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지 않다. 한 청와대 남성 행정관의 ‘부적절한’ 책, 그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요구한 여성 의원에 대한 일부 남성들의 비난과 공격. 묵언수행하듯 버티고 있는 당사자. ‘보편적’ 한국 남성의 정서를 반영한 예측 가능한 행동이었기에 솔직히 그리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정작 실망스러운 것은 당사자를 끼고 도는 몇몇 높으신 분들이다. 성차별적 가치관을 가진 인물이 국정운영에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것에 큰 문제의식이 없는 듯하다.

이 정권의 탄생을 눈물겹도록 반기고 지원하고, 성공하길 기원하는 한 시민으로서 주요 인사검증 과정에 ‘성평등’이란 요소를 꼭 고려할 것을 고언한다. 물론 평등의식은 가치관이라 검증이 쉽지 않을 터. 추후 구체적인 평가 리스트를 만들어야 한다.

고려해야 할 이유는 단순하다. 진보의 갱신, 이를 통한 문재인 정권의 성공,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위해서다. 안보와 경제관만이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잣대가 아니다. 글로벌 다문화사회에서 젠더와 인종, 섹슈얼리티는 사회적 지위를 새롭게 만들고 차별을 심화하는 주요한 사회적 축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과거의 분할선에만 집중한다면 이 정권을 탄생시키는 데 기여한 수많은 시민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직조하는 불평등 구조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심화·재생산할 가능성마저 있다.

무엇보다 잘못된 분배가 야기하는 양극화와 계층의 공고화는 사실 차이에 대한 불인정 및 무시와 긴밀히 연관된다. 예를 들어 여성들이 겪는 성적 대상화, 성적 희롱, 성폭력, 성매매 등의 문제는 무시, 경멸, 비하, 혐오 등 ‘여성’에 대한 오랜 문화적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한 인식은 성별직종 분리, 임금격차, 유리천장 등 노동시장에서 여성들이 겪는 부정의를 생산하고 정당화한다. ‘여성의 일’이라 여겨지는 자리에 배치되는 그 여자는 일터에서조차 동등한 노동자가 아니라 ‘여성스럽기-여성스럽지 않기’를 모순적으로 강요당하며, 희롱의 대상이 되거나 마침내 “먹히는” 대상이 된다. 공사영역을 넘나드는 여성들의 이중노동 또한 이러한 두 가지 영역의 차별이 연결된 전형적 현상이다. 그저 남성성과 여성성 간의 평면적 차이가 아니다.

임신한 선생님이 생산과 재생산 노동에 힘겨워하는 시민이 아니라 “섹시한 여자”로 인식되는 이유는 남성 욕망의 배출구로 취급되는 젠더관이 보편적 남성문화였기 때문이다. 자신은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거의 하지 않으면서, ‘프로정신’이 없어 여자들은 뽑고 싶지 않다, ‘뽑으려 해도 인재가 없다’고 말하는 남성들, 여성에게 성적 모욕과 폭력을 일삼는 룸살롱 단골 아저씨들, 이들이 ‘사회지도층’인 것은 우연적 모순이 아니라 필연이다.

저출산 정책과 일·가정 양립 정책은 물론 노동 정책 전반에 젠더관점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분배 부정의를 교정한답시고 내놓는 정책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평등의식, 인권의식을 장착하지 못한 차별주의자들이 정책 ‘과정’의 주요 작인이었기 때문이다. 부디 이번 정권에서는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여성이 한 번도 동등한 시민으로 평등권을 전면적으로 보장받지 못했다는 인식이 출발선이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평등은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이자 민주주의 ‘과정’의 가장 중요한 목표 아닌가. 평등이 사회적 합의란 명목으로 미뤄질 문제인가. 자신의 무지함을 만천하에 공공연히 ‘자랑질’하는 자가 민주주의 공고화에 어떤 기여를 할까. 과거 친구들과 낄낄거리며 나누었던 그 대화가, 남성문화 속의 일상적 언행들이 실제 여성들의 삶에, 불평등의 공고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모르면서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는 분을 보필할 자격이 있는가.

