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음달 7~8일 한국을 방문한다. 정상회담을 하고 국회연설도 한다. 트럼프 방한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를 예측해 가면서, 방한을 기회로 우리가 그에게 전할 말을 준비하는 것이다. 트럼프의 언동을 ‘미치광이 전략’이라고 언론이 평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는 이익을 내기 위해 이악스럽게 계산하고, 상대방이 물건을 사도록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는 ‘실속형’ 정치인으로 보인다. 그의 말폭탄 뒤에는 고도의 계산과 의도가 숨어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헤리티지 재단 대통령 클럽 회의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9일 트럼프는 지금까지의 말폭탄과는 결이 다른 말을 했다. “지난 25년간 북한에 수십억달러를 줬지만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잉크가 마르기 전 합의가 위반됐다.” 이 말에는 무슨 복선이 깔려 있을까? 우선 팩트 체크가 필요하다. 미국은 그동안 핵문제 때문에 북한에 ‘수십억달러’를 준 적이 없다. 제네바 북·미 기본합의(1994년 10월)에 따라 북핵활동 중단 대가로 1996년부터 2002년까지 매년 중유 50만t을 현물로 준 적은 있다. 1998년 8월 제기된 ‘금창리 지하동굴 핵활동’ 의혹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자 벌금조로 식량 60만t을 북한에 준 적도 있다. 미국이 북한에 준 건 중유 350만t, 식량 60만t뿐이고 그 가격은 도합 5억달러 정도였다. ‘수십억달러’를 줬다는 건 과장이다.

“잉크가 마르기 전 합의가 위반됐다”는 말도 팩트 체크가 필요하다. 2005년 9월19일 베이징 6자회담에서 9·19공동성명이 합의·발표됐다. 그런데 그 다음날 미 재무부가 마카오 BDA은행의 북한계좌 2500만달러를 동결시켰다. 북한은 즉각 미국을 비난했고 핵활동을 재개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06년 10월9일 1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9·19공동성명의 잉크가 마르기 전 합의가 깨진 건 사실이지만, 북한의 책임이라고 떠넘기는 건 왜곡이다.

그러면 트럼프는 왜 이런 말을 할까? 사실을 좀 과장하고 왜곡해서라도 장차 대북 협상무용론을 밀어붙이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향후 협상무용론에 따라 대북 압박·제재가 더 강화되면 한반도 안보위기는 그만큼 더 커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트럼프는 ‘겁먹은’ 한국을 상대로 안보장사를 할 것이다. 우리가 경계하면서 대비해야 할 점이다. 한편 20일 최선희 북한 북미국장이 모스크바 국제회의에서 ‘북핵무기 협상불가’를 말했다. 트럼프 방한을 의식한 발언 같다.

이것이 대북압박론자들의 주장에 원용될 수도 있겠지만, 최선희 말에도 숨은 뜻이 있다. 조성렬 박사는 “대화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조건 없는 대화로 시작하자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대화용의는 있지만 처음부터 비핵화를 전제로 하는 회담은 안 하겠다는 것이다.

트럼프 방한을 앞두고 대통령과 여야 지도부에 부탁한다. 트럼프의 입만 쳐다보면서 정치공방이나 벌일 정도로 한가한 때가 아니다. 여야 모두가 북·미 대화·협상을 트럼프에게 적극 권고해주기 바란다. 안보불안에 떨고 있는 국민을 생각하면 야당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 1993~1994년 북·미 협상으로 북핵 문제 해결 모델을 만들었던 로버트 갈루치 전 동아·태차관보는 16일 연세대 강연에서 어렵지만 북핵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고 했다. “제재는 해결책이 아니다. ‘조건 없는 협상’을 시작하라. 거기서 북한이 무엇을 원하는지 듣고,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하되 그 대가는 제공해야 한다. 북핵 포기가 쉽지 않지만 가능하다.” 갈루치의 말은 미 진보진영의 목소리이고, 트럼프 정부 내 국무장관, 국방장관도 대화와 협상을 얘기했다. 

그동안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전쟁 불가’까지는 강하게 얘기했다. 트럼프 방한을 계기로 ‘한반도 운전자론’에 입각해서 ‘대화·협상 불가피’를 적극 설득해 나갈 차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대통령으로부터 국민이 들어야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대통령이 그렇게 발언할 때마다 국민은 절망스럽다. 신바람 나게는 못하더라도 희망의 끈조차 놓게 하지 말 것을 부탁한다.

<황재옥 | 한반도평화포럼 여성·청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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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6차 핵실험을 한 3일 광화문광장은 휴일 나들이 인파로 북적였다. 눈부신 초가을 햇살 아래 시민들의 표정은 밝았다. 아이들은 달리고 소리치고 웃었다. 보수층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안보불감증이라고 개탄했다. 하지만 엄중한 정세라고 해도 이 정도의 행복과 평화조차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은 과도한 엄숙주의다. 70년 가까이 머리띠 두르고 북한 규탄 구호를 외쳤어도 달라진 것은 없지 않은가.

1주일 전 북한의 중거리탄도미사일 화성-12형이 일본 상공을 통과해 날아갔을 때 일본은 발칵 뒤집어졌다. 학교가 휴교하고 신칸센이 멈춰서고 신문들은 앞다퉈 호외를 냈다. 일본 정부는 긴급 대피령인 ‘J얼러트’를 발령했다. 지진 때 침착하게 대응하는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반대로 한국인은 지진을 더 두려워한다. 북핵을 머리 위에 이고 사는 한국과 남의 동네 일로 보는 일본의 반응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북한이 6차 핵실험을 강행한 3일 오후 도쿄 거리에서 한 시민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사진을 배경으로 한 북한 핵실험 관련 보도를 보고 있다. 도쿄 _ AP연합뉴스

김정은은 핵 도박판을 키우는 데 성공했다. 일본은 기대 이상으로 부응했다. 하지만 북한의 핵·미사일쇼의 가장 충실한 관객은 도널드 트럼프다. 누구보다 빨리, 자주 반응한다. 반응 패턴은 불가측하고 피아를 넘나든다. 북한이 도발을 멈추면 김정은을 극찬하고 도발하면 장롱 속 군사옵션을 꺼내든다. 트럼프가 중심인 국제사회 북핵 대응체제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트럼프의 발언에는 사실과 의견이 섞여 있다. “미국은 지난 25년간 북한과 대화를 해왔고 터무니없는 돈을 지불했지만 대화는 답이 아니다”라는 발언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북한과 대화를 죽 해온 게 아니라 하다 말다 했다. 클린턴이 대화 창구를 열어놓으면 부시가 창구를 닫는 식이었다. ‘터무니없는 돈’이란 말도 사실과 다르다. 미국은 북·미 제네바 합의로 북한에 중유와 식량을 제공했지만 북한은 그 대가로 핵프로그램을 중단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북핵 사태의 수혜자인 트럼프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트럼프는 북핵 사태를 주도하면서 러시아 스캔들 등으로 흔들리는 국내 정치적 기반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터무니없이 돈을 쓰는 건 북한이다. 가장 발사비용이 싼 스커드미사일만 해도 1발에 600만~1000만달러인데, 북한은 지난 6년간 60발이 넘는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북한이 나라 곳간을 털어 도발하는 것을 트럼프는 감사해야 할 입장이다. 사학스캔들로 지지율이 폭락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북한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김정은의 핵도박은 지금까지는 성공적이다. 의도치 않게 아베와 트럼프의 정치적 환경을 개선해주기도 했지만 한반도 정세 주도권을 쥐고 강대국들을 호령하는 편익이 훨씬 더 크다. 그러나 앞으로도 성공을 거둘지는 미지수다. 김정은은 핵보유국 지위와 영구적 체제생존을 최종목표로 추구한다.

북한이 핵보유국이 되려면 미국과 대등한 핵억지가 형성돼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게 핵무기 종류의 다양화와 운반체계 완비를 뜻하는 다종화다. 북한은 핵무기 종류는 구비하고 있지만 운반체계는 그렇지 못하다. 일종의 소모품으로 200대가량 보유 중인 미사일 발사대가 대표적인 사례다. 제작 기술은 없는데, 유엔 제재로 수입할 길은 막힌 상태여서 언제 동이 날지 모른다. 향후 발사대 부족으로 미사일이 무용지물이 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북한은 과거 병뚜껑 제조기술 부족으로 생활필수품인 병 생산에 애를 먹은 적이 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는 법이다.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용 잠수함도 버거운 문제다. 발사관 3개짜리 대형 잠수함을 건조해야 하는 데 비용, 시간, 기술 모두 북한 편이 아니다. 미국과의 핵경쟁은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려는 것과 유사하다.

기술적 난관을 극복했다고 해도 문제가 끝나는 건 아니다. 미국이 자신을 핵으로 위협하는 북한에 핵보유국 지위를 내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6차례 핵실험 후 핵보유국 지위를 획득한 ‘파키스탄 사례’를 내심 기대하고 있겠지만 두 나라는 차이가 크다. 파키스탄은 미국을 위협하지 않았고 국제사회와 반목하지도 않았다. 파키스탄의 핵이 숙적 인도만을 겨냥하고 있다는 믿음도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북한은 이 중 어느 대목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김정은의 핵도박은 갈수록 위험해지고 있다. 핵무력 교리도 어느덧 안보와 생존의 수단에서 공격 중심으로 변질됐다. 자위 차원의 핵개발 명분도 상실했다. 생존을 넘어 국제정치 현실을 마음대로 조정하는 강대국을 꿈꾸는 것 아닌가 의심스럽다. 불가능하고, 추구하면 안되는 끔찍한 망상이다. 묻고 싶다. 북한은 왜 핵국가가 되려고 하는가.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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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이후 한반도가 지니는 지정학적 의미는 강대국들 간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에서 특정 국가에 의한 한반도의 독점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과 북으로 분단된 한반도를 두고 미국과 중국이 펼치는 힘겨루기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4일 중국의 지식재산권 침해와 강제적인 기술이전 요구 등 부당한 무역관행을 조사토록 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사실상 무역전쟁을 선포한 셈이다.

