일 광장에 나갔다. 촛불행렬을 따라 줄줄이 걷는 그 길에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라는 추모노래가 흘러나왔다. ‘하야가’를 부르고 퇴진을 외치던 소리가 잠시 멈추었다. 나도, 내 앞의 사람도, 내 옆의 사람도, 내 뒤의 사람도, 선뜻 따라 부르지 못했다. 양희은의 ‘상록수’,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전인권의 ‘애국가’보다 더 먹먹한 선율. 감히 떼창도 할 수 없는 그 노래가 광장의 사람들을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과연 그러한가. 과연 그렇다고 나는 말할 수 있는가. 국가수장이 광장에 무릎 꿇고 진심으로 머리를 숙이지 않는 한 우리가 함께 묻은 그 아이들은 영영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노래는 계속될 것이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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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반도 남쪽에서는 일찍이 세계정치사에서 본 일이 없는, 그리고 앞으로도 있을 것 같지 않은 시민혁명이 벌어지고 있다. 벌써 한 달이 넘게 매 주말 10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 새로운 정치질서를 외치고 있다. 입으로는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고 있지만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만약에 이 거대한 시위가 통치능력이 없는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면 한국인은 그저 데모나 잘하는 국민으로 세계사에 기록될 것이다.

지난 총선에서 국민은 야당을 다수당으로 만들어주었지만 이들이 집권한다고 해서 새로운 정치질서가 들어설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며칠 전에도 대통령이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려고 법리에도 맞지 않은 제안을 던지자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의원들을 보고 촛불민심은 믿을 게 자신뿐이란 것을 더욱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말이 국민의 대변자이지 사실은 기존의 정치구도 안에서 어떻게든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그야말로 악마와도 손을 잡는 무리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의원들도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척박한 환경 속에서 제 뜻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시나브로 사라지고 만다. 이런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집권당과 그 수족인 권력기관들은 야당을 마음대로 주물러가며 반세기 넘게 부패한 권력구조를 유지해 왔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정치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정치란 현실이고 타협”이라고 대답한다. 맞다. 문제는 너무 쉽게 원칙을 저버리고 타협한다는 것이다. 김영삼의 ‘3당 합당’이 그랬고, 김대중이 김종필의 손을 잡은 것이 그랬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면서 ‘삼김시대’가 끝났다고 말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제5차 민중총궐기대회가 열린 11월 2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보이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금 야당은 물론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중심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다 삼김의 정치적 적자이거나 그 문하생들이다. 물론 박정희를 비롯해 삼김은 모두 위대한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이다. 경제 강국 대한민국의 약진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피와 땀의 결정체이지만 그들의 리더십에 힘입은 바도 크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지나친 권모술수와 밀실야합, 지역할거 구도는 한국정치를 막다른 길로 몰아세우고 말았다. 모든 정보가 빛의 속도로 오고 가는 시대와는 도무지 맞지 않는 정치유산을 끌어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시민혁명이 일어난 배경이고 또 청산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사실 지금의 시민혁명 과정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제1야당의 문재인 전 대표이다. 공정한 선거관리가 이루어졌다면 어쩌면 그가 청와대의 주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어제 광주에서 “촛불을 계속 들어 시민혁명을 완성하자”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정작 촛불집회에 가서는 자유발언의 기회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미리 예언하지만, 이 작은 사건의 의미를 제1야당 지도부가 이해하지 못하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시민혁명이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시민혁명은 시민들의 힘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혁명 정세는 대단히 특이하다. 지난 세기에 있었던 혁명처럼 인민들이 피를 흘리며 싸워야 하는 분위기도 아니고, 국가의 공권력이 건드리면 무너질 정도로 허술한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다 짱짱한데 오직 정치적 리더십만 부재한 상황이다. 이 난국을 만든 책임이 있는 청와대와 집권여당은 재집권보다는 살아남기에 더 급급할 것이고, 야당은 탄핵만 성사되면 자동적으로 집권할 수 있으려니 하겠지만 촛불민심은 여야를 떠나 새로운 정치질서를 요구하고 있다.

문제는 이 순간 가장 강력한 권력인 촛불세력이 제도권 밖의 존재이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한시적인 집합체인지라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누구는 바람만 불면 꺼질 것이라고 하고, 누구는 거대한 쓰나미이니 거기에 얹혀 권력을 한 번 잡아보자고 한다.

다 틀렸다. 틀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나라의 정치발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은 관점이다. 만약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이 시민혁명의 의미를 정확히 읽어내어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어내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먼저 촛불시민 세력은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대의 또는 소통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이름이야 어떻게든 붙여지겠지만 일단은 그냥 ‘시민권력’이라고 하자. 의회는 여야 협상을 통해 시민권력을 국정의 파트너로 인정하는 한시적인 법을 제정해야 한다. 행정부와 사법부는 시민권력과 의회가 지정한 비상거국내각이 통할한다. 물론 이 아젠다는 시민들이 계속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온다는 가정하에 성립할 것이다.

지금의 촛불집회는 하루아침에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멀리는 4·19혁명에서 광주민주항쟁과 87년 6월 항쟁, 그리고 2008년 광우병 파동을 거쳐 진화를 거듭해 온 것이다. 한때 한국의 시위에는 화염병과 최루가스가 난무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비폭력 평화시위 기조가 확고히 자리 잡았다. 축제의 요소까지 곁들어져 외국인 관광객들도 안심하고 참여하는 문화상품으로 인식될 정도이다. 가히 한국의 시위문화는 세계 최고의 수준과 선진성을 자랑한다. 이러한 시위문화를 일궈낸 한국의 시민들이기에 비록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국면이 계속된다 하더라도 기어이 혁명을 완수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명언이 있지 않은가!

