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이후 한반도가 지니는 지정학적 의미는 강대국들 간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에서 특정 국가에 의한 한반도의 독점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과 북으로 분단된 한반도를 두고 미국과 중국이 펼치는 힘겨루기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4일 중국의 지식재산권 침해와 강제적인 기술이전 요구 등 부당한 무역관행을 조사토록 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사실상 무역전쟁을 선포한 셈이다.

중국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중국 상무부는 15일 대변인 성명을 통해 “다자간 무역 규칙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좌시하지 않겠다”며 세계무역기구(WTO)에 미국을 제소할 수 있음을 내비쳤다. 그러자 극우 성향의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가 나서서 “중국과의 경제 전쟁은 모든 것이고, 우리는 모두 그에 미친 듯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반도에서 그들이 (북핵 문제 등으로) 우리를 툭툭 치고 있지만 그건 단지 곁가지(sideshow)에 불과하다”고 했다.

7월 28일 오후 경북 성주 주한미군 사드 기지에 미군 장비가 놓여 있다. 이날 국방부는 사드 기지에서 진행해온 소규모 환경영향평가 이외 일반 환경영향평가도 실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연합뉴스

북한과 미국이 주고받은 ‘말폭탄’이 결국 ‘쇼’였던 것이다. 난공불락인 북한의 핵무기 위협 속에 살아남으려면 자수자강(自守自强)하는 수밖에 없다는 깊은 자괴감이 들었다. ‘어떻게’라는 물음에는 핵무기가 없는 한국의 전략적 딜레마가 숨겨져 있다. 풀기가 어려운 고난도 방정식과도 같다.

역대 어느 지도자도 자신에게 주어진 북핵 숙제를 풀지 못했다. 그 사이 북핵 문제는 점차 난도만 높아갔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레드라인’을 넘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그렇다면 문 대통령도 임기 내 북핵 문제를 불가역적으로 해결할 묘안이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임기 5년 단임제의 대통령이 세습으로까지 이어지는 왕조체제를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길 방법은 없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시 말한다. 김정은 정권이 10~20년 이내 붕괴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도 말자. 희망적 사고가 정책이, 국가전략이 될 수는 없다. 머지않아 김정은 정권이 붕괴될 것을 가정하고 보고서를 만들고 있다면 당장 중단하기를 권한다.

그렇다면 현명한 지도자가 해야 할 일은 주어진 여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경로를 택하는 일이다. 어느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비핵화 벽돌을 한 장만 쌓는 일이다. 

‘가난한 국가’가 국가안보 수준을 단기간에 높이는 방법은 타국과 군사동맹을 맺는 것이 정설이다. 문재인 정부 역시 굳건한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북핵 문제 해결의 전기를 마련하겠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다.

다만 우려되는 점은 사드 배치 과정에서 확연하게 드러났듯이, 한·미동맹 강화 과정에서 중국의 크고 작은 반발에 문재인 정부가 얼마나 명민하게 대응할 수 있느냐이다. 이를테면 동북아 지역에서라도 미국에서 중국으로 급격하게 세력 전이가 이루어질 경우 우리의 내부적 균열을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고민도 함께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유럽의 동아시아 전문가였던 카를 필니가 19세기 말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존 헤이의 “지중해는 과거의 바다이고, 대서양은 현재의 바다이며, 태평양은 미래의 바다”를 인용하면서 21세기는 중국이 세계 초강대국 역할을 맡는 다극화된 세기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병철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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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한 건 1993년 3월이다. 자대 배치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 사찰 요구를 거부했고 미국은 팀스피릿 훈련 중단 약속을 파기했고 따위의 한반도 정세 얘기는 듣지도 못했다. 전쟁 위기가 ‘원자로 건설’ 때문인지 ‘핵미사일 개발’ 때문인지 몰랐다. 장교들은 “북한 놈들이 쳐들어온다”고 했다. 전투준비태세 단계가 높아졌다. 군장을 꾸린 채 취침하기도 했다.

