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적 양심을 걸고 이번 경제성 분석 결과를 확신합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경인운하 사업에 대해 비용 대비 편익(B/C) 분석이 기준점인 1을 넘는다고 설명하던 한 국책기관의 연구원이 이렇게 말했다. 기존의 같은 분석에서 1을 밑돌던 사업이 단번에 경제성 있는 사업으로 둔갑했다는 기자들의 질문 공세 끝에 나온 답이었다. 한반도대운하를 공약으로 내건 MB 정부 출범에 토건관료들은 경인운하를 다시 들고 나왔고, 사업타당성을 높이기 위해 국책연구기관들을 압박했다. 이전에도 정부는 B/C 결과가 1에 못미치자, 평가항목을 수정해 재분석을 요구했고, 그래도 경제성이 없다는 결과가 나오자 용역비 지급을 미루기까지 했다. ‘학자적 양심’과 불도저 같은 정부의 밀어붙이기에 2조원 넘는 예산이 투입됐다. 그 결과는 4대강 사업의 ‘녹조라떼’만큼이나 허탈한 상황이다.

정부가 전문가에게 의견을 묻는 이유는 객관적 입장에서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신뢰 때문이다. 일반 시민의 의사 결정에도 전문가의 의견은 필수적이다. 고도로 전문화된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경제적 측면에서 시민들은 전문가의 의견을 들음으로써 정보취득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앤서니 다운스는 <경제이론으로 본 민주주의>에서 “합리적 시민들은 전문가의 의견에 필적한 만한 의견을 스스로 생산할 때 드는 비용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전문가의 일반적 의견을 구매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극단으로 치닫는 사회적 갈등 속에서 전문가 의견마저 그 격차가 커지고 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한편으론(on the one hand) 어떻고, 다른 한편으론(on the other hand) 어떻다라는 백악관 안팎의 경제학자들에게 “외팔이(one-handed) 경제학자를 한번 만나봤으면 좋겠다”고 비꼬기도 했다지만 지금 우리 상황은 반대다. 너무나 완고해서 논리를 통한 설득보다는 상대방 의견을 ‘순진한 생각’, ‘얼치기 수준’으로 무시하기 일쑤다.

더 씁쓸한 것은 전문가로서 쌓은 명성과 지식으로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쓰고 있다는 점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등장하는 주요 인사들이 그렇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하고 성균관대 교수를 지내다 2005년부터 박근혜의 경제 가정교사 역할을 했다. “해외출장을 가도 대통령 전용기만 타고 다녀서 면세점 갈 시간이 없다”며 명품가방을 요구했다는 소식에 쓴웃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미르재단과 보수단체에 필요한 돈을 수금하는 데 앞장섰던 이승철 전경련 부회장 역시 완고한 시장우선주의자였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전경련 연구기관인 한국경제연구원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학자 출신이다. 대통령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철학을 얘기하던 달변가이기도 했지만 지금 보면 누구보다 반(反)시장적이었고, 권력을 좇는 ‘예스맨’에 불과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의 중심에 있는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김상률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김종 전 문체부 차관 역시 교수 출신이다.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된 이들은 ‘영혼 없는 공무원들’과 함께 헌법을 유린했다. 정유라 부정 입학과 학사 특혜 혐의 등으로 남궁곤·류철균 등 이화여대 교수들도 구속됐다.

시민이 전문가의 의견에 의지하다가는 주주와 전문경영인의 관계처럼 ‘대리인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다.

고 신영복 선생은 지식인에 대해 “지남철의 여윈 바늘 끝처럼 불안하게 전율하고 있어야 하는 존재”라며 떨림이 없이 어느 한쪽에 고정되면 나침반이 아니라고 했다. ‘조기 대선’ 분위기에 전문가들이 캠프에 몰려들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콘크리트처럼 굳어진 신념과 그 신념을 펼치기 위한 자리 구하기가 아니라 사회를 위해 고민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떨림’이어야 할 것이다.

산업부 | 박재현 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5·18민주화운동이 다시 우리 사회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그동안 정권의 입맛에 따라 진실이 왜곡되고 은폐돼 심지어는 북한군 투입설까지 공공연하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1980년 5월의 진실이 하나둘씩 미국의 비밀문서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최근에는 그동안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던 시민들을 향한 헬리콥터에서의 기총소사가 사실로 밝혀졌다.

1980년 5월에서 1987년 6월항쟁으로, 그리고 비록 절반의 성공에 그쳤지만 민주정부로의 정권교체라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경험하게 된 역사도 5월의 희생 위에서 맺어진 열매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극도로 어수선한 시국에서 5월의 민주주의와 역사성을 키우고 발전시켜야 할 5·18기념재단이 정작 5월의 가치를 훼손하고 ‘민주·평화 도시’라는 자부심을 갖고 사는 광주시민들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하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따지고 보면 5·18기념재단을 둘러싼 문제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그동안 곪아오던 고질적인 내부 문제들이 터져서 오늘날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시민단체들이 이미 여러 차례 제기했지만, 재단은 오래전부터 내부 감사보고서에서조차 연고주의와 가족주의, 낡은 타성과 관행을 수차례 지적받아 왔다. 재단의 공식 기구가 이 같은 비판을 반복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직원을 회유하거나 협박해 재단의 비리를 감추려는 시도를 해왔다. 심지어 광주시의 감사가 진행되는 순간에도 5·18기념재단은 전혀 반성 없는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현재의 5·18기념재단은 스스로 자정할 능력마저도 없는 것 같아 답답하고 참담한 심정이다. ‘5월은 명예가 아니라 멍에이고, 이권이 아니라 채무이자 희생이고 봉사’라는 1994년 창립선언문이 무색할 정도이다.

시민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나란하게 서겠다는 다짐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국민성금으로 창립하고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5·18기념재단은 소수의 인사들에 의해 사유화되는 바람에 시대의 아픔과 만나는 광장이 되지 못하고, 깨어 있는 시민들의 든든한 동지가 되지 못한 채 고립돼 있다. 스스로 특권의 밀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재단은 특정인을 채용하기 위해 내부 규정까지 바꾼 것으로 드러났고, 기증물품과 관련한 각종 비리 의혹도 불거졌다. 그런가 하면 재단에 파견된 공무원의 수당 부당 지급, 부당노동행위와 노동탄압 등으로 얼룩졌다. 여러 언론을 통해서도 알려진 바 있지만 5·18기념재단이 안고 있는 문제를 모두 열거하자면 한이 없을 정도다.

이렇듯 재단이 무력하고 비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원인은 재단 이사 구성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특정 단체가 추천하는 이사가 과다하게 선임되고, 그로 인해 이사회가 민주적인 논의가 불가능한 구조로 돼 버린 것이 오늘날 5·18기념재단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행해야 할 것은 기득권과 특권 지키기에만 집착하는 이사회의 개편과 외부의 비판을 수용하는 시스템의 확립이다. 고인 물은 썩고 부패하기 마련이다. 조직이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민주적 의사결정을 통해 견제와 비판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려면 시민사회에 과감하게 조직을 개방하고 투명하게 운영해야 한다.

그동안 5월의 전국화와 세계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제기된 ‘그들만의 5월’ ‘기득권화된 5월’이라는 비아냥과 냉혹한 비판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뼈를 깎는 각성과 고민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5·18기념재단에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재단이 자정능력을 상실했다’고 진단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재단 측이 무슨 대안을 내놓든 시민들은 이해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단언컨대 그동안 시민사회에서 제기한 많은 문제들을 스스로 책임지고 풀어가는 모습을 통해 쇄신하지 않으면 5·18기념재단의 미래는 없다.

정영일 | 광주시민단체협의회 상임대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 법이다. 거짓말을 감추려면 다른 거짓말을 더 할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런 악순환에 빠졌다. 박 대통령은 최순실씨를 ‘평범한 가정주부’로 생각했다고 밝혔다. 경향신문 보도를 보면 박 대통령은 지난 3일 헌법재판소에 낸 ‘소추 사유에 대한 피청구인의 입장’이라는 의견서에서 “피청구인(박 대통령)은 최순실에 대해 평범한 가정주부로 생각했고 그녀가 여러 기업을 경영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음”이라고 적었다. 미르·K스포츠 재단 설립 등이 최씨에게 속아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다 보니 40년 지기인 최씨를 작년까지 평범한 가정주부로 알고 있었다고 표현하게 된 것이다. 어이가 없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박 대통령으로부터 재단 설립과 모금에 대한 세부지시를 받았다고 증언하는 등 박 대통령과 최씨가 공범이라는 증거는 차고도 넘친다.

김용민의 그림마당 캐릭터(박근혜 2016년 12월 21일)

박 대통령은 청와대 기밀 유출 책임도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부하인 정호성 전 부속비서관 탓으로 돌렸다. 박 대통령은 의견서에 “(정 전 비서관에게)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어서 참고하라고 한 것”이라며 “연설문, 말씀 자료 이외의 다른 자료들을 보내도록 포괄적으로 위임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하지만 거짓말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 정 전 비서관은 최씨에게 문서를 전달한 것은 박 대통령 지시였다고 이미 검찰에서 자백하고 법정에서도 진술했다. 헌재 재판관들이 박 대통령 주장을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박 대통령은 언론 취재와 특검·검찰 수사를 통해 확인된 사실에도 ‘오리발’을 내밀었다. 지난달 청와대 출입기자단 신년인사회와 극우 성향 언론인과의 인터뷰 등에서는 “완전히 엮은 것”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라고 했다. TV로 생중계된 대국민 담화 내용도 지키지 않았다. 검찰 수사를 받겠다고 해놓고는 거부했고, 최근에는 청와대 압수수색 불가 방침으로 특검 수사에 성실하게 임하겠다는 말도 뒤집었다. 박 대통령의 파렴치 행태는 끝이 없다. 특검이 어제 수사 기간 연장을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특검법상 1차 수사 기간은 오는 28일까지인데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결정으로 한 달간 연장이 가능하다. 박 대통령의 거짓 증언과 수사 방해 행위가 지속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특검 수사 기간 연장은 당연하고 필수적이다. 특검은 수사 강도를 더욱 높여 박 대통령의 증거 은폐 의혹까지 낱낱이 밝혀야 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언론 보도와 특검 수사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전모가 드러나고 있지만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씨는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지 않고 애먼 시민이 목숨을 끊는 일이 일어났다. 설인 지난 28일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60대 ‘박사모’ 회원 조모씨가 투신해 사망했다. 조씨는 탄핵 반대 집회에서 사용하는 손태극기 2개를 든 채 몸을 던졌고, 태극기에는 ‘탄핵가결 헌재무효’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경찰은 “박사모 활동 때문에 가족과 불화가 있었다. 유족을 상대로 경위를 확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이달 7일 박근혜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에서는 한 스님이 박 대통령 체포 등을 요구하며 분신했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두 사람의 극단적 선택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지만,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의 죽음은 박 대통령 탓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대통령이 비리를 저지르지 않고 정상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박 대통령 지지자로 보이는 조씨의 투신에는 설 직전 박 대통령이 “최순실 사태는 거짓말로 쌓아올린 거대한 산”이라며 허위 내용으로 극우 언론인과 인터뷰한 것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박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박사모의 탄핵 반대 집회를 ‘태극기 집회’라고 표현하며 자신의 대통령직 유지를 국가 수호와 연계하는 극단적인 메시지를 던졌다. 그러나 국가와 정부는 다르다. 정부는 국가와 주권자인 시민을 연결하는 매개체에 불과하다. 박 대통령이 물러나 박근혜 정부가 중도에 해체되더라도 주권자가 선거를 통해 새로운 정부를 세우면 된다. 이것이 민주주의다.