황대권 | 생명평화마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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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이 선거 날만 주인이 되고 투표가 끝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가는 제도.” 사회계약론으로 유명한 18세기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현대정치, 현대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대의 민주주의를 이렇게 비판한 바 있다. 최근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촛불을 바라보면서, 정치학자로서 가장 자주 떠오르는 것은 이 비판이다.

그렇다. 2012년 12월19일 우리는 주권자로서 한 표를 던졌다. 그러나 그 이후 지난 4년 가까운 기간 동안, 다른 후보를 찍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박근혜를 찍은 사람들까지, 박근혜의, 아니 최순실의 ‘노예’에 불과했음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국회는 어떠한가? 보수야당들조차도 분노의 촛불이 광화문에 넘쳐나기 전까지는 기껏해야 ‘질서 있는 퇴진’ ‘명예로운 퇴진’을 주장하며 몸조심하기에 바빴다. 박근혜의 지지율이 4%로 떨어지고 국민의 80%가 탄핵을 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 친박계는 아직도 탄핵에 반대하고 있다. 이정현·김진태 의원을 뽑은 순천과 춘천 시민들이 박근혜의 사수대 역할이나 하라고 이들을 국회에 보낸 것인가? 비박계 역시 오락가락하다가 지난 주말 촛불에 놀라 뒤늦게 탄핵 합류를 선언했지만, 언제 다시 마음이 변할지 모른다. 한국 대의 민주주의는 중병에 걸려있다. 만일 탄핵안이 국회에서 부결된다면 사망선고를 받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이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개최한 촛불문화제에서 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인구가 증가하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우리는 대의 민주주의를 어쩔 수 없는 ‘현대정치의 유일한 대안’으로 간주해 왔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문학의 ‘재현(representation)’ 논쟁이 불붙고 인터넷의 발달 등으로 직접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커지면서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재평가가 간헐적으로 진행됐다. 재현이란 어떤 사물을 다시 형상화하는 것인데 재현이 대상을 그대로 표현할 수 없듯이, ‘대의’ 역시 불가피하게 민의의 왜곡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이 같은 부분적 재평가를 넘어서 대의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번 촛불항쟁의 밑바닥에는 단순한 권력남용을 넘어 헬조선, 흙수저, 신분세습제에 대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논의를 정치 문제로 국한시킨다 하더라도, 우리의 문제는 단순히 박근혜를 몰아낸다고, 문제의 근원으로 지목되고 있는 ‘87년 헌정체제’(제왕적 대통령제)를 타파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설사 내각제로 정부 형태를 바꾼다고 하더라도 탄핵 과정이 잘 보여주듯이 ‘국민을 대표하지 않는 대통령의 독재’를 ‘국민을 대표하지 않는 국회의 독재’로 바꾸어놓을 따름이다. 다시 말해 이번 문제의 핵심에는 루소가 고발한 대의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자리 잡고 있다.

촛불을, 광장을 주목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히 박근혜를 몰아낼, 아니 이미 몰아낸 힘이 거기서 나왔기 때문만이 아니다. 대의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계기와 가능성을 촛불과 광장이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이후에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새로운 공화국’의 단초들을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광장은 전국 1500개 시민사회단체가 밑으로부터 퇴진운동조직을 만들면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광장을 메우고 있는 것은 일반시민이다. 구체적으로 1500개 조직의 조직화된 참여자는 20만명 수준이며, 90%는 일반시민이다. 직접민주주의가 폭발한 것이다. ‘운동 내에서의 직접민주주의적 계기’들도 주목해야 한다. 주요 단체의 대표들이 단상에 포진하고 의례적으로 발언을 과점하는 ‘운동 내의 대의제’가 약화되고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발언권을 갖는 직접민주주의가 강화되고 있다. 일부 운동권의 돌출적 행동에 대해서도 대중들이 비판하고 규율하고 있다. 탄핵 결과와 상관없이 이제 민선공직자 소환제 강화 등 대의제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수술하고 직접민주주의적 기제들을 극대화해야 한다. 대의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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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의 국회 본회의 상정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대부분 의원들은 입장을 천명했지만, 유독 새누리당 초·재선 80여명의 표심만 안갯속이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권력 재편은 물론 이후 국회 재구성까지 이들 손에 달린 형국이다. 여당 초·재선 의원들이 방관하지 말고 책임있게 행동하고 시민의 물음에 답해야 하는 이유다. 탄핵소추안은 야 3당과 무소속 의원 등 171명 명의로 발의됐다. 나머지 새누리당 의원 128명 가운데 비주류 30여명은 탄핵에 찬성하고 있다. 지도부와 친박계 30여명은 반대를 천명하고 있다. 나머지 60여명은 침묵하거나, “고민 중”이라며 답변을 유보하고 있다. 하지만 더 이상 익명의 그늘 뒤에 숨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제만 해도 232만명이 전국 67곳에서 촛불을 들고나와 박 대통령 퇴진을 외쳤다.

여당 초·재선들이 탄핵안 처리 요구에 답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대통령의 범죄는 친박이니, 비박이니 하는 계파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탄핵소추안에 적시된 대통령 범죄에 동조 혹은 묵인하느냐, 반대하고 처벌토록 하느냐는 선택의 문제다. 개개인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으로서 판단을 내리고 답해야 한다. 다선 의원들은 파당의 핵심이 돼 있고, 공복으로서 의무보다 정치적 이득에 몰두해 손에 쥔 것을 놓지 못한다. 탐욕과 노여움, 어리석음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초·재선들이 나서야 엉킨 매듭을 풀 수 있다. 부끄럽지 않은 보수정당으로의 변모도 때가 덜 낀 초·재선이 주도할 때 가능하다.