개별 인간의 가치와 의지가 무력할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꼈던 것 같다. 세상, 특히나 정세는 ‘나’라는 존재는 안중에도 없이 돌아갔다. 전쟁과 죽음, 핵의 공포를 체감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 호전성을 곧잘 드러내던 선임병은 보초를 서며 욕설 한마디를 내뱉고 흐느꼈다.

최전방에서 근무하던 1994년 6월 전쟁 직전까지 갔다는 건 제대하고 수년이 지나서 알았다. 미국 클린턴 행정부는 핵무기 개발을 막으려고 북한 영변 폭격을 계획했다가 격론 끝에 취소했다. “(폭격이) 북한 당국을 자극해 100만명이 희생될 것으로 예상되는 전쟁을 불러오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는 1999년 CNN 보도를 읽곤 섬뜩했다. 남북한 사람 100만명이 죽을 수도 있는 폭격을 두고 미국은 ‘외과적 수술’이란 완곡어법을 썼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공포의 이유로 ‘무지’ ‘무기력’을 들었다. 미래에 무슨 불행이 닥쳐 큰 상처를 입힐지 모르는 무지와, 그 불행이 닥쳤을 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기력이 공포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김정은과 트럼프가 고조시킨 최근 위기에서 무지와 무기력을 다시 느꼈다.

‘무신경’도 공포스럽다. 미디어는 미국의 전략무기를 곧잘 소개한다. 스포츠 경기 중계하듯 예상 시나리오를 전한다. 어느 유력 언론은 외신기사를 ‘남한과 북한이 전쟁하면 누가 이길까’라는 제목을 달아 내보냈다. ‘전개’ ‘충돌’ ‘정밀타격’ 같은 용어는 ‘나뒹구는 시체’를 은폐한다. 동물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는 원격 조작 무기를 두고 “우리의 정서적인 심층은 집게손가락의 발사 신호가 타인의 창자를 찢는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고 했다. 저널리즘 언어도 그 ‘집게손가락’처럼 움직이는 듯하다.

어떤 이들은 공포에 공포로 대응하자고 말한다. 현실 정치를 지배한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에 기댄 핵무장론이다. 북핵이 그런 논리의 결과였다. 남한의 핵잠수함 추진도 예외일 수 없다. 한반도 위기는 ‘평화를 원하면 평화를 준비하라’는 교훈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지 전쟁 준비를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핵무기 없는 세계’? 2000년대 후반 이상주의적인 이름의 성명서를 내놓은 건 헨리 키신저, 조지 슐츠, 윌리엄 페리 같은 국방·외교를 오래 한 현실 정치인들이다. 미·소의 수소폭탄 실험 이후 버트런드 러셀과 아인슈타인이 주도해 1955년 발표한 ‘핵무기 없는 세계와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호소하는 선언’은 전면적 군비 축소와 핵무기 폐기를 위한 협약 체결을 제안하면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행복과 지식과 지혜가 지속적으로 진보하느냐 퇴보하느냐가 결정된다”고 했다. 50년이 지나서도 유효한 선언이다.

바우만이 말한 공포의 세 번째 이유는 무지와 무기력에서 비롯된 굴욕감이다. 그는 “(굴욕감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불행에 따른 손상의 많은 부분이 신호를 제때 탐지하지 못한 우리 자신의 부주의, 지나친 꾸물거림, 게으름, 의지 부족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우리의 자존심과 자신감에 입게 되는 상처”(<도덕적 불감증> 책읽는 수요일)라고 했다. 군축·핵폐기를 위한 실천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 중 최우선 과제가 되길 바랄 뿐이다.