박 대통령이 궤변으로 혹세무민하며 버티기에 들어가면서 나라는 더욱 엉망이 되고 있다. 시민들의 피로감과 스트레스도 임계치에 이르렀다. 설 연휴 모처럼 일가 친척이 모인 자리의 대화 주제도 국정농단 세력에 대한 분노와 나라 걱정이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과 최씨는 ‘내가 무슨 죄가 있느냐’며 적반하장으로 나오고 있다. 특검과 헌법재판소에 출석하지 않으면서 수구 보수층을 내세워 재기를 모색해보려는 꼼수에 시민들은 억장이 무너진다. 특검은 청와대 압수수색 등 수사에 더욱 속도를 내고, 헌재는 탄핵 결정을 앞당겨 하루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야 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역설적이게도 대통령기록의 중요성을 최순실 사태가 증명해주고 있다. 대통령기록은 대통령의 국정철학이자 방향이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국가 예산을 동원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어설픈 말솜씨에도 발언하는 순간 국가 예산이라는 노다지가 쏟아진다는 것을 최순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집요하리만큼 국가시스템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나라살림연구소가 발간한 ‘최순실과 예산도둑들’에는 놀라운 장면들이 나온다. 최순실이 써준 대통령 연설문을 박근혜 대통령이 대독하면, 관련 부처들은 연설문을 중심으로 예산을 편성했다. 특히 최순실이 좋아했던 평창 올림픽, 창조경제, 문화융성을 언급할 때마다 관련 부처는 바빠졌다. 그 결과 문화체육관광부는 87번, 미래창조과학부가 90번이나 대통령 관심 예산으로 언급되어 있었다. 이런 과정으로 반영된 최순실 예산은 지난 3년간 1조4000억원이다. 이것이 대통령 연설문의 힘이다.

이런 비밀을 간직하고 있던 박근혜 정부는 청와대 정보공개 요청을 유독 불편해했다.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가 청와대에 외교사절들이 선물한 대통령선물목록을 정보공개청구 하였으나, 누가 어떤 선물을 언제 줬는지 알 수 없도록 기존 정보를 재가공해 공개했다. 위 정보는 이명박 정부마저도 일목요연하게 공개한 자료다. 그 이유를 알고 보니 대통령 선물이 최순실 집에 전시되어 있었다. 대통령 선물이라는 공적자산도 개인적으로 챙기는 저 집요함과 꼼꼼함을 누가 상상했겠는가.

이렇듯 박근혜 정부에서 대통령기록, 공공기록, 정보공개정책은 끝도 모르게 무너졌다. 시민에게는 닫힌 정부, 최순실에게는 활짝 열린 정부였다. 그러면 위와 같은 사태들은 어떻게 개혁을 해야 할까? 벚꽃 대선을 치를 가능성이 높고, 차기정권은 인수위원회도 없이 임기를 시작해야 하기에 각 캠프는 지금부터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우선 대통령기록 생산에 대해 강력한 개혁조치가 필요하다. 대통령이 근무 중에 언급한 모든 발언내용은 녹음 및 속기록으로 남겨야 할 것이다. 이는 대면지시, 전화통화, e메일 등을 모두 다 포함해야 한다.

참여정부 이지원 시스템 복원, 미국의 e메일 공공기록 관리정책, 백악관 녹음 시스템 등을 참고해 차기 정부에 반영해야 한다. 최근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통령 일정 24시간을 공개하겠다고 밝혀 이 문제에 대해 가장 먼저 언급을 했다. 매우 환영할 만한 정책이다.

다음으로 청와대 및 정부의 기록·정보공개정책을 전담하는 기구 신설이 시급하다. 정보는 매우 미묘해, 공개만 고집하다 보면 국가비밀, 개인정보 등이 노출되고 비공개 정책을 유지하면 각종 비리와 부패가 발생한다. 현재 국가차원에서 정보공개기준을 전문적으로 고민하는 기관이 없어, 부처별로 정보공개 편차가 심각하다. 이런 것들이 쌓여 정부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다행히 서울시는 박원순 시장 부임 이후, 정보공개심의회를 체계적으로 운영해왔고 관련 예산을 투입해 각종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다음 정부는 서울시 정책을 반영해 국가기록정보위원회를 신설하고 정보·기록관리 체계를 정비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각종 기록관리 및 정보공개 법령 정비가 시급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정호성 비서관을 통해 국가기밀 및 대통령기록을 최순실에게 지속적으로 유출·은닉했다. 그런데 검찰은 대통령기록물법 및 공공기록물법 위반으로 위 두 사람을 기소하지 못했다. 법의 사각지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향후 대통령기록물법, 공공기록물법, 정보공개법 등을 개편해 국가기록 및 정보를 특정인의 이익을 위해 유출할 때 처벌할 수 있는 법안 마련이 필요하다.

대통령기록 및 국가정보는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공적재산이다. 하지만 권력을 잡은 세력은 공적재산인 정보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해왔다. 이번 사태는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기록시스템의 허점이 빚어낸 참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 현 사태에 대한 분노를 넘어 재발방지를 위한 정부개조에 나서야 할 때이다.

전진한 | 바꿈 상임이사·알권리연구소장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 명부(冥府)다. 저승이란 곳이다. 저승엔 죽은 자의 죄를 심판하는 열 명의 왕이 있다고 한다. 염라대왕은 그중 다섯 번째에 앉아 있다. 염라대왕 앞에는 아홉 면의 업경(業鏡)이 있다. 하나하나의 거울에 한평생 지었던 죄업이 차례로 떠오른다. 거짓말을 해도 소용없다. 일종의 CCTV다. 꼼짝 마라다.

이승엔 그런 거울이 없다. 그러니 마음 놓고 ‘모른다’고 발뺌할 수 있다. 김기춘은 1975년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시절 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총지휘했다. 당시 한국에 있던 재일동포 유학생이 대략 200~300명이었다는데 이 중 10%가량이 간첩으로 몰렸다. 혹독한 구타와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 피해자들은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김기춘은 그때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김기춘에겐 기억도 나지 않는 하찮은 사건으로 학생들은 사형 선고를 받고 십수년을 감옥에서 지냈다. 반성도 사죄도 없었다. 단죄도 없었다.

김기춘이 마침내 구속됐다. 생애 첫 수감이다. 김기춘은 정부 비판적인 인사들에 대한 지원을 다 끊으라고 지시했다. 이를 위해 1만명에 달하는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는 40년 전에 “공산주의자들은 무좀과 비슷하다. 약을 바르면 잠시 들어갔다가 약을 바르지 않으면 또 재발한다”고 했다. 1975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602달러였다. 지금은 3만달러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때에 비하면 소득뿐 아니라 삶의 질과 다양성, 지적 수준, 정보는 50배, 100배 이상 높아졌다. 김기춘의 시계는 40년 전에 멈춰 서 있다. ‘무좀 리스트’를 만들었던 그 사고 그 수준으로 지금 또 블랙리스트를 만들었을 것이다. 해마다 노벨상 후보에 오르는 고은 시인, 맨부커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 영화배우 송강호·김혜수·하지원, 영화감독 박찬욱 등이 들어 있다. 김기춘에겐 모두 무좀 같은 존재들이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실행에 관여한 혐의로 지난 21일 새벽 구속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왼쪽 사진)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2일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대치동 특검 사무실에 들어서고 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연합뉴스

1940년대 할리우드 최고의 작가인 돌턴 트럼보는 미국에서 무좀 취급을 받았다. 당시 미국은 좌파 성향의 극작가·감독·배우의 활동을 막기 위해 ‘할리우드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매카시즘 광풍 이후엔 그 숫자가 더욱 불어나 많은 영화인들이 공산주의자 혹은 동조자로 몰렸다. 미 의회 청문회의 추궁에 트럼보는 “네, 아니요로만 대답하는 사람은 바보 아니면 노예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일자리를 잃었다. 생계를 위해 트럼보는 11개의 가명으로 작품을 썼다. 가명으로 쓴 ‘로마의 휴일’(1953), ‘브레이브 원’(1956)은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았다. 그는 수상식에도 나타날 수 없었다. 트럼보는 훗날 ‘악마의 시절’이라고 그때를 회고했다.

김기춘은 21세기 대한민국에 악마의 시대를 재현했다. 2014년 6월14일 김영한 민정수석 부임 첫날 김기춘 비서실장의 지시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인사들이 공직·민간·언론을 불문하고 독버섯처럼 자랐다’ ‘정권에 대한 도전은 두려움을 갖도록 사정활동을 강화하라’고 했다. ‘과거를 보면 미래를 알 수 있으니 위태로운 자, 인간 쓰레기를 솎아내는 일을 점진적으로 추진토록 하라’고도 했다. 김기춘은 네, 아니요로만 대답하기를 강요했다. 아니요라고 하는 사람은 무좀으로, 독버섯으로, 인간 쓰레기로 취급하라고 그는 명령했다.

대한민국 어두운 역사, 부끄러운 과거마다 김기춘 이름 석자가 빠지지 않았다. 부산 초원복집 지역감정 발언은 도청 사건으로 뒤집었다. 김기설 분신은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으로 돌려놓았다. 세월호 참사는 유병언 잡기와 유족들에 대한 공격으로, 정윤회 문건은 지라시 유출로, 이석수 특별감찰관은 국기문란으로 몰아 상황을 반전시켰다. 최순실 국정농단은 태블릿 PC 출처 시비로 또다시 국면을 바꾸려 했다. 위기 때마다 본질을 덮고 “불이야” “강도야”라고 외친 사람을 잡아 가뒀다. 그는 법비(法匪), 법을 악용한 도적이라고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말했다.