무엇보다 의원이 복종할 대상은 공천장을 준 옛 당 대표도 아니고, 좌충우돌하는 현 당 대표도 아니며, 청와대에서 뭘 하는지 모르는 대통령 박근혜 개인도 아니다. 좁게는 자신을 찍어준 유권자, 넓게는 시민 전체를 위해 복무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시민들이 지금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9일 국회에서 탄핵안 처리가 무산됐을 때 후폭풍이 어디로 불지 자명하다. 촛불은 국회, 당사, 지역구 사무실로 옮아갈 것이다. 이미 “촛불은 바람 불면 꺼진다”고 말한 김진태 의원 지역구에서 촛불·트랙터 시위가 열렸다. 가만히 있어도 세월이 지나면 잊혀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과연 그럴까. 광장에서 촛불을 켠 고등학생들은 21대 총선에서 생애 첫 투표를 한다. 이들은 이렇게 물어볼 것이다. “당신은 3년 반 전 탄핵소추 때 무엇을 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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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믿었다. 김주열의 피로, 경무대 앞에서 쓰러진 학생들의 피로 4·19혁명이 이뤄졌다. 박종철, 이한열, 그리고 자신의 몸을 불사른 많은 열사들의 피는 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자유를 위해 비상해 본 사람이면 안다. 자유에는, 민주주의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다는 걸.

어느새 아득한 시절이 돼 버린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 시절. 학교엔, 거리엔 화염병과 최루탄, 쇠파이프와 곤봉이 난무했다. 그걸 당연시했다. 이렇게 온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고는 독재정권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믿었다.

요즘은 민주주의가 촛불을 먹고 자란다. 100만명, 200만명이 촛불을 들고 권력자를 쫓아내려는 집회와 행진을 이어가지만 경찰과의 충돌은 없다. 전두환·노태우 정권 시절엔 지금 박근혜 대통령을 향하는 촛불 시민들의 구호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고 무서운 비난과 분노가 권력자를 향해 외쳐졌다. 그러나 그들 모두 어쨌거나 임기는 마쳤다. 이번에는 정치적 꼼수가 훤히 보이긴 하지만 박 대통령이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말은 꺼내놓은 상태다. 화염병보다 촛불의 폭발력이 더 강하다.

6차 촛불집회가 열리는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서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이 주최한 새누리당 해체 요구 집회에서 시민들이 '4월 퇴진, 6월 조기대선'을 당론으로 채택, 탄핵 추진에 제동을 건 새누리당의 대형 깃발을 찢고 있다. 연합뉴스

그래서 현 상황을 명예혁명이라 부르는 이들도 많다. 명예혁명은 1688년 영국에서 무력충돌 없이 왕을 몰아낸 혁명을 말한다. 이 혁명은 국왕의 전횡에 맞서 의회가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일으킨 반란이다. 입법권, 조세제정권 등 당시 의회가 쟁취한 권리와 자유가 일반 민중들의 삶에 긍정적 영향을 주고 영국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가 되긴 했다. 하지만 혁명의 과실을 가장 많이 차지한 것은 의회의 주인인 귀족과 부자들이다.

무엇보다 명예혁명이라는 말은 혁명의 대상을 주인공으로 하는 명칭이다. 당시 영국 왕 제임스 2세는 새로 들어설 왕의 묵인 아래 가족들과 함께 프랑스로 도피할 수 있었다. 모름지기 혁명이라면 왕을 단두대나 교수대로 보내는 거지만 왕은 스스로 물러났고, 혁명세력도 쫓겨난 왕에게 살길을 열어줬다는 의미에서 명예혁명이라 불린다.

그러나 지금 거리의 촛불은 박 대통령에게 명예로운 퇴진을 열어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래서 지금 상황을 명예혁명이라 부르고 싶지 않다. 혁명의 대상이 아니라 혁명의 주체가 주인공이 되는 이번 혁명의 이름은 촛불혁명이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불과 두 달여 전만 해도 현재 펼쳐지는 상황을 예상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과연 바람은 딴 데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듯 촛불혁명은 우리 앞에 툭 떨어진 것일까. 아니다. 촛불혁명은 세월호에 갇힌 아이들 수백명의 피, 메르스로 고통 속에 숨진 시민 수십명의 피, 경찰 물대포에 쓰러진 백남기 농민의 피를 먹고 자랐다. 시민들은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를 보며 ‘이게 나라냐’고 절망했고, 남북관계를 일촉즉발의 위기로만 치닫게 하는 개성공단 폐쇄와 사드 배치에 절망했고, 아버지를 미화하겠다는 ‘박근혜 국정교과서’에 절망했다. 쌓여만 가는 절망들이 결국 촛불혁명으로 폭발했다.

피와 절망으로 점철된 이 땅에서 우리는 그저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을 뿐이다. 강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때 세월호에 타고 있지 않아서, 그때 메르스 감염자와 접촉하지 않아서 지금 살아 있다.

수많은 이들의 고통으로 차려진 밥상에 정치인들은 숟가락을 들고 쇄도하고 있다. 대선을 어느 시점에 치러야 유리한지 주판알을 굴리고, 누구 뒤에 줄을 서고 누구와 합종연횡해야 살아남을지 탐색하는 이들의 복마전이 펼쳐지고 있다. 본디 자기가 차린 밥상도 아닌데 독차지하겠다고 싸우고 있다. 밥상을 엎을 기세다.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은 새 대통령을 뽑겠다고 나온 것이 아니다. 그들이 분노하는 것도 단지 박 대통령 개인에 대한 절망 때문만은 아니다. 근저에는 특권과 반칙의 늪에 빠져 있는 우리 사회에 대한 깊은 실망이 깔려 있다. 최순실 게이트의 어처구니없는 일련의 사건들은 더욱 심각해지는 부의 양극화, 전혀 변하지 않는 권력과 재벌의 유착, 그리고 시류에 표변하는 하이에나 같은 언론과 검찰 등 우리 사회의 고질병이 상징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래서 촛불을 든 시민들은 다음 대통령이 아니라 이런 잘못된 사회를 바로잡아달라고 요구한다.

