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의 권력은 막강하다. 현대 사회에서 합법적으로 타인의 인신을 구속할 수 있는 권한은 오로지 사법부와 의료인에게만 허용되어 있다. 최근 정신보건법 개정으로 절차가 까다로워지기는 했지만, 정신과 전문의는 환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환자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의료의 권력이 정신병원 강제입원 같은 특수한 상황에만 행사되는 것은 아니다. 일반인의 의료 이용 전반에 걸쳐 행사되고 있다.

 

의료의 권력이 보편적으로 확립된 것은 20세기 초 이후에 형성된 현상이다.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의료 이용의 중심 공간은 병원이 아니었다. 빈민층은 수용소와 다름없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중산층 이상의 환자는 의료인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서 치료를 받았다. 의료인이 환자를 통제할 수 있는 여지는 매우 적었다. 그러나 의료기기와 기술이 발전하고 의료조직이 체계화되면서 병원이 의료 이용의 중심 공간으로 자리 잡게 됐고, 중산층 이상의 환자도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게 됐다. 병원이라는 통제된 공간에서 의료인은 환자의 일거수일투족에 개입할 수 있게 됐다. 의료인은 지시하고 환자는 따라야 하는 고전적인 의사·환자 관계는 점차 문화로 굳어졌다. 이런 관계는 법에도 반영되어 있다. ‘보건의료기본법’은 모든 국민은 보건의료인의 정당한 지도에 협조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질병을 잘 치료해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일반적인 상거래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소비자 의무 조항이다.

 

국민의당 이용주 의원이 14일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국정조사특별위원회 3차 청문회에서 피멍 자국이 있는 박근혜 대통령 얼굴 사진을 들고 미용 시술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국가권력은 면허 제도를 통해 의료의 권력을 배타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면허가 없거나, 면허 범위를 벗어난 일체의 의료 행위는 불법으로 간주되어서 처벌받는다. 고 백남기 선생의 사망진단서 논란에서도 확인한 바와 같이, 모든 의사가 아니라고 해도 주치의가 그렇다고 하면 그 누구도 해당 환자의 사망진단서에 손을 댈 수가 없다. 현대사회에서 타인의 몸에 칼을 대고도 처벌받지 않는 이는 의료인이 유일하다.

 

의료의 권력은 천부적인 것이 아니다. 근대 의료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고,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일종의 공적 권력이다. 그런 만큼 의료인은 높은 책임성과 윤리성을 요구받는다. 일부 의료인은 왜 우리에게 일반인보다 더 엄격한 이중 잣대를 들이대느냐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한다. 더 높은 책임성과 윤리성을 거부한다면 의료의 배타적 권력은 존립 근거를 잃게 될 것이다. 그런 만큼 책임성과 윤리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의료인 스스로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그러나 사망진단서 논란부터 ‘박근혜 의료 게이트’에 이르는 일련의 사태에서 일부 의료인이 보인 모습은 이런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망진단서 논란은 권력화된 의료의 힘을 실감하게 했다. 권력과 가까운 의료인과 병원에 주어진 각종 특혜 의혹은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정경유착과 판박이처럼 닮아 있다. 아직 진상이 다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진료기록 조작과 위증이 사실이라면 이것 역시 의료인의 책임성과 윤리성을 전적으로 위배한 것이다. 환자의 정보보호라는 의료인의 의무 조항이 진료기록 폐기와 조작을 감추는 방패막이로 악용하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 의료인이 보인 모습은 대다수 의료인의 정서와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의료계의 대표 단체인 대한의사협회는 사망진단서 논란 초기에 백남기 선생의 사인은 외인사라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에 대한 대다수 의료인의 분노도 일반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대한전공의협의회 소속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은 촛불집회 내내 광화문에 진료소를 차려서 촛불시민을 진료했다. 그러나 연이어 터져 나온 의료 게이트 파문은 의료인들의 이런 노력을 무색하게 했다.

 

권력에 유착된 의료는 국민으로 하여금 의료인의 책임성과 윤리성을 의심하게 했고, 최고 권력자가 누린 독특한 ‘웰빙 의료’는 정권의 정당성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대통령이라고 미용시술을 하지 말고, 각종 주사제를 맞지 말란 법은 없다. 우리나라 국민이 그런 것을 가지고 트집 잡을 정도로 야박하지는 않다. 그러나 정도껏 해야 했다. 때와 장소를 가리는 눈치는 있어야 했다. 대통령에게 특별한 의료를 보장하는 이유는 그가 국민의 안위를 책임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안위를 제쳐놓고 웰빙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번 사태에서 권력에 유착된 의료와 권력자의 독특한 웰빙 의료는 한 몸이었다. 국민은 독특한 웰빙 의료를 누리던 권력자로부터 권력을 거두어들였다. 권력에 유착된 의료가 다시 기승을 부리지 못하도록 경계하는 것은 상식 있는 의료인들이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해야 할 일이다.

 

이진석 서울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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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헌법재판소의 움직임에 시선이 쏠려 있다. 만약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인용되면, 박 대통령은 헌법에 따라 즉각 파면되고 60일 이내에 후임자를 뽑기 위한 선거가 실시된다. 헌재의 결정 시점에 따라 대선시기가 달라질 수 있고, 대선후보로 나설 지방자치단체장들은 퇴임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등 정치일정은 매우 급박하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특검 수사를 받게 될 현시점의 대통령기록 처리와, 실제 탄핵인용이 될 경우 대통령기록 이관에 관한 규정이 명확하지 않아 대통령기록 파기와 멸실이 우려된다. 대통령기록물법은 ‘대통령기록물생산기관의 기록관의 장은 대통령 임기종료 6개월 전부터 이관 대상 대통령기록물의 확인·목록작성 및 정리 등 이관에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정상적으로 임기를 종료한다면, 2017년 8월25일에 대통령기록 이관을 준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탄핵이 인용되면 법에서 명확한 이관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현시점에 청와대가 대통령기록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이관에 협조적일지도 매우 우려스럽다. 최순실 특검법 수사대상 1호는 ‘이재만·정호성·안봉근 등 청와대 관계인이 민간인 최순실 등에게 청와대 문건을 유출하거나 외교·안보상 국가기밀 등을 누설하였다는 의혹사건’이다.

 

세종시에 위치한 대통령기록관 4층에 역대 대통령 선거 당시 사용됐던 벽보와 유세사진이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

 

특검법에 문건 유출에 관한 수사를 명시하고 있으니, 증거자료로 활용될 대통령기록이 파기될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현재 특검 및 대통령기록관은 청와대에서 생산된 대통령기록에 관한 어떤 법 조치를 하지 않고 있다. 실제 대통령기록을 전달받은 최순실은 지난 10월 독일 도피 기간 ‘더 블루케이’에서 사용하던 컴퓨터 폐기를 지시했고, 측근들은 컴퓨터 5대의 하드디스크를 포맷한 뒤 망치로 파기했다. 만약 이런 일이 청와대에서 일어나면 체계적인 수사도 힘들 뿐만 아니라 어렵게 시행하고 있는 대통령기록물법도 유명무실화될 수 있다.

 

따라서 특검과 대통령기록관은 위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적극적인 조치를 해야 한다. 우선 박영수 특검은 대통령기록관의 협조를 얻어 박근혜 정부 대통령기록 생산 실태를 확인해야 한다. 현재 대통령기록물법에는 청와대가 대통령기록물의 원활한 수집 및 이관을 위하여 매년 대통령기록물의 생산현황을 대통령기록관에 통보하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대통령기록관은 이 통계를 박영수 특검과 공유해야 하며, 통보되지 않은 대통령기록에 관한 실태 파악에도 나서야 한다.

 

다음으로 현재 청와대 대통령기록에 대한 파기 및 증거인멸을 하지 못하도록 특검은 압수수색 등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리고 수사과정 중에 대통령기록의 파기 등이 확인되면 ‘증거인멸죄’ 등이 아닌 대통령기록물법 무단파기 등으로 기소한다는 의지를 피력해야 할 것이다. 형법상 증거인멸죄는 실효성 있는 처벌을 하기 힘들었으나, 대통령기록물법상 무단파기죄는 ‘10년 이하 징역’으로 강력한 처벌조항을 두고 있다.

 

마지막으로 실제 헌법재판소의 탄핵인용이 실현되면, 대통령 이관에 관한 현 정부의 협조를 얻기가 어려울 수 있다. 법에서는 기록 생산기관이 폐지될 때 대통령기록물 생산기관의 장은 지체 없이 그 기관의 대통령기록물을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탄핵이 인용되는 순간 청와대 전체의 직무가 마비될 수 있어, 기록 이관 절차를 이행하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대통령기록관은 인용결정이 난다는 가정하에 대통령기록물을 인수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최순실 국정농단을 드러낸 것도 대통령기록이었다. 김영한 전 민정수석이 남겨둔 비망록이 얼마나 큰 증거로 활용되고 있는지 똑똑히 보고 있다. 이렇듯 대통령기록은 박근혜 정부의 수많은 문제점을 보여줄 수 있는 ‘사초’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생산된 대통령기록을 향후 역사적 증거로 활용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보호조치를 서둘러야 한다.

 

전진한 ‘바꿈’ 상임 이사·알권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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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서 넘실대는 거대한 저항행동을 일단 ‘2016 촛불대항쟁’이라고 불러본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었던 한국을 경이로운 눈으로 다시 보게 한 것이 촛불대항쟁이었다. 바로 이 촛불시민이 야당은 야당대로 여당은 여당대로 주판알을 굴리던 국회를 내몰아 마침내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하게 했다. 촛불의 힘이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과 새로운 대한민국을 세우라는 촛불의 염원은 아직 미완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2016 촛불대항쟁은 이미 그 자체로 정치사적 의미가 되기에 충분하다. 외환위기 이후 점점 더 고단해진 시민의 삶은 민주주의를 아득히 잊어버린 듯했고 위임권력은 권력자들만의 것이 되었다. 이 황폐한 정치의 시대에 놀랍게도 2016 촛불대항쟁은 국민주권의 민주주의를 완전히 진화된 형태로 귀환시켰다. 그것도 세계적으로 진화를 멈춘 대의 민주주의의 출구를 열었다. 촛불대항쟁은 21세기 민주주의를 진화시킨 지구적 사건이 될 만했다. 그 특징을 몇 가지 들여다보자.