법비는 48년간 이 나라를 활개치고 군림했다. 그건 누군가의 용인과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보수언론은 그에게 ‘미스터 법질서’란 애칭을 붙여줬다. 거제 주민들은 3선 국회의원을 만들어줬다. 박근혜는 그를 대통령비서실장으로 불러들였다. 부끄럽다. 이 나라는 친일도, 유신 잔재도, 군사독재도 제대로 청산해본 적이 없다. 대청소를 할라치면 미래로 가야지 과거를 들쑤셔서 어쩌자는 거냐고 덤벼든다. 그 결과가 김기춘이란 괴물을 만들었다. 온 나라에 제2의 김기춘이 즐비하다. 정의도 아니다. 하늘이 무섭지 않으냐는 말은 저승의 법정 몫이다.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 이승의 법정에서도 정의는 행해져야 한다. 역사의 법정에서도 정의가 이긴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박래용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박근혜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을 늦추기 위해 갖은 꼼수를 부리고 있다. 박 대통령 측은 어제 헌재에서 열린 탄핵심판 8차 변론에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등 무려 39명의 증인을 추가로 신청했다. 검찰과 특검의 조사 결과를 인정할 수 없으므로 관련자들을 직접 불러 얘기를 들어보자는 것이다. 증인 1명 심문에 적어도 1시간이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재판이 2주 이상 늘어질 수 있다. 그런데 김 전 실장이나 우 전 수석은 이미 국회 청문회에 출석해 모든 사안에 ‘모른다’고 답한 인물들이다. 헌재 출석 요구를 받은 청와대 ‘문고리 3인방’도 모두 불응했다. 나라가 결딴나든 말든 조금이라도 더 대통령 자리에 앉아 반전의 기회를 노리겠다는 속셈이다. 대통령으로서의 품위나 주권자에 대한 예의는 눈곱만큼도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23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있는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묘소를 찾아 성묘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박 대통령은 특검 수사도 훼방을 놓고 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박 대통령이 지시했다고 보도한 언론사와 기사에 언급된 ‘익명의 특검 관계자’를 고소했다. 자중해야 할 피의자가 수사 주체를 고소해 처벌하겠다니 어이가 없다. 대면조사나 청와대 압수수색 등 향후 특검 수사를 거부하기 위한 명분을 축적하려는 것 아닌지 의심스럽다. 최순실씨도 막무가내로 나오기는 마찬가지다. 특검의 소환 통보를 6차례나 거부해 수감 중인 최씨의 체포영장을 법원에 청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정 공백이 길어지면서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물가와 실업률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가계부채와 나랏빚도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탄핵 국면에 대한 피로도도 높아지고 있다. 나라 바깥도 어지럽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으로 전 세계가 대격변의 소용돌이에 들어갔다.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안보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위중하다. 헌재가 일단 내달 1일 김 전 실장과 김규현 외교안보수석 등을 심문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헌재의 최종 결론은 8명의 재판관이 내리게 됐다. 박한철 헌재 소장은 오는 31일 퇴임한다. 9명의 재판관 중 6명 이상 찬성에서 8명 중 6명 이상 찬성으로 탄핵 조건이 변해 박 대통령은 그만큼 유리해졌다. 박 대통령은 이런 걸 노렸을 것이다. 헌재는 무책임한 박 대통령의 재판 지연 술책에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 아울러 선고 일정 등을 가능한 한 일찍 알려 시민들이 대통령 선거 등 향후 정치 일정 등을 예측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시민의 대표자로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은 사고력, 판단력, 표현력을 두루 갖춰야 한다. 정치인은 직무와 관련된 결정과 행위를 논리적으로 철저히 시민들에게 설득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그것은 위임받은 권력을 통치행위로 행사하는 정치인들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자격이며 도리이다. 직무 수행이 온전치 못했거나 판단 착오를 범했을 때, 더욱이 그것이 법규 위반으로 이어졌을 때는 그에 대한 입장 또한 명료한 언어로 밝혀야 마땅하다.

오늘의 정국은 권력이 우리 사회에서 의미하는 바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권력은 사적인 삶을 위한 도구로, 권력을 가진 자를 법치영역의 예외자로 만드는 일탈적 힘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가치의 공유를 가능하게 하는 상식적 언어의 변질, 부재라는 현상으로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언어는 외적 대상을 지시하기만 하는 수단이 아니다. 언어는 인간의 심리적, 정신적 본질을 드러내는 통로이자 내용이며, 공동체의 합리적 일상을 가능하게 하는 공적 기반이다. 사고의 훈련은 그래서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을 배우고 다듬는 훈련과 불가분의 것이다.

대통령은 자신이 법으로부터 예외적인 존재라고 굳게 믿는 것으로 보인다. 그 법에는 문법도 포함된다. 대통령의 발화는 늘 문장구조가 부정확하고 지시대상과 표현이 불분명하다. 오죽하면 ‘박근혜 번역기’라는 패러디 게시물들이 인터넷에서 회자되겠는가. 탄핵정국 이후 신년의 이른바 기자간담회에서 일방적으로 내놓은 입장표명도 마찬가지였다. 끝이 없는 비문들로 늘어놓은 부인과 해명은 법적 책임의식이나 윤리적 성찰의 흔적을 보이지도 않았고, 논리적 정당성을 확보하지도 못했다. 최순실이 고친 연설문이 국정농단 사태 폭로의 발단이 된 건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속속 공개되는 최순실의 말주변, 글솜씨는 또 어떤가. 그들의 두서없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 녹취를 했다는 대통령 비서관의 증언은 이 사태의 핵심적 아이러니다. 대통령이 주장하는 ‘철학과 소신’이 그에게든 최순실에게든 있다면, 어법에 맞지 않는 말의 파편들을 조리없이 나열하는 발화가 바로 그것의 실체다. 철학은 언어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국회의 ‘최순실 게이트’ 청문회가 계속되는 동안 최고권력을 사유화한 이들은 법적 책임을 추궁당하는 엄중한 상황에서도 윤리적 주체로서의 발언은커녕 최소한의 성의조차 보이지 않았다. 국회의 소환에 불응하다 겨우 출석한 전·현직 공무원들은 ‘모른다’와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만 태연히 늘어놓으며 법치영역의 예외자로 행세했다. 무한 반복되는 그 말들은 민의를 위임받은 국회 청문회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시민들을 모욕했다.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의 변론을 위해 대통령 변호인단이 구사하는 언어도 마찬가지다. 청와대를 비롯한 최고위 권력층에서 동원하는 논리와 표현 수준은, 그들에게 권력을 맡겼던 시민들에게 수치와 모멸감을 느끼게 한다. 부끄러움이 위반한 자들의 몫이 아닌 시민의 몫이라는 점 역시 견디기 힘든 부조리다.

국정농단 사태가 드러나기 시작한 지 어느덧 석 달이 지났다. 하지만 대통령과 비선 관계의 실제 내막과 뇌물 수수의 규모, 대통령의 7시간, 대통령의 성형시술 의혹을 비롯한 비선 의료진의 존재, 청와대의 비아그라와 향정신성 의약품 다량 구입,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진상 등은 여전히 의문투성이다. 검찰 수사가 있었고, 청문회에 이어 헌재의 탄핵심판과 특검이 진행 중이지만, 정확한 사실관계가 드러나지도, 납득할 만한 해명이 제시되지도 않고 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이 상황에서 수없는 추측성 가설들과 믿고 싶지 않은 가상의 시나리오들이 시중에 유통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것들은 물론 음모론의 일환이다. 하지만 음모론이야말로 가장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은 가장 합리적인 충동의 대중적 발현이다. 합리성의 영역에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을 어떻게든 이해가능한 논리로 언어화하려는 필사의 시도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현상은 현 정권 출범 이래 두드러졌다.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사태 때도 정부의 적절한 대처와 납득할 만한 해명이 없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현 정권은 유신시대 공안정국을 떠올리게 하는 ‘유언비어’라는 낡고 낯선 말로, 끊일 날 없었던 시민들의 불안감과 의구심을 위축시키는 데만 골몰했다. 표현의 자유를 통제하고 말의 소통을 막으려고만 했다. 하지만 정윤회 문건을 ‘지라시’ 수준의 유언비어라고 규정했던 정권의 실체야말로 비선의 농단이었다. 유언비어란, 말이 있으되 말이 안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과연 유언비어가 누구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가장 비논리적인 언어로, 가장 비합리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윤조원 고려대 영문학과 교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씨 측에 433억원의 뇌물을 준 혐의를 받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어제 법원에서 기각됐다. 조의연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뇌물 범죄의 요건이 되는 대가관계와 부정한 청탁 등에 대한 현재까지의 소명 정도 등에 비춰 볼 때 현 단계에서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기각 사유를 밝혔다. 지금까지의 특검 수사 결과로는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 요건이 충분하지 않다는 취지이다.

사법부 판단은 존중하지만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인신 구속은 신체의 자유를 억압하는 등 개인에게 큰 피해를 주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 법원은 수사에 미진한 점이 있고 의심이 들면 마땅히 구속영장을 기각해야 한다. 그러나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 기각이 법과 원칙에 따른 것인지 의문이다. 수십명의 전관 변호사를 병풍처럼 세운 재벌 총수가 아닌 일반인이었어도 법원이 이처럼 결정했을까. 230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는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은 “법은 평등하지 않았고 상식은 또 한번 무너졌다”고 비판했다. 야당도 일제히 비판 성명을 냈다. 경제 위기론과 재계 및 보수세력의 압박에 법원이 무릎을 꿇었다는 지적도 있다. 당연한 반응이라고 본다.

