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에서 모처럼 울림이 있는 정책을 내놓았다. 여당에선 “전근대적이고 해괴망측”하다며 비아냥댔지만, 출산주도성장 정책은 우리 사회가 선택해야 할 길을 언어유희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제안의 핵심은 많은 사람이 비난하듯 여성들을 출산 ATM으로 만들어 출산율을 높이자는 게 아니다. 그보다도, 제안자는 몰랐겠지만 아이가 있는 가정에 스웨덴, 독일, 프랑스 같은 유럽 선진국 수준의 지원금을 지급해 선별복지를 넘어 보편복지로 가자는 것이다.

[시사 2판4판]사람이 먼저다 (출처:경향신문DB)

자유한국당의 제안대로 아기를 낳으면 2000만원, 20세 이하의 모든 국민에게 매년 400만원을 지급한다면 1년에 투입되어야 할 예산은 45조원 정도이다. 큰돈처럼 보이지만, 보편복지를 시행하는 유럽 선진국이 아이 양육지원금으로 사용하는 돈에 비하면 얼마 안된다. 독일에서는 아이가 있는 가정을 위해 해마다 250조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한다. 프랑스에서도 그에 맞먹는 예산을 사용한다. 여기에 고등학교뿐 아니라 국공립대학의 무상교육을 위해 투입하는 예산까지 더하면 이들 나라에서는 아이 하나가 커가는 동안 우리보다 훨씬 많은 돈을 사용하게 된다. 이에 비하면 45조원은 보편복지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지불해야 하는 통과비용 정도에 불과하다. 이 길목의 통과를 돕겠다는 것이 야당의 출산주도성장이다.

여당에서는 출산주도성장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장난으로만 보는 것 같다. 말장난에 현혹돼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일 터인데, 자유한국당에서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출산주도성장은 사실 소득주도성장의 각론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소득주도성장의 대항담론을 내놓았다고 의기양양해할지 모르지만, 조금만 들어가보면 소득주도성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이가 둘 있는 가정에 매달 70만원 가까운 돈이 지급되면 이들 가정의 소득이 크게 늘어나고 이것이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그 돈을 확보하기 위해 고소득자와 지대소득자들에게 세금을 더 많이 거두면 소득분배 효과도 얻을 수 있으니 출산주도성장이야말로 소득주도성장을 뒷받침하는 각론에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여당이 야당 원내대표의 현 정부에 대한 수준 낮은 비아냥으로 가득 찬 연설 중에 튀어나온 출산주도성장을 거부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여당이 야당과의 협치를 모색한다면 진정성이 의심되더라도 출산주도성장을 ‘덜컥’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면 아마 야당도 대통령의 큰 관심사인 판문점선언 비준을 거절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이를 낳으면 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출산율이 크게 늘어나지는 않는다. 출산율은 선진산업국가가 되어 에너지소비가 크게 늘어나면 떨어지기 때문이다. 유럽 선진국 중에서는 프랑스와 스웨덴이 출산율이 높은 나라에 속하는데, 두 나라의 출산율이 양육수당을 많이 주기 때문에 높은 것은 아니다. 프랑스는 이미 20년 전부터, 스웨덴은 30년 전부터 지금까지 출산율이 1.9 수준에서 큰 변동 없이 유지되고 있다. 일인당 에너지소비도 늘어나지 않고 그때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다. 반면에 일인당 소득은 그때에 비해 크게 증가했다. 고령사회의 표본으로 여겨지는 일본도 두 나라와 차이가 없다. 30년 전에 비해 소득은 크게 늘었지만 에너지소비는 변동이 거의 없고, 출산율은 1.4 수준에서 유지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 30년 전 1.7 수준이었던 출산율은 지속적으로 감소해 1.0 수준으로 떨어졌다. 일인당 에너지소비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30년 전에 비해 3배가량 늘어났다.