 

첫 번째, 촛불대항쟁은 제도로서의 민주주의 영역을 획기적으로 확장했다. 대규모 군중행동은 대개 불법적이고 비제도적 행동을 수반한다. 그러나 촛불대항쟁은 230만명의 군중이 완전한 자발성으로, 그리고 완전히 합법적인 방식으로 제도화된 저항행동을 보여줌으로써 가장 강력하고도 직접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나타냈다. 단 한 건의 체포나 연행 없이 자율적 군중의 민주적 활동반경을 넓힌 셈이며 대의적 영역을 넘어 직접참여의 민주주의를 확장한 효과를 얻었다. 두 번째, 거의 매일 그리고 매주말 열리는 거대 집회는 생활민주주의의 현장이 되었다. 생활민주주의는 삶의 다양한 영역에 참여적 정치양식이 결합된 질서를 말한다. 말하자면 개인의 삶을 공공적 쟁점으로 구성된 정치양식과 결합하는 생활공공성의 질서다. 2016 촛불대항쟁은 불법 없는 시민행동이라는 점에서 이제 확장된 정치제도요, 정치양식이 되었다. 적어도 촛불시민들은 대통령의 퇴진과 새로운 질서라는 공적 쟁점을 추구하고자 자신의 일상적 시간을 정치와 결합시키고 있다. 촛불대항쟁은 생활시민이 생활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공공적 정치양식이 되었다.

 

제5차 민중총궐기대회가 열린 2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보이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 번째, 촛불대항쟁은 자아실현의 민주주의이자 자기표현의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다. 이 거대한 집회는 일원적 질서로 움직이지 않고 거대투쟁조직이 일원적으로 시민을 동원해내는 구조도 아니다. 오히려 시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표현해내고 있다. 매주 새롭게 등장하는 깃발과 구호에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자기표현의 민주주의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얼룩말연구회, 한국고산지발기부전연구회, 독거총각결혼추진회, 노처녀연대, 행성연합 지구본부 한국지부, 장수풍뎅이연구회, 아이돌 팬의 깃발 등 대단히 다양하고 흥미롭다. 네 번째, 촛불대항쟁은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성을 반영한다. 2016 촛불대항쟁은 역사적인 시민항쟁의 누적된 학습효과를 갖는다. 1960년 4월의 민주주의와 1987년 6월의 민주주의가 모두 미완에 그쳤다. 시민의 힘으로 항쟁을 만들었으나 제도정치권이 받아내지 못했다. 2016년 촛불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시민들은 우리 시민혁명의 미완의 역사를 선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훨씬 더 차가운 이성으로, 훨씬 더 부릅뜬 눈으로 제도정치권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다섯 번째, 2016 촛불대항쟁은 한국 민주주의의 세대적 진화를 기대하게 한다.

 

현재까지 일곱 차례에 걸친 거대 집회에는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가 망라되어 있다. 심지어는 신혼부부들이 이 위대하고도 거룩한 역사의 현장에 함께하기 위해 유모차를 몰고 나온다. 또 아이들에게 지켜야 할 가치와 질서가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 자녀들을 데리고 나왔다고 말한다.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한국 민주주의의 진화를 떠올리게 하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2016 촛불대항쟁은 이미 문명사적 사건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 없는 위태로운 정치과제들이 남아 있다. 더 크고 맑고 차가운 촛불의 눈으로 정치권의 움직임을 뚫어지게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라고 외쳐야 한다. 완성된 시민혁명, 그것도 무혈의 명예혁명 한 번 해봤으면 더한 바람이 없겠다. 전국에서 출렁이는 촛불의 물결이 2016년 ‘촛불혁명’으로 기록되는 날을 그려본다.

 

조대엽 고려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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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간 감정싸움이 위험수위를 오르내리고 있다. 급기야 “박지원 원내대표는 총리 사심이 있다” “문재인 전 대표 측에서 박지원 총리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박 원내대표가 거절했다”며 진실공방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국민의당 박 원내대표는 13일 페이스북에 “문재인 전 대표 측 인사가 저의 지인을 통해 제가 총리 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해왔다”며 “한 칼에 딱 잘랐다”고 썼다. 촛불정국 와중에 민주당 문 전 대표 측이 총리 자리를 제안했지만 거절했다는 취지다. 문 전 대표 대변인 격인 김경수 의원은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다.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왼쪽)가 11일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정국 수습 방안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권호욱 기자

박 원내대표 주장은 문 전 대표 측근으로 알려진 노영민 전 의원의 당원 상대 강연 내용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노 전 의원은 지난 2일 충북지역 당원을 상대로 한 비공개 강연에서 “박지원 대표 본인이 꿈이 있다. 총리를 하고 싶어 하잖아”라며 “이 국면에서 그거 안 해주니까 저 난리를 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박 원내대표가 지난달 14일 민주당 추미애 대표의 영수회담 제안을 비판한 것은 ‘총리 사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기 대선을 앞둔 두 야당이 주도권 경쟁을 벌이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촛불혁명 성과를 사유화하려 이전투구를 벌이는 일이다. 촛불민심 꽁무니를 따라가기 급급했던 야당들이 마치 전리품이나 되는 양 총리 자리 문제를 입에 올리며 정쟁하는 건, 그 진위를 떠나 지켜보기 민망하다.

촛불은 박근혜 대통령뿐 아니라 그런 흉물스러운 정부를 배태한 구체제 전체를 향해 타오르고 있다.

야당들도 구체제 일부임은 물론이다. 일신하지 않으면 함께 촛불민심에 쓸려내려 갈 수 있다.

정제혁 | 정치부 jhj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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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되면 으레 한 해를 돌아보게 된다. 어떻게든 살아낸 스스로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해주고 싶어진다. 내년에도 상황이 더 나아질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지금보다 더 나빠질 리는 없을 거라는 생각에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보기도 한다. ‘당신이 놓쳤을지도 모르는 것들’이나 ‘올해가 가기 전에 꼭 해봐야 하는 것들’과 같은 리스트가 안도감을 주기도 하고 불안감에 휩싸이게 만들기도 한다. 나는 남들과 비슷한 속도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하다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 길을 지나다 초등학생 둘을 만났다. 기말고사를 치르고 나오는 모양이었다. 책가방이 유독 무거워 보이는 아이가 입을 열었다.

“시험 망쳤어. 이러려고 공부했나 자괴감 들어.”

옆에 있는 아이가 맞장구쳤다.

“나도 자괴감 들어! 밤새워서 공부했는데, 공부한 데서 하나도 안 나왔어.”

이렇게 자괴감에 사로잡힌 아이들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자괴감을 느껴야 할 대상은 정작 아무렇지 않은데 자괴감과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 아이들의 입에서 앞다투어 자괴감이라는 단어가 쏟아져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이 10월 25일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실에서 '최순실 의혹'에 관해 대국민 사과를 하기 전 원고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자괴감은 올해 하반기에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단어일 것이다. “이러려고 대통령 하려고 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라는 담화문 속 대통령의 말은 국민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이러려고 주식투자 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이러려고 직장인 했나 피로감 들고 괴로워”처럼 자기 자신과 관련된 토로부터 “이러려고 대한민국 국민 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이러려고 세금 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처럼 정부를 향한 따끔한 일침까지 곳곳에서 패러디가 이루어졌다. 패러디의 끝에는 해학이 남아야 하는데 이상하게 뒤끝은 늘 씁쓸했다.

자괴감은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대통령은 이 단어를 원뜻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한 것 같다. 하긴 담화는 본디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상황을 상정하는 것인데, 대통령은 일체의 질의응답을 허용하지 않은 채 자기 말만 하고 들어가 버리지 않았는가. 나는 대통령이 담화문을 읽을 때 자괴감이라는 단어를 ‘부끄러움’이 아닌 ‘분노’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은 분명 화가 나 있었다. 자기 자신이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여기저기서 칼끝을 겨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 때문에 정작 자괴감을 느낀 것은 국민들이었다.

인간이 자괴감을 품을 수 있다는 점은 인간을 비로소 인간답게 만들어준다.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 없이 어찌 진심 어린 사과를 할 수 있겠는가, 자괴감을 건너지 않고 어떻게 자부심에 가닿을 수 있겠는가. 부끄러움은 다음을 기약하게 해주는 마음이다. 부끄러움이 있어야 반성을 할 수 있다. 조금 더 떳떳하고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괴감은 ‘앞으로’를 내다보는 마음이다. 대통령의 자괴감은 앞이 아닌 뒤를 향해 있었다. 그래서 대통령은 억울하고 화가 난 것이다.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양심이 없는 사람 아니면 양심에 거리낄 게 없는 사람이다. 나는 대통령의 자괴감을 인정하지 못하겠다.