밥상이나 엎지 마라. 그게 살아남은 자의 의무이고 최소한의 염치다. 지난 주말 거리를 비춘 232만개의 촛불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하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우리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면 또 다른 촛불혁명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김준기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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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상황이 박근혜 대통령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다. 박 대통령의 3차 대국민담화 후 그의 퇴진 방법을 둘러싸고 정치권이 지리멸렬한 것이다. 새누리당은 며칠 전 일부 원로 정치인들이 제시한 ‘4월 말 퇴진, 6월 말 대선’을 어제 만장일치 당론으로 채택했다. 탄핵에 앞장서겠다던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와 비박근혜계가 손바닥 뒤집듯 견해를 바꾼 것이다. 대통령이 물러나겠다는데 굳이 탄핵까지 갈 필요가 있느냐는 게 명분이다. 그러나 속셈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부박하기 이를 데 없는 행동이다.

청와대의 최근 움직임을 보면 박 대통령의 3차 담화가 퇴진에 무게를 두지 않았다는 점이 명확해진다. 퇴진 시점을 정하지 않은 채 국회에 공을 던진 뒤 벌어진 정치권의 혼란상을 즐기고 있다. 박 대통령의 임기단축을 위한 여야 협상안은 애초부터 빈 카드이며, 탄핵대오를 흩트러뜨려 반전의 기회를 찾기 위한 시간벌기가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어제도 박 대통령 스스로 퇴진 시점을 밝히라는 정치권의 요구에 앵무새처럼 “여야가 합의해달라”고만 했다. 스스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가진 3차 대국민 담화에서 “국회가 정한 일정과 절차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히고 있다. 박민규 기자

이런 태도라면 설령 협상한다 해도 청와대는 협상 결과를 꼬투리 잡아 시간을 벌 것이 뻔하다. 보수세력이 결집할 때까지 기다리자는 비열한 꼼수이자 치사한 연명책이 아닐 수 없다. 새누리당 비박 세력 또한 얄팍한 계산을 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새누리의 재탄생이 아니라 친박이 힘을 잃은 자리에 자신들이 들어가 낡은 새누리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것이다. 적당히 타협하기로 한 이유를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박 대통령은 3차 담화에서 자신은 오로지 선의로 국정을 수행했다고 말해 인식에 변함이 없음을 드러냈다. 그제는 국민 대통합을 총괄하는 장관급 자리에 세월호 유족들의 가슴에 못을 박은 극우성향의 목사를 앉혔다. ‘순수하게 개인적인 차원’에서 했다는 대구 서문시장 방문도 순수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차 안에서 눈물 흘렸다는 내용까지 대변인이 브리핑하는 것을 보면 대구에서 지지여론을 불러일으켜 보겠다는 계산이 분명하다. 박 대통령이 겉으로는 국가를 위해 일한다지만 다 거짓말이고 오로지 자신의 명예만을 생각한다는 것을 시민들은 다 안다.

박 대통령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한 그의 퇴진 약속은 허구일 뿐이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행동은 촛불이 곧 꺼질 것이라는 전망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시민의 시선은 박 대통령의 퇴진을 뛰어넘어 정치의 근본적인 개혁을 바라보고 있다. 어떤 술책도 끝없이 타오를 촛불을 견딜 수 없다는 점을 깨닫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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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겨울이 되었다. 토요일의 삶을 잃어버린 지 한 달 하고도 열흘, 그사이, 가을 산야는 속절없이 불타올랐고, 광장에는 진눈깨비 첫눈이 내렸다. 광장을 다시 찾았고, 어둠이 내린 거리를 낯모르는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촛불을 들고 걸었으며, 월요일이면 어김없이 출근을 했다.

어제 정오 수업에서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소설들과 김탁환의 최근 소설에 대한 학생들의 발표가 있었다.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체르노빌의 목소리>와 김탁환의 <거짓말이다>는 장르적으로 ‘소설’로 분류되지만, 내용적으로는 다큐멘터리(르포르타주)에 가깝다.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전쟁과 원전 사고를 겪은 구소련권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지역에 살았거나 살고 있는 200명의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인터뷰)로 구성되어 있다. 김탁환의 <거짓말이다>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고 김관홍 민간 잠수사의 탄원서 내용을 추적해가는 과정을 통해 세월호 참사의 진실에 접근해간다.

제5차 민중총궐기대회가 열린 2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소설은 픽션, 곧 지어낸 허구물이다. 그러나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해 지어낸다 해도, 현실의 생생한 이야기를 당해낼 수 없는 경우, 곧 현실이 픽션을 압도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재난 참사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이것은 소설인가’, 소설 속 인물들을 만나면서 ‘이것이 인간인가’ 끊임없이 자문한다. 수많은 밤 이러한 질문들과 맞서며 혼신의 힘으로 써온 것이기에, 학생들의 발표는 뜨겁고, 감동적이다. 그들은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온 사건이 어느 순간 자신의 삶 한가운데로 육박해 들어오는 경험을 하고, 눈앞에 벌어진 사실 뒤에 은폐된 진실을 직시하고, 끝까지 외면하지 않고 주시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절규하는 목소리들을 온몸으로 겪고 온 날 밤에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다가 추스르듯 촛불 하나 켜놓고 플로베르의 소설을 펼친다. 펠리시테라는 한 여자의 일생을 그린 <단순한 마음>이다. 단순한 마음이란, 삶에 바치는 소박한 마음, 인간을 대하는 순박한 마음이다. 소설사에서 대가로 추앙받는 플로베르가 말년에 발표한 소설인데, 주인공은 펠리시테라는 프랑스 북부 작은 포구 마을에 사는 가정부이다. 플로베르는 이 여성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그녀는 착한 마음씨와 옳은 일에 헌신하는 뜨거운 정신의 소유자일 뿐, 털끝만큼도 사심(私心)을 거느리지 않은 견결한 여성이다. 그녀의 일생을 둘러싸고 커다란 사건이 벌어지지 않음에도 읽어갈수록 인간에 대한 진실한 마음을 경험해서인지 깊은 여운이 남는다.