중국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중국 상무부는 15일 대변인 성명을 통해 “다자간 무역 규칙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좌시하지 않겠다”며 세계무역기구(WTO)에 미국을 제소할 수 있음을 내비쳤다. 그러자 극우 성향의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가 나서서 “중국과의 경제 전쟁은 모든 것이고, 우리는 모두 그에 미친 듯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반도에서 그들이 (북핵 문제 등으로) 우리를 툭툭 치고 있지만 그건 단지 곁가지(sideshow)에 불과하다”고 했다.

7월 28일 오후 경북 성주 주한미군 사드 기지에 미군 장비가 놓여 있다. 이날 국방부는 사드 기지에서 진행해온 소규모 환경영향평가 이외 일반 환경영향평가도 실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연합뉴스

북한과 미국이 주고받은 ‘말폭탄’이 결국 ‘쇼’였던 것이다. 난공불락인 북한의 핵무기 위협 속에 살아남으려면 자수자강(自守自强)하는 수밖에 없다는 깊은 자괴감이 들었다. ‘어떻게’라는 물음에는 핵무기가 없는 한국의 전략적 딜레마가 숨겨져 있다. 풀기가 어려운 고난도 방정식과도 같다.

역대 어느 지도자도 자신에게 주어진 북핵 숙제를 풀지 못했다. 그 사이 북핵 문제는 점차 난도만 높아갔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레드라인’을 넘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그렇다면 문 대통령도 임기 내 북핵 문제를 불가역적으로 해결할 묘안이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임기 5년 단임제의 대통령이 세습으로까지 이어지는 왕조체제를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길 방법은 없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시 말한다. 김정은 정권이 10~20년 이내 붕괴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도 말자. 희망적 사고가 정책이, 국가전략이 될 수는 없다. 머지않아 김정은 정권이 붕괴될 것을 가정하고 보고서를 만들고 있다면 당장 중단하기를 권한다.

그렇다면 현명한 지도자가 해야 할 일은 주어진 여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경로를 택하는 일이다. 어느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비핵화 벽돌을 한 장만 쌓는 일이다. 

‘가난한 국가’가 국가안보 수준을 단기간에 높이는 방법은 타국과 군사동맹을 맺는 것이 정설이다. 문재인 정부 역시 굳건한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북핵 문제 해결의 전기를 마련하겠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다.

다만 우려되는 점은 사드 배치 과정에서 확연하게 드러났듯이, 한·미동맹 강화 과정에서 중국의 크고 작은 반발에 문재인 정부가 얼마나 명민하게 대응할 수 있느냐이다. 이를테면 동북아 지역에서라도 미국에서 중국으로 급격하게 세력 전이가 이루어질 경우 우리의 내부적 균열을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고민도 함께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유럽의 동아시아 전문가였던 카를 필니가 19세기 말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존 헤이의 “지중해는 과거의 바다이고, 대서양은 현재의 바다이며, 태평양은 미래의 바다”를 인용하면서 21세기는 중국이 세계 초강대국 역할을 맡는 다극화된 세기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병철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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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1950년 11월30일 “핵무기 사용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아마 이 협박이 북핵 개발의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1956년 2월23일 북한이 소련의 드브나 핵연구소에 30여명의 연구원을 파견한 것이 핵개발의 기원일 수도 있다. 그 기원이 무엇이든 북한이 핵개발을 시작한 지 올해 60년이 넘는다. 이 60여년은 한마디로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에 걸친, 핵 대장정의 시기였다. 때로는 경제붕괴 상황에 직면하고, 때로는 선제공격의 위험이 닥쳐도 중단 없이 행진한 시간이었다. 오랜 고립과 제재를 견디고, 온갖 난관을 헤쳐온 끝에 드디어 핵 보유국을 눈앞에 두고 있는 북한이다. 제재를 더 강화하거나 추가한다고 핵 국가의 꿈을 포기할 리 없다.

지층처럼 켜켜이 쌓인 핵 문제들을 풀려면 단계적 접근법이 합리적이다. 북한과 외부세계가 상호 조치로 신뢰를 쌓아가며 원인을 하나하나 제거해나가는 방법이다. 과거 핵 합의 때 많이 해본 것이다. 그러나 순서대로 풀기에는 너무 오래 걸리고 그만큼 인내심을 요한다. 최근 평양에서 이런 통첩이 날아왔다. “주체 조선이 대륙간탄도로켓(ICBM)을 시험 발사할 시각이 결코 머지않았다.” 그런데도 남북, 미국은 “여건이 되면 대화하겠다”며 사돈 남 말 하듯 하고 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전략적 인내를 내세워 북핵 상황을 악화시켰던 오바마와 달리 트럼프가 최대한의 압박과 관여를 천명했을 때만 해도 상당한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지금 압박뿐 관여는 없다. 누구보다 상대가 그 의미를 본능적으로 느낀다. 북한은 “최대의 압박과 제재로 누구를 굴복시킨 다음 대화 탁에 끌어내어 항복서를 받아내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북한의 연이은 미사일 도발이 말해주듯 트럼프의 대북정책은 벌써 실패했다.

한국과 미국의 정권교체와 대북정책 전환도 북한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백약이 무효라는 말일까? 절망하기에는 이르다. 60여년 수없이 제재도 하고, 경제지원도 하고 타협도 해봤지만, 사실 모두 변죽을 울리는 것이었다. 트럼프가 초기 실패를 거울 삼아 관여의 수준을 높인다 해도 북핵 문제의 핵심을 벗어나 있는 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압박 수위를 올려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핵항모, 핵잠수함, 전략폭격기를 동원하면 할수록 핵에 대한 북한의 물리적, 심리적 의존도는 높아진다. 위기 고조는 북한이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위기 조성으로 보상의 크기를 키운 뒤 미국이 제시하는 카드가 마음에 들 때 적당히 물러서면 그만이다. 북한은 현 국면에서 아쉬울 게 별로 없다.

과거의 게임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면, 지긋지긋한 핵 현상 유지를 깰 방법이 하나 있다.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던 것, 핵 문제의 본질로 파고들어가는 것이다. 북한은 평화의 부재 상태, 즉 북한 체제를 위협하는 정치·군사적 환경 때문에 핵을 선택했다. 한반도 평화 체제의 대안으로 핵을 손에 쥔 것이다. 그렇다면 평화를 주고 핵 의존도를 낮추는 것이 사리에 맞다. 그러나 한·미는 반공주의 이념과 제도, 주한미군, 군사력 우위를 기반으로 한 기득권 체제인 정전체제의 수혜자였다.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문제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핵과 ICBM을 품은 정전체제는 이제 더이상 쓸모없게 됐다. 대전환의 시간이 온 것이다. 북한이 60년간 요구했지만 한·미가 외면하던 것, 평화체제를 준비해야 한다. 그걸 위해 북한의 태도 변화를 기다리지 말고, 선제적으로 평화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그 첫 신호로는 미국의 전략자산 배치 중지, 한·미 연합훈련 유보가 적당하다. 그건 북한이 바라던 바이므로 호응할 것이다. 그럼 북한과 탁자에서 마주 앉아 군사적 긴장 완화 조치를 논의할 수 있다. 이게 진정 대화의 시작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달 말 트럼프를 만날 때 양국의 북핵 문제 원칙을 확인하는 것에 만족하기보다 핵 문제 돌파구를 열 과감한 구상을 던져야 한다. 북핵 개발 60년사를 전해주며 지난 20년간의 협상에도 왜 비핵화에 실패했는지 이해시키면 어떨까. 트럼프가 믿고 있듯이 김정은은 미치지 않았다. 할아버지·아버지로부터 계승되고 학습된 생존법칙을 따를 뿐이다.

트럼프는 기성 논리, 기존 경로에 집착하지 않는다. 창의적 해법을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 대통령이 좀 터프해야 한다. 오마바가 취임 초 의기양양하게 말했던 터프한 외교(tough diplomacy)를 상기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진짜 거래를 제안해 보라. 트럼프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 될 것이다.

이대근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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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핵 문제에 대해 “어떤 조건이 되면 관여로 평화를 만들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미특사인 홍석현 한반도포럼 이사장과 접견한 자리에서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핵과 관련해 ‘평화’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처음이다. 이는 최근 미국 고위 당국자들의 유연한 대북 태도와 맥을 같이한다.

문재인 정부 미국 특사인 홍석현 한반도포럼 이사장이 17일 인천공항을 통해 미국으로 출국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 핵실험 중단 시 대화 용의가 있다는 니키 헤일리 유엔주재 미국대사나 북한 붕괴를 추구하지 않겠다는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의 발언이 그것이다. 북한의 태도에 따라 대북 압박 기조를 대화 국면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얘기다. 대화 조건을 비핵화 약속에서 핵실험 동결로 문턱을 낮춘 것도 변화다. 북한의 핵능력이 완성단계에 이른 것을 감안한 현실적 조치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의 달라진 북핵 정책 기조는 한국 정부와 공통점이 많다. 문재인 정부에서 한·미 간 불협화음이 불거질 것이라는 항간의 우려와 달리 오히려 양국 협력의 공간이 넓어질 것임을 예고한다. 정부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과 긴밀히 공조하되 평화적 해결책을 주도해야 한다. 어떤 경우라도 북핵 문제 접근의 대원칙은 평화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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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양국 군당국이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를 기습 배치했다. 어제 새벽 경북 성주골프장에 사격통제레이더와 발사대 6기, 요격미사일 등 핵심 장비 상당수를 반입했다. 국방부는 “가용한 사드의 일부 전력을 배치해 우선적으로 작전운용 능력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환한 대낮을 놔두고 한밤중에 도둑 배치한 이유로 충분치 않다. 북한이 당장 핵미사일 공격을 할 것이란 징후도 없는데 서둘러 배치한 의도가 궁금하다. 특히 대선이 한창 진행 중인 상황에서 선거 쟁점인 사드 배치를 강행한 저의가 뭔지 묻고 싶다. 대선판에 뛰어들려고 작정하지 않고서야 이럴 수 없다.