국민들의 자괴감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 혼란스러운 정국 때문에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주말을 반납하고 광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자책감을 느끼고 배신감을 참을 수 없어 일상이 무너진 사람들도 보인다. 무너지고 난 후에야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힘든 상황일수록 그것을 지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절절히 깨닫게 된다. 자괴감이 심화되면 심한 자책이나 자포자기 상태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포기하고 돌아보지 않는 상태 말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촛불을 들고 광장에 다시 모였다. 역설적으로, 이 또한 우리가 자괴감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다음 세대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직면하지 않도록, 우리는 촛불을 더 높이 들었다.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던 날, 우리는 입을 모아 외쳤다. 촛불이 이겼다고,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 침묵은 진실을 덮을 수 없다고. 이기는 경험을 했다는 것, 다음을 기약해도 된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경험이다. 희망이 아직 남아 있음을 온몸으로 깨닫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 나라가 이렇게 돌아가고 있었다는 자괴감이, 내가 바로 이 나라의 국민이라는 자괴감이 만들어낸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다. 자괴감 이후에 찾아오는 것은 성찰의 시간이다. 우리는 광장에서 작년과는 다른 우리의 존재감을 이미 재확인했다. 국민들은 자괴감을 직면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괴감이라는 말 뒤에 숨어 있는 대통령과 얼마나 다른 품격인가.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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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의심스러운 대목은 많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소양에 관한 얘기는 그가 정계 입문한 18년 내내 입방아에 올랐다. 박근혜는 늘 짧게 말한다. “대전은요?” “참 나쁜 대통령” “동생이 아니라면 아니다”. 간단명료하다. 처음에는 무슨 심오한 뜻이 있겠거니 했다. 알고 보니 그게 다였다. 2012년 대선 토론회에선 정책 현안을 묻는 문재인의 질문에 “그러니까 제가 대통령 하겠다는 거 아니에요”라고 했다. 2004년 한나라당 대표 시절 손석희 앵커와의 인터뷰에선 ‘경제회생론의 근거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계속되자 “저하고 싸움하시자는 거예요”라고 했다. 본질인 정책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박근혜가 그간 보여준 행적과 언행에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수단과 방법은 전무했다. “대통령이 돼도 걱정”이란 말은 그래서 나왔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158회, ‘무능과 독선의 대통령’이란 비판을 받았던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도 210회 기자회견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150여회 기자회견을 했다. 박근혜는 4년 동안 5번 기자회견을 한 것이 전부다. 그나마도 질문은 받지 않았다. 토론 없는 회의, 대면보고 불가, 문답 기피는 박근혜의 실체다. 대통령 리더십은커녕 사회인의 기본 자질마저 갖추지 못했다. 그런 그가 국가 최고 지도자에 올랐다. 적어도 유권자의 절반 이상이 ‘집단 네다바이’를 당한 것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첫째는 보수·영남·고령층에 깔린 박정희 향수다. 이들에게 박정희는 신격화됐고, 박정희의 딸도 특별한 존재였다. 박정희의 후광을 빼놓고서는 박근혜에 대한 맹목적 지지를 설명할 수 없다. 둘째는 미래 권력에 대한 기대다. 박근혜는 야당 시절에도 ‘여의도 권력’이었고 확고부동한 ‘차기 대통령’이었다. 불러주면 감읍했고, 부르지 않더라도 줄을 이었다. 셋째는 포장이다. 박근혜의 불통과 오기, 무능, 책임 회피는 철저히 감춰졌다. 모든 단점은 신비주의로 포장됐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신중하다고 했고, 어쩌다 한마디 하면 간결하고 힘 있는 메시지라고 했다. ‘식인종 시리즈’를 얘기하면 세상에 이런 재밌는 얘기는 처음 들어본다는 것처럼 배꼽을 잡고 웃었다. 영혼 없는 리액션이 세상 물정 모르는 공주를 만들었다. 비극의 전조는 있었을 테지만 외면하거나 은폐됐다.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곧바로 ‘레이저’를 맞고 나가떨어졌다. 원로그룹 7인회의 좌장 김용환조차 ‘최태민’이라는 이름을 거명했다가 그 길로 정치생명이 끝났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가결된 9일 박근혜 대통령이 위민관에서 마지막 국무위원 간담회를 주재하며 모두발언을 마치고 메모를 살펴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전여옥은 ‘벌거벗은 임금님’을 외친 유일한 측근이다. 한나라당 대변인을 지내면서 박근혜 대표를 2년간 밀착 수행한 전여옥은 박근혜의 실체를 맨 처음 폭로했다. 전여옥에게 물어봤다.

- 보통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이 많았는데.

“컴퓨터로 치면 저장 용량이 이미 꽉 차 있다. 새로 타인의 삶을 보고 배우고 공감할 능력이 없다. 야당 대표 시절엔 그나마 종이에 써서 외우기라도 했다. 대통령이 돼서 다시 나의 집이었던 청와대에 들어가는 순간 내 임무를 완수했다 생각하고 손을 놔버린 것 같다.”

- 박근혜 화법을 ‘베이비 토크’라고 했다.

“사용하는 단어를 세어 보면 100단어가 안된다. 문법도 표현도 안 맞는다. ‘우리 경제가 불쌍하다’는 말은 유치원생들이 ‘꽃이 아야야 해요’라고 하는 것과 같다. 사고가 청와대 공주 수준에서 딱 멈춘 것이다.”

- 다른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몰랐나.

“왜 몰랐겠나. 다 똑똑한 사람들이다. 나보다 먼저 안 사람도 많다. 그런데 말을 안 하더라. 그게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란 점을 잘 알기 때문이다.”

똑똑한 사람 넘버원인 김기춘은 “우리 대통령은 차밍(매력적)하고, 디그니티(위엄) 있고, 엘레강스(우아)하다”고 했다. 이정현은 청와대 홍보수석 시절 “자랑스러운 불통”이라고 했다. 이들뿐 아니다. 박근혜를 인우(隣友)보증 선 인사들은 도처에 깔려 있다. 지금 이들은 서로 네 잘못이 크다며 싸우고 있다. 박근혜 코미디 2막이다. 

어두운 면이 있으면 밝은 면도 있다. 박근혜가 무사히 임기를 마쳤으면 전직 대통령으로 그 위세를 계속 떨쳐갔을 것이다. 친박계도 건재했을 것이다. 선거 때마다 정치판을 휘저을 것이고, 현안마다 “좋아요” “나빠요”를 던지며 정치 영생(永生)을 누렸을 것이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지 않았다면 이런 꼴을 더 봤어야 할 판이다. 반면교사도 훌륭한 선생님이다. 이젠 인물을 요모조모 뜯어보는 눈도 생겼다. 지역·세대 투표도 달라질 수 있다. 천만다행이다. 그러니 박근혜에게 속았다고 속상해할 일만은 아니다.

박래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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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을 한국인은 참으로 위대했다. 100만, 200만명이 저마다 촛불 하나씩을 들고 몰려나와 근 두 달 동안 ‘박근혜 퇴진’을 외치고 있는 모습을 나는 프랑스 남쪽 님(Nimes)에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거북아, 거북아/ 네 목을 내어라…”를 외쳤던 신화를 떠올리게 하였으니, 만인의 입이면 무쇠도 녹일 수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후세의 사가들은 2016년 12월9일, 이 땅에서 일어난 일을 두고 어떻게 기록할까?

돌이켜보면, 4년 전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부터 그는 좀 이상했다. TV토론에 나와 “그래서 내가 대통령 되려고 하는 거잖아요”를 반복하는 걸 보면서, 웬만큼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심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댓글조작 의혹을 받는 국가정보원 여직원이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던 것을 두고 “사람들이 그녀를 감금했다”고 주장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심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청와대에 들어앉은 그는 어쩌면 지금도, 나쁜 사람들에 의해 자신이 감금돼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12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에 대한 첫 재판관 회의가 열린 헌법재판소 앞에서 경찰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다. 김창길 기자

보수와 진보를 떠나서, 언어구사력이 극히 저조해서 논리적 사유가 불가능한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는 것은 세계적인 스캔들이 될 거라고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급기야 그는 국제적인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가 ‘보수’이기 때문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건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물론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그가 내세웠던 공약들이라는 것이 ‘진보’와 별반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그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박정희의 딸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사실 ‘박정희’는 이 땅의 우상이었다. 18년 동안 장기집권을 하면서 그가 저지른 온갖 만행에 대해서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그 18년 동안 이룩한 경제적 성과만을 내세워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퇴행적 로맨티시즘이 상당수 한국인들의 뇌리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식 개발과 7·4·7 공약을 내세웠던 이명박 전 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옛날에 박정희가 그랬던 것처럼 삽을 들고 4대강을 파기 시작했다. 어떤 외신은 그런 그를 보고 “뇌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사람들은 듣지 않았다. 그만큼 사람들은 박정희를 잊지 못했던 것이다.

박정희의 공과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그 단세포적인 논쟁은 이제 너무나 식상하고 피곤한 것이지만, 이 땅에는 아직도 그것이 보혁 논쟁의 출발점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박근혜의 출현에 대하여 어떤 외신은 ‘독재자의 딸’이라고 비웃었지만 소용없었다. 박정희의 딸이기 때문에 그가 어떤 결함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 따위는 따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정말이지 절망적이고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이 땅에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 낡은 우상을 사람들이 허물기 시작한 것이다. ‘반신반인의 그 위대한 박정희의 딸’은 알고 보니 청와대 관저에서 각종 주사나 맞으면서 최순실이라고 하는 이상한 사람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다는 의혹이 하나둘 사실로 밝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비서실장 김기춘은 유신시절에 박정희 밑에서 배웠던 온갖 독재적 탄압을 오늘날 버젓이 음모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놀랍고 끔찍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박근혜가 탄핵심판대 위에 올랐다는 것은 이 나라 사람들의 뇌리를 점령하고 있던 그 지긋지긋한 우상이 통렬하게 허물어졌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우상을 허물어야만 비로소 사람들은 보수란 무엇이며 진보란 무엇인가 하는 데 대한 차가운 사유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일지 | 소설가·동덕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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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혁명, 시민혁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혁명은 체제(시스템)의 교체를 의미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결의안이 통과되었지만, 아직 탄핵이 된 것도 아니고 박근혜·최순실을 만든 시스템도 여전히 그대로다. 그래서 샴페인을 터뜨리기에는 너무 빠르다. 아직은 혁명이 아니다.

