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동계올림픽은 ‘역사적’인 의미를 획득할 것인가. 폐회식까지는 며칠 더 남아있기 때문에 이 ‘역사적’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한정적인 수사에 지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일말의 기대를 걸고 싶다. 특정 국가 올림픽을 통하여 그 이전과 이후를 완전히 가르는 새 지평을 연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그래도 1964년의 도쿄 올림픽이나 2012년의 런던 올림픽은 세계가 일본과 영국을 어떤 식으로든 달리 보게 만든 사건으로 기록된다.

우리의 기억도 선명하다. 88서울 올림픽과 2002 월드컵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대규모 이벤트를 치르기 전과 후로 한국 사회를 일정하게 판별해 볼 수 있었다. 거대한 중산층 문화의 형성과 새로운 세대의 활기찬 등장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평창 올림픽도 그러한 분기점으로 기억될 것인가. 숱한 논란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지난 9일 이후 수많은 선수들이 흘린 땀방울과 그 이상의 사람들이 열렬히 터트린 함성의 무게를 직관적으로 판단하건대 88이나 2002만큼은 아니어도 2018이라는 숫자 역시 우리 사회의 새로운 분기점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세계적인 잔치를 어렵사리 잘 마무리했다는 판단을 서둘러 내리기보다는 좀 더 냉정하게 이번 올림픽 과정에서 드러난 우리 사회의 집합적인 문제를 깊이 생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요컨대 이번 올림픽이 정치적으로 악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 말이다. 사실 나는 이 질문을, 올림픽 개막 전, 어느 외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받은 적 있다. 그 기자는, 남북 단일팀 및 북측 응원단의 참가 등에 대한 국내 일부 여론을 거론하면서, 순수한 올림픽을 정치에 이용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단호히 반대했다. 도구적 차원의 기술 수단으로서 정치라면 그런 면이 있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더 절박하다고 말했다. 소설가 한강은 지난해 추석 연휴 때 ‘뉴욕타임스’에 우리의 상황을 기고한 바 있다. 북한이 핵무기를 실험하고 미국이 북한을 선제 타격할 수 있다는 보도가 나와도 우리가 평온한 듯 고요하게 일상을 유지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고요는 전쟁의 공포를 극복해서가 아니라 수십년 동안 축적된 긴장과 공포가 우리 안에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렇게 고요한 긴장, 그러나 속으로 멍들어가는 팽팽한 불안 속에서 올림픽이 개막되었으니 한번쯤은 그 긴장을 풀고 ‘평화’를 외치는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그 유명한 나치 올림픽이나, 전범 국가가 패전 희생자 코스프레하는 도쿄 올림픽이나 강력한 군사력과 극단적 이념 대결을 펼친 모스크바와 LA 올림픽, 대국굴기 중화주의의 베이징 올림픽과 차르 푸틴의 대유라시아 퍼포먼스인 소치 올림픽과 비교할 때, 일단 잠시라도 군사적 긴장을 늦추고 대화를 해보자는 이번 올림픽을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

일단 북·미 간 군사 행동을 쌍중단하고, 여러 채널을 가동하여 올림픽 이후에도 긴장보다는 대화의 물꼬를 트자는 것은 단순한 외교가 아니라 거의 절박한 몸부림이다. 한 사회의 복합적인 갈등을 헤아리지 않고, ‘순수한 스포츠’라는 기계로 납작하게 눌러서, 스포츠를 정치에 이용 또는 악용한다는 의견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북한을 이롭게 한다고? 그런 의견도 있다. 지난 10여년 동안 북한이 핵개발을 추진하면서 일관되게 보여준 일방통행식 행동을 보면 그러한 의견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단일팀을 비롯한 거의 모든 대화와 협상이 불발에 그쳤을 경우를 생각해보자. 연일 극우 언론이나 일부 고약한 인터넷 여론은 긴장과 파국을 노래하고 북한도 때마침 그들의 건군절에 미사일 열병식을 위협적으로 치르고 미국 또한 이른바 ‘코피 터트리기’ 전술을 당장이라도 벌이겠다는 식으로 사태가 전개되었을 경우를 상상해보자.