스웨덴, 독일, 프랑스에선 아동 양육지원금을 꾸준히 늘려왔다. 그래도 출산율이 증가하지는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출산주도성장 정책을 펴더라도 출산율이 증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한국당의 제안에서 더욱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것이 보편복지를 본격적으로 열어주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필렬 방송대 교수 문화교양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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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세대의 출산기피 현상에 대한 자유한국당 김학용 의원의 ‘망언’이 논란이 됐다. 그는 “요즘 젊은이들은 내가 행복하고 내가 잘사는 것이 중요해서 애를 낳는 것을 꺼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청년들은 행복한가? “청년들이 가치관부터 바꿔야 한다”는 그는 불안하고 불행한 사람들이 아이를 낳을 생각을 하기 어렵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사실 그는 복지예산을 통합해서 아이를 낳은 가정에 “5000만원, 1억원을 지원”해야 한다는 말을 하려던 것이었다. 이달 초 자유한국당 김성태 의원이 “출산주도성장”을 현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모델의 대안으로 제안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통합적 지원을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청년들의 가치관을 문제 삼으니, 그 지원책의 진실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취업률, 실업률 문제가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을 가져와도 자유한국당의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이유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9월6일 (출처:경향신문DB)

출산율 급락에 대한 우려는 깊어도, 출산이 단순한 선택의 문제이며 돈을 주면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지극히 평면적인 사고는 바뀌지 않는 것 같다. 출산 지원금 정책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비용이 너무나 많이 드는 현실에 대한 표피적 인식에서 나온다. 돈이 많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당장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에 대한 통찰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러한 접근이 비판을 받는 것이다.

출산율 저하를 개인적 선호나 경제적 문제로 환원하는 논리, 지원금을 포함해 결혼한 부부의 육아 지원에 집중되는 정책은 여당도 마찬가지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내세웠으나 정부의 여성정책에는 어떤 전격적인 시도도 보이지 않는다. 가령 정부가 여성의 재생산 권리 보장에 보이는 미온적인 태도는 현 정부가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증거다. 합법적 의료지원과 혐오범죄 근절에 대해 여성들과 적극 소통하며 젊은 여성들이 안전하게 성적 주체로서 살 수 있는 방안,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조건들을 마련하는 일이 더 급선무다. 여성 보좌관들에게 둘러싸인 대통령의 사진을 공개하는 시대착오적 퍼포먼스는 정부 현안에서 여성 문제가 뒷전이라는 역설적 증거다.

연애도, 결혼도, 아이를 키우기도 힘들다. 결혼과 육아의 현실은 성 불평등을 가중시키는 경험이다. 게다가 어떻게든 아이를 남보다 뒤처지지 않는 조건으로 키워야 하고 남보다 손해를 보면 안된다는 무서운 경쟁적 분위기는 출산과 육아에 대한 총체적 불안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지난 두 정권에서 가속화된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성년이 된 세대에게는 더 그럴 것이다. 정치인들이 말하는 출산장려정책은 이런 두려움과 사뭇 동떨어진 것 같다. 출산과 노동을 적극적 자아실현과 관련된 선택으로 여길 수 있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든다. 안정된 삶의 기반을 마련하려는 분투 속에서 비출산은 비자발적 선택이 되는 일이 허다하다. 학자금 대출, 자기방어적 경쟁, 고용불안을 젊은 세대가 살아내야 하는 일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기성세대다. 좋은 삶의 기준을 물질만능주의적으로 획일화하고 남과 다른 삶의 가능성들을 두려워하게 만든 것도 기성세대다. 상속이 아니면 주택 소유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은 기성세대가 청년들에게 가치관을 바꾸라는 요구를 하는 건 견강부회다. 

인구절벽을 염려하는 이 분위기에서 마치 아이는 태어나기만 하면 환영받을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결혼을 하지 않고 출산을 한다면? 부모 중 한쪽 또는 양쪽이 이주민이라면? 아이가 성소수자로 자란다면? 장애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면?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를 낳는 것조차도 무책임한 일로 간주되는 일이 흔치 않은가. 방어적 경쟁심, 고질적 불안감이 비관용을 넘어 혐오로 표출되는 사회에서, 몇 가지 전략으로 출산율을 높일 수는 없다.