물론 탄핵소추가 성사된 것은 시민의 승리이다. 그러나 지금의 승리는 견고하지 못하다. 현재 상황을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시스템의 교체는커녕 정권교체도 이루지 못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1987년으로부터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다. 87년 6월 100만명이 거리에서 최루탄과 맞서서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쳤다. 그러나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겠다는 6·29선언이 나온 후에 상황이 급반전했다.

여당과 야당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8인회의’라는 것을 구성하고, 그 안에서 헌법개정안을 만들었다. 거리에 나왔던 시민들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헌법개정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했지만, 그해 12월 치러진 대선의 승리자는 군사정권의 한 축이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었다. 야당은 지리멸렬했고, 시민들이 만들어준 기회마저도 발로 차 버렸다.

10일 서울 청운.효자동사무소 앞에 모인 제 7차 촛불 문화제 참가자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구속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며 하늘로 폭죽을 쏘아올리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시위를 주도하던 세력의 한계도 있었다. 당시 민주화운동의 주류는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는 것에 집중했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 수 없었다. 더구나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하면서도, ‘결선투표제’처럼 당연히 필요한 제도를 논의하지도 못한 것은 결과적으로 큰 실책이 되었다. 대통령제를 택한 많은 국가들이 이미 도입하고 있었던 결선투표제만 됐더라도, 1987년 12월 대선에서 득표율 36.6%를 얻은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1987년 당시에는 국회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에 관한 논의도 없었다. 1970~1980년대에 민주화가 되었던 스페인, 포르투갈과 중남미의 많은 국가들은 정당득표율대로 국회의석을 배분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국회의원 선거제도로 택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논의 자체가 없었다. 결국 지역구 소선거구 선거제도를 택한 결과 국회는 지역주의 정당, 기득권 정당들이 채우게 되었다. 이들은 필요하면 정계개편과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이것은 정치에 대한 환멸과 냉소를 불러일으켰다. 결국 87년 6월 민주항쟁은 ‘미완의 시민혁명’으로 끝났다.

지금의 상황은 1987년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박 대통령은 물러나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집권세력 교체와 시스템 개혁의 전망은 매우 불투명하다.

벌써부터 정치권은 다음번 대통령을 누가 차지할 것인지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야당의 대선후보들은 자기중심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을 뿐, 집권세력 교체와 시스템 개혁의 전망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탄핵에 찬성함으로써 ‘박근혜 꼬리 끊기’를 한 새누리당 세력들은 재결집을 시도할 것이다. ‘개헌’을 매개로 한 정계개편의 불씨도 살아있다. 자칫 죽 쒀서 남 줄 상황이다.

따라서 이번 촛불이 또 다른 미완의 시민혁명이 되지 않으려면, 시민들이 긴장을 놓지 않아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특검의 수사와 헌법재판소의 탄핵심리가 신속하면서도 철저하게 진행되도록 하고, 황교안 국무총리 대행체제가 또 다른 국정농단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앞으로 우리가 어떤 대한민국을 만들 것인지에 대한 얘기다. 이번에 촛불을 들고나온 시민들의 공통된 마음은 ‘이게 나라냐’는 것이었다. 이제는 바꿔야 한다. 지금부터는 부패하고 낡은 국가 시스템을 어떻게 혁신할 것인지에 관한 얘기가 곳곳에서 토론될 필요가 있다.

국가 시스템의 근본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핵심을 잘 잡아야 하고 순서도 잘 세워야 한다. 시스템 개혁의 입구는 선거제도의 개혁이다. 그래야 정치판을 바꾸고, 내 삶에 도움이 되는 정치가 이뤄질 수 있다. 민주주의 역사를 볼 때, 정치판을 바꾸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선거제도 개혁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권고하고 있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고, 만 19세로 되어 있는 투표권 연령을 만 18세로 낮추는 것이 그 시작이 될 것이다.

한편 시스템의 개혁 과정에서 기득권 구조의 청산을 반드시 해야 한다. 재벌개혁, 검찰개혁, 행정·사법개혁이 필요하다. 개혁을 위해서는 시민들의 직접·참여민주주의를 도입하고 확대해야 한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국민소환제도, 국민발안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 중앙으로 집중된 권력을 분산시키는 지방분권도 시스템 개혁의 핵심이다.

한편 개헌논의도 국회에서 할 일이 아니다. 국회 중심의 개헌논의는 결국 대선을 염두에 둔 정략적인 논의가 될 수밖에 없다. 이번 개헌은 역사상 최초로 시민들이 참여하고 시민들이 주도하는 개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국회는 가만히 있으라. 국회에서 해야 할 일은 개헌의 내용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참여 개헌절차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추첨으로 뽑힌 시민들이 개헌의 내용에 대해 토론하고, 온·오프라인으로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밟아야 한다. 최근 이런 방식으로 개헌을 추진한 아일랜드, 아이슬란드의 사례도 있다.

이번에는 여기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미완의 시민혁명이 아니라, 부패한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만드는 시민혁명이 될 수 있다.

하승수 |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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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에는 여러 가지 눈물이 있다. 기쁨의 눈물, 억울한 눈물, 겁먹은 눈물, 회한의 눈물, 고통의 눈물, 웃음 끝의 눈물, 마지막 숨을 몰아쉰 눈물, 웃픈 눈물, 거짓 눈물…. 눈물을 흘리는 사람과 상황에 맞춰 이름을 짓자고 하면 세상에는 사람들 생김새만큼이나 많은 눈물이 존재할 것이다.

이날의 눈물은 어떤 눈물이었을까. 지난 9일은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로 직무가 정지된 날이다. 남보라색 재킷에 회색 바지를 입은 그는 오후 4시53분 청와대 위민1관 영상 국무회의실에 입장해 국무위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대통령 신분’이란 껍데기만 갖게 된 그는 4분54초간 모두발언했고 우리는 TV로 이를 지켜봤다.

이후 TV로는 볼 수 없는 비공개 간담회가 이어졌다. 무거운 침묵이 감도는 자리였을 것이다. 그는 국무위원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고 악수하며 개별 인사를 나눴고 눈물을 흘린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황교안, 유일호, 이준식 등 국무위원들과 한광옥 비서실장을 비롯한 청와대 참모들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끝내 모두 함께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영국 BBC방송이 9일 페이스북 계정에 ‘박근혜가 탄핵안 가결로 한국 대통령직에서 축출됐다’는 문구와 함께 박 대통령의 사진을 올렸다. BBC 페이스북

우리는 최근 그의 눈물 몇 가지를 기억한다. 지난 1일 그는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 이후 35일간의 칩거를 깨고 화염에 휩싸여 잿더미로 변한 대구 서문시장을 방문했다. 점포 839곳 중 679곳이 소실된 곳이다. 소실된 점포 가운데는 2005년 당시 화재로 빚을 지고 아직 그 빚에서 벗어나지 못한 곳들도 있다. 삶의 터전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한 상인들의 피눈물이 뚝뚝 떨어진 자리다. 무엇을 위한 방문이었는지 그는 10여분간 일부 지역을 둘러본 뒤 시장을 빠져나왔다. “청와대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청와대는 전했다.

지난달 4일의 눈물도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관련 2차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하면서다. 올해 최대 유행어를 낳은 이날 담화문에서 그는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라며 눈물을 보였다.

좀 더 시간을 돌려보자. 2년7개월 전 2014년 5월19일의 눈물을 잊을 수 없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39일 만에 청와대 춘추관에서 발표된 세월호 참사 대국민담화다. 그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두 줄기 굵은 눈물을 흘렸다. 또렷이 정면을 응시한 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비장한 목소리로 희생자들을 호명하며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 “감사합니다”라는 맺음말에선 할 일을 잘해낸 사람의 당당함마저 느껴졌다. 그때까지도 닦지 않은 눈물은 카메라를 통해 그대로 생중계됐다. 이때의 눈물이 무엇이었는지 이후 그는 스스로 증명해보였다.

대통령의 눈물은 그때마다 회자가 됐다. 정치적 해석은 물론 심리학, 생물학 등 과학 영역의 분석 대상이 되기도 했다. 눈물샘의 위치, 주름살의 모양, 눈물이 맺혔다 내린 초시간, 흘러내린 뺨의 위치 등을 근거로 눈물의 진의를 따지는 정밀한 분석도 나온다. 과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지지율을 올리는 반전도 낳았다. 반대로 조롱과 분노를 일으키기도 했다.

눈물(을 흘리는 것)에도 자격이 있을까. 지난 3일 232만명이 촛불을 든 6차 촛불집회에서는 세월호 미수습자인 단원고 조은화양의 엄마가 무대에 올랐다. 은화 엄마는 “지금도 팽목항에서 4월16일을 살고 있다”면서 “최소한 엄마로서, 최소한 사람으로서 은화를 떠나보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했다. 왜 세월호가 인양돼야 하는지 담담히 그 정당성을 얘기하는 엄마는 울먹이지 않았다. 말을 끝맺을 때서야 그리움과 억울함에 울음을 토했다.

대통령이 탄핵 후 국무위원들과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리던 그 순간 또 다른 눈물이 있었다. 국회 방청석에서 탄핵 표결을 지켜봤던 세월호 유가족들이다. 엄마들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유경근 세월호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탄핵 가결 후 심정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무겁게 입을 뗐다. “이제 시작이죠. 국민들의 힘이, 촛불의 힘이 이렇게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고, 기쁜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1~2초간 뜨거운 눈물을 속으로 삼킨 그는 대통령이 하루라도 더 청와대에 있는 것은 국민에게 고통이라고 분명히 했다.

지난 10일 탄핵 가결의 한 파고를 넘긴 광화문광장과 전국에서는 또다시 104만개의 촛불이 타올랐다.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촛불을 든 고사리손들도 많았다. 이날의 촛불은 한층 더 밝았고 더 예리했다. “박근혜를 구속하라” “황교안이 웬 말이냐” “김기춘·우병우를 구속하라” “세월호를 인양하라” “한상균을 석방하라”…. 소리 없이 자신의 몸을 태워 칠흑 같은 어둠을 몰아내는 촛불은 반전의 눈물을 허락지 않는다.

