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5.06.26 [이택광의 왜?]표절, 문단의 ‘침묵’
  2. 2015.06.25 [기고]일본 문학 감염 증후군

어김없이 학기 말이 돌아왔고, 학생들이 제출한 논문들을 읽었다. 성실하게 자신의 의견을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기술한 학생들이 있는 반면, 인터넷에서 내려받은 자료들을 출처 없이 그대로 짜깁기해서 제출한 학생들도 있었다. 이런 경우는 무조건 낙제점을 주는 것이 나의 방침이다. 학기 초에 학생들에게 베껴서 제출하지 말고 한 문단이라도 참고문헌을 읽고 자기 생각을 써서 제출하도록 반복해서 환기하지만, 마감시간이 임박하면 ‘표절의 유혹’에 빠지는 학생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표절 논란에 휩싸인 소설가 신경숙씨는 22일 경향신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내려놓을 수 있는 건 다 내려놓겠다”고 밝혔다. _경향DB

신경숙 작가의 표절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한 주가 이렇게 또 다른 표절에 대한 추억으로 끝나게 돼 씁쓸하다. 작가의 표절에 민감한 우리들이 자기 주변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표절에 대해 무감한 까닭은 무엇인지 물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신경숙 작가의 표절 문제가 불거지고, 단독 인터뷰를 통한 작가의 해명까지 나왔지만,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저작권 침해라는 관점에서 표절에 대한 법적인 제재를 가할 수 있다고 해도, 표절 자체는 작가의 윤리에 속하는 문제라서 신경숙 작가의 태도가 바뀌는 것 이외에 다른 해결책은 없다.

게다가 앞서 학생들의 경우가 잘 보여주듯이, 우리 사회의 표절 문제는 개인적인 윤리의식의 부재 못지않게 구조적인 것이기도 하다. 학생들의 가치판단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취업이다.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대다수인 것이다. 그래서 표절을 제재하려면 부득이하게 학점을 이용해서 불이익을 주는 장치를 고안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겨우 윤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자율적인 개인이 윤리적이라는 환상은 여기에서 깨어져 나간다. 윤리는 결코 자율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개인과 구조가 분리될 수 없는 것이 이 때문이다.

이처럼 불이익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학생들은 표절을 서슴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학생들의 표절행위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지만, 진정으로 표절을 근절하고자 한다면 학생들의 윤리의식 부재만을 질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근본적으로 표절이 옳지 않은 것이라는 윤리적 판단을 학생들이 가지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난제가 있다. 신경숙의 표절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응준은 애초에 신경숙을 비윤리적인 작가로 낙인찍어서 매장시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문제제기는 15년간 표절 논란이 지속되었음에도 ‘문단’이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뼈아픈 각성에 따른 질문이었다.

내가 판단하기에 신경숙은 인터뷰라도 했지만, 이응준이 이른바 ‘문단’이라고 지목한 곳은 이 물음에 대한 아무런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신경숙 표절문제는 당연히 작가가 책임을 져야 할 사안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표절을 묵인해왔던 ‘문단’이 책임을 면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에게 표절이 윤리의 문제라면, 이런 작가의 표절행위를 근절시키지 못한 것은 ‘문단’을 구성하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문단’의 실체가 모호하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구조적 문제라는 것은 모순적이고 총체적이기 때문에 한두 마디로 파악하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구조적 문제를 쉽사리 사적인 문제로 치환해버리는 것이다.