다시 토요일은 돌아오고, 올곧은 마음으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날은 언제나 가능한 걸까. 그날을 하루빨리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매서운 겨울바람에도 물러서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을 일이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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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사과 한달째. 광화문에서는 100만명 이상의 꺼지지 않는 촛불이 횃불로 이어지고 있다. 뉴스는 아직도 대부분이 최순실의 국정농단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다. 대통령은 헌법과 국민을 무시하고, 국가원수와 군 통수권자로서 스스로 권위를 던져 버렸다. 언젠가부터 국내 포털사이트의 청와대 연관검색어는 비아그라, 발기부전, 프로포폴 등으로 바뀌었을 정도다.

2014년 3월6일, 필자는 학군장교로서 동기생 5860여명과 함께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 앞에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헌법과 법규를 준수한다’는 임관선서를 했다. 이날 대통령은 군 통수권자로서 우리에게 ‘선배 전우들의 소임을 이어받아 강한 애국심과 투철한 사명감으로 충성을 다해줄 것’을 주문했다.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그날의 뜨거움은 가끔씩 힘들었던 군 생활 속에서 필자를 잡아주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장병들이 믿고 기대야 하는 정신적 지주 격인 군 통수권자는 스스로 군의 사명감을 저해하고 장병들의 권위와 사기까지 붕괴시켰다.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를 목숨으로 지켜온 선배 전우들의 뒤를 이을 각오로 훈련 중인 장교 후보생단의 기개를 꺾어버렸다.지금 이 순간에도 전후방 각지에서 작전에 투입되고 있는 우리 용사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지휘관들은 과연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주변에 간신뿐인 군 통수권자는 최순실에게 국정을 맡겨놓고 얼이 빠져 있었는데 일선 지휘관들의 명이 서겠는가.

미국에서는 주한미군의 방위비 인상을 압박하는 트럼프가 당선되고, 북한은 한반도 평화를 저해하는 핵실험을 계속하는 일촉즉발의 위급한 안보상황이다. 군 통수권자는 장병들에게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지휘관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군기를 주문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국정 컨트롤 부재 상황에서는 그렇게 주문할 수 없다. 정치권은 하루빨리 국정을 수습해 ‘이러려고 군 생활하나’ 하는 자괴감을 장병들에게 그만 심어주어야 한다.

김용태 | 예비역 중위·고려대 대학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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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동료시민 여러분. 이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가 어떤 추악함을 품고 있는지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주에는 4%라는 기록적인 대통령 지지율이 발표되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에는 사람들이 청와대를 에워싸고도, 광화문과 종로거리에 여전히 엄청난 인파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거리는 여전히 깨끗했고, 불타거나 깨지는 것 하나 없이 질서정연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는 광장의 질서가 어떤 두려움들을 깔고 있다고 느낍니다. 폭력과 희생자는 없을수록 좋고, 누구에게나 안전한 광장이 되자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라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일까요? 이미 권위를 상실한 대통령일까요? 차벽 뒤의 경찰일까요? 아니면 선진국의 언론일까요? 지지율 4%라는 놀라운 결과를 두고 여전히 버티고 있는 대통령도 굉장하지만, 이 압도적인 여론을 등에 업은 우리들의 조심스러움도 놀랍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광장의 주인인가요? 아니면 법원의 허락과 경찰의 선처를 바라는 공포에 질린 사람들인가요? 저는 최근 일고 있는 ‘폭력 대 비폭력’의 논쟁에 허망함을 느낍니다. 지금의 비폭력은 오직 경찰이 물대포를 쏘고 시위대를 마구잡이로 연행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뿐입니다.

