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기업이 부담되더라도 근로자의 권익 보호를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찬성 79.1%, 반대 20.9%) “우리가 다소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은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찬성 82.8%, 반대 17.2%)

어떤 여론조사 결과일까? 놀라지 마시라. 2007년 대선을 앞두고 한겨레가 실시한 국민 이념조사 결과이다. 다른 여론조사와 달리 ‘다소 부담되더라도’ ‘다소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이주노동자 인권 보호를 지지하는지를 물어본 것인데, 우리 국민들 5명 중 4명이 긍정적인 답변을 한 것이다.

10년이 지나 2017년 대선을 앞둔 지금 다시 한번 조사해 본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생업을 잠시 접고 국정농단 세력 단죄에 나서고, 도심 교통체증을 인내하며 광장에 나오는 촛불 민심을 들여다보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하지만 그렇지 않은 대목도 존재한다. 최근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개선과 정규직 전환을 촉진하기 위해 추진되어온 ‘교육공무직법’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고작 11개 조항과 부칙으로 만들어진 이 법안에 대해 선동적인 반대 의견이 쇄도해 결국 이 법안을 발의한 더불어민주당 측이 사회적 토론을 통한 재추진을 전제로 발의를 취소하기에 이르렀다.

법안 내용의 핵심은 아니었지만 교사 자격증을 소지한 비정규직 노동자를 교사로 채용토록 노력한다는 조항에 대한 취업준비생들의 반대 의견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는 취업전선에 선 수많은 청년들의 절망은 폭발 직전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드러난 일부 교사, 공무원들의 반대 의견은 이해하기 어렵다. “시험도 보지 않고 정규직이 되겠다는 거냐?” “예산도 충분치 않은데 가능한 일이냐?”

이런 의견은 그나마 신사적인 수준이다. 업무 자체가 정규직과 다른데 어떻게 동일 처우를 바라느냐, 아는 사람 추천으로 들어온 이도 있는데 모조리 정규직 전환을 해야 하느냐 등 노동과 비정규직을 비하하는 의견들까지 개진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우선 간단한 오해부터 풀고 시작하자. 교육공무직법은 37만여명에 달하는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를 (공무원이 아니라)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처우를 개선하자는 취지이다. 따라서 시험 얘기가 끼어들 이유가 없다. 예산이 충분치 않다? 이 얘기는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교사, 공무원들의 처우 악화로 이어지는 논리가 되고 말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학교 비정규직 업무의 노동강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휴가 한 번 쓰기도 어렵고 근골격계 질환도 심각하다. 업무가 정규직 노동과 다르다? 맞다. 훨씬 힘들고 어렵고 기피하고픈 업무들이다. 하루만 일해봐도 처우가 이래선 정말 곤란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 주자고는 못할망정 처우의 획기적 개선 필요성을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

교육공무직법이 담고 있는 핵심 내용은 11개밖에 되지 않는 법조항 숫자만큼이나 단순명쾌하다. 우선 상시적인 업무에는 비정규직을 사용하지 말고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하라는 것이다. 정부 역시 올해 4월7일 ‘기간제 고용안정 가이드라인’에 이러한 취지를 담은 바 있다. 하지만 이는 법이 아니라 지침에 불과해서 사업장에 적용을 강제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선 교육현장에서만이라도 이 원칙을 법으로 강제하자는 것이다.

다음으로 ‘근속을 인정한 임금체계’를 도입하라는 것이다. 1년을 일해도, 10년을 일해도, 어제 입사한 노동자와 똑같은 임금을 받는 게 과연 합리적인가? 호봉제나 근속수당 도입 등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교육공무직법은 구체적 방법은 명시하지 않되 임금과 처우에 대해서는 “근속 기간을 고려하여 정하”도록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길게 보면 교육공무직법 제정은 교사와 공무원의 권리를 높이는 계기가 된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교사·공무원들이 함께한다면, 정규직으로 전환된 노동자들은 교사·공무원의 권리 확대를 위한 사업에 연대할 것이다. 교사·공무원과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연대가 성사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교육 현장의 모든 노동자들이 K스포츠재단이나 미르재단 설립 등에 투입되는 예산, 재벌들만 배불리는 정책에 투여되는 예산을 찾아내는 집단적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쓸데없는 곳에 투입돼 낭비되는 예산을 교육현장에 투입하자는 주장이 자연스럽게 나올 것이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대중운동이 구성된다. 정규직 혼자서, 또는 비정규직 혼자서 운동을 하는 것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공동의 목표를 향해 같이 나선다면 여기에서 뿜어지는 거대한 에너지는 교육 현장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과 권리 보장을 만들어낼 것이다.