지난 18일 서울중앙지법에서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받고 서울구치소에서 대기하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9일 새벽 영장 청구가 기각되자 구치소 밖으로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이 부회장의 핵심 혐의는 박 대통령 등에게 뇌물을 줬다는 것이다. 법원은 이 부회장이 박 대통령과 최씨 측에 건넨 433억원의 대가성이 명확하지 않다고 봤다. 이 부회장이 박 대통령과 최씨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돈을 냈다는 이른바 ‘피해자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당시 경영권 승계가 걸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건으로 박 대통령과 정부 도움이 절실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부정한 방법으로 국민연금공단의 지원이 이뤄진 정황이 있다. 특검은 이 부회장이 뇌물의 대가로 박 대통령에게 경영권의 안정적 승계라는 ‘부정한 청탁’을 한 것으로 규정했다. 특검은 “문형표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보건복지부 장관이던 2015년 6월 말 안종범 당시 경제수석 등을 통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이 성사될 수 있게 잘 챙겨보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를 전달받았다”고 밝혔다. 법원도 이를 인정해 문 이사장의 구속영장을 지난달 발부했다. 그래놓고도 이 부회장의 청탁과 이 부회장이 건넨 돈의 대가성은 인정하지 않았다. 법원 판단대로라면 일련의 사건이 모두 독립적으로 이뤄진 셈이다.

삼성은 미르·K스포츠 재단에 204억원 출연 외에도 최씨 모녀를 직접 지원했다. 재단 출연이야 다른 재벌·대기업도 했다지만 삼성은 승마 유망주 육성 명목으로 2015년 8월 최씨가 세운 독일의 페이퍼컴퍼니 코어스포츠(비덱스포츠의 전신)와 210억원 규모의 컨설팅 계약을 맺고 35억원가량을 송금했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최씨를 콕 집어서 지원한 것이다. 누가 봐도 비정상적이다. 법원은 이 과정에서도 부정한 청탁이 없다고 봤다. 이 부회장은 박 대통령에 대한 조사 없이 자신의 영장이 청구됐다는 점도 호소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수사 상황에 따라서는 뇌물 수수자보다 뇌물 공여자를 먼저 구속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이번 사건은 최종 타깃이 박 대통령인 만큼 특검 입장에서는 이 부회장 신병 확보가 절실했다.

법원이 영장을 기각했다고 해서 이 부회장이 무죄라는 의미는 아니다. 특검도 이 부회장에 대한 수사 의지를 밝혔다. 이규철 특검 대변인은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 결정은 매우 유감이나 필요한 조치를 강구해 흔들림 없이 수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특검은 추가 증거가 확보되는 대로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을 재청구해야 한다. SK·롯데·CJ 등 다른 재벌 총수의 뇌물 공여 의혹 수사도 계속돼야 한다. 특검의 분발을 촉구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의 진실이 드러나면서 시민들의 분노는 대통령의 참모들에게도 쏟아지고 있다. 대통령의 무능과 무책임이 사태의 근본 원인이지만 이를 막지 못한 허수아비 참모들도 공동책임이 있다. 특히 세월호 참사 때 청와대 참모들의 무책임한 행태를 보면 화가 치민다. 300여명의 목숨이 오가는 절체절명의 순간 대통령비서실장도, 국가안보실장도 대통령의 위치를 몰랐다고 진술했다. 진술 내용은 물론 태연자약한 진술 태도 역시 분노를 샀다. 그 중차대한 시기에 대통령이 어디 있는지 모른 것을 그다지 큰 문제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시민 안전과 생명을 책임지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건 충격적인 일이다.

박근혜 정권에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거나 자칫 대통령의 눈에 날까봐 자기 의견을 말하지 못한 채 자리만 보전하는 참모들로 넘쳐난다. 이러니 비선실세가 마음놓고 국기문란 행각을 벌여도 끽소리 못한 채 오히려 묵인·방조하는 불상사가 빈발한다. 예외가 없던 건 아니다.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세월호 참사 때 내각 총사퇴를 주장했다가 대통령 눈 밖에 났다.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대해서도 “이러면 안된다”고 대통령에게 직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바른말을 한 참모는 극소수였다.

대통령의 ‘거수기 참모’들에게 질린 시민들에게 제프 세션스 미국 법무장관 내정자의 발언은 요즘 말로 사이다 같다. 그는 어제 인사청문회에서 “대통령에게 과감히 노라고 말하고, 대통령의 생각이라면 살피지도 않고 인가하는 ‘고무도장’이 되지 않겠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당선자가 부활하겠다는 물고문이 불법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고무도장은 형식을 갖추는 데 사용하는 도장으로, 여기서는 ‘예스맨’을 의미한다.

대통령의 참모가 되려면 전문성과 정치적 감각을 갖춰야 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통령에게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시민과 국익을 바라보겠다는 의지다. 지금 4·19혁명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야를 권고한 허정 외무장관 같은 이들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정권의 부정과 부패에 공동책임이 있다 해도 마지막 순간만이라도 직언할 줄 아는 참모들을 보고 싶다.

조호연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의 국정 개입을 인정한 뒤 국회에서 탄핵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46일이었다. 분노한 1000만 촛불이 광화문광장과 전국을 가득 채웠다. 최근 ‘박근혜 결사 옹위’를 주장하는 ‘맞불 시위’가 등장하긴 했지만, 거센 분노의 흐름을 되돌리긴 불가능해 보인다. 한국 현대사에서 유례없이 짧은 기간에 누구도 피를 흘리지 않고 부패한 지도자를 거의 축출한 작금의 상황은 시쳇말로 ‘사이다’이다. 이제 시민들은 저마다 새로운 시대를 꿈꾸고 있다. 계기가 마련됐으니, 그런 날이 오는 것은 시간문제인 듯하다. 정말 그럴까.

12일 개봉하는 <7년-그들이 없는 언론>은 이명박 정권 당시 YTN, MBC 등에서 해직된 언론인들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다. 낙하산 사장을 반대하거나, 편향적인 보도와 인사에 항의하거나, 그도 아니면 뚜렷한 이유도 없이 해직된 기자와 PD들이 이후 7년간 겪었던 일들을 다뤘다. 해직된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한두 달 후면 복직될 것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1심에서 복직 판정을 받아냈지만, 회사는 끈질기게 소송을 이어갔다. 그 와중에 복직된 이도 있지만, 몇몇은 끝내 회사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직 재판을 받고 있는 이들도 있다. 어쩌면 이 거대 언론사들은 기나긴 송사를 통해 해고의 정당성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해직자들이 지쳐 나가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7년 세월 동안 언론사에는 새로운 인물들이 들어왔다. 초기엔 해직 언론인들의 처지에 관심을 가지던 여론도 조금씩 식어갔다. 심지어 해직 언론인들이 모두 복직된 줄 아는 사람들도 많다.

잊혀진다는 건 힘들고 서글픈 일이다. 사람의 몸과 마음이 조금씩 파괴된다. 평소 온화한 가장이었던 조승호 YTN 기자는 어느 순간 자신이 아내와 아이들에게 괜한 일로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용마 MBC 기자는 암과 싸우고 있다. 버티고 살아남아야 했다. 조승호 기자는 무박 2일로 100㎞를 뛰는 울트라 마라톤을 시작했다. 박성제 MBC 기자는 취미였던 스피커 제작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7년-그들이 없는 언론>은 해결된 것도, 해결되지 않은 것도 아닌 문제들 때문에 조금씩 지쳐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루고 있다.

탄핵 정국은 저널리즘의 승리라는 분석이 있다. 많은 언론사들이 대통령과 측근, 비선 인사들의 비리를 밝혀내는 성과를 거뒀다. ‘단독’이란 말머리를 붙인 기사들이 각 언론사에서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7년-그들이 없는 언론>을 제작한 김용진 뉴스타파 대표는 저널리즘에 대한 최근의 상찬이 “불편하다”고 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앞서 권력을 비판했던 해직 언론인들은 복직되지 않았고, 이들을 거리로 내쫓은 이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지난 정권의 피해자들에게 아직 ‘사이다’는 돌아가지 않았다.

어지러운 판국일수록 쾌도난마의 언변, 일도양단의 해결책이 환호를 받는다. 대선을 앞두고도 그런 정치인, 논객이 인기를 끈다. 돌아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야말로 ‘사이다’의 원조였다. 지난해 개봉해 인기를 끈 다큐멘터리 <무현, 두 도시 이야기>는 2000년 제16대 총선 당시 당선 가능성이 희박한 부산에 출마한 노무현을 담아냈다. 당시 유세 장면을 보면 노무현은 근래 보기 드문 탁월한 대중연설가였음을 알 수 있다. 대규모 군중 앞에서도, 골목길의 소규모 유세에서도 그는 두루 강점을 보였다. 그의 말은 논리와 감정을 동시에 자극했으며, 인간적인 매력까지 담아냈다.

그런 노무현조차 집권 이후엔 이런저런 장애물에 부딪혀 뜻한 개혁을 완수하지 못했다. 서거 5개월 전 김형아 호주국립대 교수와 가진 마지막 인터뷰가 최근 뒤늦게 공개됐다. 자신의 임기를 솔직하고 냉정하게 평가한 그는 “(역사에) 어떤 진전이 있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확고한 비전과 추진력, 의지를 가진 정치인에게조차 개혁은 그토록 어려운 일이었다.

지난달 개봉한 영화 <마스터>는 희대의 사기꾼 조희팔을 모델로 한 영화다. 현실의 조희팔은 수조원의 피해액을 남긴 채 죽었지만(혹은 사라졌지만), 영화 속 진현필(이병헌)은 시원하게 응징당한다. 진현필의 정·관계 로비 장부를 입수한 강직한 경찰 김재명(강동원)은 대규모 수사팀을 이끌고 국회의사당 쪽으로 향한다. 개봉 이후 3주 만에 650만 관객이 이 속 시원한 엔딩에 박수를 보냈다. 현실이 <마스터> 같다면 좋겠지만, 실제론 <7년-그들이 없는 언론>에 가까울 것이다. 지루하고 지지부진하고 답답하다.