5차 민중총궐기대회가 열린 2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경찰이 차벽에 평화시위를 해달라며 걸어놓은 현수막은 저에겐 모욕처럼 느껴졌습니다. 트랙터를 몰고 열흘을 달려온 농민들은 서울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고속도로에서 경찰에게 봉쇄당했습니다.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지 않는다고 폭력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새벽에,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시위에, 우리의 약한 고리들을 경찰은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주권자로서 우리는 권력에 저항하는 수단을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빌미를 제공해선 안 된다’, ‘너는 프락치가 아니냐’와 같은 내면화된 강박과 굴종이 아니라요. 보수언론과 기회주의자들이 우리를 평범한 시민이라 부르고, 시민의식이 돋보이는 평화시위를 찬양하는 것은 우리에게 족쇄를 채우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불순세력과 폭력시위로 우리를 매도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정작 광장에 나온 동료시민들에게 충분한 배려와 예우를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광장에서 대통령의 여성성을 조롱하면 마음이 상하는 것은 그걸 듣는 다른 여성 동료시민들입니다. 생각 없이 내뱉는 대부분의 욕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사소한 문제보다 시국이 더 중요하다고요? 그런 말은 이 모든 시국이 끝난 뒤에도 그들을 위한 자리는 없을 것이라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광장을 좁게 만드는 것은 물리적 충돌이 아니라 이렇게 다른 동료시민들의 존재를 하나하나 지워가는 행위에서 비롯됩니다. 정권을 수백 번 바꿔낸들,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과연 정의로운 것일까요? 그렇게 만들어낸 새로운 세계가 어느 날 나를 밀어내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동료시민 여러분, 우리는 이 나라의 처음부터 끝까지 뿌리박혀 있는 불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든 것을 새롭게 세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을 대신해줄 그 어떤 책임 있는 세력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곧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혁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권력의 시간과 자본의 시간을 정지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만의 호흡으로 새로운 시간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가 싸우는 것은 단지 차벽 너머에 있는 하나의 권력이 아니라, 우리를 고통에 빠트린 모든 억압과 불의, 그리고 그것에 끌려다니던 지난날의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인정도 바라지 말고 스스로 떳떳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새로운 법을 만들고, 또 그것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혁명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최태섭 | 문화비평가·‘잉여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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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선에서 박근혜가 기어코 당선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착잡한 심정이었다. ‘국민들은 어떤 식으로든 박정희가 만들어놓은 체제의 매듭을 짓고 싶어 하는구나’라는 생각이었다. 문재인에 만족하지 못했지만 박근혜만은 절대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나는 참담한 심정이었지만 유권자들의 선택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제도이고 규칙이므로. 박정희를 존경했기 때문에 박근혜를 좋아했던 유권자들에게 그것은 일종의 보은(報恩)이었을 것이다. 박정희 덕분에 북한의 위협을 이겨냈고 이만큼 먹고살게 됐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그의 딸을 꽃가마에 태우는 것이야말로 박정희 시대의 수미상관한 매듭이었다. 나는 다른 종류의 매듭이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 박정희 시대에는 작동했지만 점차 효용을 잃어 이제는 거의 작동하지 않게 된 시스템을 마침내 그의 딸이 철저히 절단을 냄으로써 매듭짓게 될 것이라는 예감. 결국 우리는 그 파국적 종언을 목도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이 파국은 다행스러운 면도 없지는 않다. 더 이상 우리에게 맞지 않는 옷이 되어버린 박정희의 기나긴 그림자를 마침내 벗어던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빨리 다가온 파국 앞에서 새로운 시대를 어떻게 설계할지를 의논해야 한다.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보다 새로운 시스템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 지금의 파국이 박근혜라는 한 개인 때문에 만들어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주권자 위에 군림하는 제왕적 대통령, 승자독식의 선거제도, 노동을 비롯한 사회적 파트너의 철저한 배제, 5년 단임 떴다방 정권의 대통령 무책임제, 위험의 사회화와 이윤의 사유화 같은 제도의 조합은 지나간 모든 정권에서 문제를 야기해왔다. 그 꼭짓점에 어떤 개인이 앉느냐에 따라 문제의 정도와 양상이 달랐을 뿐이다. 우리의 제도는 언제나 문제를 안고 있었고, 박근혜는 그 문제를 판타지 소설로 만드는 주술을 부렸을 따름이다. 언젠가 이 시스템의 꼭짓점에 박근혜보다 더한 진짜 악마가 들어앉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보다 새로운 시스템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5차 촛불집회를 이틀 앞둔 24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벽면에 시민들의 행동을 촉구하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이석우 기자

내가 불행하게 생각하는 것은 야권의 유력 주자들에게서 ‘지도자의 언어’를 듣기 어렵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야권은 대체로 광장의 촛불에 뒤따라가는 모습을 보여왔다. 그것이 민의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광장은 엄청난 불확실성을 안고 있다. 광장은 앙시앵 레짐을 해체할 수 있지만, 새로운 제도를 설계하지는 않는다. 박근혜 이후의 새로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파탄 난 정권과 덩달아 멈춰버린 행정부를 대신해 이 모든 논의를 국회가 책임 있게 이끌어나가야 한다. 그중에서도 야당이 앞장서서 새로운 시대를 설계하고 권력을 가져올 준비가 되어 있음을 국민들에게 보여야 하고, 그중에서도 대선주자들이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악마는 언젠가 돌아올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야권의 대선주자들이 앞장서서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 대선주자의 기득권은 지지율의 크기에 비례한다. 그러나 지금의 지지율은 우리가 그렇게도 재설계하고 싶어 하는 낡은 시스템하에서 얻어진 것이다. 지지율 1위인 문재인 전 대표를 보자. 이 와중에도 그의 지지율은 기껏해야 2~3%포인트 올랐을 뿐이다. 대결적 정치구도에서 그의 편에 속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박근혜 하야를 요구하면서도 그의 편에 합류하기를 꺼린다. 확장되지 않는 지지율에 연연하기보다는 다른 주자들과 더불어 새로운 시대를 설계하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겠다고 선언하는 편이 훨씬 나은 전략이다.

국가적 민폐가 되어버린 박근혜를 하루라도 빨리 끌어내리기 위해 광장의 촛불이라는 동력을 활용하는 것까지는 좋다. 그러나 동시에 야권의 대선주자들은 기득권을 내려놓고 새로운 시대를 설계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박근혜 이후의 새로운 시대를 무엇으로 채워나갈지 하나하나 합의하고 우리 중에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이것만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국민들은 지도자의 모습을 발견하고 안심할 것이다. 마침 새누리당의 남경필 지사는 탈당을 결행했고 김무성 전 대표는 대선 불출마와 탄핵을 선언했다. 누군가는 불타는 수레에서 먼저 빠져나오려는 정치쇼라고 비판하겠지만, 비록 정치쇼라 하더라도 묵직한 희생을 감내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행동들이다. 그들에게서 언뜻 지도자의 모습을 본 국민들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이제 공은 야권 주자들에게로 넘어왔다. 혁명의 시대이지만 지도자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 한 시대의 파국적 종언을 넘어 새 시대의 청사진을 보여야 한다.