이제야말로 이 정권의 일꾼들은 성평등, 반차별이 가장 중요한 사회적 가치, 민주주의의 근간임을 천명하고 실천하시라. 정파적으로 혐오발화를 판단하고 모순적으로 용인하며, 발화자에게 관용을 베푸는 순간, 혐오집단은 ‘우리’ 내부에 깊숙이 씨를 뿌리고 성장하게 될 것이며, 결국 이 정권의 성공에 아니, 민주주의 구현 과정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개인의 ‘고매한’ 인품과 윤리, 도덕을 따지는 자들이 아니다. 신상털이를 통해 개인을 단두대로 보내자고 요구하지 않는다. “누구도 자유로울 자 없다.” 백번 옳은 말이다.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고 과거의 어떤 행위가 현재적 관점에서 볼 때 죄가 되기도 한다. 문제는 과거의 부정의한 구조에서 비롯된 자신의 행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성찰하는 태도다.

잘못을 복기할 기회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사람은 달라진다. 성장은 여기서 일어난다. 그래야 ‘진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성도덕주의자로 위장한 자기분열적 혐오주의자들, 차별주의자들, 범죄자들과 어떻게 차별화할 것인가. 시민들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진부한 남성연대를 혁파하고 평등을 기준으로 보수 남성들을 갈라내는 과정을 진심으로 보고 싶어할 것이다. 2017년 아닌가!

이나영 중앙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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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국립생태원장으로 재직 중이었던 진화생물학자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를 인터뷰했을 때 슬그머니 물었다. “페미니스트들은 진화론을 여성비하적이라고 비판하는데….” 최 교수는 몇몇 학자들이 잘못 소개했다고 했다. 최 교수는 2004년 여성단체연합으로부터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받았다. 과학적 근거로 호주제 폐지에 대한 정당성을 제시했다는 공로였다.

최근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서 사퇴한 안경환 서울대 교수의 책 <남자란 무엇인가>가 여성비하적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몰래 혼인신고’ ‘여자와 술’ 같은 내용은 비판을 받을 만하다. 이 부분은 빼고 진화론과 관련된 부분만 보자. ‘진화심리학적으로 보면 남자는 여자의 유혹에 약하게 진화되어 있다. 여자는 생존을 보장해주는 한 남자와 안정된 관계 속에서 자녀를 양육하는 데 관심이 쏠려 있지만 난교는 남자의 생래적 특징이다.’

난교가 남자의 본성? 페미니스트, 아니 (남성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발끈했다. 진화론은 정말 남성의 바람기를 정당화하는가?

최재천 국립 생태원장. 박민규 기자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후손, 즉 DNA를 남기려고 한다. 이게 진화 법칙의 골자다. 에드워드 윌슨은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썼다. 윌슨은 최재천 교수의 스승이다. ‘여성은 평생 겨우 400개 정도의 난자만을 생산할 수 있다. 이 중 기껏해야 20개만이 건강한 아기로 태어날 수 있다. 갓난아이를 나이가 찰 때까지 기르고 그 후에도 보살피는 데 드는 비용은 상대적으로 엄청나다. 반면 남성은 한 번 사정할 때마다 1억마리의 정자를 방출한다.’

남성은 자신의 DNA를 될 수 있는 한 많이 퍼뜨리려는 경향이 있다는 거고, 여성은 남성이 아이만 낳고 육아에 힘을 보태지 않을 경우 낭패를 당할 위험이 있어 믿음직한 남자를 고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도‘남성에게는 일반적으로 난혼 경향이 있고 여성에게는 일부일처제의 경향이 있다’고 했지만 인간사회의 진화는 문화적이라고 했다. ‘난혼 사회도 있고 하렘제에 기초한 사회도 많다. 이 놀랄 만한 다양성은 인간의 생활양식이 유전자가 아닌 오히려 문화에 의해 주로 결정됨을 시사하고 있다.’(<이기적 유전자>)

페미니스트들은 진화론, 특히 진화심리학을 비판하는 것은 많은 가설이 그 복잡한 남녀관계, 성 인식 문제를 번식에만 초점을 맞춰 설명한다고 비판한다. “남자가 다 바람둥이가 아닌 것처럼, 여성도 번식이 아닌 즐기기 위해 섹스를 한다고!” 더 중요한 것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본성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수컷의 바람기가 본성이라면 바람피운 남편을 무조건 용서하라는 거야?”