<김종목 모바일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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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한다. 북한의 핵무기와 첨단 미사일 기술 개발은 지역 안정을 깊숙이 뒤흔들 정도로 위험하다. 그러나 언론에서 끊임없이 떠드는 것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북한이 한국이나 미국을 상대로 핵무기를 실제로 사용할 가능성은 극도로 낮다. 그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으며, 어떤 실질적 목적도 달성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언론에서 이런 시나리오가 계속 나오는 이유는 미사일방어 체계를 비롯한 무기 판매에 엄청난 자본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북한 핵개발이 위험한 것은 동북아시아 군비 확장을 촉발해 북한뿐 아니라 역내 모든 국가 사이에 군사적 긴장관계가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단기간에 핵무기를 200기에서 1000기, 심지어 1만기까지 손쉽게 늘릴 수 있고, 일본과 한국 또한 핵무장에 나설 수 있다. ‘핵 억지를 통한 평화’는 신화에나 나올 법한 가상의 개념이다. 모든 국가가 핵무장을 하면 동아시아는 지금보다 훨씬 위험한 지역이 될 것이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과감한 행보로 한국 나름의 ‘예측불가능성’을 보여줘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후 첫 상·하원 합동 의회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우선, 북한 핵개발이 가져오는 최대 위험은 역내 군비 확장이라고 ‘돌직구’를 날려야 한다. 그리고 미국이 북한, 중국, 러시아와 함께 진지한 협상에 나서도록 해서 북한이 핵실험을 중단하고 기존 핵무기를 폐기하도록 합리적으로 유도하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미국은 북한과의 외교 정상화를 제안해야 한다. 이는 즉시 한반도 긴장상태를 완화할 것이며, 북한이 혹시라도 핵무기를 사용하려는 가능성을 낮출 것이다. 그다음으로 핵확산금지조약 가입국 의무에 따라 미국 또한 완전한 비핵화를 향해 분명하고 검증 가능한 첫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세계 각국과 미국 국민 다수는 원칙을 지키려는 미국의 노력을 환영할 것이다. 미국이 향후 10년간 핵무기 6800기를 200기 미만으로 감축하겠다고 약속하면 아시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 군부 내에서 치열한 권력투쟁이 일어나고 있어 핵무기의 적절한 통제에 관한 우려가 증가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이는 미국의 신속한 핵무기 해체를 요구하기에 최고로 좋은 타이밍이다. 한국은 미국이 안보를 지켜주겠다는 약속에 충실히 임하는 한편, 북한의 핵 공격처럼 가능성 낮은 위협보다 지금 당장 눈앞에 닥치고 가능성도 높은 위협에 집중할 것을 요청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미국, 일본과 힘을 합칠 수도 있다. 3국은 사이버 공격과 조직범죄 증가에 통합된 대응을 하고, 드론 및 3D 프린팅을 이용한 신무기의 통제 및 대응 과정에서 힘을 합칠 수 있다.

무엇보다 한국과 미국, 일본은 기후변화라는 막강한 위협에 직면해 함께 대처 방안을 만들어갈 수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등에 대응하기 위해선 대규모 인프라 투자와 함께 인간의 생존을 담보할 다양한 기술 개발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를 현실로 옮기기 위해선 역내 국가들이 군사 및 정보를 통합하고 이를 온전히 재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는 오래전에 완수했어야 하는 과업이다. 중국과의 협력 여지도 충분하다. 4개국이 긴밀한 조율을 시작한다면, 미국과 중국은 장기적 안보 협력을 위한 폭넓은 합의, ‘대타협’을 이룰 실질적 가능성도 타진할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나 공화당이 장악한 미국 의회에서 한국의 이런 제안을 반길 사람은 몇이나 될까? 감히 말해 보자면, 거의 없다. 아마 대부분은 처음에 격분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미국 정치인의 생각에 대해서는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정치체제 전반에 대한 미 국민의 불신이 유례없는 수준으로 높은 걸 보면, 국민과 유리되어 가는 미국 정치인들이 국민의 의견을 대변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미동맹의 미래를 위해 한국이 제안을 한다면, 한국은 실질적 안보 이익을 지킴과 동시에 미국의 장기적 안보 이익도 지켜주게 된다. 모두를 기쁘게 하기 위해 어색한 가식을 떨 시기는 지났다. 군수회사의 로비를 받은 미국 정치인이 한국의 제안에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한국이 생존을 위해 실질적 비전과 전략을 주체적으로 수립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

중국과 군사 대립에서는 미래를 찾을 수 없다. 북한과의 전쟁도 마찬가지다. 분명한 사실을 소리 내어 말하고, 이를 기준으로 수립한 안보 원칙을 천명하는 것이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 되어야 한다.

이만열 |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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