인구관리 차원에서 출산에 접근하면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당장 출산율을 높이려는 시도보다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근원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노력을 거시적 안목으로 기획하고 지속해야 한다. 출산과 육아가 근본적으로 별로 돈이 들지 않는 일이 되도록 복지체계 전반을 재조직해야 하며,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교육정책을 개발해야 한다. 모든 문제는 맞닿아 있다. 성평등정책, 교육정책, 부동산정책, 경제정책과 다 상관이 있는 것이다. 지난 두 정권의 적폐를 청산하는 일 못지않게 국민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사회구조 개선과 삶의 질 향상에 대한 대통령과 현 정부의 일관되고 구체적인 비전과 잘 조율된 실천이다. 그런 큰 그림을 설득력있게 구상하여 현실화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대해 대통령과 정부는 실질적으로 답해야 한다.

<윤조원 고려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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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도동 유치원’은 하나의 대명사가 될 듯하다. 안전불감증, 무사안일주의, 개발주의가 응축된 대명사. 위태로운 흙 낭떠러지를 옆에 두고 기우뚱 옆으로 무너진 건물은 ‘유치원’이라는, 건물의 외양과 부조화를 이루는 이름과 만나 더욱 극단적 느낌을 자아냈다. 건물이 한밤중에 무너져 내리지 않았다면 정말 참혹한 결과가 초래됐을 터였다.

유치원 측에서 이미 이상징후를 포착하고 공사업체에 항의했지만 공사업체는 무시했다. 구청에서도 제대로 된 현장 점검조차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눈앞에서 서서히 무너져내리는 건물을 두고 아무도 제대로 된 조치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상도동 유치원은 결국 철거되어 폭삭 무너져내렸다.

인근 공사장의 흙막이가 붕괴되면서 건물이 기울어진 서울 동작구 상도유치원에서 사고 닷새째인 10일 파손된 부분의 철거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준헌 기자

무너진 유치원을 보고 퇴근하던 날, 내 삶의 지반에도 균열이 느껴졌다. 전염병에 걸려 어린이집을 일주일째 가지 못하고 있는 아이가 길가를 서성이고 있었다. 할머니·할아버지와 집에만 계속 있자니 답답하고 지겨웠던 것 같다. 할머니 손을 잡은 아이를 보는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아이가 아프면 부모가 돌볼 수 있어야 한다’지만, 현실은 그와 거리가 멀다. 휴가를 내기 힘든 상황에서 아이는 전적으로 조부모의 손에 맡겨졌다. 일하면서 아이를 키우기 위해 노년에 접어든 조부모의 삶을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이 무너진 건물 틈으로 훤히 드러난 유치원 내벽처럼 선명히 드러났다.

한국에서 일하면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 내 가랑이가 찢어지지 않기 위해 남의 가랑이를 찢어져라 붙잡고 있어야 하는가. 내 삶을 위태롭게 지탱하고 있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이제 점점 늙어가는 조부모의 노동이었다. 일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누군가의 노년을 착취하면서 바늘 하나 꽂힐 여유 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나는 모르고, 대책 없이 맞이했다. 미리 알았다면, 그때도 같은 선택을 했을까? 이것은 내 모성애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대한 질문이다.

