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경남 창원에서 열린 촛불집회 연단에 24세 청년이 올라왔다. 유튜브를 통해 본 영상에서, 그는 20세에 취직해 4년째 최저임금을 받고 있는 전기공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세금 떼고 나면 손에 쥐는 월급이 120만원인데, 방세와 교통비, 식비, 공과금을 내고 나면 저축을 할 돈이 남지 않는다고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지만, 지금의 월급으로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궁금해서 촛불집회에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박근혜 퇴진 이후에 자기 삶이 나아질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고 했다. 1987년에도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고, 그다음에 노동자들이 대투쟁을 해서 임금도 오르고 삶이 나아졌다고 알고 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건지 궁금하다고 했다. 이 청년노동자의 소망처럼, 이번 촛불은 우리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 수 있을까? 유튜브에 떠 있는 자유발언 영상들을 보면, 이런 희망 섞인 기대들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반면 하루하루 밝혀지는 대한민국의 민낯은 참담하기만 하다. 소설가로 알려진 대학교수가 ‘정유라’에게 학점을 주기 위해 부정행위를 서슴지 않았다는 뉴스가 나온다. 국회에서는 태연하게 ‘최순실을 몰랐다’고 잡아떼던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사실은 최순실·정유라에게 수백억원을 지원하라고 직접 지시했다는 뉴스도 나온다. 힘과 돈을 가진 이들이 나라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런 나라를 바로잡겠다고 알바비 7만원을 포기하고 왕복교통비까지 들여서 촛불집회에 나왔다는 청소년이 있는 게 이 나라의 기막힌 현실이다.

(출처: 경향신문DB)

그래서 이번에는 ‘박근혜’라는 한 사람이 물러나는 것으로 끝낼 일이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쌓여 있는 이 나라의 적폐를 청산하는 것과 함께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것이 없지는 않다. 많이 훼손되어 왔지만, 소중한 대한민국만의 유산도 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국을 떠나,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독립운동가들이 꿈꿨던 나라의 모습이 여러 문서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 문서들을 보면, 대한민국의 참된 헌법정신, 건국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은 ‘고르게 인간답게 사는 민주공화국’이다. 무슨 근거로 이런 얘기를 하느냐고 묻는다면, 1941년 11월2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포했던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보라고 말하고 싶다. 이 문서에서 독립운동가들은 ‘삼균주의(三均主義)’를 표방하고 있다. 조소앙이 이론적 기반을 세웠던 삼균주의는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의미한다. 보통선거를 통해 정치의 균등을, 토지 국유를 통해 경제의 균등을, 무상교육을 통해 교육의 균등을 도모하고, 불평등을 해소한다는 것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이 꿈꿨던 나라는 이런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런 내용은 1948년 제헌헌법에도 반영된다. 제헌헌법은 이승만 세력, 한민당 등 우파로 분류되는 집단들도 참여해서 만들어졌지만, ‘대한민국 건국강령’의 연장선상에서 ‘만민균등주의’를 기본정신으로 택했다. 그래서 ‘모든 영역에서 사람들의 기회를 균등히 한다’는 것이 헌법 전문에 담겨 있다. 헌법 제정 과정에서 많은 역할을 했던 법학자 유진오는 “대한민국 헌법의 기본정신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적·경제적 민주주의의 조화를 꾀하는 데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제헌헌법이 만민균등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좀 더 구체적으로 규정한 내용도 있다. 대표적으로 노동자에게 이익균점권을 보장했다. 사기업의 근로자가 기업의 이익 분배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이익균점권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그만큼 제헌헌법을 만들 당시에는 만민균등주의에 대한 공감대가 존재했던 것이다. 만약 이런 정신만 실현되고 있다면, 24세 청년노동자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낫지 않았을까?제헌헌법은 토지 자체를 국유로 하지는 않았지만, 광물 등 지하자원은 국유로 한다고 규정했고, 운수·체신·금융·보험·전기·수도·가스 등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는 규정도 두었다. 농민이 농지를 가질 수 있도록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정했고, 이 조항을 근거로 이승만 정권도 농지개혁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과정은 끊임없는 헌법정신의 훼손이었다. 노동자 이익균점권은 5·16쿠데타 이후인 1962년 삭제되었다. 공공성 있는 기업을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는 조항은 그보다 앞선 1954년 삭제되었다.