장덕진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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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민심과 국민 여론은 거듭 대통령의 하야다. 하지만 대통령은 꿈적도 하지 않는다. 헌법을 무기로 대통령이 국민을 이기겠다고 작정했다는 뜻이다. 선을 넘은 것이다.

이로써 마지막 가능성으로 남았던 대통령의 정치는 완료됐으며 명예혁명과 망명을 운운했던 일각의 로망은 소멸했다. 남은 것은 국회의 정치와 시민의 정치다. 국회의 정치는 이제 외길로 보인다. 탄핵을 가결하고 헌법재판소로 가는 길, 대통령의 헌법과 국회의 헌법이 맞붙는 막다른 길이다. 반면 시민의 정치는 이 길과 함께 또 다른 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의 사문화된 원칙을 되살려 엘리트 독과점 정치의 대의 민주제를 넘어서겠다는 국민혁명의 길이다.

날마다 특종과 속보와 가십성 뉴스가 홍수를 이루지만 국민은 허우적거리며 떠내려가지 않는다. 대통령의 하야를 마땅하게 여기는 민심은 하야한들 지난한 탄핵으로 간들 그다음이 마땅치 못한 이 난국을 냉정하고 차분하게 직시하고 있다. 국민은 마음속에서 대통령을 지웠기 때문이다. 진상 규명과 처벌은 응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누가 무엇을 위해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만들 것인가이다. 초겨울의 주말문화이자 저녁문화가 된 광장 행렬이 100만 촛불을 켜면 때맞춰 청와대 실내등이 꺼지고 경복궁과 북악산이 깜깜해지는 광경은 우연이 아니다. 낮과 밤, 평일과 주말을 교차하는 이 빛과 어둠의 대비는 국민 저마다의 간절한 ‘보디 퍼포먼스’가 어우러진 거대한 ‘미디어 아트’다.

이 ‘국민예술’이 열망하는 국회의 정치는 ‘경제부흥, 국민행복, 문화융성, 평화통일’의 4대 국정과제를 사사로운 먹잇감으로 갈취한 ‘비선 실세’의 공범들과 이들을 공권력으로 뒷바라지한 국가 시스템의 적폐를 대청소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민 대표성이 현저히 떨어진 국회를 정당득표 연동 비례대표제를 통해 일신하라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탄핵 정국을 경과하는 동안 국회의 정치가 보여줘야 할 기본이다. 이것을 실천하지 않고 대통령 선거로 가서 차기정부가 하겠노라 공약한들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민심은 안다. 51%로 당선된 대통령을 95%가 마음에서 버리게 된 국민의 자괴감은 더 이상 무력감이나 패배감이 아니라 새 판 짜기를 시작해야겠다는 집단지성의 장기전으로 가고 있다.

이 점에서 민심의 향배를 요약하면 이렇지 않을까 한다. 못 볼 것의 끝을 끝내 보았다, 돌이킬 수 없고 돌아갈 수 없는 데까지 왔다, 그리고 이 몹쓸 사태를 단숨에 정리할 방법을 그 누구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국회는 죄인의 심정으로 탄핵의 외길에서 입법, 행정, 사법, 헌법재판, 선거관리에 이르는 헌법기관 전체의 정상화를 위한 대장정에 그 어떤 지름길도 샛길도 없음을 직시하고 국가 대개조의 가시밭길을 정직하게 걸어가라고 말이다. 이렇게 국민과 소통하며 탄핵 정국이 일단락되어야 대통령 선거가 의미를 갖는다.

시민의 정치는 국회의 정치를 견인하되 따로 가야 할 길이 있다. 그것은 100만 촛불이 부른 그 노래의 후렴구 그대로다. “후회 없이 꿈을 꾸겠다 말해요”이고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이다. 이 꿈을 계속 꾸고 싶어서 소설가 부희령은 “오래오래 광장을 지킬 수 있으면 되는 거”라 믿지만 그러기 위해선 “촛불이 꺼지면 언제든지 옆 사람에게 붙여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강풍이 불고 한파가 와도 모일 수 있는 공간을 국민과 함께 만들 공적 주체는 누구일까. 이 난국에도 국민의 일상과 안전을 책임지는 최후의 헌법기관, 바로 전국 17개 광역 지방정부와 의회이며 228개 기초 지방정부와 의회다.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를 겪으며 국민은 경험했다. 중앙권력의 갑질 횡포에 위축된 지방정부와 지방의회지만 주민자치를 위해 깨알같이 많은 일을 해 왔으며 특히 위기 때 국민이 믿고 의지할 언덕이 되었던 공공이 누구였는지 말이다. 그 지방정부와 의회가 전국 각지에 한겨울의 촛불 민심을 환대하는 공간을 마련한다면, 시민의 정치는 겨울밤 내내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천일야화를 이어갈 것이다. 이 천일야화를 통해 헌법을 공부하고 민주주의 교과서를 집필하며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갈 행복한 나라를 후회 없이 꿈꿀 수 있어야 한다. 대중문화 평론가 황진미의 통찰대로 “허깨비가 사라진 이후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꿈꾸는 것”이야말로 시민의 정치가 갖는 힘이자 국민혁명을 만들어가는 길이다.

새로운 민주공화국이라면 국회의 정치와 시민의 정치를 연결하는 플랫폼은 대통령이나 중앙정부가 아니라 충분한 권력을 가진 지방자치의 각양각색 정치여야 할 것이다.

내년이면 6월 국민항쟁 30년이다. 그 사이에 국민은 박근혜 대통령까지 여섯 명의 대통령을 뽑았다. 국민이 원하는 바는 일곱번째 대통령을 뽑기 전에 헌법 제1조의 원칙이 살아 숨 쉬는 민주공화국을 맘껏 꿈꾸는 일이다.