개혁이란 살림살이 같다는 생각을 한다. 살림을 살아본 사람은 안다. 해도해도 끝이 없다. 아무리 해도 티가 안 난다. 안 하기 시작하면 집안꼴이 엉망되는 건 시간문제다. 이 지겨운 살림을 대신 살아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이제 지겨운 일을 꾸준히 할 각오를 해야 한다. 꾸역꾸역 고구마를 먹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백승찬 문화부 차장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지난 몇 달 동안 우리 모두의 관심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집중됐다. 매일같이 뉴스와 소셜미디어에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때마다 사람들은 흥분하고 분노했다. 그래서 국회에서 청문회가 열리고, 이번 사태의 주체가 되는 인물들이 TV 앞에 나섰을 때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여기에 고정되었다. 몇몇 증인들의 용감한 증언이 나올 때 사람들은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이번 사태와 관련된 대부분의 증인들은 ‘모른다’ ‘아니다’ ‘기억에 없다’로 일관했다. 법적 구속력이 있는 유의미한 정보를 얻는 데는 실패하였기 때문에 청문회 무용론도 떠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사람들은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고,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우리들이 대화를 할 때 언어뿐만 아니라 손짓, 몸짓, 자세나 얼굴 표정 등을 이용해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통틀어 ‘비언어 의사소통’(nonverbal communication)이라 한다. 그리고 이런 비언어 의사소통 덕분에 우리는 유의미한 말이 없었어도 증인에 대해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 인류가 언어를 처음 사용한 시점이 언제인지는 논란거리이다. 그러나 언어를 진화시키기 이전의 원시 인류도 의사소통을 했다. 이들은 주로 동작과 소리, 그림을 이용하여 의사소통을 했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뜻을 전달할 수 있다. 비언어 신호는 오늘날에도 중요하다.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나라의 사람들이 만나도 손짓, 몸짓을 이용하여 기본적인 대화가 가능하다.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왼쪽 사진)과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오른쪽)이 각각 6일과 22일 국회에서 열린 ‘최순실 국정농단 진상규명’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를 듣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비언어 표현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간파한 사람은 찰스 다윈이다. <종의 기원>을 발표한 후 찰스 다윈은 인간의 기원에 대해 엄청난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이런 비판에 맞서 그는 여러 권의 책을 발표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1872년에 나온 <인간과 동물에서 감정의 표현>이다. 이 책에서 찰스 다윈은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을 비교하면서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동작이 사용됨을 강조했다. 이런 유사성은 인간과 동물이 공통 조상에서 유래했고, 그의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뒷받침하는 증거였다.

감정 표현에 대한 찰스 다윈의 놀라운 통찰력은 지난 몇 십 년간의 연구를 통해 대부분 사실로 밝혀졌다. 비언어 신호는 말을 할 수 없는 아기도 사용할 수 있다. 아기와 아기를 돌봐주는 사람은 울음, 웃음, 얼굴 표정을 통해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또 우리가 낯선 사람을 만나면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비언어 신호를 이용하여 상대방과 의사소통한다. 그래서 처음 말을 걸기도 전에 상대방에 대한 첫인상이 마음속에 그려져 있다. 이런 사실은 인간의 비언어 신호가 영장류와의 공통 조상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비언어 의사소통은 우리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깊숙이 배어 있다. 사람들은 의사소통을 할 때 언어와 비언어 신호를 동시에 사용한다. 언어에도 말투, 높낮이나 억양과 같이 비언어 표현이 담겨 있다. 말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자세, 얼굴 표정, 응시, 손짓 등은 말하는 사람의 지위, 상태, 진실성 또는 성적 매력도를 암시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사소통할 때 전달하는 의미의 반 이상(60~65%)을 비언어 신호에 의존한다. 물론 말을 하는 사람의 나이나 성별 또는 말을 하는 상황에 따라 이 수치가 크게 바뀔 수는 있지만 비언어 신호가 우리의 의사소통에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분명하다.

언어와 비언어 신호는 그 내용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이 둘이 서로 상충할 수 있다. 이럴 경우 사람들은 언어보다 비언어 신호를 더 신뢰한다. 우리는 말이 값싸고, 진실을 쉽게 왜곡시킬 수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람 얼굴의 윗부분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근육에 의해 주로 지배를 받지만, 얼굴의 아랫부분은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근육의 지배를 받는다. 그리고 두려움, 노여움, 기쁨, 슬픔, 역겨움 같은 주요 감정 표현은 얼굴 윗부분의 표정을 적어도 하나씩 포함하고 있다. 얼굴 표정 같은 비언어 신호가 얼굴 아랫부분의 움직임에 의존하는 말보다 우리의 감정을 보다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비언어 신호는 언어에 비해 왜곡시키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능숙한 거짓말쟁이는 말과 더불어 비언어 신호도 상대방을 속이기 위해 동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을 할 때 쉽게 드러나는 비언어 표현이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비언어 표현은 동공이 팽창하며 처음에는 눈을 껌뻑이지 않다가 나중에 자주 껌뻑이는 것이다. 일명 ‘동공지진’이다. 두 번째는 얼굴에 표정이 없고, 입술이 굳으며, 머리가 꼿꼿하다. 국회 청문회에서 나타난 익숙한 광경이다.

인간은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자원을 얻거나 지키기 위해, 처벌이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그런 거짓말을 탐지하기 위해 말이나 비언어 신호를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읽으려고 한다. 우리 인간이 지닌 의사소통의 속임수와 독심술은 다른 어떤 동물의 능력보다 탁월하다. 불행하게도 인간의 이런 능력은 우리 의사소통에 속임이 만연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장이권 |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국가정보원의 비위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른바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한 것은 기본이고, 정권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정부의 문화예술 지원 사업에서 특정 기관을 탈락시킨 정황까지 나왔다. 헌법에 보장된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다. 대선에 불법 개입한 혐의로 당시 원세훈 국정원장이 형사처벌까지 받았지만 국정원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는 국정원, 시민 아닌 정권에 봉사하는 국정원은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적이다.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국정원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시·도 문화재단의 좌편향·일탈 행태 시정 필요’ 문건에는 지방자치단체 산하의 문화재단들이 좌편향을 보이고 있으므로 감사 등을 거쳐 보조금을 삭감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한국작가회의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등 정권에 비판적인 단체를 탈락시키기 위해 최종 심사까지 마친 ‘현장 예술인 교육 지원 사업’을 갑작스럽게 폐지하는 과정에도 국정원이 개입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사실이라면 국정원이 정보 수집 차원을 넘어 정부 부처의 예산 집행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으로 매우 심각한 일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7년 1월 10일 (출처: 경향신문DB)

‘아르코(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목할 만한 작가상’ 선정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이사 선임 과정에도 국정원이 개입했다는 폭로가 있다. 문화예술인 이름 뒤에 알파벳 K나 B가 적혀 있는 새로운 블랙리스트도 발견됐다. 지난해 초 작성된 이 블랙리스트에서 K는 국정원, B는 청와대의 지시에 따라 선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특검은 문화체육관광부 압수수색을 통해 국정원과 문체부 직원들이 “진보성향 문화예술단체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배제해야 한다”는 내용의 e메일을 주고받은 사실을 확인했다.

특검은 국정원의 불법과 일탈이 드러난 이상 좌고우면할 필요없다. 특검법은 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인지한 사건을 수사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특검은 국정원에 대한 압수수색 등 전면 수사에 착수해야 한다. 대통령 탄핵을 계기로 국정원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국정원은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되는 정보·보안 및 범죄수사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는 국가 최고의 정보기관이다. 막대한 인력과 예산 지원을 받고 있지만 국가안보를 명목으로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 있다. 정권에 악용될 우려가 있어 무엇보다 중립이 중요하지만 현재로서는 시민들이 감시하고 통제할 방법이 전무하다. 특검 수사가 국정원의 게이트 개입 의혹을 규명하고 관련자와 책임자를 처벌해 국정원 개혁과 인적 청산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정유년 새해가 밝았다. 늘 세월은 흐르고 새해가 오지만 올해는 범상한 해가 아니다. 추운 날씨에도 1000만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은 오직 불의에 분노하고, 나라가 바로 서기를 바라서였을 것이다. 이 열망이 이번에는 실현될까? 과거 몇 차례 찾아왔던 호기를 번번이 놓쳐버린 우리가 과연 적폐를 청소하고 새 나라를 세울 수 있을까?

물론 첫 단계는 박근혜, 최순실 일당의 불법을 밝혀내 엄정한 법의 심판을 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 정도로 새나라 건설은 안된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한국현대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 신화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잘했는데, 그 딸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건 틀린 생각이다. 박정희와 박근혜는 일심동체다. 박근혜, 최태민, 최순실은 박정희 유신독재의 산물이다. 박정희는 헌법 위에 군림했고, 그걸 보며 자란 박근혜 역시 법의식이 희박하다.

박정희는 보기 드문 기회주의자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입학을 위해 일왕에게 충성 맹세 혈서를 썼다. 조갑제 책을 보면 박정희는 수시로 일본말을 했는데, 5·16 새벽 쿠데타군 출동명령조차 일본말로 했다. 해방 후 좌파 세상이 올 것 같으니 좌파에 가담했다가 이승만이 총애했던 악질 친일파 김창룡에게 체포되자 대뜸 동지들 이름을 불어서 수많은 동지들을 죽게 하고 혼자 살아남았다. 4·19로 모처럼 찾아온 민주주의를 1년 만에 뒤엎는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온갖 이유를 갖다 대지만 본질은 권력욕이다. 그 뒤 대통령 임기 연장을 위해 헌법을 바꾸고 또 바꾸어 종신집권을 기도했다. 김재규는 법정에서 박정희의 여성 문제를 밝히는 부하의 발언을 제지했으나 끌려간 젊은 여성이 200명이 넘는다는 말을 남겼고, 그 부하는 달력에 등장하는 여성은 거의 다 다녀갔다고 보면 된다는 말을 남겼다.

1976년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대한구국선교단 야간진료센터를 방문해 박근혜 대한구국선교단 명예총재, 최태민 총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사람들은 박정희가 경제는 살렸다고 말하는데 이마저 허상이다. 박정희는 청렴해서 떨어진 러닝셔츠를 입었다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 최순실 일가의 천문학적 재산이 실은 박정희 재산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된 대통령의 재벌 독대, 정경유착, 부패는 박정희 모델의 핵심이다. 박정희는 욕심이 지나쳐 전국의 땅을 파헤치는 난개발, 부동산 투기를 일으켜 한국 땅값을 세계 1위로 올렸고, 돈을 마구 풀어 물가를 천정부지로 올렸다. 난개발과 물가상승은 일시적 성장 효과가 있겠지만 마약일 뿐이고, 장기적으로 경제를 망친다. 한국의 고도성장은 박정희 덕분이 아니고, ‘박정희에도 불구하고’ 근면한 우리 노동자, 농민이 피땀 흘려 달성한 것이다. 박정희는 경부고속도로를 1968년에 착공, 1970년에 완공했다. 무리한 졸속, 부실공사로 애꿎은 77명의 인부들이 사망했다. 왜 이렇게 무리하게 서둘렀을까? 1971년 대선에 이용하기 위해서였다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박정희는 나라의 이익보다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했고, 멀리 보지 않고 항상 눈앞의 이익을 탐했던 사람이다. 일제 때는 친일파, 좌파 세상이 되자 좌파 변신, 체포되자 동지 배신, 권력욕에 눈이 멀어 신생 민주정권을 총칼로 뒤엎었고, 권력 유지를 위해 애국 학생, 시민을 잡아다 일제식으로 고문했고, 무고한 사람들을 공산주의자,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켰고, 경제개발조차 대통령 선거에 이용했던 사람이다. 이런 아버지를 찬양하기 위해 박근혜는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했단 말인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런 사람을 배우라고 가르친다면 이 나라가 장차 어찌 될 것인가. 광화문에 박정희 동상을 세운다면 세종과 이순신이 이러려고 훈민정음 만들고, 거북선 만들었나 하는 자괴감이 들 것이다.

