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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1.21 [시론]잘 비워야 잘 채운다

최근 미국의 한 대학 연구팀이 수면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낮에 깨어 있을 때는 뇌가 일하고, 밤에 잠 잘 때에는 뇌가 쉰다는 것이 그간의 통념이었다. 그러나 이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밤에 잠을 자고 있을 때에도 뇌는 맹렬하게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뇌가 하는 낮일과 밤일이 전혀 다르다고 한다. 낮에 깨어 있을 때에는 외부환경으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이는 일을 한다. 그러나 밤에 잠을 잘 때에는 낮 동안 받아들인 정보 중에서 필요 없는 것을 삭제하고, 치매와 같이 뇌 질환을 야기하는 독성물질을 제거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불충분한 수면으로 뇌가 밤일을 제대로 못하면,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낮일에도 지장이 있고, 뇌 질환의 위험도 커진다고 한다. 잘 배설하지 못한 채 먹기만 하면 큰 탈이 생기는 것이 몸의 일반 생리인데, 두뇌 활동도 예외가 아니었다.

외국 고등학교에서 교환학생으로 머문 미국 학생들의 경험을 담은 미국 언론인 아만다 리플리의 책에는 우리나라 학교의 일상이 소개되어 있다. 반 아이들의 3분의 1이 아침 첫 시간부터 잠을 자다가 쉬는 시간이 되자 일제히 잠에서 깬다. 그리고 일분일초가 아깝다는 듯 떠들며 놀다가, 다음 시간이 시작되자 다시 잠을 잔다. 이 와중에도 선생님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수업을 진행한다. 이 광경을 지켜본 미국 교환학생은 마치 한 편의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고 소감을 말한다. 우리나라 학생의 공부시간은 세계에서 가장 길다. 뛰어노는 시간을 없애고, 잠을 줄인 결과다. 그러나 책상에 앉혀놓은 시간만 길지, 온전한 정신으로 공부하는 시간은 세계 최장이 아닐 수 있다. 공부의 질은 따질 것도 없다. 이런 비효율 탓에 애먼 아이들만 파김치처럼 시들고 있다. 몇 달 전 뉴욕타임스에는 한국의 교육을 아동학대에 비유하는 기고문이 실리기도 했다.

지금의 어른 세대도 어릴 적부터 “잘 것 다 자고 놀 것 다 놀면서 언제 공부하느냐?”는 말을 수없이 들으며 자랐다. 이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요즘에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압력은 아이들이 감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의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학생의 삶의 질과 행복지수가 모두 꼴찌로 나타났다. 지금 당장 아이들이 맘껏 행복하도록 교육제도를 뜯어고치지는 못하더라도, 잠시나마 아이들의 숨통을 터주는 것은 필요하다. 아이들이 잠을 좀 더 잘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한다.

경기도 내 초·중·고등학교의 '9시 등교'가 본격화 된 9월 수원시 대평고등학교 2학년 4반 교실 모습. 9시가 가까이 되자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리에 앉았다. 경기도 내 2250개 학교 중 2001개 학교가 '9시 등교'에 참여했다. (출처 : 경향DB)


경기도의 9시 등교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9시 등교로 우리나라 아이들의 과잉학습과 만성 수면 부족 문제가 해결될 리 만무하다. 근본 원인은 딴 데 있기 때문이다. 9시 등교는 대증요법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제껏 학원교습시간 제한 정도를 빼고는 이런 종류의 대증요법조차도 변변한 것이 없었다. 그간 교육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된 온갖 조치들이 아이들의 어깨만 더 짓누르는 결과를 낳곤 했던 점을 감안하면, 이런 대증요법조차도 아이들에게는 큰 힘이 될 수 있다.

아이들이 좀 더 잘 수 있도록 숨통을 터주는 것은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데도 중요하다. 그동안 수많은 연구를 통해 수면 부족은 심혈관계질환, 당뇨, 비만, 사고, 정신질환 등 각종 질환의 발생 위험을 높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성장기 아동·청소년의 몸과 마음에는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이런 부정적 영향은 평생을 따라갈 수 있다.

아이들의 잠을 좀 더 재우자는 명분에 반대할 학부모는 없다. 그러나 현실적인 걱정거리는 있다. 첫째는 아이보다 일찍 출근하게 되는 맞벌이 학부모의 어려움이다. 당장 우리 집도 이 문제에 걸려 있다. 9시 등교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서는 이들의 불안을 일소할 수 있는, 좋은 아침 활동 프로그램들이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 경기도 일부 학교의 사례처럼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금상첨화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참에 9시 등교 때문에 탄력근무제를 요구하는 직장인과 탄력근무제를 시행하는 사용주가 늘어나길 기대해 본다. 둘째는 9시 등교를 시행하지 않는 지역에 비해 학업이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이다. 그러나 이런 걱정은 붙들어 매셔도 된다. 잠 좀 더 재운다고 학업을 등한시할 만큼 우리 아이들이 미련하지는 않다. 그리고 잘 자야 잘 비우고, 잘 비워야 잘 채운다.


이진석 | 서울의대 교수·미 텍사스 보건대학원 교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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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