사실 남성과 여성의 본성이 있다는 생각은 성적 역할을 나누는 논리로 이용돼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남성은 적극적이어야 하고, 여성은 신중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건 남성은 중요한 자리에서 리더적 자질을 발휘해야 하고, 여성은 집안살림을 잘해야 한다는 얘기로 변형된다. 페미니즘은 그동안 수많은 노력을 통해 무너뜨리려고 했던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진화론이 자칫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복구시킬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우려도 있다. ‘과학적 방법은 반복해서 말함으로써 사실처럼 들리게 하는 것이다. (중략) 처음에는 세계를 바라보는 특정한 방식처럼 보이던 것이 이론의 여지가 없는 믿음으로 굳어지는 것이다.’(<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

진화론은 본성이라는 이유로 남녀차별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성평등 시각도 있다.

진화론자들은 수렵채집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생존에 중요하다고 본다. 세라 블래퍼 허디는 <어머니의 탄생>에서 ‘(중략) 최고 사냥꾼의 아이들이 잘 먹는 까닭이 아버지가 더 많은 고기를 가져다주어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가장 뛰어난 채집자와 결혼하는 데 성공해서였다’고 썼다. 진화론에 비춰보면 동성애도 자연계에 흔한 현상이다. 최재천은 동물의 동성애 현상을 관찰한 책이 작은 백과사전 두께만 하다고 했다.

성 차별은 과학이 아니라 역사적·사회적·문화적으로 힘의 역학과 권력 관계 속에 생겨난다. 이동성이 중요하고, 타 부족과 갈등할 수밖에 없는 유목민족의 경우 상대적으로 남성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성평등적인 부족사회에서 중앙집권적인 군장사회로 발전하면서 통한 정복의 역사가 진행됐고, 남성의 권력이 강화됐다. 현대사회에서는 상급자 여성이 하급자 남성을 성희롱하기도 한다.

과학 자체에는 선악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과학적 증거는 높은 설득력을 얻고 진실로 받아들인다. 반대로 생각하면 과학을 말할 때는 더 신중해야 한다.

최병준 문화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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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적이되 감동적이다. 지난 몇 주간 새로운 대통령의 행보다. 5·18 유가족과의 눈물의 포옹이 그 정점에 있다. 근현대사에서 우리 스스로가 생산하고 억압한 사회적 타자들의 다친 마음을 감싸는 대통령의 행동은 사실 생경하면서 감격적이었다. 시민들은 벅차고 야당은 당황스러울 것이다. 슬퍼서 울고, 기뻐서 울고, 감동받아 우는 시민들은 자연스레 하나의 연대체를 구성하게 된다. 이전 정권의 경직성과 폐쇄성이 새 대통령의 비의례적이되 적극적 소통의 행보로 더 도드라지는 이 풍경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행복하게 한다. 비로소 ‘비정상의 정상화’가 이루어지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페미니스트’ 대통령으로서의 약속이 바로 그것이다. 문재인 정권이 대한민국 최초로 페미니스트 정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5.18 유가족인 김소형씨를 위로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우선 조직이다.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오랜 여성운동의 산물인 여성가족부를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젠더는 그저 생물학적 남녀를 가리키는 ‘양성’이라는 단어에 갇혔고,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들은 성별 간 기계적 구분을 위한 업무로 여겨지는 사이, 아이돌 스타들의 치마길이나 감시하는 ‘조리퐁’ 정부기관이라는 꼬리표가 내내 따라다녔다. 진보적 여성운동과 페미니스트 집단 전체가 오해와 불신의 불똥에 화상을 입었다. 그 정점에 성평등 의식이 부재한 반(비)페미니스트 수장들과 고위 공무원들이 있었다. 다행히 이번 정권은 여성가족부의 위상 강화와 더불어 대통령 직속 성평등위원회를 만든다고 하니 반가운 일이다. 이참에 여성가족부의 예산이나 업무 범위를 확대하는 것은 물론 모든 정부부처의 정책들을 성평등 관점에서 견제하고 조정할 수 있는 성평등위원회의 역할을 기대해 본다. 페미니스트 수장들에 의한 강력한 조직 장악력과 실천력은 필수다.