물론 지금 이런 조항을 단순히 부활시키자는 얘기를 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조항을 두었던 헌법의 기본정신을 복원하자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이, 그리고 제헌헌법이 꿈꿨던 나라는 ‘고르게 인간답게 사는 나라’였던 것이 분명하다. ‘헬조선’은 헌법정신과는 정반대의 결과이다.

그래서 박근혜 퇴진은 정경유착과 특권·기득권 구조의 퇴진이 되어야 하고, 제헌헌법의 정신을 부활시키는 강력한 개혁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선거제도 개혁, 재벌 개혁, 검찰 개혁, 관료기득권 개혁, 중앙집권적 국가구조의 개혁이 필요하다. 일하는 사람에게는 정당한 대가가 보장되고, 누구나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비빌 언덕’이 권리로 보장되어야 한다. 이런 나라를 이제는 만들어야 한다.

하승수 |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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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서 개헌론이 분출하고 있다. 여당의 분당으로 신4당 체제로 정치권 구도가 재편되면서 개헌을 매개로 한 대선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개헌론자들의 주장은 박근혜 게이트처럼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이 문제가 되니 개헌을 통해 이를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시키자는 주장,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고치자는 의견도 있다. 1987년 체제 이후 강화된 시민의 정치·사회적 권리를 헌법에 반영해야 한다는 논리도 있다.

하지만 지금 제기되는 개헌론은 생각해봐야 할 점이 많다. 우선 정치권이 당장 개헌 논의를 시작하면 모든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그런데 이번 촛불집회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시민들의 요구는 단순한 개헌이 아니다. 특권과 반칙으로 점철된 구체제의 개혁과 일신이다. 개헌론자들은 개헌에 이런 개혁 과제들을 담아낼 수 있다고 하지만 실현 가능성이 의심된다. 당장 대선 정국과 맞물려 개헌의 본래 취지는 뒷전으로 밀리고 개헌파와 비개헌파로 나뉘어 권력을 잡는 일로 날을 지새울 게 뻔하다.

개헌론은 특히 대통령에 대한 권력 집중을 문제점으로 지적한다. 하지만 한국 정치가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는 것은 헌법 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 헌법의 문제에 앞서 민주주의의 기본 프로세스 자체가 작동하지 않은 탓이 크다. 기존 헌법에도 책임총리제 등 권력 분산의 요소가 다 들어있다. 더구나 촛불시민들의 요구대로 개혁을 한다면 대통령에 대한 권력 집중과 부정부패 등은 충분히 해소할 수 있다. 개헌까지 갈 것도 없이 여야 정치권과 검찰, 언론이 제 기능을 다한다면 제왕적 대통령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경향신문DB

설령 권력 체제를 개편한다 해도 내각제나 대통령제, 이원정부제 가운데 무엇이 최상인지 합의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내각제와 대통령제가 다 문제라면 이번에는 이원정부제를 도입해야 하는데 현대정치에서 내치와 외치를 구분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대통령의 권력이 너무 강하다고 해서 권력해체에만 집착하면 또 다른 폐해를 낳을 수 있다. 대통령이 권한을 가지고 책임있게 국정을 운용할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가능성이 있다.

개헌의 또 다른 맹점은 정치세력들이 저지른 실책을 한꺼번에 덮어버린다는 것이다. 대선은 지금까지 어느 정치세력 또는 어떤 정치인의 잘잘못을 가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개헌은 모든 것을 제도의 결함으로 치부하기 때문에 모든 대선후보를 동일선상에 놓아버린다. 여당과 그 지도자의 실정에 대한 심판이나 야당 정치인의 잘못된 정치적 선택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도 다 소용이 없어진다.