무너져내린 유치원을 보면서 매번 최저치를 갈아치우는 출산율이 떠오른 건 그래서다. 올 2분기 합계출산율은 0.97명을 찍었다. 정부가 내놓는 ‘저출산 대책’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출산율은 곤두박질치고 있다. 여성의 삶이 근본적으로 좋아지지 않는다면 출산율은 오르지 않는다. 성평등지수가 높은 북유럽 국가에서 출산율이 높다는 건 이제 상식이다. 그러니까, 출산을 하는 여성의 자궁과 여성의 삶을 분리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삶은 얼마나 종합적인가. 각종 성차별, 남녀 임금격차, 여성의 높은 비정규직 비율, 유자녀 여성이 겪는 직장에서의 보이지 않는 차별 등 모든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임대주택 몇 채와 출산수당으로 출산율은 높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제1야당 원내대표가 ‘출산주도성장’을 대안이랍시고 이야기한다. 출산장려금 2000만원, 출산수당 1억원을 지급하자는 것인데, 논박하기도 입이 아프다. ‘출산주도성장’은 출산율 하락 위기에 대한 안전불감증과 성장중심주의가 결합한 가장 천박한 형태의 말이다. 여성의 몸을 출산의 도구로 환원시키며, 아이를 낳는 여성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성의 변증법>을 쓴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1970년대에 비혼이나 저출산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미 젊은 여성들은 ‘비비탄(비혼 비출산 탄탄대로)’을 삶의 전략으로 택하고 있다. 정상가족 중심의 복지제도, 남녀 임금격차 등을 생각하면 ‘비비탄’의 앞길이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하지만 적어도 여성들은 결혼과 출산이 가져오는 여성의 삶의 변화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출산율은 그 결과다.

무너지는 것들은 장기간에 걸쳐 이상징후를 드러내지만,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출산율에 관하여 우리 사회는 이상징후를 여러 차례 보냈다. 무너진 유치원이 되지 않으려면, 근본적 해법을 고민해야 할 때다.

<이영경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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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행정자치부가 만든 ‘출산지도’에 이어 지난 주말,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원종욱 선임연구위원의 발표문이 가임기 여성을 분노케 만들었다.

출산지도가 ‘여성을 걸어다니는 자궁 취급한다’는 비판 끝에 문을 닫았다면, 원 연구위원의 발표문은 “여성의 스펙을 낮춰 결혼하게 만들자” “여성의 배우자 하향 선택을 유도하기 위해 문화적 콘텐츠를 음모 수준으로 은밀히 만들자”고 밝혀 누리꾼들을 아연실색하게 했다.

두 눈을 의심케 하는 발표문은 심지어 ‘저출산 대책의 성과의 향후 발전 방향’이라는 주제를 건 인구포럼의 정식 발표문이었다. 정부기관이 저출산 대책이라고 내놓는 결과물들을 보면 ‘대책’이라기보다는 왜 한국이 역대 최저 출산율을 기록하는지에 대한 원인을 보여주는 것 같다.

‘많이 배운 여성’들의 분노로 SNS는 뜨거웠다. 한 트위터 이용자는 “나라에 아이가 안 태어난다→결혼을 안 해서 그런가보다 결혼을 시키자→고소득 고학력 여자들이 결혼을 안 하네, 후려쳐서 눈을 낮추도록 만들자는 사고 흐름이 끔찍하다”고 적었다. 다른 트위터 이용자는 “여성에 대한 억압을 더 강화해서 거의 히잡을 씌울 기세로 퇴행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여성들이 고학력 고스펙이어서 결혼을 안 하는 것일까. 페이스북 이용자는 “한정된 일자리를 뚫기 위해 무한경쟁시키고 불안한 사회를 만들어놓고 고스펙이 저출산 원인이라고? 복지시스템이나 제대로 갖춰주는 게 더 시급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트위터 이용자는 “고학력 고소득 여성 둘 다에 해당되는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고 주변에 다 고학력 저소득 고용불안 여성뿐인데 여성의 낮은 소득과 고용불안정은 없는 셈 친다”고 비판했다. 