2007 이념 지도에 나타난 국민들 의식, 즉 ‘다소 부담되더라도’ ‘다소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정규직 전환이 필요하고 이주노동자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의 바탕에도 그런 것이 깔려 있다. 즉, 이러한 시각은 “손해를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 당장은 손해와 불이익처럼 보이지만 길게 보면 나를 포함해 전체 사회 구성원에게 이익으로 작동하게 될 것이라는 영리한 생각이다. 이제 며칠 뒤면 2016년이 끝난다. 2017년의 이념 지도는 어떻게 그려 나가야 할까.

오민규 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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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최순실 사건은 역사적인 법치주의 학교이다. 부패한 자들이 너무 오랫동안 가짜 법치를 내세워 법으로 민중을 억눌렀다. 하도 당하다 보니 시민들은 법을 지배자의 채찍이며 칼처럼 여기게 되었다. 문정현 신부가 목판에 조각한 ‘법보다 밥입니다’라는 글귀도 사람들의 이런 마음을 담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문 신부의 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법은 사람들의 밥그릇을 걷어차는 군홧발이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의 법의 지배란 권력이 시민을 법으로 지배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권력의 행사는 법에서 정한 절차와 내용을 따라야 한다는 것, 즉 권력이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사임이나 탄핵이 박근혜·최순실 사건의 최종적 해결은 아니다. 이 땅에 권력자가 법을 지키는 법치를 튼튼하게 세울 때 비로소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법치에 실패하면 제2, 제3의 박근혜가 반드시 등장할 것이다.

엄중하게 물어야 한다. 왜 대한민국의 검사, 고위 관료, 그리고 국가정보원의 국가 엘리트들은 최순실에게 저항하지 않았을까? 국민적 항쟁을 촉발한 ‘정유라 부정입학 사건’의 경우도 교육부가 이를 막을 법적 권한과 절차가 대학교육법에 있었다. 재벌의 돈을 받아 만든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설립도 비영리재단법인설립법을 지켰다면 불가능했다. 비밀취급인가증이 없는 최순실에게 대통령 일정, 남북관계, 외교관계 등 국가의 중요한 비밀이 유출된 행위는 국가정보원법과 보안업무규정을 지켰으면 막을 수 있었다.

특히 국정원은 법에 의해 청와대에 대해 보안측정이나 보안사고 조사를 할 권한이 있다. 보안업무규정은 아예 국정원장에게 청와대의 보안업무가 적절하게 수행되는지 여부를 확인할 권한을 주었다. 그런데도 최순실은 지속적으로, 아무런 견제 없이 국가 비밀을 건네받았다. 나는 국정원이 청와대가 보안업무규정을 위반하여 최순실에게 국가 비밀을 건네준 행위를 몰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국정원이 몰랐다면 국정원장은 광화문광장에서 백배사죄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국가 엘리트들이 최순실에게 저항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들의 지배동맹이 영속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검찰의 최순실 공소장에 의하면 청와대의 행정관은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국가 비밀문서를 최순실에게 유출했다. 그 행정관은 대통령의 임기가 2018년 2월24일이면 끝난다는 것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그러한 행위를 한 이유는 그들의 지배동맹이 계속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법치는 영속적 한·미동맹, 영속적 남북대립 그리고 취약한 민주정당의 세 가지 장애물에 갇혀 있다. 박근혜·최순실 사건의 최종적 해결은 이들 세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끈질기게 해결하는 것이어야 한다. 전시작전권을 외부가 갖는 한 국민주권은 온전히 실현되지 않는다. 긴 설명이 필요 없다. 미국 민주주의의 문민통제 역사와 전통을 어겨 가며, 별명이 ‘미친개’라는 퇴역 장성을 국방부 장관에게 임명하겠다는 미국 대통령에게 전시작전권을 계속 주어서는 안된다. 북한 문제도 교류와 협력의 목적과 단계를 밝히고 다수 국민의 동의를 얻어, 우리 내부의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일관되게 추진해야 한다.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앞의 두 과제는 미국과 북한이라는 외부 변수가 있다. 그러므로 온전히 우리 내부의 의사 결정으로 가능한 정당 질서에서 역사적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 200만 촛불이 광화문에만 머물지 않고 국회에서 365일 국민주권으로 피어나야 한다. 국민의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왜곡 또는 과잉되게 하거나 누락하지 않고 국회 의석으로 변환시키는 선거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국가의 엘리트들은 제2, 제3의 최순실에게 저항할 것이다.