당초 개헌론은 지난 10월 수세에 몰린 박근혜 대통령이 제기했으나 정략적 접근이라는 비판으로 수그러들었다가 탄핵 가결 후 재등장했다. 여당은 물론 야당 일부까지 가세해 만병통치약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지금 개헌론은 개헌 그 자체보다 개헌을 매개로 자기 정파의 정치적 이득을 챙기는 데 목표가 있다. 현 정치 구도가 대선을 치르기에 불리하다고 판단한 정치인들이 개헌을 고리로 힘을 모아 상황을 바꾸려는 것이다.

지금 개헌안은 구체성이 결여돼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개헌이 가능하지도 않다. 개헌 방향에 대한 합의조차 없는데 언제 민감한 헌법 조항까지 합의해 통과시킬 수 있을 것인가. 대선 국면에서의 개헌은 시민의 참여 기회도 제약한다. 그래서 지금 개헌을 주장하는 것은 당략적 접근일 수밖에 없다. 정치인들만의 개헌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개헌은 시민의 뜻을 충분히 모아야 한다. 대선 공약으로 제시하고 심사숙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정치권은 이제 개헌론의 수렁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민들이 요구한 개혁 과제를 입법화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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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여야 3당은 내년 1월부터 6개월간 국회 개헌특위를 운영키로 합의했다. 위원은 새누리당 8명, 민주당 7명, 국민의당 2명, 비교섭단체인 정의당 1명 등 총 18명으로 구성하고, 위원장은 새누리당이 맡기로 했다.

탄핵 시국에서 개헌 추진 자체에 대한 논란도 있고 개헌 내용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분출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떠한 방향으로 개헌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에 앞서 개헌 논의를 국회에만 맡겨둬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개헌의 방향에 대한 여야 간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고, 같은 당 안에서도 생각의 차이가 있는 상황에서 개헌안 마련을 의석수에 비례한 국회 특위에 맡길 경우 과연 가능할까. 국회는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선거구획정조차 입장 차이로 법정시한을 넘겨 처리했다. 선거구를 넘어서서 권력구조 변동을 다룰 수밖에 없는 헌법개정안을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대안으로 헌법개정 시민의회를 제안한다. 아일랜드는 2012년 12월 헌법 8개 조항을 검토하기 위한 ‘헌법회의’를 1년4개월 동안 운영한 바 있다. 헌법회의는 의원 33명과 성, 연령, 지역을 감안해 추첨으로 선발된 시민 66명, 임명직 의장 1명 등 100명으로 구성됐다. 헌법회의는 전문가 집단과 8주간 회합 뒤 각 참가자들의 의견 개진, 지역별 회합, 인터넷으로 실시간 중계된 총회, 건의 내용 제시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와 온타리오주도 선거법 개정을 위해 전원 추첨으로 구성한 시민총회를 1년여 동안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우리의 헌법개정 시민의회는 국회가 운영주체가 되며 성, 연령, 지역을 감안한 추첨을 통해 뽑힌 시민으로 구성한다. 국회 의석이 있는 정당은 자체 헌법개정안을 준비해 시민의회에 제출하고, 시민사회도 일정수 이상의 국민 서명을 받아 개정안을 청원할 수 있다. 개정안을 제출 또는 청원한 정당 및 시민대표들은 시민의회에 출석해 당위성을 설명한다. 시민의회는 헌법 및 각 분야 전문가 의견을 경청한다. 인터넷 홈페이지, 각 시민의원들 등을 통해 국민 여론도 수렴한다. 최소 6개월 운영 후 시민의회가 최종 개정안을 마련하면 국회 본회의에 바로 상정해 수정 없이 찬반 투표로 처리하거나, 국회 헌법개정특위 차원에서 논의해 본회의에 상정하면 된다. 후자의 경우 국회의원들이 상정된 안에 거부감이 있다고 하더라도 시민의회 결정을 전적으로 무시하기 어려울 것이다. 본회의에서 통과되면 국민투표에 부친다.