선산 출신 김재규는 평생 박정희와 가까이 지냈으나 유신독재의 죄악상을 직시하고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했다. 전두환은 김재규를 패륜아로 몰았지만 언젠가 역사가 재평가하는 날이 올 것이다. 김재규는 거사 직전 붓글씨를 많이 썼는데, 그중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이 있다. 비리는 법을 못 이기고, 법은 권력을 못 이기고, 권력은 하늘을 못 이긴다는 뜻이다. 박정희의 무도한 권력도 하늘의 심판을 면할 수는 없다는 뜻이리라.

박근혜, 최순실의 부역자들이 쇠고랑을 차고 법의 심판을 기다리는 이 중요한 순간에 우리가 엄정한 법적 처벌만 갖고 새 나라 건설을 낙관할 수 없다. 하늘의 심판, 즉 우리 머릿속에 남아 있는 박정희를 청산하지 않고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했던 우리의 굴절된 역사를 바로잡을 수 없다. 박정희 청산 없는 박근혜, 최순실 처벌은 뿌리는 그냥 둔 채 잎과 가지만 자르는 것이어서 언제 다시 기회주의자들이 살아나 정의를 짓밟을지 모른다.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경제학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대한민국 국민들의 자괴감을 높여 주기도 했지만, 최순실 게이트가 준 또 다른 긍정적인 영향은 세월호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바꿔줬다는 점이다. 최순실 게이트가 공론화되기 전까지 세월호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이제 그만 좀 우려먹어라, 지겹다. 둘째, 유족들이 돈 더 받으려고 저러는 거다. 셋째, 교통사고인데 무슨 진상규명이 필요하냐. 넷째, 인양하지 마라. 돈 아깝다. 모든 이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인터넷을 통해 표출되는 여론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정부가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을 방해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최순실과 박근혜 대통령의 공모관계가 밝혀진 이후 세월호는 다시금 조명되기 시작한다. 사건 당일 7시간 동안 대통령의 행적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혹은 세월호가 어떻게 침몰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는데, 이유인즉슨 검찰 수사로 인해 밝혀진 침몰 원인인 과적과 급변침에 대해 대부분 수긍했기 때문이었다. 일부에서는 대통령이 배를 고의로 침몰시켰다는, 소위 인신공양설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여기에 동조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작년 말, ‘자로’라는 닉네임을 쓰는 누리꾼이 2년의 노력 끝에 ‘세월X’라는 동영상을 만들어 유포했다. 무려 8시간49분에 달하는 이 동영상을 보고 있노라면 자로와 그를 도운 김관묵 이화여대 교수의 노력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자로는 그간 발표된 침몰 원인을 하나하나 제거하면서 세월호를 가라앉힌 진짜 이유에 접근해 나간다. 일단 급변침은 침몰 원인이 될 수 없다. 방향을 그 정도 틀었다고 해서 배가 넘어진다면, 우리나라 해역은 침몰하는 배들로 인해 연일 난리가 날 것이란다. 또한 언론에 보도된 것과 달리 세월호의 복원력은 그 정도로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과적이 원인일까? 세월호 운항일지를 보면 사고 당일보다 3배 가까이 물건을 실은 날도 있었단다. 자로가 존경스러운 점은 사소한 주장을 할 때조차 관련된 증거를 산더미처럼 제시한다는 데 있다. 세월호 특조위의 조사결과가 인용되기도 하고, 언론보도나 검찰수사 자료, 그리고 <세월호 그날의 기록>이라는 책이 동원된다. 과적이 원인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자로는 세월호 당일 배에 화물이 실리는 폐쇄회로(CC)TV를 동원하기도 한다. ‘이 많은 자료를 다 어떻게 구했을까?’라는 감탄이 나오는 대목이다.

이런 노력 끝에 자로가 본 진실은 ‘외력’이었다. 사고 당일 세월호는 충격과 함께 45도로 기울었다. 3층 로비에 있던 양승진 선생님(실종)은 이 충격으로 바다로 튕겨 나가기까지 했는데, 이건 급변침으로 인한 침몰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실제로 세월호 생존자들 중 ‘쿵’ 소리를 들은 이가 많다고 하니, 이게 전혀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다. 문제는 그 외력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사고 장소가 바다인 만큼 암초나 다른 선박일 수밖에 없는데, 사고 당시 세월호 주위에는 둘 다 없었다고 발표된 바 있다. 자로는 그걸 잠수함이라고 추정한다.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VTS) 레이더에 나타난 괴물체가 그 증거다. 원래 이 물체는 세월호에서 떨어진 컨테이너라고 발표됐다. 하지만 자로는 이것이 컨테이너가 아닌, 나름의 동력을 가진 물체라고 주장한다. 레이더에 따르면 그 물체는 독자적인 방향으로 움직이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레이더에서 사라졌는데, 이렇게 할 수 있는 물체는 잠수함밖에 없단다.

그렇다고 자로가 자기주장이 맞다고 일방적으로 우기는 것은 아니다. 자로는 말한다. 자신의 주장도 하나의 가설일 뿐이며, 더 설득력 있는 주장이 나온다면 기꺼이 잠수함 주장을 철회하겠다고. 보다 정확한 진실을 알기 위해 자로가 원하는 것은 세월호의 인양이다. 무엇인가에 부딪혔다면 세월호의 어딘가에 그 흔적이 남아있을 테니 말이다.

2016년 해양수산부 장관은 “올해 인양에 성공하겠다”고 여러 번 밝힌 바 있지만, 결국 세월호 인양은 해를 넘겼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인양에 별 뜻이 없는 게 아니냐 의심한다. 그간 인양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데다 상대적으로 기술력이 떨어지는 상하이샐비지를 인양업체로 선정한 사실은 의심을 증폭시킨다. 중국업체인 만큼 인해전술로 배를 빨리 인양하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지만, 인양이 언제쯤 될지 오리무중이다. 오히려 이들은 배에 130개의 구멍을 뚫는 등 선체를 훼손하고 있는데, 이러다간 배를 인양해도 침몰 원인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혹자는 자로의 영상을 또 다른 음모론으로 치부한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음모론은 진실의 당사자가 뭔가를 자꾸 숨기려고 할 때 만들어진다. 박 대통령의 청와대 7시간에 대해 갖가지 음모론이 나오는 것도 당시 행적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다 사실이 드러나면 그제야 인정하는 청와대의 석연치 않은 태도 때문이 아닌가? 세월호 침몰에 대한 음모론이 부담스러우면 하루빨리 배를 인양하자. 그리고 과학자를 포함한 검증단을 만들어 침몰 원인을 재조사하자.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혁명은 ‘정당함’을 표현하는 언어다. 세계와 인간과 삶의 본질인 ‘좋음’을 구현하기 위한, 즉 실존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생각과 말과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반란(rebellion)’이나 ‘반역(revolt)’과 구분해 ‘혁명(revolution)’이란 말을 별도로 만들어 쓰는 이유이다.

그러니까 혁명은 급진적이고 과격한 방식으로 기존의 권력층을 뒤엎거나, 특정 정권을 타도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계와 인간과 삶의 본질을 억압하고 왜곡하는 낡은 체제(앙시앵 레짐)를 새로운 체제로 대체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혁명이다.

근대 문명의 정치적 특성인 민주공화제의 등장에 결정적 영향을 끼쳐 혁명의 대명사라고 불리는 프랑스 대혁명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보면 혁명이 반란이나 반역과 다른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루이 16세가 민중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했다는 소식을 듣고선 “반란인가?”라고 물었으나, 그의 최측근이었던 라 로슈푸코 리앙쿠르가 “아닙니다. 폐하! 혁명입니다”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그것이다.

라 로슈푸코 리앙쿠르는, 혹은 이 일화를 소개한 <프랑스 혁명>(1837)의 저자 토머스 칼라일은 루이 16세와 달리 바스티유 감옥 함락의 의미가 루이 16세의 퇴진만이 아니라, 시민과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절대왕정과 신분사회로 압축되는 앙시앵 레짐의 사멸과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질서, 즉 민주공화제를 요구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미국의 독립혁명도 빠지지 않는다. 프랑스 혁명에 앞서 일어난 미국 독립혁명 역시 단지 영국의 왕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난 인간의 기본적 권리의 획득’이라는 좋음을 추구한 사건이다. 프랑스와 미국 외에도 근대 문명 세계에서 강대국 혹은 선진국으로 불리는 나라들 대부분이 혁명이라 불리는 역사적 사건을 경험했다. 근대 의회정치 발전의 기초가 된 명예혁명의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을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다. 독일도 기억할 만한 혁명의 역사를 갖고 있다. 1차 세계대전 말미인 1918년에 제정을 무너뜨리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기초를 세운 11월 혁명이 그것이다. 아예 유럽 전체를 휩쓸면서 혁명의 경험을 선사했던 사건도 있다.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수용토록 한 1848년 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새해가 밝았지만, 세상은 아직 어둡습니다. 지난해 세밑까지 촛불을 들었을 때 시민들은 비로소 자신의 그림자라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촛불은 ‘여기 사람 있다’고 외치는 목소리였습니다. 암흑에 빠져 있던 민초들을 꺼내야 한다는 구조 신호였습니다. 새 세상에 대한 염원이었습니다. 새해에는 촛불을 켜지 않아도 대지와 광장의 목소리들이 곳곳에 전달됐으면 합니다. 시민들의 삶이 밝아졌으면 합니다. 사진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2016년을 보내고 2017년을 맞은 새해 첫날 새벽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입니다. 김창길 기자

최근 대한민국에선 촛불시위 과정에서 혁명이란 말이 공론장에 다시 등장했다. 시위 참가자들이 혁명이란 슬로건을 들고나오고, 지식인들이 촛불시위의 성격을 시민혁명으로 파악하면서다.