김희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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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비평

“당신은 천당 가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그제 국회의 최순실 국정농단 2차 청문회. 김경진 국민의당 의원이 증인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에게 독설을 쏟아냈다. 게이트의 책임자가 모르쇠로 일관하자 참지 못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김 전 실장은 청문회에서 “잘 모르겠다”(60번), “부끄럽고 죄송하다”(24번)란 답만 되풀이했다. 그러나 청문회 후반에 대반전이 일어났다. “최순실 이름도 못 들었다”고 잡아떼던 그를 한 방에 무너뜨린 동영상이 등장한 것이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누리꾼의 제보를 받아 공개한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청문회’ 동영상에는 최태민 관련 의혹에 대해 당시 박근혜 후보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최순실의 이름도 여러 차례 언급된다. 박 후보의 법률지원단장이던 김 전 실장이 방청석 맨 앞자리에 앉아 청문회를 지켜보는 모습도 동영상에 나온다. 그때까지 모든 질문을 받아치며 여유를 부리던 김 전 실장은 동영상을 보자 당황하며 “최순실이란 이름은 이제 보니까 내가 못 들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꼬리를 내렸다.

동영상을 제보한 이는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주식갤러리(주갤러) 이용자다. 한 누리꾼이 온라인 커뮤니티 ‘오늘의 유머’에 게시한 동영상을 민주당 박영선·손혜원 의원에게 퍼나른 것. 손 의원은 자신보다 질의 순서가 앞인 박 의원에게 질의를 양보했다. 잘도 빠져나가던 김 전 실장이 누리꾼수사대와 야당 의원들이 합심해 날린 회심의 일격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각종 주식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 주갤러는 뛰어난 정보수집력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그래서 “주식 빼고 다 잘하는 주갤러”란 말도 듣는다.

대통령의 3차 담화 발표 전에는 ‘예상담화문’ 글이 올라왔는데, 이것이 실제 담화와 유사한 대목이 많아 화제를 모았다. 이번 제보글에는 수천개 댓글이 달리고 조회수가 수십만을 넘었다. 인터넷상에서 크게 화제가 된 글을 누리꾼이 찾아가 소원을 비는 이른바 ‘성지순례’도 줄을 잇고 있다. 박 의원은 어제 주갤러에 “여러분의 용기가 세상을 바꿉니다. 이젠 주식도 대박나세요. 감사합니다”란 글을 올렸다. 국회 청문회도 시민이 주도하는 세상이 되고 있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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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날이 밝았다. 결과에 따라 조금은 달라지겠지만 우리 모두의 신념은 확고하다. 탄핵이 성사된다고 해도 마냥 기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실패한다고 해도 결코 끝이 아니며, 따라서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보장된 것은 없지만 오늘은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가장 추악한 환부를 도려내기 위해 마침내 칼을 빼든 날이다. 국민을 철저하게 기만하고 정치를 난도질해 온 대통령을 심판하는 날이다.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다며 반성 없는 대통령에게 국가를 사유화했던 잘못이 얼마나 큰 것임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날이다. 치부은폐와 권력연장을 위해 눈 닫고, 귀 막고, 무릎 꿇어왔던 정치인과 정부 관리들에게도 죄를 묻는 날이다.

그리고 홀린 듯이, 취한 듯이 무지몽매하게 나라를 맡겼던 우리 모두의 실수와 오판에 대해 처절히 반성하는 날이다. 숨이란 계속 들이마시기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숨이 넘어가지 않으려면 숨을 뱉어내야 하듯이 임계점에 닿은 우리는 이제 이 부조리의 썩어서 악취 나는 호흡을 뱉을 때다. 기도를 꽉 막고 있던 찌든 가래덩어리를 내뱉어 버려야 할 때다.

혁명적 상황이 아니라 혁명이다. 이것이 혁명이 아니면 무엇이 혁명일까? 민의에 의한 혁명을 더럽히는 선택을 국회가 한다면, 역사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토록 모든 국민이 하나가 된 적이 있었던가? 박근혜 대통령은 고립무원이다. 고립무원이어야만 한다. 한 줌도 되지 않는 부역자들이야 남겠지만 그들과 함께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만 우리의 미래가 살길이 생긴다.

탄핵 통과 여부와 상관없이 사퇴를 요구한다. 이유는 아까운 대한민국의 시간이 낭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리라고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깨달을 사람이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을 사람이었다면 후안무치의 3차례 담화는 분명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에는 너무도 아까운 시간이 흐르고 있다. 이런 귀중한 시간을 지연시킬 권리는 대통령, 국회, 헌재를 포함해 누구에게도 없다.

지금 대한민국은 곧 2014년 4월16일의 세월호다. 침몰하는 세월호에서도 그랬듯이 지금의 골든타임은 대통령이 멋 부리며 낭비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 국민의 목숨과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린 시간이다. 정부가 야만성에 항거하고, 이웃의 경박한 피로감에 의해 매장당한 공동체 의식을 살려내어 이번에는 침몰을 막아야 한다.

세월호 대책모임 ‘연장전’이 발표한 시국선언문을 떠올린다. “박근혜 정부가 열어버린 지옥에서 우리는 생명보다 죽음에, 진실보다 왜곡에, 슬픔보다 분노에, 애도보다 투쟁에 익숙해져야 했다. 우리는 이 지옥에서 새로운 삶의 가치와 연대를 만들어 낼 진심들을 반드시 인양할 것이며, 또 우리는 304개의 우주를 기억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한국의 미래가 민주주의 퇴행을 막고 경제정의를 실현하는 계기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담아 함께 피눈물로 쓴다. 각계각층의 외침과 준엄한 심판의 소리들은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통곡이며, 미래를 위한 기대와 공감의 위대한 합창이다.

창자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신음은 입을 통과해 소리가 되어 울리며, 깊숙이 숨어있던 성찰은 손을 통과해 글이 되어 던져진다. 글과 소리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행동이 되어 저항의 광장으로 돌진한다. 촛불은 횃불이 되고, 횃불은 들불이 되듯이, 결코 뿔뿔이 낱개로 흩어지지 않고 모두 모여 싸워 이기도록 기원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갈림길에 서 있다. 박근혜 게이트는 위기와 기회를 모두 품고 있다. 박근혜와 최순실 무리들이 대한민국을 세계의 조롱거리로 만들어버렸지만, 국민은 일순간에 찬사로 바꿔버렸다. 세계적인 극우준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안보장사꾼들이 판치는 동북아에서 평화를 주도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국민의 힘으로 정권교체를 실현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한 다음 정치권을 쇄신하여 양극화 해결에 본격적으로 나설 수 있다. 국가의 진짜 주인이 정치를 되살릴 때다. 시민의 힘으로 민의의 대변자가 되기를 포기한 대통령과 군주의 가신으로 호가호위하는 정치인들에게 준엄한 심판을 직접 내릴 수밖에 없다.

지난 몇 주 동안 부를 때마다 모두를 울컥하게 만들었던 노래를 다시 되뇌어본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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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어제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김현웅 법무부 장관에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수사지휘권을 발동하라고 시켰다”고 폭로했다. 수사지휘권은 법무장관이 검찰 수사를 지휘·중단할 수 있는 권한을 말한다. 백 의원은 박 대통령이 법무장관의 지휘를 통해 검찰로부터 서면조사를 받은 뒤 무혐의라는 결과를 얻어내려고 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김현웅 당시 법무부 장관이 박 대통령의 지시에 반발해 사표를 쓰게 됐다는 것이다.

법무부는 부인하지만 백 의원 발언은 개연성이 있다. 김 전 장관은 이임식에서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윗사람이 신의가 없으면 백성은 떨어져 나간다)’이라는 뼈 있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당시 박 대통령이 김수남 검찰총장을 경질하려 한다는 얘기도 돌았다. 박 대통령은 1개월여 전 우병우 민정수석을 앞세워 검찰 권력을 사유화할 때만 해도 수사를 자청했다. 그러나 검찰이 촛불민심을 의식해 게이트 수사에 적극 나서자 표변했다. 지난달 20일 검찰이 최순실씨 기소 때 박 대통령을 공범으로 규정하자 “사상누각”이라며 검찰 수사에 응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박 대통령의 수사지휘권 발동 지시가 사실이라면 심각한 사안이다. 수사 대상자가 수사를 무력화하는 공작을 펼친 것이다. 직권남용,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에 해당할 뿐 아니라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헌법 제11조에도 위배된다. 박영수 특검은 박 대통령의 수사 방해 여부와 김 전 장관의 사퇴 이유도 밝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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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오늘 국회에서 처리된다. 국정 최고책임자의 축출 여부를 결정할 의원들이나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 모두 무거운 마음으로 역사의 한 장을 마주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지키고 더 나은 국가를 향해 행진할 것인가, 민주주의를 배반하고 국가를 위기로 몰아갈 것인가. 시민의 뜻은 분명하다. 박 대통령을 탄핵함으로써 새로운 국가, 새로운 질서를 세우라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파괴하고 민주주의의 기본적 질서를 무시했다는 사실이 검찰 수사에서 드러났다. 시민 전체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라고 시민이 위임해준 권력을 아무런 자격도 없는 최순실 일가의 사적 이익을 위해 사용했음이 드러났다. 최씨의 국정농단 실태는 그제 국회 국정조사에 나온 최씨의 측근들을 통해 다시 입증됐다. 문화계의 황태자로 불리며 최씨와 함께 국정을 주무른 차은택씨는 “최씨와 박 대통령이 동급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박·최 공동정권이라는 견해에 동의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한때 최씨를 도왔던 고영태씨도 “최씨가 김종 전 문화부 차관을 수행비서쯤으로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대한민국 권력서열 1위가 최순실이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다는 사실 앞에 시민들은 분노와 참담함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진행될 특검 조사에서 세월호 참사 당일 7시간 동안의 박 대통령 행적이 드러나면 그를 용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국회는 박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 박 대통령은 “검찰 수사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해놓고 한 달 넘게 수사를 거부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검찰 수사에서 드러난 사실조차 부인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지금까지도 미르·K스포츠 재단을 만들어 재벌들로부터 돈을 내도록 한 것이 국가를 위해 한 일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더구나 박 대통령은 그동안 여러 차례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거짓말과 꼼수로 시민을 우롱했다. 지난 한 달 동안 국회에 두 번씩이나 거취를 정해달라며 공을 던져놓고 정치적 혼란을 부추기며 연명을 꾀했다.