사드 배치는 차기 대통령으로 누가 선출되든 되돌릴 수 없도록 ‘알박기’하려는 목적이라는 분석이 많다. 하지만 미묘한 배치 시점을 감안하면 알박기 차원을 넘어서 대선판을 흔들어 보려는 의도를 의심하게 된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를 크게 앞선 것으로 나타난 시점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문상균 국방부 대변인이 불과 1주일 전 대선 후 사드 배치를 시사한 이후 뚜렷한 이유 없이 배치를 앞당긴 것도 이해가 안된다. 사드에 미온적인 문 후보를 견제하고, 사드를 찬성하는 다른 후보들을 지원하려는 것은 아니었는지 군은 해명해야 할 것이다.

26일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성주골프장 부지에 포문을 하늘을 향해 조준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발사대가 배치돼 있다. 한미 당국은 이날 새벽 사드 핵심장비인 X-밴드 레이더와 차량형 발사대, 요격미사일 등을 골프장으로 전격 반입했다. 매일신문 제공

미국 군 당국이 한국 대선 와중에 사드 배치를 강행한 것은 한국을 존중하지 않는 행태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들어 한국을 무시하는 미국 지도자들의 언행이 잦아지는 것을 가볍게 봐선 안된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의 ‘일본은 핵심 동맹국, 한국은 파트너’ 발언이 대표적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한국은 중국의 일부’ 발언을 전하는 트럼프의 언행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의 사드 배치 강행 자체가 대선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미국과 한·미동맹에 대한 후보들의 견해 역시 대선 주요 이슈이기 때문이다.

사드는 군사적 실효성 논란과 중국 보복의 문제 외에 시민의 의사 묵살과 절차상 불법으로도 배치 명분이 없다. 정부는 사전 상의 없이 사드 배치를 일방적으로 발표했으며, 반대 시민과 대화하기는커녕 물리력으로 밀어붙였다. 어제도 경찰이 반대 주민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소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또한 환경영향평가를 거치지 않고 사드 배치를 강행한 것은 명백한 현행법 위반이다. 기본설계가 나온 뒤 환경영향평가를 하겠다는 게 군당국의 계획이지만 사후적 환경영향평가마저 제대로 이뤄진다는 보장이 없다. 사드 부지에 대한 주한미군 무상공여 문제는 법적 분쟁이 진행 중이다. 제대로 법을 지킨 게 없다. 사드는 불법 위에 쌓아올린 모래성에 다름 아니다.

불법적 사드 기습 배치를 누가, 왜 강행했는지 진상규명이 필요하다. 대선에 영향을 미칠 의도가 있었는지 여부도 밝혀야 한다. 진실을 찾아내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다른 사람 아닌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할 일이다. 주권국가로서 미국에도 강력한 유감을 표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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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는 허세도 중요한 전략이다. 적을 공포로 몰아넣고 아군의 사기는 북돋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일까. 전쟁판에서는 병력 부풀리기가 일반화돼 있다. 예컨대 삼국지연의를 보면 주요 전투의 동원 병력이 100만명을 넘기 일쑤다. 적벽대전에는 120만명이 투입됐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당시 위와 촉, 오나라의 동원가능 병력은 모두 합해 87만명 정도였다. 소설가가 재미를 위해 숫자를 부풀렸겠지만 장수들의 허풍도 한몫했을 것이다.

허풍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나라가 북한이다. 김정일은 1990년대 초 미국에 대한 핵공격을 공언하곤 했다. 당시 북한은 조악한 형태의 핵폭탄 제조도 불가능했다. 북 외교관들이 플루토늄을 러시아로부터 밀수하다 적발되는 형편이었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도 다르지 않다. 휴전선 지뢰 폭발 사건 때 대외적으로는 전쟁 불사 위협을 거듭했다. 하지만 정작 북한군에는 전면전 예방을 지시했다. 안팎으로 다른 말을 한 셈이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 장수들은 선조 앞에서 일본이 까불면 단숨에 대마도를 점령하고 왜왕의 무릎을 꿇리겠다고 큰소리쳤다. 이처럼 허세는 양날의 칼이다.

미국 해군의 핵추진 항공모함 칼빈슨호가 지난 15일(현지시간) 인도양을 지나고 있다. ㅣ미 해군

한반도로 향한다던 미국의 핵추진 항공모함 칼빈슨호가 1주일이 지난 지금도 호주 해상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북한의 핵실험 도발 가능성이 점쳐진 김일성 생일(4월15일) 이전 한반도에 배치될 것이라는 당초 관측과는 큰 차이가 있다. 칼빈슨호의 한반도 전개 소식은 미국의 시리아 공격 직후에 나와 긴장을 고조시켰다. 미국의 ‘선제타격설’ ‘4월전쟁설’ 같은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그 와중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북한에 무적함대를 보내고 있다”고 말해 위기설을 부채질했다. 그러나 당시 칼빈슨호는 한반도에서 5000㎞가량 떨어진 인도양에서 다른 작전을 하고 있었다. ‘가짜뉴스’다.  

이것이 미국의 허세인지, 아니면 북한 압박용 심리전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한민족의 생존이 걸린 북핵 문제를 가볍게 보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한반도는 사소한 불씨 하나도 전면전으로 이어질 우려가 상존한다. 항공모함 배치 같은 중요한 군사 조치는 계획적이고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허풍은 포커판에서나 필요하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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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미·중 정상회담은 북핵 문제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두 정상은 북핵의 심각성에 공감하고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의 충실한 이행에 뜻을 같이했지만 가시적인 해법은 도출하지 못했다. 북핵 위기가 갈수록 고조되고 있는데도 단순한 상황관리에만 치중하는 중국과, 중국 역할론에만 몰두하는 미국의 태도가 실망스럽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은 “중국이 북핵 해결에 협력하면 좋겠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우리는 독자적인 방도를 마련할 것이고, 마련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핵의 평화적 해결을 추구한다면서도 북한의 태도변화가 없다면 대화는 없다고 못 박았다. 미국은 회담 전에도 독자 대응 의사를 밝혔지만 이번에는 화학무기를 사용한 시리아를 미사일로 공격한 뒤에 나온 것이어서 무게가 사뭇 다르다.

6~7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6일 중국 베이징의 신문판매대에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이 표지에 실린 잡지들이 놓여 있다. 베이징 _ AFP연합뉴스

미국은 말로만 그치지 않고 한반도 주변에 군사력을 증강배치하고 있다. 핵추진 항공모함 칼빈슨호를 기함으로 하는 항모강습단을 한반도 주변 해역에 배치했다. 미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북핵과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국 내 핵무기 배치, 김정은 제거 작전, 한·미 특수부대 북파 등 3대 대북전략 옵션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을 중국이 적극적 역할을 하도록 유인하는 압박수단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북한이 ‘레드 라인’을 넘어설 경우 군사 행동에 나서겠다는 의지도 강해 보인다.

북한 역시 강경 일변도다. 북한은 오는 15일 김일성 생일 105주년과 25일 군창건기념일을 앞두고 6차 핵실험을 준비하는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다. 북한은 미국의 시리아 공격에 대해 “자위적 국방력을 더욱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북핵 해결의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했던 미·중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정세가 오히려 더 불안해진 형국이다. 특히 미·중 정상회담 등 외교적 해법이 교착상태에 빠진 사이에 군사적 대응이 테이블에 오르는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다. 북핵은 군사적 대응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해결 기조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그렇잖아도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수위는 최고조에 달한 상태다. 아차 하는 순간 전면전으로 비화되지 않을 것이라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국의 국정공백 상태에서 차기 대통령이 선출되기 전까지 한반도의 안정적 관리는 대단히 중요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군사적 충돌이 발생해서는 안된다. 당장 남북한과 미국이 상대를 자극하는 언행부터 자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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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어제 서해 동창리에서 동해 쪽으로 중거리미사일로 추정되는 탄도미사일 4발을 동시에 발사했다. 지난달 ‘북극성 2형’ 중장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지 22일 만이다. 이는 한반도 및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전에 대한 위협이자 유엔 안보리 결의의 중대 위반이다. 지역 평화를 깨뜨리고 국제규범을 거듭 파괴하는 행위를 용납할 수 없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대북정책을 저울질하고 있는 민감한 시기에 보란 듯이 이뤄졌다.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은 대북정책을 재검토하면서 대북 선제타격, 대중국 세컨더리 보이콧과 함께 한국에 전술핵무기를 재배치하는 방안을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나하나가 한반도의 운명과 직결되는 사안들이다. 특히 전술핵 재배치는 한반도에서 핵무기 경쟁을 하자는 것으로 결코 북핵 문제 해결의 대안이 될 수 없다.

출처: 경향신문DB

더구나 트럼프 대통령은 예측불가의 인물이다. 후보 때부터 대북 강경 발언을 쏟아내더니 취임 후에는 갈수록 발언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북한을 매우 강하게 다스리겠다” “김정은이 한 일에 대해 매우 화가 난다”는 그의 발언에서는 북핵 문제의 합리적 해결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다. 자칫 북한의 도발과 미국의 대북 강경책이 부딪칠 가능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북·미가 번갈아가며 모험적 대응을 하면 서로에게 강경책의 명분을 제공하게 될 것이고 이는 다시 한반도의 군사적 불안을 고조시키는 악순환을 초래할지 모른다.