송기호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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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거짓의 가면을 쓰고 ‘망국의 춤’을 췄다. 비선 실세와 문고리 3인방은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청와대 경제수석은 경제정책이 아닌 ‘기업 목조르기’를 설계했다. 일부 고위 관료들은 권력놀음에 취해 ‘최순실 부역자’를 자처했다. 재벌은 부패한 정권에 뒷돈을 대며 정경유착의 검은 고리를 찾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그런 지난 4년은 야만의 시절이었다.

박근혜는 거짓으로 무너졌다. 2012년 대선 당시 “경제민주화와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는 공약부터 거짓이었다. 경제민주화는 취임 6개월도 안돼 폐기됐다. 기초연금·반값 등록금·4대 중증질환 100% 보장 등 복지공약은 파기 또는 축소했다. 대통령 취임 이후엔 틈만 나면 규제완화를 주술처럼 외쳐댔다. “규제는 암덩어리다. 단두대에 올려 규제 혁명을 이루겠다”고 했지만 그것도 거짓이었다. 겉으로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속셈은 ‘기업 삥뜯기’를 위한 밑밥 깔기였다. ‘노동개혁 5법’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원샷법’ ‘규제프리존법’ 등은 규제완화의 외피를 두른 ‘대기업 민원 해결법’에 다름 아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대국민사과를 하며 흘린 눈물도, “필요하다면 특검을 통해서라도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낱낱이 밝히겠다”는 말도 거짓이었다. “세금이 많이 들어간다”며 세월호특조위 활동기한을 연장하지 않은 것은 ‘7시간 미스터리’가 밝혀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터이다. 국정을 농단하고, 헌정질서를 파괴한 게이트의 주범이란 사실이 밝혀진 뒤 2차 대국민담화를 하면서 보인 눈물도 거짓이었다. “모든 사태는 저의 잘못이다. 검찰 조사는 물론 특별검사의 수사까지 수용하겠다”고 하더니 검찰의 대면조사를 거부하고 190만 촛불에 포위돼 섬처럼 고립된 청와대에서 장기농성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3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한 뒤 기자회견장 뒤편으로 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에 맡기겠다”고 밝힌 3차 대국민담화에서도 끝내 거짓의 가면을 벗지 않았다. 국회를 분열시켜 탄핵을 모면하려는 간교한 정치적 술수를 감춘 채 “단 한순간도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변명만 늘어놨다. 거짓으로 쌓은 사상누각(沙上樓閣)이 무너졌는데도 또 다른 거짓의 성(城)을 쌓으려는 대통령을 시민들은 마음속에서 탄핵한 지 오래다.

재벌들의 도덕성은 정권과의 부당거래로 무너졌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재벌과 대통령이 한 몸이 돼 재단 출연금이란 명목의 뇌물을 주고받은 부당거래 사건이다.

재벌들은 청와대와 최순실의 압박이 두려워 미르·K스포츠 재단에 뒷돈을 댄 ‘강제모금의 피해자’가 아니다. 권력에 협조한 뒤 각종 현안을 해결하려 한 ‘자발적 공범’이다. 미르·K스포츠 재단에 204억원을 낸 삼성은 국민연금의 지원을 받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성사시켰다. SK는 배임죄로 두 번씩이나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 중이던 총수가 사면으로 풀려났다. 롯데는 면세점 사업자 선정에서 탈락한 뒤 K스포츠재단에 추가로 70억원을 냈다가 되돌려 받았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다.

시장에서의 공정한 경쟁보다 정권의 비호와 묵인 속에 다른 경제주체의 몫을 빼앗으며 몸집을 키워온 게 한국 재벌의 어제이자 오늘이다. 재벌들은 영화 <부당거래>에 나오는 대사처럼 “(정권의)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 4년간 한국 사회는 박근혜 정부의 실정(失政)으로 무너졌다. 시중에 떠도는 “임금은 착취이고, 세금은 수탈이고, 물가는 갈취이고, 일자리는 노예이고, 부동산은 거품이고, 복지는 생색이고, 안전은 재앙”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청와대에 한 대당 5만~10만원짜리 백옥·마늘·감초·신데렐라 주사가 반입될 때 서민들은 가계부채와 주거난으로 무너졌다. 노동자들은 ‘쉬운 해고’로 일자리를 잃고 무너졌다. 청년들은 돈도 실력으로 여기는 금수저들의 반칙으로 무너졌다. 교육계는 비선 실세와 결탁한 교수들의 교육농단과 복면 집필진이 밀실에서 만든 친일·독재 미화 국정 역사교과서로 무너졌다. 문화예술계는 검열과 블랙리스트로 무너졌다. 의료계는 길라임 대통령과 최순실 자매의 대리처방으로 무너졌다. 체육계는 비선 실세와 협작한 ‘왕차관’의 미운털 찍어내기로 무너졌다.