아니 이것은 상상이 아니라 우리가 몇 해 동안 늘 겪은 일상이다. 그 일상화된 긴장, 내면화된 대립, 언제든지 군사적 충돌이 벌어져도 응당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 아니었냐며 체념할 수밖에 없던 상태에서 올림픽 개회식을 치렀다고 상상해보자. 우리는 최민정의 시원한 질주나 이상화의 눈물을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마침 설날 아침에 윤성빈 선수가 금메달을 땄는데, 만약 동북아를 둘러싼 모든 군사적 언어가 날카롭게 대립하는 중이었다면 설날의 금메달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 어딘가에는 실질적인 공포와 불안의 냉기가 일렁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올림픽 이후, 동북아 상황은 예전처럼 돌아갈 거라고 한다.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하지만 설령 그 가능성이 높다 해서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가? 단일팀 같은 이벤트 한두 번으로 평화가 오겠냐고 한다. 당연히, 한두 번의 스포츠 이벤트로 무슨 평화가 오겠는가. 그러나 그것을 위하여 동북아의 정치, 군사, 외교의 모든 채널이 다른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돌아간다.

수면 아래의 수많은 채널이 가동된 결과 지난 18일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을 “북핵 해결을 외교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함께 일해야 할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당신(북한)이 나에게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하기를 귀 기울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포츠에 내재된 힘이 어떤 변화된 감수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스포츠에 내재된 미와 힘이 수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일들이 신중하게, 그러나 중단 없이 시도되어 훗날 북한 선수단이 내려오는 게 단신 뉴스가 될 만큼 자연스러워지기를 나는 상상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때의 우리 일상은 긴장 속의 안정이 아니라 진실로 평화로운 안정을 유지하게 되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하여 다시 강조하건대, 이번 올림픽은 ‘평양올림픽’이 아니며 ‘종북올림픽’이 아니다. ‘종남올림픽’이며 ‘평화올림픽’이다. 진실로 그렇게 될 경우 2018평창 올림픽은 88서울 올림픽이나 2002 월드컵 이상의 역사적인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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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겨울올림픽이 시작되었다. 여자아이스하키에서 남북 단일팀이 출전하듯이 대화와 협상의 실마리가 잡혀 평창이 ‘평화올림픽’으로 역사에 남기를 누구나 소망한다.

그러나 최근 국내외 강경파의 도를 넘는 북핵 관련 발언은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그들의 문제를 일일이 짚을 여유는 없지만 강경론이 공유하는 암묵적 전제, 즉 미국의 선제예방타격을 포함한 효과적인 제한 전쟁이 가능하다는 전제는 냉정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목숨이 걸린 터에 설령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마땅히 따져 봐야 할 일이며, 모두가 합리적이고 온당한 결론을 찾아내야 할 관심사이다.

실제로 선제타격이 벌어지면 북한은 과연 어떻게 나올까? 전면전으로 번지지 않으려면 북한도 재래식 무기로 제한적인 응전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통제된 무력충돌도 휴전선 이남에서는 군사적 피해 외에 증시 폭락과 환율 급상승, 외국인의 국외 탈출 소동 등 감당하기 힘든 사태로 이어질 위험이 높다.

1994년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의 영변 핵시설을 선제타격하려 했을 때 목표물은 단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의 미군은 다수의 목표를 동시에 파괴해야 한다. 이동식 미사일 발사대나 지하 요새의 특성 때문에 목표물의 숫자와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겠지만, 여하튼 스텔스 폭격기와 크루즈 미사일은 복수의 군사목표를 해치워야 한다.

여기서 꼭 던져야 할 물음이 있다. 선제타격이 제한적이라고 미국이 공언한들 공격당한 북한군 지휘부가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최첨단 무기가 자신의 군사 시설 여러 곳에 한꺼번에 퍼부어질 때, 이를 국지전으로 간주하고 자제할 수 있는 군대는 지구상 어느 나라에도 없다. 파괴할 목표가 하나뿐이었음에도 1994년 미국이 공격을 단념한 까닭을 돌아봐야 한다.