국회는 박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 박 대통령은 과거 정윤회씨 문건 유출이나 이석수 특별감찰관의 우병우 전 민정수석 조사 때 “국기를 흔드는 행위”라고 딱 잡아떼며 보호막을 쳤다. 국정농단의 주범이 자신이면서 끝까지 시민을 속이고 정권 유지에만 골몰하는 가증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민주당 당사를 도청한 사건으로 물러난 게 아니다. 사건 발생 후 대응과정에서 거짓말한 사실이 밝혀졌고 그 때문에 탄핵 위기에 몰리자 스스로 사임했다. 닉슨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게 헌법을 유린하고 시민에게 거짓말을 반복한 박 대통령을 탄핵하지 못한다면 누구를 탄핵한단 말인가.

국회는 박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 박 대통령은 권력 유지를 위한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지금도 시민의 뜻에 저항하고 있다. 탄핵이 가결되어도 물러나지 않고 헌법재판소에서 법리 다툼을 하겠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 자신이 보수 일색으로 짜놓은 헌법재판관 진용을 믿고 있을 것이다. 오직 자신의 정치적 생존이라는 원칙 하나에 의존해 필요에 따라 말을 바꾸는 대통령에게는 탄핵으로 응징하는 것 이외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다. 이미 80%의 시민이 박 대통령 탄핵을 지지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국정 수행을 지지하는 이는 100명 중 5명이다. 선거부정을 저질러 축출된 초대 대통령도, 유혈 진압으로 집권한 군인 대통령도 이렇게 배척받지는 않았다. 박 대통령을 뽑았던 시민들이 더 실망하고 분개하는 이유가 뭔지 더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국회는 민주공화국의 품격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탄핵소추안을 가결해야 한다. 최고권력자도 법 앞에 평등한 민주주의 사회임을 입증하기 위해, 민주적 질서의 수호를 위해 국회는 그를 탄핵해야 한다. 헌법, 민주주의, 시민 주권, 정치적 책임성, 반부패라는 대의 앞에 여당과 야당, 친박계와 비박계,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박 대통령은 시민의 대표권을 상실했다. 그렇다면 시민을 대표하는 유일한 제도로 남은 국회가 할 일은 그의 대표권을 회수하는 것이다. 국회는 박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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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열차가 종착역을 향해 달리고 있다. 국회는 9일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농단에 대한 탄핵소추결의안 표결에 나선다. 탄핵은 가변적이다. 하지만 탄핵 결정이 난 뒤에도 박 대통령은 헌법재판소까지 탄핵사건을 가지고 가겠다고 한다. 끝까지 해보겠다는 것이다. 탄핵 정국의 혼란이 조속히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시민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다. 탄핵 이후에도 정국은 긴 안개 터널이다.

국가를 경륜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 몸을 괴롭히고, 정신을 피로하게 하고, 몸은 나그네가 머무는 집 같은 데 두고, 입은 문지기 같은 음식을 먹고, 손은 노예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통치자는 시민들의 눈높이에서 공감하고 소통해야 한다. 그런데 그는 시대·시민과 불화를 자초하며 싸움에 빠져들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역사·시민·시간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는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명예회복에 나서며 역사에 싸움을 걸었다. 아버지의 명예회복은 그를 정치에 입문시키고 대통령에까지 이르게 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는 자서전 곳곳에 박정희를 ‘국가만을 생각한 위대한 애국자’로 기록했다. 그는 1979년 박정희 피격사건 이후 “아버지의 혜택을 보았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표변했다”며 ‘배신자’라고 적었다. 세상이 뒤집힌 뒤 아버지에 대한 사회의 냉소적 평가에 불만을 토로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되자 재평가 작업에 나섰다. 역사교과서의 근대사 부분이 전교조의 이념에 경도돼 있다고 했다. 국정 역사교과서 추진을 통해 역사와의 전쟁에 나선 것이다.

그는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며 국정화를 집권 후반기의 주요 정책과제로 밀어붙였다. 그러나 반대여론이 빗발치며 참여 학자들이 부족하자 깜깜이로 모집해 ‘몰래 집필’에 들어갔다. 결국 만들어진 교과서는 편향성 시비에 몰리면서 누더기가 됐다. 사초를 찢고 개칠을 해도 역사는 바꿀 수 없다.

그는 40여년 전 개발시대의 프레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박정희 생존 당시 가족모임에서 ‘새마을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그리고 대통령이 돼서는 아버지의 유산인 새마을운동 전파에도 몰두했다. 하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장단에 맞추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었다. 지속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시민들과 대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맞서고 있다. 지난 10월29일 첫 촛불집회 이후 6차례에 이르면서 함성은 커지고 규탄의 목소리는 강해졌다. 지난 주말 집회에는 조직적인 동원 없이도 232만명에 달하는 시민이 광장으로 나왔다. ‘퇴진’ ‘하야’에서 이젠 ‘구속’으로 강도가 높아졌다. 그러나 국정농단에 자신은 하나도 잘못이 없다고 한다. 국민들은 그에게 나라를 맡겼으나 그는 모르쇠다. 그는 국민들이 인간다운 생활을 하고 차별받지 않고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할 의무를 방기했다. 그는 세월호가 침몰할 때 머리를 만지고 있었으며 최순실이 딸 정유라를 위해 갖가지 편법을 동원할 때도 이를 방치했다. 어린 학생에게는 노력하면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이 아니라 ‘돈도 실력’이라는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청소년들은 장시호와 정유라가 불법·편법으로 명문대에 진학하는 현실에 절망했다.

그는 시간과의 싸움을 하고 있다. 시간을 벌기 위한 버티기다. 232만 촛불이 시간이 지나가면 꺼질 한시적인 화풀이 정도인 것으로 인식하는 듯하다. 그는 1차, 2차, 3차에 걸친 대국민담화를 하면서 차일피일 퇴진을 미뤘다. 그리고 어제 “탄핵이 가결되더라도 헌법재판소의 결정 과정을 보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겠다”고 했다. 헌재까지 가서 싸우겠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5000만명이 반대해도 고집을 꺾지 못할 것”이라는 예견이 맞았다. 탄핵안 가결 후 헌재 결정까지 최장 6개월이 소요된다. 그동안 국정혼란은 불을 보듯 하다.

국가적인 위기 상태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국정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내년도 성장률은 올해보다도 낮게 예상되는 등 경제지표들도 하나같이 좋지 않다. 조류인플루엔자가 전국을 덮치고 있다. 그는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면서 국민을 볼모로 잡고 실익 없는 싸움에 나섰다. 그는 스스로 1원도 챙기지 않았다며 버티고 있다. 솜털보다 가벼운 법률지식을 가지고 자신의 방어막을 치고 있다. 끝까지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에 거슬러 ‘효도 교과서’를 만들고 아버지의 명예회복에 나선 것, 그 자체가 엄청난 사익 추구다. 국민은 합법적인 구제수단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때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실력행사를 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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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새롭게 시민의 힘, 참여의 힘을 느낀다. 지난 9월20일 한겨레신문이 ‘최순실’이란 이름을 거명하기 시작하면서, 보다 직접적으로 지난 10월24일 JTBC가 최순실씨의 태블릿 PC에 관한 보도로 국정개입 사건의 전모를 알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나라는 유례없는 격랑에 휩싸여 버렸다. 바로 그 주 주말인 10월29일부터 헌법유린과 국정농단의 실체를 밝히라며, 박근혜 대통령은 물러나라며 시민들의 자발적 촛불집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12월3일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인 232만명이 참여한 6차 집회에 이르기까지 지금 우리 시민들은 역사를 새롭게 써내려가고 있다. 광장을 가득 채운, 시민들의 평화롭지만 도도한 분노가 우리 사회를 바꿔나가고 있다.

광장에서 만난 많은 이들은 말한다. 머릿수 하나라도 채우러 나왔다고. 내가 빠져서 숫자가 줄어들면 안된다고. 내가 안 나가도 누군가 나오겠지가 아니라 날씨가 추워서 혹시 집회 참가자 숫자가 줄어들까봐 나라도 참가해야 한다고. 아이들과 청소년은 물론이요, 제주에서 비행기삯을 물어가며 참가한 90세 할머니가 계신가 하면 100세 할머니까지 거리로 나오셨다. 흔히 말하는 ‘무임승차자’는 보이지 않는다.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고 안타깝다는 마음, 자기 몫까지 대신해줘서 고맙다는 인사가 댓글에 넘친다.