촛불로 표출된 우리 시민들의 시민혁명에 경외감을 쏟아내면서도 헌법개정은 국회에서 정당들끼리 알아서 하겠다고 하는 것은 촛불 민심에 대한 배신이다. 그럴 경우 촛불이 대통령을 넘어서 국회, 정당으로 향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말로만 깨어 있는 시민을 찬양할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제1조의 정신에도 부합하는 헌법개정 시민의회를 제도화할 것을 정치권에 촉구한다.

이지문 | 연세대 SSK 연구교수·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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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을 계기로 헌법을 다시 볼 기회가 생겼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전에는 헌법 문구들을 당위적으로 대했다. 이번엔 사뭇 달랐다. 조항을 읽을 때마다 촛불을 켜는 정성이 생각나고 광화문 거리를 걸었던 해방감이 밀려왔다. 촛불파도가 넘실거리듯, 단어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몇 번의 촛불 참여가 이러한데 처음 민주공화국을 외치며 쓰러져간 사람들은 어땠을까? 복지국가도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국민은 행복추구권과 인간다운 생활권을 지니고 국가는 이를 보장해야 한다는 조항들, 헌법의 명령이 바로 복지국가였다.

며칠 전 빨라진 대선에 관해 토론하다 지인이 물었다. 복지시민단체는 무엇을 내세울 거냐고. 복지 쪽에선 어떤 요구가 있을지 궁금하고 획기적인 게 나올까 하는 의문이 담긴 질문으로 들렸다. 한두 해 전부턴 강연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복지국가가 시들해진 것 아닌가요?”라고 묻는다. 이때마다 대답들은 있다. 우선 복지재정이 부족하다. 박근혜 정부 들어 복지 공약이 축소되었고 누리과정예산 공방처럼 복지 확충보다는 복지 유지를 둘러싼 힘겨루기만 되풀이돼 왔다. 이러니 시민들이 복지국가를 향한 상상을 키우기보단 당장 ‘돈이 없는데 어떻게 복지를 늘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복지세력도 미약하다. 복지는 정치 영역에서 결정되기에 정당이 중요하건만 복지국가를 주창하면서도 ‘세금폭탄론’을 서슴없이 꺼내는 게 우리나라 정당이다. 서구에선 노동조합도 복지국가를 만드는 핵심 부대였다는데 우리나라 노동조합이 여기에 얼마나 힘을 쏟는지를 따지면 긍정적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등등.

헌법 문구에서 복지국가를 생각하다 문득 질문이 나에게로 향했다. 혹시 나도 기성체제이지 않았을까? 하루하루 ‘헬조선’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절박함과 제대로 호흡하고 있었을까? 재정이 없다고? 이미 시민들은 공적보험에 내는 보험료보다 더 많은 돈을 민간보험에 내고 있다. 빈약한 공적보험 탓에 어쩔 수 없이 민간보험에 가입하고 또 이 보험료 때문에 힘겹다고 토로한다. 그렇다면 민간보험료를 공적보험으로 돌리면 되는 일 아닌가? 월평균 1만원 정도 더 내서 민간보험 대신 ‘국민건강보험 하나로’로 병원비를 해결하자는 제안이 몇 년째 잠만 자고 있다. 민간보험료에 힘겨운 사람이 이리 많은데도 왜 이 운동을 힘있게 벌이지 않느냐며 헌법이 질타한다.

복지서비스 질은 어떤가? 아이의 보편 권리로 보육복지가 자리 잡은 건 큰 성과이다. 하지만 비용의 대부분을 공공재정으로 충당할 뿐 ‘믿음직한 안심 보육’이라 말하긴 어렵다. 장기요양 복지도 본인부담금은 줄었지만 지금과 같은 서비스에선 당사자 노인이나 자식들 모두 마음이 불편하다. 의료는 어떤가? 아프니 병원에 가지만 수익을 위해 과잉진료받은 건 아닌지 의구심을 지니며 병원을 나선다. 주거도 걱정 중 걱정이다. 공공임대주택에 들어갔으면 좋으련만 그림의 떡이고 전·월세 비용에 허리가 휜다.