신경숙 표절도 작가 개인의 윤리라는 사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그것을 묵인해오고 방조해온 구조적인 ‘문단’의 문제가 있다. 이응준의 고발도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 흘러가는 분위기는 신경숙 개인의 결단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은 착시를 준다. 나는 지금 표절이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신경숙은 억울한 희생자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표절 문제가 두 가지 층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고, 작가의 윤리와 관련해서 사적인 책임을 묻는 목소리는 많이 들리는데, 정작 표절을 묵인해온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많이 들리지 않는다는 우려를 표명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문단권력’이나 ‘문학권력’이라는 단순용법으로 해명하기 어렵다. 문학이 권력을 가진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닐 테다. 다만 그 권력이 특정 이해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동원되는 것이 문제이지 않겠는가. 시장의 논리가 ‘문단’의 논리로 내재화되어버린 상황이 이런 표절을 용인해왔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개인의 ‘사과’를 통해 다시는 표절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문학 자체가 시장의 논리로 포섭되어 버린 상황에서 표절의 문제를 오직 개인의 ‘결단’에 맡겨 둔다는 것은 정말 허술하기 짝이 없는 해결책일 것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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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요즘 신문과 방송, 그리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슈 중의 하나가 소설가 신경숙씨의 표절 문제이다. 지난 22일 급기야 신씨는 표절을 인정하는 발언을 내놓음으로써 일본 언론에서도 뉴스로 다루기 시작했다. 한국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일본 작가의 작품을 도용한 것이냐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된 것이다. 국제적인 망신도 망신이지만, 일본을 여러가지 면에서 비판해 왔던 우리의 입장이 우스워지게 되었다.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외국이 한국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한국을 무대로 한 소설이 메이지·다이쇼·쇼와에 걸쳐 패전에 이르기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일본 문학의 성격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일본인이 한국인에 대해 갖는 편견은 유럽인이 유대인에 대해 갖는 편견처럼 오래되지는 않았다.

에도(江戶)시대 이전에는 경의를 갖고 한국을 대했던 시대가 있었다. 에도시대 후기에는 교섭이 끊겼기 때문에 일본인은 한국에 대해 무관심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미국이 일본에 취한 제국주의적 자세와 역할을 일본은 한국에 그대로 적용했고, 이때부터 한국인에 대한 보호자 의식과 함께 멸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일본은 한국을 강제로 식민통치하고 지배함으로써 양국 관계는 오늘날까지 해결하지 못한 많은 과제들을 그대로 껴안은 채 미궁에 빠져 있다. 일본이 ‘자기 민족을 어떻게 자각하느냐’ 하는 문제에서 한국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간과하려고만 하는 일본의 자세가 일을 더욱 미궁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처럼 한·일 관계에서 문제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래 서구 열강을 문명의 규격으로 삼고 근대화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을 뿐, 한국은 멸시와 차별의 대상을 넘어 이제는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정작 한국의 지식인 집단(문단과 학계)은 일본의 대중문학을 마치 한국 문학의 자양강장제인 양 앞다퉈 소개하기에 바빴다. 그것이 한국인의 정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즉 약의 효능만 선전하고 그 부작용이나 후유증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 몰상식의 관행을 지켜 왔던 셈이다. 한쪽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든가 독도 문제로 우리 민족의 자존감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의지로 투쟁에 나서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일본의 대중문화가 주는 단맛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외국 문화를 즐기는데 무슨 법이고 사상이냐고 하겠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일본 문화를 외국 문화로 즐기기에는 양국 간의 관계가 그다지 평이하지 않다. 더구나 이번 신경숙 표절 문제와 같은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36년의 치욕의 역사가 버티고 서 있는데 표절이라는 오명까지 쓴다면 그만큼 우리가 일본에 대해 운신할 폭이 줄어드는 것이다.

23일 오후 서울 서교동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한국작가회의와 문화연대 공동주최로 <신경숙 작가 표절 사태와 한국 문학권력의 현재>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이날 토론은 이동연 교수 사회로 이명원, 오창은 교수가 발제하고 심보선 시인, 정원옥 문화과학 편집위원, 정은경 원광대 문창과 교수가 지정토론자로 나섰다. (출처 : 경향DB)


한국 문학은 남의 문학을 흉내 내서는 안 되겠지만, 특히 일본 문학을 다룰 때는 우리 고대 선조들의 넋에 먹칠하는 일이 되지 않는지부터 따져 봐야겠다. 옛 백제의 사신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 박사가 아니었다면 그들에게 ‘가나’라는 문자가 가당키나 했겠는가. 따지고 보면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도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도 그 서자에 불과한 것을 왜 정작 적자인 우리들은 그들의 독문(毒文)에 감염되고만 있는 것인지 곰곰이 돌아볼 시기이다.

그동안 우리는 일본 문학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일본 소설이나 시 또는 하이쿠(俳句) 등을 번역해 왔다. 단순히 문장이라든가 표면적인 이해만을 갖고 일본 문학을 대해 온 우리 문학계의 풍토가 이번에 불거져 나온 표절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면 문제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김현희 | 일본문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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