이를 모를 리 없는 북한이 잇따라 도발하고 있는 것은 한반도 정세를 흔들어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해보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듯하다. 하지만 북한이 얻을 것은 없다. 당장 한·미 양국은 북한 도발을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의 명분으로 삼으려 할 것이다. 사드에 반대하는 중국의 입장도 곤혹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중국의 대북 지원 명분은 약화되고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명분은 강화될 것이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개발할수록 국제적 고립만 자초한다는 사실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김정은 체제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핵·미사일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북한이 깨닫지 못하는 현실이 답답하다. 하루빨리 무모한 핵·미사일 개발을 중단하고 대화의 장으로 나오기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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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문제는 상당 부분 북·미 간 문제다. 북·미 간 타협과 갈등으로 점철된 북핵 문제의 긴 역사가 잘 말해준다. 그런데도 오바마 정부는 북한의 목줄을 쥐고 있다는 이유로 중국이 쉽게 끝낼 수 있다며 중국에 떠넘겼다. 그런데 그건 미국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미국은 선제타격으로 북한을 무릎 꿇릴 수도 있고, 대북 경제 지원으로 북한 태도를 얼마든지 바꿀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과 마찬가지로 미국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모두 그게 전략적 이익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오바마가 북핵 문제를 북·중 간의 문제로 바꿔치기하려 갖은 노력을 했음에도 실패한 이유다.

문제 해결의 출발점은 문제를 직면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정은과 트럼프의 움직임은 주목할 만하다. 김정은은 손을 뻗어 트럼프의 옷깃을 건드리는 데 성공했다.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시험 단계에 있다고 발표하자 트럼프는 “그럴 일 없을 것”이라고 즉각 반응했다. 그리고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을 한국과 일본에 보내 북핵을 주요 위협으로 다룰 것임을 분명히 했다. 북·미가 신호를 주고받은 것은 미·중이 서로 책임전가하며 시간을 낭비한 것보다는 나아 보인다. 그러나 이건 두 거친 남자가 치명적 무기를 다루는 일이다. 김정은은 정말 ICBM을 발사하거나 6차 핵실험을 할지 모른다. 트럼프와 네오콘 못지않은 그의 주변 인물들도 어떤 카드를 꺼낼지 알 수 없다.

이런 정세에서는 종잇장 차이로도 험한 대결과 큰 거래라는 상반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김정은·트럼프 간 교신이 반가우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 이유다. 김정은과 트럼프가 협상을 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의 예측불가능성과 불확실성은 잘 알려져 있다. 안 그래도 불안정한 게 요즘 한반도 주변 정세다.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오른쪽)이 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을 예방하기에 앞서 한민구 국방부 장관(왼쪽)과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6년 한국 국방백서는 미국이 군사 우위를 지키는 가운데 중국, 러시아, 일본이 해·공군 중심의 군사력을 경쟁적으로 증가시키고 있다고 밝혔다. 2016년 1월 기준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한국의 군사비 합계는 세계 군사비의 57.6%다. 동북아는 이미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군비를 쓰고 가장 치명적인 무기로 상대를 겨누는, 세계 최고의 중무장 지역이다. 이런 긴장 상태라도 대화와 교류가 활발하다면 위기감이 그렇게 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 북·미 사이뿐 아니라 한·중, 한·일, 북·중, 중·일 사이를 채우고 있는 것은 깊은 불신과 적대감이다. 이런 상태에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를 결정, 불에 기름을 부은 형국이 되었다.

한반도와 주변에 지금 모자란 것은 군비, 무기, 적의가 아니다. 부족한 건 대화다. 급한 것도 대화다. 그렇다면 정당하다는 이유만으로 상대가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를 하는 건 피해야 한다. 북한이 수용할 것 같지 않은 당위적 주장보다 북한이 원하고 한·미가 들어줄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 필요하다. 바로 한·미 연합훈련 일시 중단이다. 북한은 연합훈련을 일시 중단하면 핵실험도 일시 중단하겠다고 줄기차게 제안했지만 한·미는 일관되게 거부했다. 결과는 핵전력을 총동원한 더 강력한 훈련, 북핵 개발의 가속화, 한반도와 주변에 만연한 위험과 불안이다. 그럴수록 한국은 중국을 겨냥한 한·미·일 3각 협력체제에 깊숙이 끌려들어갔다. 그렇게 해서라도 한반도에 평화가 온다면 다행이지만 현실은 정반대이다.

훈련 일시 중단은 비핵화에 관한 북한 태도가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낡은 도그마를 깨는 선제적 조치다. 그건 북한을 대화의 마당으로 이끌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한반도 문제와 북핵의 핵심에도 다가가게 해준다는 점에서 상당한 파급력을 갖고 있다. 북핵은 평화의 부재가 낳은 것이다. 과감하게 군사 문제로 대화의 물꼬를 튼다면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문제로도 진전시킬 수 있다. 미·중에 휘둘려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수렁에 빠진 한반도 상황을 탈피하고 싶다면 한국이 군사적 긴장 완화와 군비통제에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

서울에 온 매티스는 북핵 문제에 관해 A부터 Z까지, 24시간 365일 긴밀히 소통하고, 3각 협력 및 연합훈련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더 강력하게 한국을 미국의 손안에 틀어쥐고, 북한과 중국에 맞서겠다는 말로 들린다. 다음 한국 정부가 너무 나서지 못하게 미리 쐐기를 박아 놓자는 것일 수도 있다.

김정은의 무모한 모험을 부추겨도 안되고, 트럼프의 변덕에 휘둘려도 안된다. 그러자면 선택해야 한다. 김정은·트럼프가 추는 지뢰밭 위의 탱고를 구경만 할 것인가. 아니면, 한반도 운명의 주인으로서 나설 것인가.

이대근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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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국민이 특검 수사에 몰입하고 있던 지난 며칠 사이, 두 개의 섬뜩한 국제뉴스가 있었다. 하나는 트럼프 시대의 개막이다. ‘미국 우선!’의 막무가내식 밀어붙이기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다른 하나는 중국의 일대일로가 그 첫 번째 결실을 보았다는 기사이다. 중국 저장성 이우시에서 출발한 화물열차가 17일간 1만2500㎞를 달려 영국 런던에 도착한 것이다. 중국, 카자흐스탄, 러시아, 벨라루스, 폴란드, 독일, 벨기에, 프랑스를 거쳐 마침내 영국에 도착했다. 트럼프 시대에 예상되는 변화는 언론을 통해 비교적 많이 소개되었으니 여기서는 일대일로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육로와 해로 두 개의 길을 통해 중국과 유라시아, 중동, 아프리카, 유럽을 거쳐 스칸디나비아까지 연결하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래 최대의 국가사업일 뿐 아니라 2차대전 이후 유럽의 부흥을 가져온 마셜 플랜의 12배 규모이다. 완성되고 나면 전 세계 인구의 65%, 그리고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을 설명하게 될 것이다. 아직도 많은 불확실성이 남아있지만, 옹호론자들은 물론이고 회의론자들조차도 최소한 이 사업에서 구경꾼으로 남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일치된 의견이다. 중국에서 출발한 기차가 런던에 도착했다는 것은 일대일로의 첫 길을 열었다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트럼프의 미국이 미국 우선의 고립주의 길을 가는 동안 중국은 유럽으로 뻗어나갈 더 많은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초유의 거대 프로젝트는 엄청난 자본을 필요로 한다. 인프라 투자에 필요한 돈은 주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서 나온다. AIIB는 일대일로의 돈줄이자 동시에 금융에서 미국 주도의 국제통화기금(IMF)에 맞서는 중국의 전진기지이기도 하다. 미국과 일본을 제외한 57개 주요국이 참여했고, 한국은 미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AIIB에 참여하면서 5번째로 많은 분담금을 냈다. 미국으로서는 단단히 서운할 일이었는데, 그 와중에 전승절 행사까지 참석하면서 화를 돋웠다. 그 후 한·일 간 각종 외교분쟁에서 미국이 일본 편을 드는 느낌을 주었던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규모 분담금의 대가로 받은 부총재직은 4개월 만에 날아가고 그 자리는 국장급으로 강등되었다. 그뿐인가. 사드 배치를 둘러싸고 갑작스러운 방향선회로 이번에는 중국의 각종 보복조치에 시달리고 있다. 돈은 돈대로 내고 양쪽에서 뺨을 맞고 있는 격이다.