“한국 여자들에게 결혼 안 한다고 페널티 때려봐라. 안 할 사람은 이 악물고 끝까지 안 할 것이다. 한국에서 여자로 태어난 이상 최고의 페널티가 바로 결혼이기 때문이다.” 한 트위터 이용자의 일갈이다. 아기 낳고 살 만한 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 없이 여성을 결혼시켜 애 낳게 할 방법만 골몰한다면, 출산율은 절대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이 악무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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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울음소리가 끊기고 있다. 22일 통계청이 발표한 ‘2016년 출생·사망 통계’를 보면 지난해 총 출생아 수는 40만6300명으로 전년보다 3만2100명 줄었다. 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합계출산율)는 1.17명으로 전년보다 0.07명 감소했다. 합계출산율은 2005년 1.08명으로 최저를 기록한 뒤 2014년 1.21명, 2015년 1.24명으로 소폭 반등했으나 다시 추락했다. 정부는 “혼인율이 떨어지고 만혼 풍조가 고착화하면서 출생아 수가 줄었다”고 말했다. 앞으로 출생아 수도 40만명에 머물 것이라고 한다. 정부는 출산율을 높이겠다며 80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쏟아부었으나 사실상 실패했다. 인구재생산 잠재력이 극도로 저하된 지방의 일부 도시는 지도에서 사라지는 ‘지방소멸’ 위기에 처했다.

(출처: 경향신문DB)

한국은 산아제한 캠페인에 매몰돼 넋 놓고 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출생률을 낮추는 가족계획사업을 30년 넘게 벌이다 저출산사회로 진입하자 1996년 갑자기 출산장려 캠페인으로 돌아섰다. 그 이후 출산율은 더 떨어졌고 정부는 2006년 ‘저출산·고령화사회 기본계획’을 세워 막대한 돈을 투입했으나 효과를 따지기 무안할 수준이다. 정부는 출산에 따른 보육비·육아비, 출산장려금, 난임부부 지원 등에 집중했다. 2013년부터는 0~5세 아동이 있는 전 계층의 가정에 보육료를 지원했다. 하지만 출생아 수는 오히려 줄었다.

출산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가운데 최저 수준에 머물고 있다. 지난해 다시 난임시술 지원, 육아에 따른 휴직급여 인상 등 대책을 내놓았으나 다람쥐 쳇바퀴 도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재정투입을 통한 대증요법만으로 저출산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출산율 제고는 우리의 미래가 달린 문제다. 혼인율이 떨어지고 만혼이 만연하는 현상은 청년들의 갖가지 고민이 응어리진 결과다. 단순히 출산을 장려한다며 돈 몇 푼 쥐여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육비·양육비, 고용불안정 등 경제적 요인은 물론 일과 가정이 양립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인프라 구축, 여성의 사회진출과 임신·출산에 대한 가치관 변화 등 다층적이며 복합적인 문제가 풀려야 저출산 문제는 해결된다.

그러나 정부 대책이 이들이 가려워하는 부분을 제대로 긁어주었는지 의문이 든다. 저출산 문제는 미래에 태어날 아이들에 대한 걱정뿐 아니라 현재 살고 있는 우리들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 기존 틀을 벗어나 머리를 맞대고 저출산 대책을 새로 짜야 한다. 그래야 아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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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닐 미(未), 죽을 사(死).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을 담아 은퇴 후 고령층을 국가에서 ‘미사자(未死者)’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대중매체는 ‘미사자 과잉 사회, 잉여 인구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식의 여론몰이를 일삼고 있다. 그런 분위기를 부추기기라도 하는 듯 행정자치부에서는 ‘대한민국 미사자 지도’를 지자체별로 순위를 붙여서 공개한다. 인터넷에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늙은이들 잡으러 가자’, ‘우리 도시를 고려장 특화 도시로’ 같은 ‘농담’이 횡행한다.

