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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5.04 [정윤수의 오프사이드]그들의 링엔 처절함이 없었다

▲ 싱겁게 끝난 ‘세기의 대결’
링은 냉혹한 현실의 축소판
다 이룬 뒤 늦게 만난 두 사람
‘패자’ 없는 이상한 경기로


오하이오주립대학을 다니면서 조정, 육상 그리고 무엇보다 권투에 매료되었던 조지 벨로스는 훗날 화가가 되었을 때 이 스포츠를 통하여, 특히 사각의 링, 바로 사투를 벌이는 권투 장면을 강렬하게 묘사하여 20세기 초엽의 미국 사회를 증언하였다. 그가 그린 권투 장면들은 냉혹하고 음산하고 선혈이 낭자하였는데, 사람들은 곧장 그가 권투를 통하여 미국 사회를 묘사한 것임을 알아챘다. 그도 그럴 것이 벨로스는 산업사회의 살벌한 경쟁 시스템 안에서 하나의 볼트와 너트로 소모되고 분쇄되는 노동자계급의 처지에 서서 시카고와 뉴욕이라는 비열하고 살벌한 도시를 응시하였던바, 그는 사각의 링을 통해 미국 자본주의의 ‘쌩얼’을 묘파하고자 했다.

마침 1923년에 거의 불법적인 내기 싸움에 가까웠던 권투가 뉴욕을 시작으로 합법화되고 금세 이 격렬한 스포츠는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동서를 횡단하며 처절한 인기를 얻고 있었다.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의 주인공 윌리 로먼 같은 사람들, 그러니까 시골에서 대도시로 상경하여 무한 경쟁에 뛰어들었던 사람들, 오로지 믿을 것은 제 몸 하나밖에 없던 사람들이 이 스포츠를 통해 시뻘겋게 달아오른 자신의 초상화를 본 것도 이 무렵이다.

사이먼 앤드 가펑클이 부른 노래 ‘더 복서’도 바로 생애를 다룬 장려한 서사시다.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집과 가족을 떠난 어린 소년’은 대도시의 ‘헛된 말로 가득 찬 약속, 그 거짓과 농담’에 패퇴하고 만다. ‘막노동이라도 하려고 돌아다녔지만 싸구려 술집의 아가씨들만 유혹의 손짓을 할 뿐’인 도시에 밀려난 소년은 결국 귀향을 마음먹게 된다. ‘살을 에는 듯한 뉴욕의 차디찬 바람’이 불지 않는 곳으로 떠나려 하는데, 저기 권투 선수가 고독하게 서 있다. 다들 분노와 수치심에 사로잡혀 이 도시를 떠나려고 하지만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그는 여전히 서 있다. 또 다른 링을 기다리며 그는 서 있다. 이 거룩한 노랫말이 끝나면 마치 고독한 선수를 위로하고 그 소년을 격려라도 하는 듯 이 위대한 곡의 후렴은 장려한 교향시로 펼쳐진다.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위엄 있는 허밍과 함께.

미국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스포츠를 이전받은 세계 곳곳의 사람들에게 권투는 그런 것이었다. 링은 현실의 냉혹한 축소판이었다. 모두가 저마다의 피 말리는 생존 경쟁을 치르고 있으므로 링 위의 선수는 그 자신의 대리인이었다. 저 권투 황금시대의 챔피언들, 그러니까 김기수, 유제두, 홍수환, 박찬희, 장정구, 문성길 등은 거친 세상과 단독자로 맞서야 했던 70, 80년대 사람들의 초상화였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걸작 <성난 황소>가 있다. 실존했던 권투 선수 제이크 라 모타의 거친 삶을 로버트 드 니로가 열연한 작품으로 단순히 권투 영화라고 할 수는 없는, 세상의 공전과 자기 삶의 자전이 엇갈리고 뒤틀린 자의 고통과 회한을 다룬 작품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몸집이 불어난 왕년의 챔피언 로버트 드 니로가 독백한다. “아직도 귓가에 그 환호성이 들리는군. 몇 년 동안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맴돌았지. 내 삶은 순탄치 못했어. 내 비록 많은 관중들의 갈채를 받긴 했지만, 셰익스피어에 흠뻑 취해서는 내 왕국이 영원할 줄 알았지.”

그런 독백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화면은 젊은 날의 드 니로가 상대방의 강펀치를 맞고 얼굴이 연거푸 돌아가는 장면으로 이어지면서, 곧 이 선수의 거친 삶, 아니 우리 모두가 치르고 있는 이 냉혹한 대도시의 삶이 펼쳐진다. 단 한번만이라도 나의 링에 올라서, 딱 한번만이라도 내 안의 모든 것을 불살라버리고자 했던, 그러나 그런 ‘정면 승부’의 기회조차 주지 않는 대도시에서 쓸쓸히 살아가는 삶 말이다. 영화의 끝에서, 왕년의 챔피언이 다시 독백을 한다. “난 권투 선수였지. 이렇게 동네 깡패가 아니라 정말 뭔가가 될 수도 있었다구. 정면승부하자. 그랬어야 했어. 난 챔피언이라구. 난 보스라구. 보스. 보스.” 그러고는 허름한 클럽의 무대에 선다.

권투에는 이런 복합적인 감정이 뒤엉켜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를 제대로 확인할 겨를도 없이 ‘세기의 대결’로 기대를 모았던 메이웨더와 파퀴아오의 경기는 싱겁게 끝났다. 권투 하면, 거침없이 몰아붙이는 인파이터와 이를 요령껏 피하면서 예리한 카운터펀치를 작렬시키는 아웃파이터를 연상하기 쉬운데, 일단 메이웨더와 파퀴아오라는 조합은 이런 극적인 순간을 기대케 하였다. 피를 흘리며 큰돈을 벌었으되, 그것을 화려하게 쓰는 ‘악마’와 사회에 기부하며 선행하는 ‘천사’의 대결이라는, 조금은 과장된 캐릭터도 그런대로 잘 형성되었다. 그런데, 현지 언론의 촌평대로 스테이크를 기다렸는데 샐러드만 먹다가 끝난 경기였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두 선수 모두 권투라는 스포츠가 허락하는 규칙을 엄정히 다 지키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능력과 전략에 따라 경기를 풀어갔으며 특히 메이웨더는 노련하게 지지 않는 경기 운영을 했다고 한다. 일리 있는 지적이지만, 역사적이거나 세기적인 대결에 등재될 만한 경기는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너무 늦게 만났고, 모든 것을 다 이룬 다음에 만났으며 지지만 않는다면 잃을 게 전혀 없는 링 위에서 만났다. 이긴 자는 있지만 패자는 없는, 이상한 경기가 되었다.

그 바람에, 아직 자기 삶의 처절한 링 위에 있거나 아니면 여태 자신의 링조차 제대로 가져보지 못한 사람들이 고대했던 삶의 비극적 순간은 작렬하지 않았다. 단 한번만이라도 자기의 링에 올라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완전히 연소하고 싶은 이 세계 모든 도시인들의 활활 타오르는 욕망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경기였다. 모든 것을 이루고, 모든 것을 획득한 자들이 안전하게 운영한 경기는 이 야만적인 시대의 거친 삶과 무관해 보였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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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