돈도 냈고 뺨도 맞았으니 얻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거대한 물류·문화·정치의 망을 통해 한창 산업화가 진행 중인 고성장 경제에 동승해야 한다는 점이다. 일자리 부족, 양극화, 성장동력 상실, 저출산 등 우리가 겪는 문제들은 모두 탈산업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제조업이 줄어들면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가 줄어들고 이것이 앞서 나열한 모든 문제들을 일으킨다. 경제성장, 계층이동의 사다리, 낙수효과 같은 기회의 문들은 탈산업화하는 국가가 아니라 산업화하는 국가들에 있다. 중앙아시아, 인도, 중동, 아프리카, 동유럽 등 일대일로를 따라 펼쳐지는 기회에 우리도 동승해야 한다. 일대일로의 대부분 경제활동은 소위 ‘경제회랑’을 통해 일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6개의 경제회랑이 있는데 한국이 포함되어야 할 동아시아 경제회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에 가로막혀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일대일로와 매우 비슷한 구상에서 출발했다. 돈도 냈고, 뺨도 맞았고, 구상도 같다면 이제야말로 실익을 챙겨야 할 때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한 일은 느닷없는 개성공단 폐쇄로 실익을 챙길 기회를 스스로 막아버린 자해적 정책이었다. 주요 대선주자들이 개성공단 부활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동안 강화된 대북 제재로 인해 이제 와서 되살린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나는 다가오는 대선에서 후보들의 공약은 두 개의 큰 틀 안에서 평가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나는 코앞에 닥친 인구절벽·소비절벽 앞에서 적어도 20년을 내다본 정책의 장기효과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와는 달라진 미국과 중국의 양대 헤게모니 격돌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성장과 한반도 평화를 얻어낼 것인가라는 글로벌 전략이다. 주요 주자들이 내놓고 있는 공약들에서 이런 큰 틀의 사고는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유엔의 수장을 지낸 후보조차도 아직까지 이런 사고를 선보인 적이 없다. 그들의 준비 부족일 수도 있을 것이고, 아직까지 한국에서 선거에 이기는 데 글로벌 전략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정권교체든, 정치교체든, 시대교체든 좋다. 그러나 그 새롭게 만들어진 세상에서는 우리를 둘러싼 글로벌 환경에서 우리 스스로가 주요 변수가 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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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판 이명박’이라는 별명을 가진 도널드 트럼프가 제45대 미국 대통령으로 현지시간 20일 취임하자 한국 누리꾼들은 ‘미국 사람들, 비슷한 지도자를 우리는 이미 겪어보았소’라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트럼프가 취임사에서 “민중에게 권력을 돌려주겠다”며 배트맨 시리즈 <다크나이트 라이즈>(2012)의 악당 베인의 연설을 ‘복붙’하고, 빈자리가 숭숭했던 취임식에 ‘150만명’이 참석했다고 숫자까지 제멋대로 부풀리자 미국인들은 황당해했다. 미 중앙정보부(CIA) 본부 공석에서 기자를 콕 찍어서 인신공격하는 트럼프의 비민주적 행태는 한국 언론이 이미 지난 8년간 지나온 길고 어두운 터널의 ‘초입’을 연상시켰다. 트럼프의 취임식 케이크가 4년 전 버락 오바마의 두 번째 취임 때 사용됐던 케이크 디자인을 그대로 베꼈다며 요리사가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이에 트럼프에 반대하는 미국인들은 그의 단임을 기원하며 4년을 초단위로 거꾸로 세는 ‘트럼프 퇴임 카운트다운 시계’를 만들었다. 반면 지지율 60%로 백악관을 떠나는 오바마 전 대통령을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을 담은 ‘짤방’들이 유통됐다. 오바마를 태우고 백악관을 떠나는 헬리콥터를 슈퍼히어로가 안간힘을 쓰며 붙들고 있는 장면 등이었다.

이에 한국의 한 트위터 사용자는 이렇게 위로했다. “지금 화나서 엎어버리고 싶겠지만, 나머지 절반을 (설득하려면 트럼프가) 누구도 부인 못하는 최악의 삽질을 한 4년 정도는 해야 한다”며 “너네는 큰 나라라 그렇게 삽질하면 우리 모두 이 세상에 없겠구나. 미국인들아. 잊지 마라. (트럼프 대통령이) 핵 쏘기 전에 탄핵”하라고 말했다. 또 다른 누리꾼은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던 미국인들이 어떻게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았는지 모르겠다”며 의아해했다.

대선 당시 트럼프의 각종 구설에 대한 비판적 보도가 홍보로 역효과를 냈다는 뒤늦은 후회도 나왔다. 이에 각종 구설에 휩싸여 있는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대선캠프가 ‘혹시 우리도 같은 패턴인가’ 싶어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온다. 믿거나 말거나.

최민영 기자 m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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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박근혜-트럼프 조합의 이중 위기에 처할 뻔했다. 미국 우선주의, 예측불가의 도널드 트럼프는 20일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그런데 한국 외교를 벼랑으로 몬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 직전이다. 덕분에 박근혜 리스크와 트럼프 리스크가 동시에 발호하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을까.

한국 외교의 재앙적 상황이 해소된 건 아니다. 박근혜 리스크는 유령처럼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방침을 확인하면서 “중국이 반대해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불에 기름을 끼얹자는 것인가. ‘사드 보복’ 행태는 불만스럽지만 공연히 중국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 당장 “한국에 배신감을 느낀다”는 반응이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유일호 경제부총리가 트럼프의 ‘경제교사’로 알려진 스티븐 슈워츠먼 블랙스톤 회장을 만나 “대미 무역 흑자를 축소해 나갈 방법을 검토 중”이라고 밝힌 것도 부적절하다. 고도의 외교적 전술인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의 공식 요구가 없는데 먼저 한국의 입지를 좁힐 필요가 있는 건지 의문이 든다. 지난 연말 “미국의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해 “알아서 긴다”고 지적받은 장명진 방위사업청장이 떠오른다. 이 정도의 역량과 인물로 국제질서의 대변환을 예고하는 트럼프의 대외정책을 감당해야 한다니 답답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플로리다 팜비치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듣고 있다. ㅣAP연합뉴스

트럼프의 아시아 전략은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부상하는 중국 견제다. 하지만 방법은 크게 다르다. 오바마는 한·미·일 삼각동맹 구축을 견제 수단으로 삼았지만 트럼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중국을 견제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동원하고 있다. 미·소 냉전 시절 리처드 닉슨이 핑퐁외교로 중국을 끌어들여 소련을 압박한 바로 그 수법이다.

문제는 이 전략이 미국을 강하게 만들지는 몰라도 국제사회 규범과 상식에 반한다는 것이다. 러시아 고립정책을 펴온 유럽연합과 미국의 관계는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는 게 국제관계라지만 그것이 원칙은 될 수 없다. 우크라이나 군사개입 등 러시아의 ‘나쁜 행동’에 보상을 하는 것도 곤란하다. 한국으로서는 기존 미국과 중국의 G2 체제에 러시아가 가세하는 G3 체제로 바뀌는 국제질서의 지각변동 움직임이 더 절박한 문제다. 이런 중대한 변화가 국제사회 평화와 안정보다 이해당사국들의 이익보호 차원에서 안배되는 퇴행성도 비정상이다.

트럼프는 국내외 정책에서 ‘미치광이 전략’을 구사한다. 예측불가능하고 통제불능의 미치광이처럼 행동하면 겁먹은 상대가 알아서 긴다는 전략으로, ‘하나의 중국’ 정책 흔들기가 대표적이다. 중국이 타협하거나 양보할 카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핵심 이익을 건드려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에 서기 위한 포석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대선 기간 중에도 한밤중에 트위터를 날리고 수시로 정책적 입장을 바꿨다. 충동조절을 못한다거나 자기절제를 안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동맹국이건 적대국이건 협상 파트너들은 불확실성에 혼란을 느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취임 전 지지율이 44%로 역대 대통령 당선자 중 최저이고, 취임 축하 노래를 할 가수를 구하지 못해 망신당하는 트럼프는 현실의 반쪽 모습일 뿐이다. 워싱턴의 희극적인 풍경과 별개로 자국 이익만 생각하며 국제사회적 책임은 회피하는 ‘트럼프 리스크’가 한국과 세계를 점점 옥죄고 있다.

이 중차대한 시점에 한국 외교 자산의 곳간은 텅 비어 있다. 대외관계의 지렛대인 남북관계는 진작에 파탄났고, 균형외교의 핵심 축인 한·중관계는 사드 한 방에 험악한 분위기로 돌아섰다. 한·일관계 역시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과거에 묶여 있다. 북한은 핵보유 완성 단계로 달려가고 있다. 외교 역량을 북핵에 올인하면서 전략적 카드를 소진했지만 결과는 이처럼 초라하다. 박 대통령이 위기 때면 동원하는 ‘이순신의 배 열두 척’ 전략도 별무소용인 형국이다. 천재 전략가인 이순신 장군인들 배 한 척도 없는 상황이라면 어찌해볼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게도 구럭도 다 잃은 한국 외교의 출구를 유일호식 저자세 외교, 김관진식 호기 외교에서 찾아서는 안된다. 대변환이 필요하다. 갈라진 국론을 결집하는 작업이 최우선이다. 사드, 위안부 합의, 북핵 모든 현안을 광장에 펼쳐놓고 토론하는 것이다. 대외 협상력은 국민적 공감대에서 나온다. 소통과 통합, 박근혜 정부가 가장 소홀히 한 바로 그 지점이 새로운 외교의 출발선인 것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트럼프 리스크의 맞춤 대처법이기도 하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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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어느 단체의 송년 모임에서 간단한 강의를 했다. 나는 ‘올해 지구촌 뉴스’를 전하면서 “박근혜, 트럼프보다 더한 인물이 다음 우리의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청중석에서 비명 소리가 나왔다. 박근혜·최순실도 충분히 끔찍한데, 더 나쁜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니 놀란 모양이다.

‘박·최’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국정파탄, 부정부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구토를 부르는 인간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주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분노보다는 인간의 사회성에 대한 한계와 절망을 느꼈다. 독점한다는 의미의 ‘농단(壟斷)’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최순실씨 일가가 박태환 선수 협박부터 무기 구입까지 손을 뻗지 않은 곳이 없으나, 그들이 집어 삼킨 것은 좁은 의미의 국가권력(청와대)이 아니라 사회 전체다. 그들은 ‘우리’에게 깊은 자상을 남겼다. 정권이 교체될지 확실치 않지만, 이번 사태가 새누리당 해체나 정권교체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되는 이유다.

인간관계, 사회성, 민주주의를 해결해주는 과학기술은 왜 등장하지 않은 것일까. 기왕 인공지능이 필요하다면 바둑이나 소설 쓰기 실험 대신 인간의 가장 어려운 문제인 도덕성을 조절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공상을 해본다. 삶의 꼭대기에 부와 성공, 물질적 욕망이 등극한 지 오래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자원은 감정의 연대다. 덜 외로운 상태. 스트레스 덜 받는 일상. 자기가 속한 곳에서 인정받는 것. 나의 경우 미세먼지 없는 세상이다. 한국인들이 인간관계의 고통과 불쾌한 기분을 해소하기 위해 쓰는 비용은 만만치 않다. 세계 최고의 1인당 주류 소비량, 국민총생산 대비 최대 규모의 성산업, 쇼핑 중독.