북한은 민간인 살상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2010년 연평도에 수백발의 포탄을 퍼부었고, 실제로 해병대원 외에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선제공격을 당하고 얌전히 참을 정권이 아니다. 장사정포나 스커드 미사일 등 재래식 무기만이 아니라 생화학 무기와 핵미사일의 사용 가능성까지 열릴 것이다. 선제타격은 개방된 산업국가인 대한민국 경제가 마비되고 말 각본이며, 전쟁의 승패는 무의미해진다.

한반도에서 선제 군사행동은 전면전을 부른다. 정확히 말하면 1953년 7월에 겨우 중지한 전쟁이 60년도 더 지나 다시 시작되는 비극이 벌어진다. 여기까지는 굳이 군사나 국제관계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불 보듯 훤하다.

그러면 트럼프 대통령과 주변 인물들의 날선 위협은 그냥 엄포일까? 아니면 추가 무기구입을 압박하거나 FTA 재협상에서 큰 양보를 얻으려는 ‘북한 카드’에 불과할까? 그것도 아니면 남의 땅에서 벌어질 엄청난 살상극은 미국 영토 밖이라서 상관없는 걸까? 미 본토에 대한 핵 위협 문제까지 논의해야 할 이 대목부터는 전문적 판단이 필수이지만, 방귀가 잦으면 어찌 된다는 우리 속담이 떠오른다. 행동에 옮기지 못할 엄포도 반복하며 수위를 높이다보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 수 없다. 미국의 전문가 중에도 예방타격을 반대하는 강한 목소리가 나오는 상황을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더구나 양국 언론이 믿을 만한 취재원을 통해 우리 정부의 아그레망까지 마친 사실을 다 확인한 후에 느닷없이 주한미국대사 내정자의 지명을 철회하는 유례없는 불협화음마저 거듭되면 불안정한 한반도는 예측 불가능한 쪽으로 흘러가게 된다.

우리 국민의 안전과 국가의 안위를 평화적인 방법에 기대는 것은 상식이며 외길 수순이다. 물론 겉으로는 아무도 대화와 협상을 부정하지 않지만, ‘비핵화를 전제로 한 대화’와 ‘조건 없는 대화’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하지만 평화적 방식만이 유일한 길이라면 조건 없는 북·미대화(와 다자간대화) 또한 유일한 길이다. 이렇게 외길뿐인데도 미국의 강경 기류에 맞장구치며 무책임한 발언을 쏟아내는 국내의 일부 정치인, 언론과 지식인을 보노라면 혀를 차지 않을 수 없다. 촛불시민혁명의 거센 파도 앞에 궤멸에 직면한 수구냉전세력이 대규모 무력충돌이 가져다줄 정세 역전의 헛된 단꿈을 꾸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여야 정치권이 어느 쪽의 선제 군사행동도 용납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포함하여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의지를 재확인하는 만장일치의 국회 결의안이라도 채택할 때이다. 국가안보와 국민의 안녕에 대해 책임있는 입장을 널리 세계에 알려야 할 엄중한 시기인 것이다. 사회적 책임의식이 있다면 언론도 같은 길을 가야 한다. 국회 결의안은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와도 모순되지 않고 북의 교활한 전술에 휘말리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김명환 서울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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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사피엔스가 아프리카 대륙에서 탈출한 이후에도 싸움이 그친 적은 한 번도 없다. 인류의 먼 조상으로 동물에 가까웠던 구 인류뿐 아니라 현생 인류도 폭력성을 버리지 못했다. 그들도 관용을 몰랐다.

인간은 왜 싸우는가. 토머스 홉스는 인간의 자연상태를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보았다. 따라서 강제적인 수단으로 국가가 내부 평화를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홉스는 호모사피엔스의 본성이 동물과 다르지 않다고 본 것이다. 반면 장 자크 루소는 인간 자연상태가 평화롭고 조화로웠으나 점차 인구가 성장하고 사유재산, 계급분화가 나타나면서 전쟁과 각종 병폐가 출현했다고 했다. 따라서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그러면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이 둘은 시계추처럼 시대에 따라 한쪽이 설득력을 얻었다가 다시 잃기를 반복하고 있다.