이렇게 아우성이 높은데도 복지국가 이야기가 시들해졌다면 복지시민운동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무엇보다 양적 확대 논리에 얽매여 있었다. 다음에 또 무슨 복지를 추가할까 궁리하다 아동수당, 청년배당을 내놓는 방식이다. 사실 복지국가가 갖추어야 할 항목들은 이미 우리나라에 거의 도입돼 있다. 그런데도 시민들이 복지국가로 가는 길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복지구조 자체를 문제시해야 한다. 이는 국가재정이 투입되지만 사적 체제에 의존하기에 가계 지출이 여전하고 복지 질도 높지 못한 원인을 찾는 진단이다.

더 담대하게 복지국가를 말하자. 보육, 요양, 의료, 주거 복지는 공공인프라를 기반으로 해야 질 좋은 복지를 체험하고 가계 부담도 더 덜 수 있다. 지금까지 급식, 보육, 기초연금 등 양적 전면화를 추구하는 ‘선별복지에서 보편복지로’가 핵심 담론이었다면 이제는 복지구조를 혁신하는 ‘사적복지에서 공적복지로’로 가자. 이번엔 상대가 더욱 막강하다. 맞서야 할 주요 세력이 민간보험사, 종합병원, 건설사 등 재벌기업들이다. 결국 헌법에 명시된 민주공화국의 두 기둥,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는 모두 재벌체제와 정면 대응해야 하는 일이다.

모두가 촛불은 단지 대통령을 바꾸자는 데 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함께 사는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을 꿈꾼다. 우리 스스로를 일깨우고 손잡게 한, 비로소 헌법의 맥박을 뛰게 만든 촛불을 믿고 복지국가 길을 개척해 가자. 대통령을 끌어내릴 수 있다는 자신감, 우리가 주권자라는 자부심, 새로운 대한민국을 향한 열망이 우리에게 있지 않은가?

오건호 |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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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헌법 본문 앞에는 전문(前文)이 있다. 헌법학자들은 이 전문이 본문의 각 조항을 지배하는 근본원리로서, 헌법의 본질적 부분을 이루는 ‘헌법의 헌법’이라고 본다. 그래서 헌법 전문은 당연히 헌법규범의 단계적 구조 중에서 본문에 우선하는 최상위의 근본규범이 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으로 시작하는 헌법 전문에는 곧이어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부분이 나온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부정선거로 헌법을 유린하고 측근들의 부정축재를 용인한 이승만 정권에 대항한 시민혁명이 4·19혁명이다. 이리하여 4·19 시민혁명의 이념은 현재를 사는 대한민국 국민이 헌법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계승해 가야 할 이념이 된다.

지난 주말 5차 촛불집회는 서울 광화문에 150만명, 전국적으로는 190만명에 이르는 사상 최대 규모의 집회였고, 전 세계에 비폭력·평화집회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광장은 10대부터 70대 이상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로 빼곡히 채워졌지만,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요구는 단 하나, ‘대통령 즉각 퇴진’으로 모아졌다. 퇴진 전까지 물러서지 않겠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대통령 지지율이 4%로 추락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말해주듯, 그 시각에 집이나 직장에 있던 국민들의 마음도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대다수 국민들은 지난 대선에서 대통령에게 부여한 국민적 신임을 이제 거두어들인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26일 제5차 촛불집회에서 처음으로 행진이 허용된 서울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 모인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당 일부에서는 “현시점에서 대통령 하야는 헌정 중단, 헌정 파괴”라는 주장이 나왔다.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퇴진은 헌법이 예정하고 있는 절차와 방법이 아니므로 ‘헌정 중단’이나 ‘헌정 파괴’를 낳을 것이라며, 대통령 퇴진 이후의 정국에 대해 불안감을 국민들에게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지금의 상황이야말로 국민들에게 불신임당한 대통령에 의해 헌법에 따른 국정 수행이 중단된 ‘헌정 중단’의 상황이다. 주권자인 국민들의 요구에 의해 대통령이 퇴진하고, 이후 정국 수습을 통해 국정 공백 상태를 극복하며 60일 이내의 선거를 통해 5년 임기의 새 대통령을 뽑아 민주 헌정을 이어가는 것이야말로 ‘헌정 회복’이고 ‘헌법 수호’이다.