<빵과 장미>라는 영화가 있지만, 둘은 다르지 않다. ‘빵’도 ‘장미(인간으로서 존엄)’의 힘이다. 의식주는 유대와 배려 속에서 생산된다. 정의가 힐링이다. 바람직한 사회제도 역시 선의의 인간이 운용할 때만 인프라로서 힘을 가질 수 있다. 박·최 게이트는 어쩌면 대한민국에서는 이 모든 것이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증명 같았다.

나는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e메일을 많이 받는다. 이런 사연이 적지 않다. “저의 이번 생은 망했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요즘은 특히, 마음 둘 곳이 없는 중에, 하소연합니다. 별반 내용도, 목적도 없는 메모가 되고 말았지만… 죄송합니다.”

광장은 불신의 시대에 유일하게 마음을 주고, 나누고, 두고 올 수 있는 안전한 곳이 되었다. 광장에 모인 200만이 넘는 사람들의 동기와 생각이 같을 리 없다. 광장의 축제는 일상의 프로작(우울증 치료제)이기도 하다. 어쩌면 촛불은 밤의 시위가 아니라 낮의 우울을 밝히는 데 더 긴요한지도 모른다. 이런 촛불이 “바람 앞에 쉽게 꺼진다”고?

마음 둘 곳. 마음을 두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한때 이데올로기에 마음을 두었고, 한때는 사람에게 마음을 두었지만 지금은 없다. 나의 거처는 나 자신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나 역시 있을 곳이 없다. 옆을 기웃거리게 된다. 외로움과 혼자임은 무관하다. 문제는 자기 충족적인 건강한 외로움이 아니라 불안하고 고립된 느낌이다. 외로운 사람이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외로워서가 아니다. 외로움 자체는 죄가 없다. 사회가 따뜻하다면, 외로움은 절실한 연대의 근거가 된다. 그런데 경험하다시피 현실은 외로운 사람을 이용한다.

살 만한 현실이 중력처럼 나를 붙잡아주면 좋으련만 세상이 썩었으니 그 끈도 위태롭다. 예전에는 종교에 몸을 맡기는 이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기복은커녕 위안도 되지 못하나 보다. “종교가 없다”는 한국인이 56%가 넘는다. 마음 둘 곳을 찾아 헤매다가 방황을 멈춘 이들의 결심, 대한민국의 자살과 우울은 상상 이상이다.

마음 둘 곳이 없는 상황은 몸(존재)을 둘 곳도 없다는 뜻이다. 우리말의 “몸 둘 바(所)를 모르겠습니다”는 겸양, 민망, 사과 등의 의미다. 내 몸이 차지하고 있는 작은 관짝만 한 공간조차 아깝고 부당하다는 자학의 뜻이다. 그런데 비유적으로 “죄송하다”는 의미 말고, 글자 그대로 실제 몸을 둘 곳이 없는 상태. 이것은 외로움을 넘어 존재의 위기다. 나는 어디에 있어야 적합한 사람일까. 타인과 세상에 민폐가 되지 않을까. 진로를 정하지 못한 이들의 스트레스가 이것이다. 자기 몸 둘 곳이 없는 사람에게 사회는 “눈으로 레이저를 쏘며”(‘눈총’에 대한 어느 청소년의 표현인데 실감 났다) 한심하게 여긴다.

나를 포함, 마음 둘 곳도 몸 둘 바도 없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이 잉여 신세임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음을 알고 있다. 자기계발도, 힐링도 속임수라는 것을 안다. 거기에 투자할 돈도 없다. 다른 쪽 사람들, 고령화사회에서 나이 들어가는 이들의 심정은 또 다른 서러움이다. 세상이 계속 “당신의 존재 자체가 사회문제”라고 하면? 고령화 대책은 좋은데, 그럴 때마다 ‘실제’ 고령인 사람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나는 ‘그들’과 동일시된다.

나의 송년 결론. 한 사람에게라도 의미 있는 사람이면 되지 않을까. 쓸모가 ‘생산과 건설’로 지구를 망치는 일이라면, 쓸모의 의미를 재규정하면 되지 않을까. 내 마음 둘 곳을 찾지 말고, 쉽지 않겠지만 남들이 마음을 둘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자. 이렇게라도 생각을 묶어두어야 새해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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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미 대선 과정에서 나온 도널드 트럼프의 대외정책 관련 발언의 요지는 ‘오바마의 정책은 안 한다(Anything but Obama)’로 요약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중국이 북핵문제를 풀 수 있는데 전혀 안 도와준다’고 북핵문제와 관련해 중국에 고강도 경고 메시지를 발신했다. 향후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이 오바마 정부의 ‘중국 역할론’을 답습하지 않을까 불안하다. 트럼프 시대에 북핵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기를 기대하는 우리로서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트럼프 정부 초대 내각의 안보라인이 국가안보보좌관 플린, 국무장관 틸러슨, 국방장관 매티스 등 대북 강경파 인사들로 채워짐에 따라 북핵문제 해결이 더 어려워지는 것은 아닌가라는 우려를 낳고 있다. 오바마 때보다 더 강경한 대북, 대중정책이 전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9월 미국 외교협회(CFR)는 북한이 5차례의 핵실험을 단행하고, 탄두의 소형화·경량화까지 달성한 것을 두고 오바마 정부의 북핵정책 결과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북핵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대화를 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트럼프의 북핵정책이 대화·협상 쪽으로 바뀌지 않으면 북한의 핵능력 고도화는 불을 보듯 뻔할 것이고, 우리는 결국 ‘핵을 머리에 이고 사는’ 처지가 될 것이다.

 

(출처: 경향신문DB)

 

‘중국 역할론’은 무엇이 문제였나? 중국 역할론은 ‘북한 선행동론’과 함께 오바마 정부 ‘전략적 인내’ 정책의 양대 축이었다. 오바마 정부도 임기 초에는 ‘9·19 공동성명’에 따라 북핵문제를 협상으로 풀려고 했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북한의 선비핵화’를 고집하는 바람에 미국은 2010년 가을부터, 북한이 선행동(핵폐기)하도록 중국이 역할을 할 때까지 인내하면서 기다리겠다는 전략을 추진했다. 협상을 통해서 성취해야 할 결과를 대화 개시의 조건으로 내건 바람에 북핵 6자회담은 열리지 못했다. 문제는 회담이 열리지 않는 동안 북한의 핵능력이 고도화·경량화·다종화됐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국 역할론은 북한 핵능력을 키워주었다. 중국 역할론이 북핵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기 때문에 트럼프 정부가 다시 북핵문제 해결책으로 이것을 들고나오는 것은 우려할 수밖에 없다. 중국 역할론과 ‘1+1’ 세트로 따라붙는 북한 선행동론도 트럼프 정부의 북핵정책이 되어서는 안된다.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핵카드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아야 한다. 그건 2005년 9월 베이징 6자회담에서 합의·발표된 9·19 공동성명에 명시되어 있다. 북한이 비핵화 대가로 받아내고자 하는 것은 미·북 수교, 일·북 수교, 대북 경제지원,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이다. 이를 남북한과 미·중·러·일이 만장일치로 합의했었다. 당시 언론들은 9·19 공동성명을 ‘북핵문제 해결의 로드맵’이라고 평가했었다. 그런데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외교협상의 말대로 이 합의는 몇 가지 이유로 결국 이행되지 못했다.

 

한 달 후면 트럼프 정부가 출범한다. 미국의 북핵정책은 5개월가량 공백기가 있을 것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국민적 관심이 온통 헌재의 탄핵 결정에 집중되어 있어 외교안보팀이 기존의 북핵정책을 습관적으로 밀어붙일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북한 핵능력 고도화를 막고 싶어도 때를 놓친다. 외교안보팀은 곧 물러날 박근혜 대통령이 아닌 국가에 의지하는 5000만 국민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으로 북핵문제에 대처해야 할 것이다. 야권은 권한대행만 견제할 것이 아니라 외교안보팀도 감시해야 한다.

 

북핵문제는 원리상 9·19 공동성명으로 돌아가야 해결된다. 그리고 그 결정권은 현실적으로 미국에 있다. 그런 점에서 북한의 선행동론이 아니라 미국의 선행동론에 입각해서 실마리를 풀고, 중국 역할론이 아니라 한국 역할론에 입각해서 한국이 미국으로 하여금 그런 선행동을 하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다.

 

황재옥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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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사과 한달째. 광화문에서는 100만명 이상의 꺼지지 않는 촛불이 횃불로 이어지고 있다. 뉴스는 아직도 대부분이 최순실의 국정농단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다. 대통령은 헌법과 국민을 무시하고, 국가원수와 군 통수권자로서 스스로 권위를 던져 버렸다. 언젠가부터 국내 포털사이트의 청와대 연관검색어는 비아그라, 발기부전, 프로포폴 등으로 바뀌었을 정도다.

2014년 3월6일, 필자는 학군장교로서 동기생 5860여명과 함께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 앞에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헌법과 법규를 준수한다’는 임관선서를 했다. 이날 대통령은 군 통수권자로서 우리에게 ‘선배 전우들의 소임을 이어받아 강한 애국심과 투철한 사명감으로 충성을 다해줄 것’을 주문했다.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그날의 뜨거움은 가끔씩 힘들었던 군 생활 속에서 필자를 잡아주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장병들이 믿고 기대야 하는 정신적 지주 격인 군 통수권자는 스스로 군의 사명감을 저해하고 장병들의 권위와 사기까지 붕괴시켰다.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를 목숨으로 지켜온 선배 전우들의 뒤를 이을 각오로 훈련 중인 장교 후보생단의 기개를 꺾어버렸다.지금 이 순간에도 전후방 각지에서 작전에 투입되고 있는 우리 용사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지휘관들은 과연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주변에 간신뿐인 군 통수권자는 최순실에게 국정을 맡겨놓고 얼이 빠져 있었는데 일선 지휘관들의 명이 서겠는가.