김종휘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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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군중이 매주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거리의 의회’를 열고 있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을 능가하는 분노의 함성과 외침이 만추의 광화문광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서 드러난 ‘권력의 사유화’로 박 대통령은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상실하고 통치불능의 상태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 했듯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상실한 지도자는 국가를 이끌어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1974년 7월25일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범죄행위를 저지른 닉슨 대통령을 탄핵 소추한 하원 법사위원회에서 바버라 조던 하원의원은 “국민의 공적신뢰(public trust)를 배신한 대표는 탄핵될 수 있다”고 연설하였다. 대의 민주주의하에서 주권자인 국민은 대표에게 권력을 한시적으로 ‘위임’한 것이지 ‘신탁’한 것이 아니다. 대표는 주권자인 국민의 수탁자(fiduciary)가 아니라 대리인(agent)일 뿐이다. 수탁자는 피수탁자인 국민의 공익을 위해 정치권력을 행사하도록 위임받았지만, 위임받은 기간 동안 피수탁자인 국민에 대한 책임성으로부터 면제된다. 반면에 대리인으로서 대표는 주인인 국민에 대해 엄격하게 책임을 지도록 기속(羈束)되며, 따라서 국민의 공적신뢰를 상실한 대표는 권력을 회수당할 수 있다. 대의 민주주의하에서 국민이 대리인인 대표, 특히 대통령의 권력을 회수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주기적 선거를 통한 퇴출밖에 없다. 그래서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은 탄핵제도를 헌법에 넣음으로써 입법부가 국민을 대리하여 공적신뢰를 상실한 대통령을 비롯해 대표들의 권력을 회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난 19일 전국 60여 곳에서 열린 4차 촛불집회에 주최 측 추산 96만명(경찰 추산 26만여명)이 참여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외쳤다. 부산 서면 촛불집회(왼쪽 사진)에는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10만명이 참가했다. 대구 중구 대중교통전용지구에서 열린 집회 참가자들은 ‘박근혜 퇴진, 새누리 해체’라고 적힌 현수막을 전달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오른쪽 위). 광주 집회에선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당시 광주시민들이 도청 앞 분수대에 횃불을 켜고 열었던 ‘민주성회’가 재현됐다.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은 오는 26일 5차 촛불집회에 최대 300만명이 참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대한민국은 미국식 탄핵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헌법 65조는 대표가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에는’ 국회가 탄핵을 소추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검찰은 박 대통령이 최순실 일당과 범죄를 공모한 혐의가 있다고 발표했다. 따라서 박 대통령은 특검에 의해 추가 범법행위가 밝혀지기 이전에도 탄핵 소추를 당할 수 있다.

탄핵은 헌법에 명시된 합법적 절차이나, 현 탄핵사태가 헌정위기로 발전할 것인가의 여부는 박 대통령의 대응에 달려 있다. 여야의 탄핵 소추 시도에 대해 박 대통령은 주권자인 국민의 충실한 ‘대리인’이 아니라 국민에 대한 책임성으로부터 면제된 ‘수탁자’처럼 행동함으로써 자유 헌정주의의 기본 정신을 위반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국회가 탄핵 소추에 필요한 ‘적법한 절차(due process)’를 밟는 데 협조하지 않고 있다. 검찰의 대면조사를 거부하고, 탄핵 소추가 의결되었을 경우를 대비하여 대통령 권한 행사가 정지된 기간 동안 과도정부를 대행할 국무총리의 임명도 거부할 태세다.

워터게이트 사건 때 닉슨이 하원에 의해 탄핵 소추된 것은 그의 범법행위보다도 검찰의 워터게이트 사건 수사를 방해하고 사건을 은폐하려 했기 때문이다. 미국 헌법은 대통령이 법이 충실하게 집행되도록 조치를 취할 의무를 지닌다고 규정하고 있다. 미국 헌법의 아버지인 제임스 매디슨은 “대통령이 헌법을 전복하려고 시도한다면 탄핵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닉슨은 헌법을 전복하려 함으로써 국민과 의회를 분노케 했고 퇴출된 후에도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남아 있다. 박 대통령이 갈수록 더 거대한 국민적 저항에 부딪히고 있는 것은 검찰의 대면조사를 거부하면서 최순실 사건 수사에 성실히 협조하고, 탄핵 시 필요한 조치를 취해 주겠다는 기존의 약속을 뒤집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국가 최고 공인으로서 지켜야 할 공적신뢰를 배신하였기 때문에 국민적 분노를 사고 있는 것이다.

지금 박 대통령에 대한 분노는 거리와 광장에서 분출되고 있다. 이제 거리에서 분출되고 있는 분노를 의회 대표들이 장내로, 의사당 안으로 끌어들여 처리해야 한다. 계속 ‘거리의 의회’가 ‘제도권 의사당’을 압도할 경우 국민적 분노는 통제불능 상태가 될지 모르며, 한국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게 될지 모른다. 박 대통령은 탄핵에 필요한 절차가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국회와 검찰에 협조함으로써 이번 사태가 한국 민주주의의 후퇴가 아니라, 더 책임성 있는 민주주의로 전진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 주어야 한다. 노자는 “멈추어야 할 때와 장소를 알면 위태롭지 아니하다(知止不殆)”라고 가르쳐 주었다. 박 대통령은 이미 멈추어야 할 지점을 너무 멀리 넘어가 버려 위태롭게 되었다. 지금 박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만족해야 할 최적점을 발견하는 것이다(知足不辱). 박 대통령이 만족해야 할 최적점은 국민의 일반의사이다. 광장에서 표출되고 있는 국민적 요구에 응답하면 박 대통령은 닉슨처럼 치욕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임혁백 |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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