대통령의 중도 ‘퇴진’은 우리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전혀 불안해야 할 일이 아닌 것이다. 헌법 제68조 제2항은 ‘대통령이 궐위된 때’에는 ‘60일 이내에 후임자를 선거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궐위’란 대통령이 사망하거나 탄핵결정으로 파면된 경우뿐만 아니라 대통령 스스로 ‘퇴진’한 경우를 포함한다. 헌법은 전문의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부분을 통해 국민적 신임을 잃은 대통령은 임기 중에도 중도 퇴진할 수 있음을 규정함과 동시에, 불의의 정권이 퇴진하고 난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대통령에게 헌법 제70조가 부여한 대통령 5년 임기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선거를 통해 국민들이 부여한 신임을 스스로 저버린 대통령은 임기 중간에도 주권자인 국민들의 당당한 퇴진 요구에 의해 퇴진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국민들이 직접 불의의 정권에 책임을 묻는, 헌법이 정한 절차와 방식이다. 헌법이 정한 이러한 절차와 방식에 따라 질서 있게 이 헌정 위기를 수습하는 것이야말로 지금의 ‘혼란’을 극복하고 ‘평화와 안정’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오히려 위험스러운 것은 대통령의 퇴진 거부로 ‘국정 공백’과 ‘헌정 중단’ 상황이 길어지는 일이다. 가계부채가 늘어나 1300조원에 육박하고 내수와 수출이 모두 얼어붙고 있다고 한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으로 외교·국방에도 중요한 현안들이 쌓이고 있다. 대통령의 퇴진 결단이 시급한 이유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정치권이 가장 치중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진상규명의 노력이다. 검찰과 특검의 성역 없는 수사와 함께 국회의 국정조사와 탄핵소추가 병행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진상규명이 병행되면 주권자인 국민들은 이를 통해 규명된 진상들에 근거해 계속해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할 것이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국민이 성공하는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광화문에 부모 손을 잡고 나온 많은 아이들에게도 희망을 줄 수 있다.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국민들은 머지않은 장래에 승리의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그 후 이제 어떤 대한민국으로 갈 것인가를 국민과 정치권이 치열하게 논의하면 된다.

임지봉 |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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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군중이 매주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거리의 의회’를 열고 있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을 능가하는 분노의 함성과 외침이 만추의 광화문광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서 드러난 ‘권력의 사유화’로 박 대통령은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상실하고 통치불능의 상태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 했듯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상실한 지도자는 국가를 이끌어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1974년 7월25일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범죄행위를 저지른 닉슨 대통령을 탄핵 소추한 하원 법사위원회에서 바버라 조던 하원의원은 “국민의 공적신뢰(public trust)를 배신한 대표는 탄핵될 수 있다”고 연설하였다. 대의 민주주의하에서 주권자인 국민은 대표에게 권력을 한시적으로 ‘위임’한 것이지 ‘신탁’한 것이 아니다. 대표는 주권자인 국민의 수탁자(fiduciary)가 아니라 대리인(agent)일 뿐이다. 수탁자는 피수탁자인 국민의 공익을 위해 정치권력을 행사하도록 위임받았지만, 위임받은 기간 동안 피수탁자인 국민에 대한 책임성으로부터 면제된다. 반면에 대리인으로서 대표는 주인인 국민에 대해 엄격하게 책임을 지도록 기속(羈束)되며, 따라서 국민의 공적신뢰를 상실한 대표는 권력을 회수당할 수 있다. 대의 민주주의하에서 국민이 대리인인 대표, 특히 대통령의 권력을 회수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주기적 선거를 통한 퇴출밖에 없다. 그래서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은 탄핵제도를 헌법에 넣음으로써 입법부가 국민을 대리하여 공적신뢰를 상실한 대통령을 비롯해 대표들의 권력을 회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난 19일 전국 60여 곳에서 열린 4차 촛불집회에 주최 측 추산 96만명(경찰 추산 26만여명)이 참여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외쳤다. 부산 서면 촛불집회(왼쪽 사진)에는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10만명이 참가했다. 대구 중구 대중교통전용지구에서 열린 집회 참가자들은 ‘박근혜 퇴진, 새누리 해체’라고 적힌 현수막을 전달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오른쪽 위). 광주 집회에선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당시 광주시민들이 도청 앞 분수대에 횃불을 켜고 열었던 ‘민주성회’가 재현됐다.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은 오는 26일 5차 촛불집회에 최대 300만명이 참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대한민국은 미국식 탄핵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헌법 65조는 대표가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에는’ 국회가 탄핵을 소추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검찰은 박 대통령이 최순실 일당과 범죄를 공모한 혐의가 있다고 발표했다. 따라서 박 대통령은 특검에 의해 추가 범법행위가 밝혀지기 이전에도 탄핵 소추를 당할 수 있다.