미국에서는 주한미군의 방위비 인상을 압박하는 트럼프가 당선되고, 북한은 한반도 평화를 저해하는 핵실험을 계속하는 일촉즉발의 위급한 안보상황이다. 군 통수권자는 장병들에게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지휘관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군기를 주문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국정 컨트롤 부재 상황에서는 그렇게 주문할 수 없다. 정치권은 하루빨리 국정을 수습해 ‘이러려고 군 생활하나’ 하는 자괴감을 장병들에게 그만 심어주어야 한다.

김용태 | 예비역 중위·고려대 대학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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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운전대를 잡는다. 한두번의 실랑이는 예고된 일. 자전거가 훅 지나간다. 대수로울 것 없는 일이지만, 못 보았냐며 한마디 한다. 이번에는 큰 돌덩어리가 보인다. 보고 있는 거냐고 한마디 다시 보탠다. 실은 나도 보지 못했고, 내가 운전해도 마찬가지라는 것, 나도 안다. 그러다가, 차가 도로의 언저리에 부딪혀 심하게 흔들린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쏘아붙인다. 그것 보라니까. 내가 말했지. 그리고 마치 정밀촬영이라도 해 둔 것처럼 충돌 상황을 파노라마같이 설명한다. 안다. 나도 보기는 했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목청만 높인다. 나는 알고 있었다면서.

11월9일 새벽, 트럼프의 당선이 확정되었을 때, 내 심리는 대략 이러했다. 갑작스러운 불안과 불확실에 흔들리면서, “거봐 내가 위험하다고 했잖아”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몇달 전 브렉시트 결정에 깜짝 놀랐을 때 내가 ‘흑조(black swan)’의 전조가 보인다고 이 칼럼에 적어 둔 것을 신속하게 기억해 냈다. 거기서 나는 세가지 탈출을 예고했는데, 첫째가 통상적인 좌우대립 정치구조로부터의 탈출, 둘째는 통상적인 경제학으로부터의 탈출, 셋째는 통상적인 ‘진보정책’으로부터의 탈출이라 했다. 딱히 나쁘지 않은 예측인 셈이고, 트럼프의 당선과 꽤 잘 맞아 떨어진다. 게다가 27년 전 오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것 보라니까.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하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한번도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주위의 동료들이 걱정할 때마다, 나는 당당하게 경제학 좌우의 단결된 목소리와 세계 최고 수준의 데이터와 예측기법에 빛나는 투표예측 결과를 들어 “릴랙스”를 외쳤다. 세상의 모든 ‘합리적이고 양식 있는’ 사람들이 반트럼프를 외치고 있다는 연대감도 자신감을 키웠다. 한국인인 나는 미국인들을 안심시켰고, 그들은 내 말에 안도했다. 나의 위로에는 ‘분석적 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는 ‘개뿔 같은’ 분석이었지만.

나심 탈레브의 흑조이론은 예기치 않은 ‘조그마한’ 사건이 질서를 재편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현상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사건을 대하고 분석하는 인간의 태도나 접근방식이다. 그 결과가 명백해지기 전까지는 일반적으로 이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통계적 ‘잡음’ 정도로 치부한다. ‘잡음’이 의외로 커지면, 추정식 자체를 의심하기보다는 데이터를 의심한다. 이런저런 통계자료를 써 보면서 ‘잡음’을 줄여본다. 트럼프의 성공이 계속되자, 나도 공화당원 표본의 ‘어이없는’ 편이에 실소했다. 전국적이고 대표적인 표본이 열리면, 그들은 무거운 현실을 고통스럽게 마주하게 될 것이라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다가 막상 그 사건이 판을 뒤집어엎는 ‘대사건’이라는 것이 명백해지면, 태도가 급속도로 바뀐다. 너나 할 것 없이 나서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이유를 찾아내느라 바쁘다. 이것저것 얽어서 분석틀도 만들어 낸다. 심지어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었노라고 하는 사람들도 나타나는데, 그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일종의 회고적 합리화다.

브렉시트 찬성 캠프와 트럼프 선거 캠프는 그동안 ‘반지성주의’로 비난받았다. 기본적인 사실이나 통계를 무시하고, 특정한 결과를 부풀렸다. 반대편에서 무수한 저명한 학자들을 동원해서 그것이 아니라고 해도, 지지층은 꿈쩍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지성주의’도 만만치 않았다. 영국의 저명한 주간지인 ‘이코노미스트’는 트럼프 대통령 시대가 번영의 분배를 소홀히 한 대가라고 비난하지만, 정작 그들이 ‘분배’의 중요성을 목놓아 외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지난 9월 중국 항저우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수많은 지도자들은 세계화의 ‘역풍’을 염려하며 ‘포용적인 무역’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누구도 트럼프 얘기를 입에 담지 않았지만, 그의 당선을 막기 위해 ‘모든 시민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세계화로의 변신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관료들이 협상하고 그들이 채택한 정상선언문에는 자유무역 보장과 보호주의 철폐만 강조되었다.

미국 대선 직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19명이 트럼프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들은 ‘근거 기반 정책결정’(evidence-based policy making)을 중시했지만, 그들의 경제학은 세계화의 역풍이 시민의 일상에 미치는 분석을 여전히 부수적으로 생각해 왔다. 트럼프 지지층의 사회경제적 곤란에 대한 언급조차 없던 이 성명서는 그저 클린턴이 더 똑똑하다는 뜻으로 읽혔을 것이다. 사실, 믿지 않겠다고 작정하면, 믿지 않을 이유는 넘쳤다. 경제학의 최고지성이 2008년 경제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다는 놀림은 의외로 파급력이 컸다. 이제, 트럼프 당선이라는 대사건을 예상하지도 못했으니, 졸지에 ‘헛똑똑이’로 확정된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370명의 경제학자들이 연이어 내놓은 성명서는 세계화와 무역의 문제를 따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트럼프는 무역협정이 국민소득과 부를 잠식한다고 말하면서 대중을 호도하고 있다. 물론 그 혜택이 균등하게 분배되지는 않았고 이것 자체가 중요한 논의 대상이지만, 1980년 이래로 평균 소득과 평균 부는 상당히 증가했다.” 저쪽은 분배효과를 따지자는데, 이쪽은 평균효과만 내세우는 꼴이다. 이쪽의 ‘지성’으로 저쪽의 ‘반지성’을 따지기가 궁색하다.

트럼프 시대의 ‘반지성주의’는, 사람들이 봐 달라고 하는 것들을 외면하거나 서둘러 의례적으로 답하는 ‘지성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도발이다. 트럼프 시대의 불확실성도 부분적으로 여기에 기인한다. 그동안 ‘지성’에 기대어 확립된 ‘정치적 올바름’도 그들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위선일 뿐이다. 그 결과는 엄혹하다. 무엇보다도, 인류가 피 흘리며 쌓아 올린 인권과 평등의 정신이 절대 위기에 처했다. 이를 지키는 싸움이 우리의 절대명제이다. 그러려면, 우리의 ‘고고한 지성’도 변해야 한다. 그들과 대화하는 방법부터 찾아야 한다. 그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분석하고 명백한 언어로 답해야 한다. 트럼프는 미국에만 있지 않고, 세계 곳곳에 숨죽이며 때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안다. 운전하는 아내에게 잘난 척 ‘지성’을 뽐내봐야 내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멸시의 눈빛뿐이라는 걸.

경제학 박사·‘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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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g20, 트럼프

광화문에 시민들이 모이고 있다. 지난 주말에는 약 20만명이 모였다고 한다. 1987년 6월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박근혜의 국민이었다는 사실에 치를 떤다. 박근혜가 대통령직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숨이 멎을 것 같다고도 한다.       

유체이탈 화법과 기만의 언어, 봉건적 권위와 여제적 행태로 채워진 ‘박근혜의 시간’은 국민에게는 자학의 시간이었다. 박근혜의 오만과 기만과 불법과 무능은 ‘우리가 도대체 지난 대선에서 무슨 짓을 한 건가?’라는 질문을 떠올리게 했다. 가슴속 깊이 파인 상처를 자학으로 가리고 있었다. 자학이 분노의 경계를 넘지 못한 것은 권력과 언론의 굳건한 ‘협업’ 탓이었다.

굳건한 협력의 빗장을 풀고 은폐의 육중한 문짝을 열어젖힌 것은 흥미롭게도 보수권력이 자신의 입으로 삼고자 했던 종편방송이었다. JTBC가 확보한 최순실의 태블릿PC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면서 박근혜의 시간은 최순실의 시간으로 확인되었다. 드디어 시민의 자학은 거대한 분노로 바뀌었다. 등에 배반의 칼 하나씩 꽂힌 채 망연자실한 시민들에게 대통령은 마음 없는 성명서를 독백처럼 읊조리고 들어갔다. 총리를 일방적으로 지명하고, 국회의장실의 카펫을 패션쇼의 런웨이 걷듯 휘돌아 나왔다. 자신의 거취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었다.

5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을 든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아주 오래된 기만, 아주 익숙한 대통령의 오만을 다시 떠올리며 이제 시민들은 거대한 저항행동에 돌입했다. 2016년의 시민항쟁이 시작되었다. 모든 역사적인 저항행동이 그렇듯 시민항쟁은 불만이 누적된 결과다. 불만의 직접적 계기가 무엇이든 시민항쟁의 근저에는 피폐한 경제와 고단한 시민의 삶이 있다. 청년의 미래를 닫아 버리는 수저계급론과 헬조선의 현실, 심각한 양극화와 불평등, 줄어드는 소득과 늘어나는 부채, 노동계를 압박하는 재벌·대기업 친화정책, 모든 세대가 불안을 벗을 수 없는 현실 등이 저항의 심층에 시퍼렇게 자리 잡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사태에 대한 시민의 분노와 저항의 뿌리는 그만큼 깊다.