최근 현존하는 수렵채집인이나 과거 서구인이 관찰한 수렵채집인들에 대한 연구, 선사시대 수렵채집인들의 생활에 대한 발견, 그리고 진화론을 바탕으로 고찰한 한 연구는 인간의 자연상태를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결론내렸다. 인간의 자연상태가 루소가 말했던 평화로운 상태가 아니라 치열한 생존경쟁의 싸움터였다는 것이다. 아자 가트는 &lt;문명과 전쟁&gt;에서 “인간의 자연상태는 동물사회와 다를 것이 없는 투쟁이 지배했으며 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인간의 노력에 따라 달렸다”고 결론지었다. 인류에게 평화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폭력적인 본성을 억제한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리스에서 도시국가 간 전쟁에 지친 이들은 평화를 찾을 방안을 모색했다. 올림픽은 안전을 희구하는 그리스인들이 만들어낸 발명품이다.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반도 북서쪽에 위치한 도시국가 엘리스의 왕 이피토스는 전쟁과 전염병까지 액운이 휩쓸자 신에게서 신탁을 받았다. ‘전쟁을 일으키지 말고 해마다 제전을 열어 우정을 두텁게 하라’는 신탁을 받아든 그는 그동안 중단되었던 경기를 다시 열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주변국과 조약을 맺었다. 올림피아는 성지이며 여기에 무력으로 발을 들여놓는 자는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올림피아 휴전기간 중에 엘리스의 영토에서는 어느 누구도 몸에 무기를 지니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경기가 열리기 몇 달 전부터 그리스 본토와 해외지역의 모든 도시국가에 전령이 파견되었다. 신성한 휴전기간이 선포되었고 모든 그리스 시민들은 올림피아에 초대되었다. 이 기간 동안 자유로운 여행이 보장됐다. 4년에 한 번 열리는 올림피아 제전뿐만 아니라 유사한 제전들이 그리스 전역에서 열렸다. 델피의 파티아 제전, 아르골리스의 네미아 제전, 코린트의 이스트미아 제전 등이 4년 또는 2년 주기로 열렸다. 물론 제전이 열리는 시기는 휴전기간이었다.

올림피아 제전은 도시국가 간 맺은 동맹과 조약을 다른 도시국가에 공표하는 기회로 이용되기도 했다. 아테네와 아르고스 등은 올림피아 축제를 이용해 동맹조약을 기념하는 청동기둥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휴전기간에 다른 도시국가를 공격했을 경우에는 올림피아 법에 따른 처벌이 뒤따랐다. 벌금은 물론 올림피아 제전에 참여도 불허했다. 그러나 평화를 위한 노력의 산물인 올림피아 제전의 전통은 오랫동안 끊어졌다.

수천 년간 사람들은 타자를 잠재적인 적으로 여기고 자신을 공격해 올 것에 대비하는 방어기제를 발달시켜왔다. 상대방이 적의가 있든 없든 두려움, 의심, 불안을 지우지 못했다. 때론 그 의심은 선제공격으로 이어졌다. 안보딜레마라는 악순환의 늪으로 빠져든 것이다. 전쟁은 자기충족적인 예언이 되고 전쟁의 공포가 전쟁을 낳는 파국의 연속이었다. 19세기 말 올림픽 부활의 논의가 있었고 쿠베르탱 남작에 의해 다시 살아났다. 올림픽은 세계인들이 함께하는 축제이며 평화의 제전이다. 하지만 그동안 두 번의 세계대전이 있었고 분쟁은 끊이지 않는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9일 개막한다. 남한과 북한, 미국 일본과 중국 러시아, 진보와 보수 간 셈법이 다르다. 북한의 참가를 두고 평화를 위한 한 걸음이라는 평가와 ‘위장 평화’와 ‘시간 벌기’라는 시선이 교차한다.

그리스인들이 올림피아 제전으로 평화를 찾았다고 하는 것은 신화이자 미신이다. 올림피아 제전이 전쟁을 막지 못했다. 그들은 평화조약을 맺고 파기하고 또 맺었다. 그들은 전쟁의 와중에 올림피아 제전을 열면서 평화를 모색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들의 평화를 향한 노력이다. 싸움 유전자를 가진 호모사피엔스에게 평화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평창 올림픽이 평화올림픽이 되길 기원한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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