둘째, 적절한 인사다. 청와대 인사수석에 조현옥씨, 보훈처장에 피우진씨, 외교부 장관에 강경화씨를 지명한 점은 놀라움을 넘어선 인사다. 통상 ‘여성’의 자리에 생물학적 ‘여자’ 한둘을 배치하던 관행에서 벗어났고, 그들이 실질적 여성인권 향상에 헌신해 오신 분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인사에서 여성들을 적극 고려하고 있다는 징후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노골적인 여성비하 언사로 문제가 되는 남성은 청와대 행정관에 임명하면서 여성 인재풀이 약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기가 찬다. 우리에게는 현장에서 일생을 헌신하신 언니들의 계보가 있다. 평생을 페미니스트로 자기 갱신을 거듭하며 삶을 살아낸 선배들이 있다. 학연, 지연, 혈연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투쟁의 장에서 이루어진 동지의 연이 있다. 제발 페미니스트들의 계보를 읽고, 이들의 경험을 높이 사는 인사가 되길 바란다. ‘명목상 여자’로 살면서 평생 갖은 이익을 누린 자가 아니라 다층적 불평등과 싸우며 평등 감수성을 체화하신 분, 남성들의 연줄 문화 속에서 숙주처럼 살며 만든 스펙에 주눅 들지 않는 강단을 지닌 분을 적극적으로 찾아내시길 바란다. 바로 그분이 더 나은 미래의 상상력을 지닌 적임자다.

셋째, 내용이다. 지난 대선 기간 동안, 여성단체들은 성평등 구현을 위한 과제들을 다각도로 제시해 왔다. 5대 핵심과제와 20대 주요 과제들이 대표적이다. 현 시점에서 필자가 생각하는 우선 과제를 몇 가지만 꼽으면 다음과 같다. 대표성 제고와 성평등 추진체계 내실화는 앞에서 언급했으므로 뺐다. 모든 평등의 출발이자 헌법 정신을 구현할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노동정의의 출발인 동일노동·동일임금 실현과 이를 통한 성별임금격차 해소, 재생산 정의 실현을 위한 낙태죄 폐지 및 현행 저출산, 육아, 보육, 일·가정 양립 정책 전면 재검토, 포괄적 젠더폭력 방지체계 및 법제도 마련(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 성희롱, 스토킹, 데이트강간, 아내강간, 온라인 등 미디어의 성적 대상화 등 포함), 혈연중심의 봉건적 가족관을 넘어선 이주민, 한부모, 동거 가족 등 다양한 가족 지원 정책 등이다.

페미니스트는 생물학적 성으로 결정되거나 선언만으로 구현되는 정체성이 아니다. 여성이라는 집단이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멸시당하고 조롱의 대상이 되며, 성적 착취를 당하고 차별받으며 폭력의 대상이 되다 마침내 죽어도 혹은 죽어야 되는 존재로 취급당해 온 역사적 사실과 사회적 조건에 대한 깊은 분노, 그 부당한 체제를 변혁하고자 하는 열정의 구현 과정에서 ‘자라나는’ 정체성이다. 필자는 그간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문재인 대통령이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과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고 있다. 이제 불평등한 젠더체제로 고통받는 타자들의 경험에 진심으로 다가갈 때다. 성평등이 민주주의의 완성이다!

이나영 중앙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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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17일. 강남역 인근에서 한 여성이 살해됐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사건이 알려지자 여성들은 강남역 10번 출구로 모여들었다. 색색의 포스트잇이 붙었다. 슬픔과 공포, 분노의 마음들이 그려졌고, 당신이 바로 나라는 고백, 잊지 않겠다는 다짐, 이 세계를 바꾸어나가겠다는 약속 등이 빼곡하게 적혔다. 무고한 죽음에 대한 애도가 변화에 대한 열망으로 번져갔던,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의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1년이 흘렀다. 우리에게 그 1년은 어떤 시간이었을까? 무엇보다 한국 사회가 페미니즘으로 요동쳤다. 2015년 온라인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일었던 페미니즘 운동이 드디어 거리로 나섰다. 다양한 단체들이 결성되었고, 담론은 확장되었으며, 페미니즘 시장 역시 형성되었다. 각성하기 시작한 페미니스트들은 촛불광장에도 참여했다. ‘페미존’이 만들어지고 다양한 깃발이 나부꼈다. “나라 바꾸는 계집, 호모, 가난뱅이, 페미”가 등장했다. 그야말로 “페미니즘이 민주주의를 완성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현실로부터 비롯된 한계 역시 존재했다.

한 페미니스트가 ‘강남역 10번 출구’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그는 추모 공간에까지 찾아와 혐오발화를 서슴지 않았던 한 남성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고 사라졌다. 그는 논쟁을 끝내고서야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분홍색 마스크였다. 얼굴이 찍혀 신상이 털리거나 조리돌림 당하지 말라는 마음. 많은 여성들이 그 마음에 공감했을 것이다.