4차 산업혁명론을 필두로 문명의 전환이 거론되고 있고,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를 계기로 ‘대한민국 재설계’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시점에서, 혁명이 공론장의 주요 토픽으로 등장한 것은 당연하고 바람직하다. 이번 기회에 촛불시위를 통해 모아진 민의를 구체제의 청산과 새로운 체제의 수립으로 이어가야 한다.

하지만 작금의 촛불시위가 실제 혁명으로 이어질지 아닐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분명 혁명의 기운만이 아니라, 혁명으로 평가할 면모까지 갖추고 있다. 다수의 참여와 결집을 가능케 한 평화적 방식의 고수가 대표적인 예이다. “나는 내가 대표한다”는 기치하에 기성 질서에 대해 해학과 풍자의 언어를 구사하고, 기존 운동단체에 국한되지 않은 다양한 의사표현과 참여의 방식도 그러하다. 혁명으로 불린 여타의 역사적 사건들에 비했을 때조차 혁명적이다.

촛불시위를 이런 방향으로 이끈 촛불시민은 ‘새 술’이다. 촛불집회의 진행을 담당했던 한 인권운동가가 “이들이 다 어디서 (광장과 거리로) 나왔나”하고 물음을 던질 정도로 새롭게 등장한 주체이다.

고약한 승자독식체제에서의 고단한 일상과 내일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벗과 함께 광장을 사수한 주체들이다. 그러나 아직 촛불시민이라는 새 술을 담을 새 부대가 없다. 새 술의 맛을 더 감칠나게 할 새로운 장인이 누군지도 아직 모르겠다. 촛불시위를 여전히 일시적 저항의 관점에서만 조망하거나,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를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로만 몰아 개헌만 힘주어 주창하거나, 정치권의 이합집산을 통해 자파의 이익만을 극대화하려는 기성 정치인들, 특히 노회한 정객들을 볼 때 그러하다.

2017년, 이들을 넘어서서 촛불시민 스스로가 새 부대를 마련하고, 새 술의 맛을 더 감칠나게 할 새로운 장인을 발견해내길 갈망한다. 그래서 촛불시민이 혁명의 도정에서 진짜 주역으로 서길 기대한다. 그런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면서 혁명의 의미를 다시금 짚어 본다.

김윤철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검찰의 적폐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정권의 통치 수단으로 전락한 검찰은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 실세의 비리에 눈감아 오늘의 대혼란 사태를 야기했다. 김기춘·우병우 같은 검사 출신 인사들은 갖은 공작으로 국정을 농단하고, 홍만표·진경준 같은 전·현직 검사장은 공익의 대표자와 사회의 거악이 백지 한 장 차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시민이 꿈꾸는 세상과 검찰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은 이제 자명해졌다. 시민의 감시에서 벗어난 검찰, 정치적 중립성을 잃은 검찰은 부패한 폭압기구에 불과하다.

한국 검찰만큼 막강한 권한을 가진 수사기관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2200여명의 검사와 7000여명의 수사관 등으로 구성된 검찰은 그 자체로 직접적인 수사권을 갖고 있는 거대 권력이다. 검찰은 경찰의 수사도 지휘한다. 경찰이 형사 사건의 97%가량을 처리하지만 수사 주체는 엄연히 검찰이다. 경찰 단독으로는 압수수색 영장조차 발부받을 수 없고 경찰 조서는 법정에서 증거 능력도 없다. 검찰은 기소도 독점하고 있다. 검찰이 봐주기로 작정하고 재판에 넘기지 않으면 아무리 나쁜 사람도 죄를 물을 수 없다. 검찰이 저지른 범죄를 적발하고 처벌하는 기관도 사실상 검찰밖에 없다. 하지만 팔이 안으로 굽는 것처럼 검찰은 자체 비리에 둔감할 뿐 아니라 제 식구에게 한없이 관대하다. 검찰청 조사실에서 점퍼 지퍼를 반쯤 내린 채 팔짱을 끼고 있던 우병우 전 민정수석의 모습이 이를 방증한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7년 1월 4일 (출처: 경향신문DB)

한국 사법시스템의 원조격인 독일은 검찰에 자체 수사 인력이 없다. 검찰에 기소·불기소의 재량도 주지 않는다. 범죄 혐의가 확인되면 무조건 기소해야 한다. 일본은 경찰이 체포·압수수색 영장 등을 직접 청구할 수 있다. 검찰의 불기소 처분을 시민들이 심사하는 제도도 있다. 무작위로 뽑은 시민 11명으로 구성된 검찰심사회가 지방 법원마다 설치돼 검찰을 견제한다. 미국에서는 범죄 수사를 원칙적으로 경찰이 담당하고, 검사장을 시민들이 직접 선거로 뽑는다. 영국은 중대 경제 범죄가 아닌 이상 검찰이 직접 수사하지 않고 기소와 공소유지만 담당한다.

이들 나라에 비하면 한국 검찰의 권력은 가공할 수준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검찰을 두려워하지만 검찰은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검찰에 부여된 막강한 힘은 정의의 편에서 공익을 수호하라는 취지지만 검찰은 강자의 이익을 위해 썼다. 부정한 정권일수록 검찰을 장악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검찰총장으로 세우고 민정수석을 리모컨으로 활용한다. 곽상도·홍경식·김영한·우병우·최재경을 거쳐 지금의 조대환까지 현 정권의 민정수석은 모두 검사 출신이다. 그것만으로 부족해 청와대와 각 정부 부처는 매년 수십명의 검사를 파견받고 있다. 검찰은 정권과 거래하며 전리품을 챙긴다. 입법·사법·행정부의 주요 권력기관은 검찰의 재취업 자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직 공안 검사인 황교안과 박한철은 국무총리와 헌법재판소장으로 옮겼고, 국회는 검사 출신 의원들로 넘쳐난다. 검찰 공화국, 검찰 파쇼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렇게 정권과 한 몸이 된 검찰이 한 일은 시민을 배반하는 것이었다. 이번 게이트는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검찰은 부실·편파 수사를 했고 결국 가래로도 막을 수 없게 일을 키웠다. 2년 전 정윤회씨가 청와대 핵심 인사와 정기적으로 만나 국정 정보를 교류했다는 청와대 문건이 공개됐을 때 검찰은 문건의 유출 과정만 문제 삼았다. 우병우 전 수석의 비리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는 이석수 특별감찰관과 비리 의혹을 보도한 언론사를 겨냥하는, 본말 전도로 일관했다. 최순실씨 관련 비리는 지난해 7월 언론에 최초 보도가 났지만 압수수색은 3개월이 지난 뒤에야 이뤄졌다. 특검 출범이 기정사실화하자 검찰은 뒤늦게 박근혜 대통령을 수사하고 청와대를 압수수색하겠다고 법석을 떨었다.

검찰 개혁은 시대적 과제다. 시민 통제에서 벗어난 검찰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취약하다는 증거이다. 제왕적 대통령이 가능한 것도 무소불위의 검찰이 대통령 권력을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권의 축소와 분산, 검찰에 대한 견제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검사 등 고위 공직자들의 비리 수사를 담당하는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설립 법안은 이번 임시국회에서 꼭 통과돼야 한다. 공수처가 검찰의 의도적인 수사 기피와 검찰 부패를 막는 대증적 처방이라면, 검찰권 남용을 막는 근본 대책으로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해 가칭 수사청과 기소청을 두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미국처럼 주민이 지방검찰청 검사장을 직접 선출하자는 의견도 경청할 만하다. 정권으로부터 검찰을 독립시키고 중앙집권적인 검찰 권한을 분산하는 효과가 있다.

법무부에 대한 시민 통제도 필요하다. 검사 출신이 아닌 인사를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하고 법무부 주요 보직을 전문 행정관료로 대체하는 것이다. 검찰과 경찰의 수직적인 관계도 재정립해야 한다. 다만 수사권 조정 등의 문제는 검경 간의 권한 배분이 아닌, 인권 신장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경찰의 인권 의식이 여전히 후진적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검찰에 더 이상 ‘셀프 개혁’을 맡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검찰은 개혁의 대상이지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에 간여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미 그의 집무실과 자택이 압수수색당했다. 특검이 곧 그를 소환한다는 소식도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요지부동이다. 2014년 청와대 정무수석 시절 김기춘 비서실장의 지시에 따라 리스트를 만든 혐의로 특검의 수사선상에 올라 있지만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면서 버티고 있는 것이다.

조 장관의 블랙리스트 작성 참여 사실은 복수의 전직 문체부 고위간부들에 의해 구체적으로 드러난 바 있다.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은 조 장관이 정무수석으로 재직할 때 정무수석실에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김소영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을 거쳐 문체부로 내려보냈다고 증언했다. 리스트를 본 적조차 없다는 조 장관의 변명은 말이 안된다. 특별검사도 조 장관이 국회 청문회에서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지 않았으며, 본 적도 없다”고 한 것은 위증이라면서 특검에 고발해달라고 국회에 요청했다. 청와대와 문체부가 리스트를 함께 만든 사실은 특검이 문체부 실무자들이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시지에서도 확인했다고 한다.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8일 오후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전체회의에 출석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권호욱 기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적용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허문, 용납할 수 없는 범죄다. 박근혜 정부의 4대 국정지표 중 하나가 문화융성임을 감안하면 정권의 자기기만이다. 다른 사람이 한다고 해도 막아야 할 일을 해놓고 문체부 장관 자리에 계속 앉아 있는 것은 공직의 엄중함을 무시하는 행태라고 볼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 들어 두 차례 장관을 할 정도로 승승장구한 배경에도 이런 불법행위가 작용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문체부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부처다. 최순실씨 딸 정유라에 대한 특혜지원과 미르·K스포츠 재단 편법 설립 등이 다 문체부를 통해 이뤄졌다. 관계자들의 죄상을 낱낱이 밝히려면 장관이 그대로 있으면 안된다. 더구나 조 장관은 수사가 시작될 즈음 집무실과 해당 부서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를 갈아치워 증거인멸을 시도한 정황도 있다. 지금도 매일 출근하면서 어떤 증거들을 인멸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조 장관의 존재는 공무원들이 사실대로 진술하는 데도 방해가 된다. 핵심 역할을 한 직원이 장기간 휴가를 가는 사례도 있었다.