지난 주말부터 대규모 저항의 물꼬를 튼 시민의 물결에서는 냉철한 이성적 분노가 감지된다. 광장의 시민들은 질서 있는 ‘이성적 군중’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시위군중의 표정이 밝다.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군중이 아니다. 배신의 칼을 맞은 시민의 표정이 왜 이토록 밝은가? 오랜 자학의 시간에서 벗어난 ‘해방감’ 때문일 수 있다. 독재자의 딸을 선택한 자학과 세월호, 메르스, 경주 지진으로 이어지면서 누적된 불안의 원천이 온전히 드러나면서 일종의 해방감을 맛보는 듯하다. 덧붙일 수 있는 설명 하나는 ‘자신감’이다. 성공에 대한 확신과 승기를 잡았다는 자신감이 그것이다. 5%로 곤두박질친 대통령 지지율과 보수언론의 변화를 보며 광장의 시민들은 끊임없이 “더 모여야 된다”고 서로를 독려한다.

2016년 항쟁의 시민들에게 인지된 기회구조가 자신감으로 표출되고 있다. 저항행동에서는 주어진 기회구조를 운동주체가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정부의 통제역량에 대한 인지가 중요하며, 동시에 자신들의 조직과 동원의 역량에 대한 인지 또한 중요하다. 말하자면 광장에 모인 군중의 밝은 표정에는 적을 알고 나를 안다는 냉철한 이성이 담겨 있고, 이제 새로운 기회를 열 수 있다는 희망이 담겨 있다. 그래서 2016년의 시민항쟁은 어느 때보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 가능성이 높다. 거대한 군중의 냉철한 이성과 고도의 집단지성이 비추는 렌즈 앞에선 어떤 것도 숨길 수 없고, 어떤 것도 피해갈 수 없다. 국민을 배반한 권력의 마지막 꼼수도, 정치권의 주판알 튕기기도, 궤변의 책임논리나 돌발적 소영웅주의도 시민의 눈을 속일 수 없다.

박근혜의 모래시계에서 마지막 모래알이 흘러내리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이 직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국정공백, 헌정중단보다 더 큰 재앙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다. 그래서 민심과 공감하는 야당의 역할이 중요하다. 시민들은 국정의 정상화를 기대하며 그 역할을 야당이 떠안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야당에 대한 새로운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사로운’ 정치에서 시작된 위기이기 때문에 사사로운 잇속을 노리는 정치는 이 국면에서 가장 예리하게 포착될 것이다. 야 3당은 오로지 시민의 뜻에 따라 국정을 정상화하는 길을 올곧게 선택해야 한다.

경제 위기와 트럼프의 미국 대선 당선은 우리에게 새로운 변화를 주문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 급박한 현실을 자신이 물러나지 않아야 할 이유로 들이대는 것은 반상식과 비정상의 절정이라는 것을 시민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국민의 힘을 보여줘야 한다. 이 싸움에서 물러나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야 한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나쁠 순 없다.

조대엽 고려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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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친박 지도부가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을 계기로 정국 반전을 꾀하고 있다. 이른바 ‘트럼프 리스크’를 부각하며 내부가 분열하면 난국을 헤쳐갈 수 없다고 바람잡이에 나선 것이다. 박 대통령은 어제 트럼프 당선자와의 통화에서 그의 방한을 요청하며 “만나기를 고대한다”고 말했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박 대통령이 군통수권도 총리에게 넘겨야 한다는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의 발언을 반헌법적인 발상이라고 역공했다. 새누리당은 또 간담회 등을 개최하면서 ‘트럼프 비상체제’를 내세우고 있다. 박 대통령과 친박 지도부가 트럼프 문제를 내세워 위기를 덮으려는 것이다.

한 시민이 10일 서울역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이날 통화를 했다는 뉴스채널 보도를 지켜보고 있다. AP연합뉴스

트럼프의 예상 밖 당선으로 한·미관계 변화에 대한 대비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곧 퇴진 직전에 놓인 박 대통령이 통치 일선에 복귀하는 명분이 될 수는 없다. 박 대통령은 지금 비선 실세 최순실씨 국정농단의 몸통으로 드러나고 있다. 최씨의 축재를 소극적으로 허용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세세한 부분까지 직접 지시했다고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실토했다. 그 결과 시민의 불신임을 받고 여야가 추천하는 총리에게 국정을 맡기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그런데 이제 와서 뜻밖의 미국 대선 결과로 대외정책이 중요해졌다며 일선에 복귀하겠다는 것은 누가 봐도 억지다.

군통수권 등 외치가 오로지 대통령 몫이라는 여당의 주장도 지나치게 형식론적인 해석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박 대통령이 외치에 나서는 것이 오히려 부적절하다.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할 대로 당해 위신이 깎인 데다 통치권을 거의 잃은 박 대통령이 외교무대에 나선들 어떤 상대가 박 대통령과 진지한 대화를 하겠는가. 시민의 지지를 잃은 껍데기 대통령이 국가안보와 시민의 생명을 좌우할 외교·안보 문제를 결정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게다가 지금 불안을 초래하는 것은 외교·안보 현안만이 아니다. 경제와 민생 등 허다한 과제가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다. 이들 현안을 외치와 내치로 분리해서 대응한다는 것은 상상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제는 김진현·박세일 등 보수계의 원로들까지 박 대통령이 리더십을 상실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문제를 앞세워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이다. 박 대통령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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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도널드 트럼프는 지난 8월 자신의 트위터에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라는 글을 올렸다. 오바마는 최근 한 방송에 출연해서 이 글에 대해 “적어도 나는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라며 트럼프에게 일침을 가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작다는 점을 비꼰 동시에, 자신의 대통령직 수행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낸 말이다.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박근혜.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박 대통령 역시 대한민국 대통령 중 한 명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트럼프가 박 대통령에게 저 말을 한다면 박 대통령은 오바마처럼 응수할 수 있을까. 그러기 어려울 것 같다.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 미래의 역사교과서에 박근혜 대통령의 이름과 비선 실세의 이름이 나란히 쓰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10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의혹'과 관련한 대국민사과를 한 뒤 돌아서고 있다. ㅣ청와대사진기자단

하지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는 역사교과서의 한 대목이라기보다는 어느 추리소설의 후반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최순실’이라는 퍼즐 조각 하나를 집어넣었을 뿐인데 거짓말처럼 모든 일이 맞아떨어지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하나의 꾸며진 소설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역사라는 데 있다. 국정농단의 장대한 플롯을 접하며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지적 흥분이 아니라 크나큰 허탈감과 수치다.

무엇보다 당혹스러운 것은 대통령이 알고 보니 주체성이 부족한 연약하고 의존적인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은 최태민 일가가 조종하는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처럼 그려지고 있다. 다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다. 지금 국민이 보는 대통령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개인이 아니다. 짜인 각본 안에서 남이 써준 대사를 앵무새처럼 읊는 무기력한 연기자다. 그것도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보인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정신분석학에서 이야기하는 ‘자기대상(selfobject)’ 개념을 잠시 빌려와 보자. 자기대상은 타인이 온전히 자신의 일부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분리된 것도 아닌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정신분석학자 하인즈 코헛이 고안한 용어다. 자기대상의 발달은 유아기에 시작한다. 유아는 충분히 안정된 자기를 확립하지 못한 상태여서 성숙하기 전까지 정신구조의 일부 기능을 대신 맡아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어려서는 부모가 이 역할을 한다. 모든 것을 아이에게 맞추고 아이를 적절히 진정시키며 아이의 생각과 감정을 거울처럼 일일이 반영해준다. 이를 통해 아이는 일종의 전능감을 맛보게 된다. 코헛은 이러한 공감 경험이 건강한 자기애의 근간이 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까지고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지는 않는다. 현실 속에서 단계적으로 적정 수준의 좌절을 경험하면서 유아의 자기대상은 원시적인 형태에서 더 성숙한 형태로 점차 발전해 나간다. 이것이 코헛이 말하는 심리적 성숙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런 과정을 정상적으로 겪지 못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가령 양육자의 공감이 현저히 부족했거나 심각한 트라우마가 있었다면 심리적 발달이 저해된다. 또는 수족처럼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는 존재가 계속 곁에 있을 경우에도 유아기적 전능감은 적절히 포기되기 어려울 수 있다. 장기간 고립되어 지내는 것도 자기대상의 원만한 변형과 발전을 어렵게 한다. 부모에서 친구로, 연인에서 배우자로, 스승이나 동료, 때로는 자식에게로 자기대상의 초점이 자연스럽게 옮겨가는 과정이 결여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최태민과 그의 자녀들, 그중에서도 최순실은 오랜 세월 박 대통령의 자기대상 역할을 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것도 건강하지 못한 자기대상이었을 공산이 크다. 박 대통령과 최순실의 관계는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모자공생을 연상케 한다. 이런 밀착된 관계에서는 자기 생각과 타인의 생각, 자기 감정과 타인의 감정이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대통령의 주체성이 심각하게 훼손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에서 언급한 ‘순수한 마음’은 현실의 복잡다단함을 제대로 대면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맞춰주기만을 바라는 유아기적 욕망에 가깝다. 대통령의 생각이 여전히 ‘순수’에 머물러 있다면 이는 개인의 불행이자 시대의 비극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제라도 박 대통령이 국가 통치에 앞서 자기 자신을 책임지는 개인으로 다시 태어나 정치의 전면에 설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용기와 결단력, 사고력이 대통령에게 남아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기대는 크지 않다. 심리적 성숙은 그리 단기간에 이룰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김성찬 |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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