지난해 5월 20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지난 17일 새벽 인근 공용화장실 살인사건으로 희생된 여성을 추모하는 글들이 빼곡히 붙어 있다. 강윤중 기자

여기에 그 현실이 놓여있다. 추모조차 안전하지 않은 곳이 바로 우리의 세계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현실이 있다. 우리가 지나치게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이야기되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다. 우리의 두려움이 과도하다는 말은 아니다. 두려움이 사슬이 된다는 의미다. 얼굴을 가리는 것이 비겁하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그보다는, 어떻게 얼굴을 되찾을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떤 얼굴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여성들의 공통 경험, 그 기억이 일상적인 공포라는 사실은 우리의 운동을 절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를 더욱 움츠러들게도 했다. 강력한 피해자 정체성을 바탕으로, 나를 숨어들게 만드는 두려움을 자양분으로 했던 움직임. 그 한계를 뛰어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그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세계가 여자들에게 요구하는 자리다. 그리고 그것은 강력하게 ‘생물학적 여성’으로 한정 지어진 자리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강남역 10번 출구’라는 추모의 시공간은 이중의 의미를 가진다. 성별에 대한 자각 없이 살았던 여성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그에 가해지는 억압과 부조리와 싸우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는 혁명과도 같았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여성들에게는 또다시 두려움을 주입하여 스스로의 활동반경을 줄이고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획일화된 범주 안에 고착되게 했다는 점에서 반동적이었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강한 운동을 위해서는 확고한 정체성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그런 정체성이란 우리를 다시 그 자리에 가둔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나의 현실을 조건 짓고 있는 정체성을 중심으로 운동을 추동해가면서, 동시에 장애인, 퀴어, 이주민 등과 같은 다양한 정체성들과 접속하여 그 경계를 넘는, 일종의 이중전략이 필요하다. ‘뿌리를 내리면서 이동하기(rooting and shifting).’ 이는 ‘나’의 문제를 기반으로 ‘너’의 이야기를 들을 때 가능해진다. 이는 또한 나를 온전히 드러내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스스로를 드러낸 타자와 대면해야 한다는 점에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사회가 허락한 자리를 ‘발본적’으로 깨치고 나온다는 의미에서 ‘급진’이다.

“우리의 두려움은 용기가 되어 돌아왔다.” 범페미네트워크가 주최하는 1주기 추모제의 제목은 그래서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앞으로의 1년은 용기로 채워진 시간들이기를 바란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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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페미니즘과 관련된 프로젝트 제의를 받으면서 갈등한 적이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갈등은 다소 복잡한 것이었다.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무슨 대단한 페미니스트라고’라는 겸양도 들어있지만, 한편에는 페미니스트라고 분류되는 순간 감당해야 할 많은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늘 올바르고 도덕적이며 자기주장이 강한 여전사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남녀가 함께 모여 사는 세상에서 분리되어 여자로만 가득 찬 울타리 안에서 옳은 소리만 하는 운동가의 이미지도 떠오른다. 나는 아직 그곳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인권 운동가나 투사가 되기에는 너무 자기중심적이며 멋대로인 데다 그렇게 도덕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남자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 많은 의미에서 나는 아직은 남자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싶다.

그러니까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에 대한 불편함에는 완벽함에 대한 강박보다는 어떤 부정적 이미지에 대한 무의식적 불안이 작동하고 있는 듯하다. 과거 나는 <디아스포라 문학>이라는 가벼운 에세이를 낸 적이 있는데, 이후 나는 본의 아니게 ‘디아스포라 문학 전공자’가 되어버렸다. 고마운 일이지만, 한편 내가 문학에서 애초에 지니고 있던 다양한 관심은 삭제되고 이후 그것에 한정된 글을 주로 쓰게 된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떤 ‘주의자’를 경계하는 편이다. 어떤 특정 부분을 지향할 수는 있으나 어떤 인간도 그것만일 수는 없고, 우리는 조금씩 흔들리면서 살아가고 있다.