광장만이 아니다. 소셜미디어는 이제 시민들의 의사를 전달하고 소통하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 가림이나 숨김이 있기 어렵다. 정보가 끊임없이 유통되고 공유되면서, 정부가 알리고 싶지 않아 여백으로 남겨졌던 부분들을 채워나가는 퍼즐 맞추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시민 4명이 시간과 재능을 기부해서 만든 대통령 탄핵 국민 청원 사이트 ‘박근핵닷컴’(parkguenhack.com)은 국회의원과 일반 시민을 직접 연결하는, 민심을 바로 전달하는 핵심 통로가 돼 이미 100만명 가까운 시민들이 참여했다. ‘박근혜 퇴진 모바일 국민투표’도 실시됐고, 카카오톡을 활용해서 국회의원에게 의견을 전하고 요구하기 등 새로운 의사전달과 소통방법이 날개를 달았다. 시민들은 이제 폭력을 동원하지 않으면서 지혜롭고 쾌활하게 분노를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을 가졌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발의되고 국회 표결을 앞둔 지금 상황이 참담하고 수치스럽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 사회에 건강한 시민이 있다는 사실과 그 사실에 대한 발견은 상당한 위안이자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세계는, 그리고 우리 사회는, 환경·에너지·기후변화 위기 상황에서 많은 난제를 마주하고 있다. 지난 6일 정부는 신기후체제 출범에 따른 효율적 기후변화 대응을 지향한다면서 제1차 기후변화대응 기본계획과 2030 국가온실가스 감축 기본로드맵을 발표했다. 별다른 사회적 논의 없이 그렇게 계획이 만들어지고 로드맵이 그려졌다.

산업계와 시민사회는 각기 다른 이유로 이런 접근에 비판적이다. 촛불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열의와 사회적 관심이 환경·에너지·기후변화 문제 해결을 위해 모아진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 사회는 최근 몇 해 동안 활발한 사회적 소통을 거의 잊고 지냈다. 그 어느 나라보다 소통 역량이 크고 사회적 관심과 참여의지가 높은 이 나라에서 말이다. 이제 더 이상 대통령의 무능과 부패, 시대착오적 관심이 우리 사회의 건강한 에너지를 소진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 위기 시대에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다. 두 달 이상 우리 사회의 모든 의제를 다 삼켜버린 이 부당한 헌법유린과 국정농단 사태를 대통령 탄핵으로 깨끗이 일단락 짓고 새롭게 발견한 건강한 시민들의 참여와 소통을 통해 지속가능한 미래를 이뤄가도록 하자.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고 소통의 장이 마련된다면 시민참여를 통해 지속가능한 미래로의 문을 열어갈 수 있지 않을까?

윤순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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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에서 최순실씨에 맞먹는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다. 왕실장 또는 기춘대원군으로 불린 그는 2013년 8월부터 2015년 2월까지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보좌했다. 최씨가 비선이라면 김 전 실장은 공식 라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제 열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 2차 청문회에서 박 대통령과 관련된 모든 의혹에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 당시 박 대통령이 머리 손질을 했다는 보도에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태반주사 등 각종 주사를 맞은 사실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최씨를 만나거나 본 적도 없으며, 지난 10월 대통령의 연설문이 들어있는 최씨의 태블릿 PC 건이 언론에 보도된 뒤에야 최씨 존재를 알았다고 말했다. 나라가 큰 혼란에 빠지고 박 대통령이 탄핵당하기 직전이지만 비서실장으로서 책임감도 보이지 않았다. “부끄럽고 죄송하다”는 게 전부였다. 그의 발언대로라면 그는 청와대 허수아비였다. 무능하고 어리석다는 말을 듣더라도 형사처벌을 피하겠다는 속셈으로 보인다.

김 전 실장과 찰떡궁합을 과시했던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아예 청문회에 나오지도 않았다. 가족 모두가 일부러 집을 비워 국회가 보낸 등기우편과 동행명령장을 받지 않은 것이다. 당사자가 직접 받지 않으면 효력이 없다는 점을 악용했다. 검사 출신인 우 전 수석은 누구보다 엄정한 공권력 집행을 강조했던 사람이다. 그는 이미 게이트의 공범에 준하는 수사를 받고 있다. 그의 청와대 입성을 최씨가 막후에서 도왔다는 설도 있다. 그의 장모 김장자 삼남개발회장이 최씨·차은택씨 등과 골프를 친 사실도 확인됐다. 우 전 수석은 김 전 실장과 2014년 12월 ‘청와대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을 은폐·조작하고, 검찰의 수사 정보를 기업에 유출했다는 의심도 받고 있다.

이들이 재직했던 대통령비서실은 대통령의 직무를 보좌하기 위해 청와대에 설치된 국가기관이다. 정부 부처와 행정기관 등을 통해 국내외에서 발생한 일들을 시시각각으로 보고받고 필요한 조치들을 하달하는 민생과 국정의 컨트롤타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주도하는 비서실은 민생과 시민의 안전은 안중에 없었고 대신 국정을 빙자한 음모가 판을 쳤다. 김 전 실장 밑에서 우 전 수석의 전임으로 8개월간 일한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이 남긴 업무수첩 메모를 보면 기가 막힌다. 김 전 실장은 법원이 지나치게 강대하므로 견제수단 생길 때마다 길을 들여야 한다는 취지로 김 전 수석에게 지시한 정황이 담겨 있다.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는 양창수 대법관의 후임으로 호남 출신은 배제하고 검찰 몫 획득을 위해 양승태 대법원장 등과 교류할 것 등을 지시한 것으로 보이는 내용도 있다. 사실이라면 사법부 독립을 거스르는 행위이다.

야당 정치인에게 공작을 펼친 정황도 있다. 김 전 실장 지시에 따라 박 대통령을 모독한 장하나 의원을 검찰에 고발했다는 취지의 메모 등이 대표적이다. 헌법재판소 판결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세월호 관련 여론을 조작하려 한 의혹도 있다. 이 모든 내용에 대해 김 전 실장은 “그렇게 이야기한 일이 없다”며 부인으로 일관했다. 석고대죄해도 부족한 그가 국회 청문회에서 또 한 번 주권자를 능멸한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는 또 다른 차원의 국정농단이 대통령비서실에서 광범위하게 이뤄졌을 가능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영수 특검은 강도 높은 수사를 통해 이들의 비위를 밝히고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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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리우올림픽은 박태환에게 기회의 땅이 되지 못했다. 그는 주종목인 400m는 물론이고 200m와 100m에서도 예선 탈락하고 만다. 마지막 남은 1500m는 연습 부족을 이유로 기권했으니, 8명이 오르는 결선에는 단 한 번도 오르지 못한 채 귀국하는 신세가 된다.

다들 알다시피 그는 2014년 아시안게임을 두 달 앞두고 금지약물인 ‘네비도’를 투여받았고, 이 사실이 적발됨으로써 아시안게임 메달 박탈과 더불어 1년6개월간 국제대회 출전이 금지되는 징계를 당한다. 박태환은 줄곧 “비타민제인 줄 알았다”고 주장하고, 주사를 놔준 의사를 고소까지 하는데, 어려서부터 국제대회를 숱하게 치른, 그리고 올림픽 금메달까지 딴 선수가 네비도가 금지약물임을 몰랐다는 것을 난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박태환은 시종일관 억울하게 당했다고 주장한다. 그가 기자회견 때 눈물을 흘리며 했던 “고의성 여부를 떠나 대표선수로서 이런 결과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한다”는 말에는 정작 진심 어린 반성이 없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억울하게 당했는데 대체 뭘 반성한다는 것일까. 그럼에도 그는 이런 식의 언론플레이를 계속했는데, 이는 전적으로 우리 국민을 믿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몰랐다고 말하면 믿어주는 이들이 있을 테니까. 과연 그랬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대한체육회 규정 때문에 박태환의 리우행이 좌절될 위기에 처하자 여론이 들끓었다. 70%가 넘는 이들이 박태환에게 기회를 주자는 데 찬성했다. 재판 결과 의사에게 벌금형이 내려졌으니 박태환이 모르고 먹은 게 확실하며, 모르고 먹었는데 무슨 ‘약쟁이’냐는 게 그들의 논리였다. 약을 먹은 선수들이 하나같이 ‘몰랐다’고 주장하는지라, 국제수영연맹은 모르고 먹은 이도 공평하게 약쟁이로 규정하고 있다는 주장도 그들에겐 통하지 않았다. 화룡점정, 마지막 쐐기를 박기 위해 박태환은 올림픽을 석 달 앞둔 시점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바닥에 넙죽 엎드려 기회를 달라고 호소한다. 그는 그 이전에 이미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우리나라가 부당하게 선수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취지로 제소해 놓은 상태였기에 그런 퍼포먼스가 필요 없었지만, 그를 응원하는 국민들을 위해서 이는 꼭 필요한 행위였다.

그가 이렇게 해서까지 리우에 가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추정컨대 국가에 대한 봉사가 아닌, 개인의 명예회복이 더 컸을 것 같다. 리우에 못 가면 약쟁이로 은퇴해야 하지만, 올림픽에 나가 동메달이라도 따면 약을 먹은 전력은 인간승리의 멋진 재료가 되니까 말이다. 안타깝게도 박태환의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연습 부족도 이유가 되겠지만, 수영선수로서는 환갑에 달한 그의 나이로 보아 열심히 연습했다 하더라도 메달은 힘들었을 것이다. 리우에서 쓸쓸히 귀국하던 날 박태환은 여론의 뭇매를 맞아야 했다. 일부 언론이 보내주기만 하면 메달이라도 딸 것처럼 기대감을 높여놓은 탓이었다. 불세출의 수영영웅이 이렇게 퇴장하나 싶었지만, 그에게는 다시 한 차례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름하여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로, 최순실이 박근혜 대통령과 공모해 국정을 농단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워낙 광범위한 분야를 섭렵했지만, 최순실이 특히 공을 들인 분야는 자신의 딸이 활약하는 문화체육관광부였다.