탄핵은 헌법에 명시된 합법적 절차이나, 현 탄핵사태가 헌정위기로 발전할 것인가의 여부는 박 대통령의 대응에 달려 있다. 여야의 탄핵 소추 시도에 대해 박 대통령은 주권자인 국민의 충실한 ‘대리인’이 아니라 국민에 대한 책임성으로부터 면제된 ‘수탁자’처럼 행동함으로써 자유 헌정주의의 기본 정신을 위반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국회가 탄핵 소추에 필요한 ‘적법한 절차(due process)’를 밟는 데 협조하지 않고 있다. 검찰의 대면조사를 거부하고, 탄핵 소추가 의결되었을 경우를 대비하여 대통령 권한 행사가 정지된 기간 동안 과도정부를 대행할 국무총리의 임명도 거부할 태세다.

워터게이트 사건 때 닉슨이 하원에 의해 탄핵 소추된 것은 그의 범법행위보다도 검찰의 워터게이트 사건 수사를 방해하고 사건을 은폐하려 했기 때문이다. 미국 헌법은 대통령이 법이 충실하게 집행되도록 조치를 취할 의무를 지닌다고 규정하고 있다. 미국 헌법의 아버지인 제임스 매디슨은 “대통령이 헌법을 전복하려고 시도한다면 탄핵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닉슨은 헌법을 전복하려 함으로써 국민과 의회를 분노케 했고 퇴출된 후에도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남아 있다. 박 대통령이 갈수록 더 거대한 국민적 저항에 부딪히고 있는 것은 검찰의 대면조사를 거부하면서 최순실 사건 수사에 성실히 협조하고, 탄핵 시 필요한 조치를 취해 주겠다는 기존의 약속을 뒤집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국가 최고 공인으로서 지켜야 할 공적신뢰를 배신하였기 때문에 국민적 분노를 사고 있는 것이다.

지금 박 대통령에 대한 분노는 거리와 광장에서 분출되고 있다. 이제 거리에서 분출되고 있는 분노를 의회 대표들이 장내로, 의사당 안으로 끌어들여 처리해야 한다. 계속 ‘거리의 의회’가 ‘제도권 의사당’을 압도할 경우 국민적 분노는 통제불능 상태가 될지 모르며, 한국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게 될지 모른다. 박 대통령은 탄핵에 필요한 절차가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국회와 검찰에 협조함으로써 이번 사태가 한국 민주주의의 후퇴가 아니라, 더 책임성 있는 민주주의로 전진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 주어야 한다. 노자는 “멈추어야 할 때와 장소를 알면 위태롭지 아니하다(知止不殆)”라고 가르쳐 주었다. 박 대통령은 이미 멈추어야 할 지점을 너무 멀리 넘어가 버려 위태롭게 되었다. 지금 박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만족해야 할 최적점을 발견하는 것이다(知足不辱). 박 대통령이 만족해야 할 최적점은 국민의 일반의사이다. 광장에서 표출되고 있는 국민적 요구에 응답하면 박 대통령은 닉슨처럼 치욕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임혁백 |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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