출처: 경향신문DB

‘페미니스트’란 것도 그와 유사하다. 그 모자를 쓰는 순간, 다른 정체성은 보이지 않고 호명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페미니즘이 불편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어떤 공격성과 부정성이라는 단 하나의 이미지만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말 많고 따지기 좋아하고 남자들과 적대하는.’ 그러나 그 단 하나의 이미지가 얼마나 잘못 되었는지, 또 내가 왜 불편했는지에 대해 최근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책인데, 여기에서 그녀는 주류 페미니즘, 근본주의 페미니즘이라는 완벽한 페미니즘 대신 결함이 있을 수 있는, 다양한 복수의 페미니즘을 강조하고 있다. 그녀는 스스로를 “핑크색을 사랑하고 섹스를 좋아하고 가끔은 여성을 끔찍하게 표현한 노래에 엉덩이를 흔들기도 하고 때로는 정비공이나 수리 기사에게 마초 대접을 해주면 내게 이익이라는 것을 알기에 일부러 더 멍청한 척을 하는” 나쁜 페미니스트라 자처하면서, 그 불완전한 대로의 페미니스트이기를 원한다고 공표한다.

지난 학기에 ‘페미니즘과 여성문학’이라는 강의를 맡았는데, 이 수업은 애초의 생각과는 다르게 다소 재미가 없이 흘러갔다. 왜냐하면 분석방법과 결론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불행, 고통과 원한에 ‘남자’라는 타깃을 달아주면 모든 것은 해결 가능해 보인다. 고민 끝에 그러한 일률적인 분석틀을 버리고 텍스트를 매개로 각자의 경험에 대해 토론하는 것으로 바꾸자 수업은 훨씬 더 흥미로워졌다. 그 자유로운 토론 속에서 우리들은 로맨스를 즐기고 외모를 가꾸고, 나쁜 남자를 좋아하고 예쁜 여자를 좋아해도, 전업주부를 열망해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었다. 페미니즘이 오직 여성의 직장, 육아와 가사의 평등, 여성의 대상화 등에 대해 똑같은 주장과 원망을 갖고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육아, 가사, 그런 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건……’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듯 여성의 수만큼 수많은 갈등과 원망이 있고, 그것은 때로 근본주의 페미니즘이 말하는 그것과 일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한국 청년들의 고통을 전부 ‘청년실업’으로만 치부할 수 없듯이 말이다.

‘정치적 올바름’을 앞세워 모든 것의 교정을 요구하는 것이 페미니스트라는 생각은 오류이다. ‘논리정연하고 도덕적이며 일과 가정에서 완벽한 여자, 남성과 적대하고 스커트를 입지 않는 남자 같은 여자, 희생없이 끊임없이 권익만 요구하는 이기적 페미니스트’와 같은 추상적 이미지도 환상일 뿐이다. 여성 혐오는 그러한 관념 속에서 자라난다. 다 큰 자식들을 떠나보내고 남은 생을 쓸쓸해하는 어머니, 직장 일 때문에 늘 아이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아내, 씩씩한 딸 등의 구체적인 모습에서 좀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페미니스트들의 편린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록산 게이의 말처럼, 어떤 완벽한 모델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각자 불완전하고 모순투성인 채로 이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은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가 있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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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페미니스트’가 이틀간 검색어 1위에 오른 적이 있었다. 당시 터키에서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김 아무개군(18세)이 “이 시대는 남성이 성차별을 받는 시대다. 나는 페미니스트를 증오한다. 그래서 ISIS(이슬람국가의 전신)를 좋아한다”는 글을 트위터에 남기자 누리꾼들이 페미니스트가 무슨 뜻인지 찾아본 것 같다.

한국은 남성이 성차별을 받고 이슬람사회는 그렇지 않은가? 무엇보다 이것이 그가 진정 한국을 떠난 이유일까. 나는 그의 ‘탈출’이 성차별에 대한 고민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20대 남성의 사망률 1위는 자살이다. 청년실업과 연동된 ‘5포 현상(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내집 마련 포기)’이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표출된 것은 아닐까. 사실 그가 말하는 “남성이 당한다”는 성차별은 여성이 빼앗은 ‘파이’ 때문이 아니라 남성들 간의 계급 갈등의 결과이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소위 ‘알파 걸’로 불리는 여성의 가시화 현상 역시 계층 문제다. 모든 여성이 알파 걸이 될 수는 없다. 또한 우리 사회에는 여성의 노동과 역할의 증대를 ‘여성 상위’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어쨌든 위와 같은 상황은 한국사회에 팽배한 이분(二分) 논리를 상징하는 것 같다. 무관한 이슈들이 맥락 없이 아무렇게나 연결되는 것이다. 1980년대 학생운동 시위대에 “그렇게 남한이 싫으면 북한 가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다.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똑같은 논리가 횡행하고 있다. “사과를 좋아한다”고 말했더니 “그럼, 배를 재배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냐?”는 식의 대화다.