물론 이 모든 상황은 가정법이다. 하지만 아마도 독자인 당신에게는 강한 불쾌함과 거부감이 느껴졌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국가 경제’를 앞세워 멀쩡히 살아 있고 앞으로도 쾌적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권리가 있는 고령의 시민들을 ‘아직 안 죽은 짐짝’ 취급하는 내용이 한가득 담겨 있었으니 말이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나는 지금 ‘대한민국 출산지도’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대한민국의 공론장에서 발언하는 그 누구도 ‘고령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고려장을 부활시키자’ 따위의 발언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절대 선택 가능한 대안으로 취급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대신 은퇴 연령 조정이라던가, 연금 정책, 그 외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고령층을 보호하고 그들이 주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돕는다. 고령층은 ‘인구(人口)’이기에 앞서서 ‘인간(人間)’이다. 인간의 주체성을 박탈하는 사회 정책은 용납될 수 없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당연한 상식이 왜 출산율 문제 앞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것일까? 대한민국 출산지도가 공개된 후 얼마 되지 않아 한 인터넷 매체에서는 ‘남자들이 국방의 의무를 지듯이 여성들도 출산의 의무를 지고 애를 낳도록 해야 한다’는 칼럼이 버젓이 게재되었다. 인간을 강제로 죽이는 사회 정책이 용납될 수 없듯, 인간을 강제로 낳게 하는 사회 정책 역시 용납될 수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발언이나 정책에서 인권의 기준치가 확 낮아진다. 나치 독일에서나 시행했었던 ‘의무 출산’ 정책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거론되는 그런 나라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2017년 현재까지도 대한민국은 여자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인간이 아니라 인구로, 인구를 재생산하는 도구로만 바라보고 있다. ‘가임기 여성’들은 단지 자신들의 숫자를 세서 공개했다는 사실 때문에 분노한 게 아니다. 그 숫자, ‘빅데이터’를 취급하는 방식부터가 모욕적이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다.