엊그제 임명된 송수근 제1차관도 블랙리스트 작성에 연루돼 있다. 현직 장차관이 동시에 사법처리되는 초유의 사태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이다. 이런 지경이면 조 장관은 단순히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사를 방해하기 위해 그 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조 장관은 즉각 사퇴한 뒤 특검에 출두해야 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12월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경남 창원에서 열린 촛불집회 연단에 24세 청년이 올라왔다. 유튜브를 통해 본 영상에서, 그는 20세에 취직해 4년째 최저임금을 받고 있는 전기공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세금 떼고 나면 손에 쥐는 월급이 120만원인데, 방세와 교통비, 식비, 공과금을 내고 나면 저축을 할 돈이 남지 않는다고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지만, 지금의 월급으로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궁금해서 촛불집회에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박근혜 퇴진 이후에 자기 삶이 나아질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고 했다. 1987년에도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고, 그다음에 노동자들이 대투쟁을 해서 임금도 오르고 삶이 나아졌다고 알고 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건지 궁금하다고 했다. 이 청년노동자의 소망처럼, 이번 촛불은 우리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 수 있을까? 유튜브에 떠 있는 자유발언 영상들을 보면, 이런 희망 섞인 기대들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반면 하루하루 밝혀지는 대한민국의 민낯은 참담하기만 하다. 소설가로 알려진 대학교수가 ‘정유라’에게 학점을 주기 위해 부정행위를 서슴지 않았다는 뉴스가 나온다. 국회에서는 태연하게 ‘최순실을 몰랐다’고 잡아떼던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사실은 최순실·정유라에게 수백억원을 지원하라고 직접 지시했다는 뉴스도 나온다. 힘과 돈을 가진 이들이 나라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런 나라를 바로잡겠다고 알바비 7만원을 포기하고 왕복교통비까지 들여서 촛불집회에 나왔다는 청소년이 있는 게 이 나라의 기막힌 현실이다.

(출처: 경향신문DB)

그래서 이번에는 ‘박근혜’라는 한 사람이 물러나는 것으로 끝낼 일이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쌓여 있는 이 나라의 적폐를 청산하는 것과 함께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것이 없지는 않다. 많이 훼손되어 왔지만, 소중한 대한민국만의 유산도 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국을 떠나,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독립운동가들이 꿈꿨던 나라의 모습이 여러 문서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 문서들을 보면, 대한민국의 참된 헌법정신, 건국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은 ‘고르게 인간답게 사는 민주공화국’이다. 무슨 근거로 이런 얘기를 하느냐고 묻는다면, 1941년 11월2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포했던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보라고 말하고 싶다. 이 문서에서 독립운동가들은 ‘삼균주의(三均主義)’를 표방하고 있다. 조소앙이 이론적 기반을 세웠던 삼균주의는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의미한다. 보통선거를 통해 정치의 균등을, 토지 국유를 통해 경제의 균등을, 무상교육을 통해 교육의 균등을 도모하고, 불평등을 해소한다는 것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이 꿈꿨던 나라는 이런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런 내용은 1948년 제헌헌법에도 반영된다. 제헌헌법은 이승만 세력, 한민당 등 우파로 분류되는 집단들도 참여해서 만들어졌지만, ‘대한민국 건국강령’의 연장선상에서 ‘만민균등주의’를 기본정신으로 택했다. 그래서 ‘모든 영역에서 사람들의 기회를 균등히 한다’는 것이 헌법 전문에 담겨 있다. 헌법 제정 과정에서 많은 역할을 했던 법학자 유진오는 “대한민국 헌법의 기본정신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적·경제적 민주주의의 조화를 꾀하는 데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제헌헌법이 만민균등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좀 더 구체적으로 규정한 내용도 있다. 대표적으로 노동자에게 이익균점권을 보장했다. 사기업의 근로자가 기업의 이익 분배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이익균점권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그만큼 제헌헌법을 만들 당시에는 만민균등주의에 대한 공감대가 존재했던 것이다. 만약 이런 정신만 실현되고 있다면, 24세 청년노동자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낫지 않았을까?제헌헌법은 토지 자체를 국유로 하지는 않았지만, 광물 등 지하자원은 국유로 한다고 규정했고, 운수·체신·금융·보험·전기·수도·가스 등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는 규정도 두었다. 농민이 농지를 가질 수 있도록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정했고, 이 조항을 근거로 이승만 정권도 농지개혁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과정은 끊임없는 헌법정신의 훼손이었다. 노동자 이익균점권은 5·16쿠데타 이후인 1962년 삭제되었다. 공공성 있는 기업을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는 조항은 그보다 앞선 1954년 삭제되었다.

물론 지금 이런 조항을 단순히 부활시키자는 얘기를 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조항을 두었던 헌법의 기본정신을 복원하자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이, 그리고 제헌헌법이 꿈꿨던 나라는 ‘고르게 인간답게 사는 나라’였던 것이 분명하다. ‘헬조선’은 헌법정신과는 정반대의 결과이다.

그래서 박근혜 퇴진은 정경유착과 특권·기득권 구조의 퇴진이 되어야 하고, 제헌헌법의 정신을 부활시키는 강력한 개혁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선거제도 개혁, 재벌 개혁, 검찰 개혁, 관료기득권 개혁, 중앙집권적 국가구조의 개혁이 필요하다. 일하는 사람에게는 정당한 대가가 보장되고, 누구나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비빌 언덕’이 권리로 보장되어야 한다. 이런 나라를 이제는 만들어야 한다.

하승수 |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변호사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세밑이다. 한 해를 마감하기 사흘 전에 찾은 광화문광장에 부는 바람은 찼다. 하지만 가을 끝자락에서 겨울로 진입하던 때 뜨겁게 달궈졌던 광장의 열기는 칼바람에도 식지 않았다. 작가 최인훈은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고,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두 공간의 어느 한쪽을 가두어버릴 때 인간은 살 수 없다”고 했다. 그가 옳았다. 광장의 촛불은 밀실의 어둠을 몰아냈다. 죽어가던 민주주의를 살려낸 광장은 위대했다. 1000만개의 촛불로, 질서 있는 분노로, 저항의 함성으로 가득 찼던 광장은 명예혁명의 산실이었다. 헌정파괴와 국기문란을 일삼은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 열차에 올려 태운 광장의 명령은 준엄하고도 단호했다. 세밑 광장은 앙시앵레짐(구체제)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작을 간구하는 외침으로 가득 차 있다. 70년간 쌓인 적폐를 걷어내고,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외침이다.

그런 광장이 막혔다면? 촛불시민은 역사의 패배자로 남고, 세상은 불의와 부패, 부정이 판치는 기득권 세력의 놀이터가 됐을 게 뻔하다. 끔찍한 일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최고의 통치자는 백성에게 자신의 존재만 알게 하고(太上下知有之), 최악의 통치자는 백성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其次侮之)”고 했다. 그가 옳았다. 연설문 작성과 관료 인선, 정책 결정을 비선 실세에게 맡긴 대통령은 무능·무지·무책임했다.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의 휴대전화 녹음파일을 복구한 검찰은 “(최순실과 박근혜의 통화 내용을) 10분만 들으면 ‘대통령이 어떻게 저 정도로 무능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독재자 아버지의 허상에 기대 권력욕만 키운 대통령은 비선 실세와 측근들에게조차 조롱의 대상이 됐다.

지난 10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7차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청와대 인근인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폭죽을 쏘아올리고 있다. 이준헌 기자

문화계 황태자로 불린 차은택은 국정조사 청문회에 나와 “최순실과 박 대통령은 동급으로, 공동정권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40년 지기 최순실은 “아직도 지(박근혜)가 공주인 줄 아나봐”라는 말을 자주 했다. 검찰도 국정농단 주범들의 관계를 ‘지시하는 가부장적 남편’(최순실), ‘아내’(박근혜), ‘사촌’(문고리 3인방)으로 명료하게 정리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대통령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고, 저 혼자만 똑똑하고 나머지는 다 병신들”(김종필 전 총리)로 여길 정도로 오만했다. 그런 최악의 통치자를 업신여기지 않을 시민이 있다면? 아마 ‘혼이 비정상’일 게다.

알제리의 식민해방투쟁가 프란츠 파농은 “어리석은 권력은 민중의 목소리를 거부하다가 끝내 자멸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가 옳았다. 국가권력을 사유화한 대통령은 친일·독재를 미화한 국정 역사교과서, 굴욕적인 한·일 위안부 합의, 동북아 신냉전을 불러온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남북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 폐쇄 등을 일방적으로 강행했다.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게이트의 주범이면서도 자신의 책임은 털끝만치도 인정하지 않았다. 간교한 정치적 술수로 ‘막판 뒤집기’만을 노리다 자멸의 길로 들어섰다. 그런 대통령을 시민들은 ‘죄의식 없는 확신범’으로 여길 뿐이다.

영국의 신학자 스티븐 체리는 “용서는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옆구리에 깊숙이 박힌 창을 내 손으로 뽑아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게 용서”라고 했다. 그가 옳았다. 세월호 침몰 당일 304명의 고귀한 생명이 수장될 때 올림머리를 하느라 90분을 허비한 대통령을 용서할 수 있을까. 구의역 19살 노동자와 백남기 농민이 죽어갈 때, 청년들이 ‘헬조선’을 외치며 신음할 때, 서민들이 생활고로 절망할 때 청와대 관저에서 미용주사를 맞고 ‘혼밥’을 먹으며 TV를 보던 대통령을 용서할 수 있을까.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탄핵심판 답변서에 “최순실 국정 관여 비율은 1% 미만” “세월호 참사 때 청와대에서 정상 근무” “측근비리가 발생한 역대 대통령도 탄핵 대상”이란 막가파식 논리를 편 대통령을 용서할 수 있을까. 그런 대통령을 옆구리에 깊숙이 박힌 창을 뽑아내는 고통을 견디며 용서할 시민이 있다면? 아마 ‘박사모’ 회원일 게다.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은 해가 바뀌어도 잊지 못할 이름들이 있다. 지금은 우리 곁에 없는 이들의 이름은 ‘1분 소등’ 시위 때 광장에 울려 퍼졌다. “최강서, 이운남, 이호일. 박근혜 당선 직후 목숨을 끊은 노동자들의 이름입니다. 고창석, 이영숙, 권혁규, 박영인, 남현철, 허다윤, 조은화, 양승진, 권재근. 세월호에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분들의 이름입니다. 김관홍, 최종범, 염호석, 한광호, 송국현, 백남기, 김주영. 박근혜 정권에서 희생된 분들의 이름입니다.” 촛불항쟁의 길을 터준 이들의 이름은 산산이 부서지고, 허공에 흩어졌어도 시민들은 설움에 겹도록 부르고 또 부를 것이다. 잊지 못할, 결코 잊혀져서는 안될 이름이기에….

박구재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