이의 국제정치 버전이 글로벌 미디어에서 ‘여성’과 ‘이슬람’이 묘사되는 방식이다. 여성이나 이슬람은 큰 인구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내부에 차이가 없는 똑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여성은 불쌍한 피해자 아니면 ‘된장녀’ 둘 중 하나이고, 이슬람사회는 미개하고 비상식적이라는 전제에서 나온 고정관념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가 합쳐져 “이슬람 = 여성 억압”이라는 ‘진실’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사고방식이야말로 문명과 거리가 멀다. 이슬람은 세계 인구의 4분의 1, 57개국에서 12억명 이상이 믿는 종교다. 이슬람, 이슬람국가, 이슬람사회는 모두 다른 뜻이다. 대개는 이슬람 = 아랍, 중동으로 알고 있지만 세계 최대의 이슬람 지역은 인구 4위의 인도네시아와 우즈베키스탄을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다. 이들 지역의 주민 90%가 무슬림이다. 이슬람교의 알라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 동일 인물이다. 같은 신을 두고 싸우는 것이다. 차도르, 히잡, 부르카, 니캅 등 이슬람 여성의 복장에 대한 논쟁도 간단하지 않다. 여성의 몸을 보호한다, 성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 문화가 서구의 다이어트나 성형 시술보다 더/덜 차별적이라는 논의까지 이슬람 여성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남성이 성차별당하고 있다는 불만은 역사적으로 김군이 처음도 혼자도 아니다. 1989년 12월6일, 캐나다 몬트리올의 한 공과대학에서 한 남성이 “왜 여자가 공학을 공부하느냐”며 반자동 소총을 난사해 강의실과 도서관을 오가던 14명의 여학생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남성이 주도하는 남성폭력 근절 운동인 ‘하얀 리본’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북미의 경우 배우자 폭행의 90%, 성폭력의 98%가 남성에 의해 발생한다. 한국의 가정폭력이나 여아 낙태도 외부에서 보면 ‘이슬람사회만큼이나’ 끔찍하게 보일 것이다. 가정폭력과 성폭력은 미국과 유럽에서도 빈발하는 가부장제 현상이다.

요지는 여성의 지위에 대한 평가는 객관적으로 합의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한국 여성 노동자들은 대다수 비정규직에 남성 임금의 60%를 받고 있으며, 노동 시장 진출의 질은 세계 100위권 밖이다. 그러나 한국 여성의 학력 수준은 세계 1~2위권이다. 미국 50개 주(州) 중 여성의 교육, 경제적 지위가 가장 낮은 주와 가장 높은 주의 가정폭력 발생 비율은 똑같다. 여성은 공적 영역의 지위와 사적 영역의 지위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김군 사건은 여성과 이슬람에 대한 고정관념이 자국의 다양한 사회 문제를 은폐시키고 강대국 중심의 국제정치를 작동시키는 요소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시리아 북부 코바니에서 국경을 넘어 터키로 도망쳐 나온 여성이 터키 국경마을 수루치의 난민촌에서 아이를 안고 서 있다. _ AP연합