“박태환 선수, 오해해서 미안해요.” 최순실과 특히 친한 김종 전 차관이 박태환에게 올림픽 출전 포기를 종용했다는 기사에 달린 댓글이다.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를 생각하면, 그리고 박태환이 그간 쌓은 업적을 생각하면, 이런 반응은 충분히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채널A의 보도에 따르면 박태환 측의 관계자가 “박태환 선수가 자신도 모르게 남성호르몬 주사를 맞게 된 게 최순실씨와 관련이 있는지 수사해 달라고 요청”했단다. 무슨 말일까? 최순실이 자기 딸 정유라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만들기 위해 의사를 매수해 박태환에게 네비도 주사를 놨다는 것이다. 심지어 김연아가 2014년 소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못 딴 것도 다 최순실의 음모라는 얘기까지 나돈다. 너무 어이없는 소설이라 웃어넘기려 하다가 주렁주렁 달린 댓글이 눈에 밟혔다. 눈물이 나려 한다느니, 못 지켜 줘서 미안하다느니, 수많은 이들이 저 루머를 믿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죄다 사실로 확인되고 있는 게 요즘 시국이긴 하지만, 이 루머는 너무 나갔다. 더 이해가 안 가는 건 박태환의 태도다. 자신이 기자회견장에서 보인 눈물에 일말의 진심이 담겨 있다면, 김 전 차관에게 협박당한 것과 자신이 맞은 네비도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해명해야 옳다. 하지만 그는 이런 루머에 기댐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단 한 순간도 사익을 추구한 적이 없다”고 한 박 대통령의 담화는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의 숫자만 늘어나게 했을 뿐, ‘사생활’을 중시하는 그녀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지 못했다. 박태환은 물론 박 대통령과 차원이 다른 사람이지만, 이것만은 깨달았으면 한다. 진정한 명예회복은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반성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말이다.

서민 | 단국대학교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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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화재가 발생한 대구 ‘서문시장’은 박근혜 대통령의 방문이 겹치면서 트위터상의 언급량이 폭발했다. 박 대통령 탄핵에 미온적인 새누리당 의원들의 ‘전화번호’도 대중에 공개되면서 큰 관심을 받았다. 트위터코리아가 빅데이터 분석업체 다음소프트와 함께 지난달 28일부터 이달 4일까지 트위터상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키워드들 중 주목할 만한 단어를 분석해 6일 발표했다.

지난 한 주간 트위터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키워드는 ‘서문시장’이었다. 지난달 30일 화재가 발생하며 언급량이 증가하기 시작해, 이튿날 박근혜 대통령이 방문하면서 폭증했다. 박 대통령의 서문시장 방문은 최순실 국정 농단 파문 이후 첫 외부 일정이었다. 하지만 피해 상인들은 박 대통령이 자신들을 만나지 않고 10분 만에 돌아갔다며 항의했다. 박사모 회원들과 피해 상인들의 언쟁 역시 트위터상에서는 화제가 됐다.

박 대통령의 탄핵에 반대하는 새누리당 의원 명단과 전화번호가 공개되면서 ‘전화번호’도 큰 관심을 받았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탄핵에 대한 입장을 바꿀 것을 종용하는 시민들의 전화·문자가 새벽에도 쏟아지고 있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새누리당은 명단을 공개한 더불어민주당 표창원 의원과 성명불상의 전화번호 유출자를 검찰에 고소했다.

최순실 게이트와 무관한 이슈로는 유일하게 홍콩에서 열린 2016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가 이름을 올렸다. 트위터에는 ‘레드카펫’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행사에 참여한 연예인들의 사진·영상 등 콘텐츠가 다수 공유됐다.

지난달 29일 박근혜 대통령이 3차 대국민담화를 진행할 것이라는 속보가 나오자 ‘대국민담화’ 언급량도 크게 높아졌다. 세월호 참사 당일 행적이 밝혀지지 않은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의혹을 풀어줄 핵심인물로 지목된 ‘간호장교’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더불어민주당 안민석 의원이 해당 장교를 만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지만 만나는 데 실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언급량이 다시 늘었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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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최순실 사건은 역사적인 법치주의 학교이다. 부패한 자들이 너무 오랫동안 가짜 법치를 내세워 법으로 민중을 억눌렀다. 하도 당하다 보니 시민들은 법을 지배자의 채찍이며 칼처럼 여기게 되었다. 문정현 신부가 목판에 조각한 ‘법보다 밥입니다’라는 글귀도 사람들의 이런 마음을 담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문 신부의 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법은 사람들의 밥그릇을 걷어차는 군홧발이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의 법의 지배란 권력이 시민을 법으로 지배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권력의 행사는 법에서 정한 절차와 내용을 따라야 한다는 것, 즉 권력이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사임이나 탄핵이 박근혜·최순실 사건의 최종적 해결은 아니다. 이 땅에 권력자가 법을 지키는 법치를 튼튼하게 세울 때 비로소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법치에 실패하면 제2, 제3의 박근혜가 반드시 등장할 것이다.

엄중하게 물어야 한다. 왜 대한민국의 검사, 고위 관료, 그리고 국가정보원의 국가 엘리트들은 최순실에게 저항하지 않았을까? 국민적 항쟁을 촉발한 ‘정유라 부정입학 사건’의 경우도 교육부가 이를 막을 법적 권한과 절차가 대학교육법에 있었다. 재벌의 돈을 받아 만든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설립도 비영리재단법인설립법을 지켰다면 불가능했다. 비밀취급인가증이 없는 최순실에게 대통령 일정, 남북관계, 외교관계 등 국가의 중요한 비밀이 유출된 행위는 국가정보원법과 보안업무규정을 지켰으면 막을 수 있었다.

특히 국정원은 법에 의해 청와대에 대해 보안측정이나 보안사고 조사를 할 권한이 있다. 보안업무규정은 아예 국정원장에게 청와대의 보안업무가 적절하게 수행되는지 여부를 확인할 권한을 주었다. 그런데도 최순실은 지속적으로, 아무런 견제 없이 국가 비밀을 건네받았다. 나는 국정원이 청와대가 보안업무규정을 위반하여 최순실에게 국가 비밀을 건네준 행위를 몰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국정원이 몰랐다면 국정원장은 광화문광장에서 백배사죄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국가 엘리트들이 최순실에게 저항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들의 지배동맹이 영속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검찰의 최순실 공소장에 의하면 청와대의 행정관은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국가 비밀문서를 최순실에게 유출했다. 그 행정관은 대통령의 임기가 2018년 2월24일이면 끝난다는 것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그러한 행위를 한 이유는 그들의 지배동맹이 계속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법치는 영속적 한·미동맹, 영속적 남북대립 그리고 취약한 민주정당의 세 가지 장애물에 갇혀 있다. 박근혜·최순실 사건의 최종적 해결은 이들 세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끈질기게 해결하는 것이어야 한다. 전시작전권을 외부가 갖는 한 국민주권은 온전히 실현되지 않는다. 긴 설명이 필요 없다. 미국 민주주의의 문민통제 역사와 전통을 어겨 가며, 별명이 ‘미친개’라는 퇴역 장성을 국방부 장관에게 임명하겠다는 미국 대통령에게 전시작전권을 계속 주어서는 안된다. 북한 문제도 교류와 협력의 목적과 단계를 밝히고 다수 국민의 동의를 얻어, 우리 내부의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일관되게 추진해야 한다.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앞의 두 과제는 미국과 북한이라는 외부 변수가 있다. 그러므로 온전히 우리 내부의 의사 결정으로 가능한 정당 질서에서 역사적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 200만 촛불이 광화문에만 머물지 않고 국회에서 365일 국민주권으로 피어나야 한다. 국민의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왜곡 또는 과잉되게 하거나 누락하지 않고 국회 의석으로 변환시키는 선거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국가의 엘리트들은 제2, 제3의 최순실에게 저항할 것이다.

송기호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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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마지막 해인 2012년 12월31일 국회 예산결산특위 예산안조정소위 회의장. 지역구 의원들이 A4 용지에 지역사업명과 예산액 등을 적은 뒤 3~4번 접은 쪽지를 회의장 안으로 끊임없이 밀어넣었다. 이른바 ‘쪽지예산’이었다. 당시 새누리당과 민주당 예결위 간사가 5일간 머리를 맞댄 국회 정문 건너편 렉싱턴 호텔에도 쪽지예산이 쇄도했다.

예년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쪽지예산 탓에 2013년도 예산안은 “새해 회계연도 개시(1월1일) 전까지 처리해야 한다”는 규정을 어긴 채 해를 넘겨 처리됐다. 1963년 예산안 제도가 도입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쪽지예산으로 당시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는 635억원, 이한구 원내대표는 272억원을 따냈다.

이명박 정부 초기엔 이상득 전 의원의 ‘형님예산’이 도마에 올랐다. 2008년부터 날치기로 예산안을 통과시키면서 3년간 1조원이 넘는 예산을 챙겼다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비판 여론이 들끓자 여야는 쪽지예산을 없애겠다고 했지만 말뿐이었다. 최근에는 쪽지 대신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나 카카오톡 등 모바일 메신저를 활용하는 ‘문자예산’ ‘SNS예산’이란 신조어까지 생겼다.

2017년 국회 통과 예산, 주요 국회 증액 내용, 분야별 예산 증감내역 (출처: 경향신문 DB)

올해도 비선 실세 최순실 관련 예산 1800억원이 깎이는 바람에 쪽지예산이 기승을 부렸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대통령 탄핵 문제로 국정이 혼란스러운 상황이고, 기획재정부가 쪽지예산을 제출하면 ‘부정청탁금지법(김영란법)’ 위반으로 신고하겠다고 했는데도 쪽지예산 파티가 벌어졌다. 의원들이 예산심의 과정에서 증액을 요청한 사업은 4000여건, 금액은 내년도 예산의 10분의 1 수준인 40조원에 이른다. 특히 여권 실세 의원들의 ‘잇속 챙기기’는 극에 달했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는 최소 50억원, 정진석 원내대표는 48억원, 김광림 정책위의장은 60억원을 새로 증액시켰다. 야당에선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최소 13억원,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47억원을 지역구 예산에 반영했다.

쪽지예산은 나라살림을 부실하게 만드는 퇴행적 관행이다. 나라살림이야 어찌 되든지 지역 포퓰리즘에 기대 표만 생각하는 이들에게 ‘부실 의원’이란 쪽지를 전달해야 하지 않을까.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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