여성을 ‘주체’로, ‘주어’로 존중한다면, 대한민국은 여성들이 아이를 낳기 위해 ‘도와주는’ 방향을 모색할 것이다. 가임기 여성들의 숫자를 지자체별로 공개한다면 동시에 육아 시설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 성별 임금 격차가 어떠한지 등을 함께 제시해야 마땅하다. 그래야 가임기 여성들이 어느 곳에서 아이를 낳고 기를지 결정할 때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정부에서 자료를 공개한 방식은 그와 정반대였다. 지자체별로 ‘순위’를 매겼다. 여성을 ‘목적어’로만 취급하는 것이다.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여성들을 보조하는 게 아니라, 지자체를 향해 ‘출산율을 높이라’는 지시를 내리고, 그 순위 경쟁을 위해 여자들이 아기를 ‘낳게 만들라’는 압력을 넣고 있다. 단순히 통계를 제시했을 뿐이지만 그 숫자가 제시되는 맥락과 방향 속에 너무도 많은 여성혐오와 멸시가 드러나 있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에 절실한 것은 ‘출산율 대책’이 아니다. 여성을 온전히 주어의 자리에 놓는, 한낱 목적어의 대상으로 전락시키지 않는 여성 정책이 먼저다. 여자들이 볼 때 이 나라가 아이를 낳아도 되는 나라라면, 아이를 낳을 것이다. 출산율을 높여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온갖 여성혐오적 발언을 내뱉는 것이 별문제 아니라는 듯 받아들여지고 있는 한, 이 나라는 망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출산율이 아니라 여성 인권이 문제의 본질이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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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율 끌어올리기 캠페인이 한창이다.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급기야 교육부 내 미혼 남녀들의 숫자 현황까지 체크해가며 결혼 독려에 나섰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이에 비판적인 이들은 팍팍한 경제 현실을 지적하며 출산율이 떨어지는 주된 원인은 경제적 압박과 불평등에 있으니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우리 사회가 ‘선진국’에 근접해가면서 출산율이 떨어지는 것은 피할 길이 없으니 해외로부터의 노동력 수입 등으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찜찜한 의문이 남는다. 출산율을 직접 결정하는 것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아이를 낳고자 하는가이며, 이는 그야말로 그들의 인생관이라는 크고도 복합적인 틀에서 결정되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이렇게 알량한 몇 가지 사회 경제적 현상들의 함수로 바로 결정되는 문제일까? ‘선진국 사회’로 변모한다든가 경제적 압박과 불평등이 심해진다든가 하면 바로 그것이 출산율 등락으로 이어진다는 말인가? 나름대로의 생각과 철학을 갖고 스스로 인생을 짜나가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너무 실험실 모르모트처럼 보는 생각이 아닐까?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출산율 저하가 ‘선진국’이나 부자나라, 가난한 나라 할 것 없이 전 지구적으로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라는 점이다. 한때 출산율이 높았지만 아직 ‘선진국’으로 진입했다고는 볼 수 없는 이집트, 인도, 인도네시아 모두 여성 1명당 출산율은 1950년에서 2009년 정도까지 절반으로 감소하였다. 여전히 높은 출산율을 보이고 있는 아프리카 대륙 또한 마찬가지여서 2025년쯤이면 현재 출산율의 절반 가까이로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리하여 세계의 전체 인구는 그 증가율이 점차 둔화되어 2050년을 정점으로 찍고 이후 감소 추세로 바뀔 것으로 전망된다. 요컨대, 출산율 감소는 전 지구적인 추세이며, 따라서 그 원인을 몇 가지 사회 경제적 요인으로만 환원하여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장래 출생아 수 추계&생산가능인구&인구증가율&저복지·저출산율의 악순환 구조 (출처 : 경향DB)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유엔 보고서에서 제시되는 설명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좀 엉뚱하지만 이는 텔레비전과 인터넷 등의 매체 확산과 관련이 크다고 한다. 매체의 확산과 함께 ‘미드’ 등이 전 세계로 퍼지게 되면, 대여섯 명의 아기를 업고 이고 밥을 짓는 인도와 아프리카 여성들이 한 두 명의 아이를 키우며 집과 바깥을 넘나드는 서구 여성들의 생활 방식을 매일매일 접하게 된다. 여기에서 여성으로서의 ‘좋은 삶’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전통적인 이미지와 가치관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녀들이 삶을 영위하는 현실의 조건은 여전히 미국 LA나 뉴욕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이렇게 그녀들의 마음속에 각인된 ‘좋은 삶’의 모습은 그러한 객관적 조건과 무관하게 출산율 저하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제시대를 살았던 할머니 세대는 10명씩 낳아 기르는 일이 허다했다. 그네들은 일생을 출산과 육아에 바치신 셈이며, 그것이 여성의 ‘좋은 삶’이라고 여기는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지금은 끝나버린) 한국 경제의 고도 성장기를 살아오신 우리 어머니 세대는 보통 3명을 낳아 기르는 일이 많았다. 복지도 육아 시설도 마땅치 않던 그 시절에 3명을 혼자 기르는 일도 엄청난 일이었을 터. 할머니 세대만큼은 아니어도 어머니 세대 또한 출산과 육아를 자신의 ‘좋은 삶’의 내용으로 여기셨을 것이다. 탈산업화의 한국 자본주의에서 생존하느라 버둥거리고 있는 우리 세대의 여성들은 2명 혹은 1명을 낳아 기르고 있다. 물질적 조건과 여가 시간을 생각하면 분명히 어머니와 할머니 세대보다 월등하지만, 그네들의 ‘좋은 삶’에서 출산과 육아의 의미 또한 분명히 어머니와 할머니 세대와 다르다.

어설픈 출산율 캠페인은 물론이고, 몇 가지 보조금 및 수당이나 세금 감면 같은 것들만으로는 출산율 감소라는 지구적 추세를 역전시킬 수 없다. 탈산업사회라는 조건에서 많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정말로 여성의 (나아가 모두의) ‘좋은 삶’이 되는 새로운 생활 방식의 비전을 만들어야 한다. 이는 전체적인 사회경제 지표의 개선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인식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는 문화적 개혁도 포함하는 과제이며, 또한 이를 현실로 뒷받침할 여러 제도의 안착까지 포함하는 과제이다. 요컨대 일과 가족과 여성과 인생을 새롭게 바라보는 새로운 ‘좋은 삶’을 상상하고 실현해 가는 큰 규모의 과제인 것이다. 고도의 ‘선진국’임에도 불구하고 출산율 저하 문제를 성공적으로 풀어나간 프랑스나 스웨덴의 예는 이런 일이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홍기빈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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