여성과 이슬람을 균질적 집단으로 단일화, 대상화시켜 자신을 인류의 보호자로 자처하는 서구 강대국의 국제정치 전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클린턴 정부 시절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대표적이다. 당시 명분은 탈레반으로부터 여성을 구한다는 것이었고 미국의 우익 여성운동은 전쟁을 지지했다. 김군은 이러한 국제정치 현실이 낳은 또 다른 피해자가 아닐까.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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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사회 초년생 시절의 일이다. 어느 겨울, 실내 공기가 너무 건조하다는 윗분 말씀에 가습기가 덜컥 생겼다. 윗분들의 책상과 공용 테이블에 귀여운 곰돌이와 개구리 모양의 가습기들이 자리를 잡았다. 개구리와 곰돌이의 두 귀에서 일제히 촉촉한 물기가 뿜어져나오기 시작하자 확실히 사무실 공기가 촉촉해졌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출근해서 공용 테이블 위 가습기들에 물을 채운 후 틀어놓고 다른 일을 하고 있는데 선배 한 명이 나를 불렀다. 부장님이랑 차장님들 책상 위에 있는 가습기는 왜 그대로 뒀느냐는 거였다. 그러면서 앞으로 아침마다 저 가습기들에 물을 채워놓고, 물이 떨어지면 그때그때 갈아줘야 한다고 했다. “각자 책상에 있는 건 알아서 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했다가 “그걸 어떻게 부장님들한테 하시라고 하느냐, 이런 건 원래 여직원들이 하는 거다. 돌아가면서 알아서 해라” 한 소리 들었다. 설마, 싶어서 관찰해봤더니 (모두 남자인) 상사들은 가습기 물이 떨어졌는데도 아무도 물을 채우지 않았다. 하루를 버티던 나는 결국 백기투항했다. 매일매일 5개가 넘는 가습기에 물을 채워넣고, 물이 떨어질 때마다 갈다 보니 예쁘다고 좋아했던 가습기는 곧 보기만 해도 스트레스 받는 물건으로 변해버렸다. 빙긋 웃고 있는 곰돌이와 개구리의 표정마저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심지어 몇 주 후에는 가습기를 돌리면 냄새가 나는 것 같으니 “물을 채울 때마다 깨끗이 닦아오라”는 지시까지 떨어졌다. “여직원들이 그 정도는 알아서 해야지 말이야”라는 말은 덤이었다. 그런 말을 들었는데도 나는 그 지시를 내린 남자 상사보다 가습기 물이 떨어졌는데도 먼저 갈지 않는 동료 여직원이 더 미웠다.

그러니까 가습기를 사준다고 할 때 뜨뜻미지근했던 선배들의 반응은 다 이유가 있는 거였다. 화장실에서 가습기를 닦고 있는 나와 마주친 선배 언니는 소곤소곤 털어놓았다. “말도 마, 사무실에서 왜 종이컵을 쓰는데. 원래 환경보호도 하고 부서 운영비도 아낀다고 다 개인컵 갖다놨었어. 근데 어떻게 됐게? 아침에 오자마자 스무 개가 넘는 컵 싹 다 걷어야지, 닦아서 다시 갖다놔야지, 커피 타다줘야지, 썼던 컵 다시 씻어서 갖다놔야지… 여직원들 있는 부서에서는 그게 다 여직원들 일이 된 거야. 결국 강력하게 항의 들어가서 다 종이컵으로 바뀐 거라니까. 아유, 말도 마. 그 많은 컵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다. 먹고 싶은 사람이 알아서 타먹고 알아서 챙기면 좀 좋아?”

일을 한다고 모인 직장에서 이 정도니, 가정이나 일상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역할은 말할 것도 없다. 여자는 너무 많이 배워도 안되고(여자가 너무 똑똑해도 피곤하니까), 남편보다 많이 벌어도 안되고(남자 기 죽이니까), 화장을 진하게 해도 안되고(화장을 안 하면 “예의가 아니다”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뿐인가? 여성을 ‘모 아니면 도’로 분류하고 갈등을 유발하는 방식 역시 여전하다. ‘전업주부 VS 직장맘’ ‘된장녀 VS 개념녀’ ‘순종적인 여자 VS 드센 여자’ ‘미녀 VS 추녀’까지…. 여기에서 ‘드센 여자’의 대명사가 바로 ‘페미니스트’다. 사실 페미니즘은 ‘생물학적 성과 사회문화적 성별(젠더)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형태의 차별을 없애기 위한 다양한 이론과 정치적 의제’를 뜻하는 것인데도 이 같은 오해는 꽤나 공공연하다. 에마 왓슨 역시 유엔 연설에서 “페미니즘에 대해 발언하면 할수록 여성의 권리 확보를 위해 싸울수록, 남성 혐오와 같은 의미로 오해받곤 한다”고 고백한 바 있다. 오죽하면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그래도’ 증후군까지 생겼을까.

2010 지방선거 홍보용으로 제작되었다가 여성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았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던 '선거탐구생활' (출처 : 경향DB)


지금 트위터에서는 ‘IS보다 페미니즘이 위험하다’는 칼럼이 논란이 되면서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캠페인이 한창 진행 중이다. “한 점의 열이 있으면 한 점의 빛을 발하라. 반딧불이처럼 어둠 속에서 한 점의 빛을 발할 수 있다면 꼭 횃불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는 루쉰의 말처럼, 작은 시작이지만 나 역시 이야기하려 한다.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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