무너진 사회는 주권자인 시민들이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역사가 증명하듯 야만의 시절에 종지부를 찍고, 변혁을 일궈온 것은 시민들이다. 수백만 촛불민심은 거짓의 가면을 벗기고, 망국의 춤도 멈추게 할 것이다. 그게 나라도 살고, 시민도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야만의 시절을 견뎌온 시민들에게 대통령의 버티기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고통과 능욕의 시간만을 늘릴 뿐이다.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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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나면 또 무슨 일이 터질까 겁이 난다. 대한민국의 현실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이 매일 일어나는 ‘막장극’이나 다름없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을 수사하고 있는 검찰은 어제 면세점 인허가와 관련해 롯데와 SK를 전격적으로 압수수색했다. 검찰은 지난해 하반기 당시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던 최경환 새누리당 의원이 롯데 관계자와 만난 정황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롯데면세점이 지난해 11월 소공동점의 재승인허가를 받는 과정에 최 의원이 연루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검찰은 기획재정부와 관세청도 압수수색했다. 최상목 기재부 1차관은 지난해 청와대 근무 시절 최씨 의혹과 관련해 전경련 관계자들과 회의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장이 여러 정부부처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검찰 특별수사본부 관계자들이 24일 오전 SK·롯데그룹 면세점 사업 관련 의혹과 관련해 정부세종청사 기획재정부 정책조정국장실을 압수수색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뿐만이 아니다. 최씨의 행적과 관련한 새로운 증언이 계속 나오고 있다. 최씨의 운전기사였던 김모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충격적인 말을 쏟아냈다. 그는 “최씨가 1998년부터 운영한 안가에서 청와대 ‘문고리 3인방’인 안봉근·정호성·이재만 비서관이 거의 살다시피 했다”며 “이들은 ‘최씨의 종’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어 박관천 전 경관이 증언한 ‘권력서열 1위 최순실, 2위 정윤회, 3위 박근혜 대통령’이라는 말이 맞다고 했다. 경악할 내용이다.

너무나 놀라운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니 최씨가 K스포츠재단 운영과 관련해 시설비 일부를 떼어먹으려고 했다거나, 기업들에 건물이나 부동산보다는 현찰을 요구했다는 내용은 사소해 보일 지경이다. 이처럼 눈덩이처럼 커지는 의혹에도 청와대는 사건의 전모를 밝히지 않은 채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특히 세월호 침몰 당일 박 대통령의 7시간 행적에 대해서는 대통령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밝히면 모든 의문이 풀릴 일인데도 빙빙 돌려서 선문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의혹이 온갖 부문으로 퍼지면서 이게 정말 그동안 이 나라를 이끌던 그 정부가 맞나 하는 자괴감이 들게 한다. 기획재정부는 면세점 허가 문제로, 문화체육관광부는 동계올림픽 이권으로, 보건복지부는 국민연금의 삼성지원 의혹으로, 교육부는 정유라씨 입시부정으로, 법무부는 국정농단 수사 문제로 벌집 쑤신 모양이 되었다. 시민들이 이런 꼴을 보려고 대선날 투표장에 가고 세금을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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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계의 갖가지 추문을 단박에 잠재운 강력한 사건이 터졌다. 이른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이다. 이 사건은 미르와 K스포츠재단 등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그간 박근혜 정권 아래 이루어진 모든 일과 맞물려있다. ‘문화융성’이란 모토 아래 추진된 여러 행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내지 문화예술 관련 기관장 선임이 최순실의 영향력 아래 이루어졌다.

그 무리들에 의해 온갖 비리가 저질러졌고 블랙리스트도 작성되었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문화예술계의 좌파 책동에 투쟁적으로 대응”하라는 등의 지시를 내리는가 하면, 당시 정무장관이었던 조윤선 현 문체부 장관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주도한 의심을 사고 있다. 정부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사람들을 배제하기 위해 작성한 리스트란다. 2014년부터 2015년 1월까지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지원하지 말아야 할 문화예술계 인사와 단체들의 명단을 작성했고, 이 명단을 교육문화수석실을 거쳐 문체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 내려 보내 지원사업 선정에 반영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는 박근혜 정부가 문화예술인들의 표현의 자유를 어떻게 옥죄고 탄압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방증하고 있다. 이미 이명박 정권 때부터 정부는 돈줄을 풀거나 조이는 방식으로 문화계를 길들여왔다. 자신들과 정치적 이념이 다르거나 비판적인 이들을 모조리 좌파로, 빨갱이로 몰아 뽑아내고는 전문성이나 능력과 무관하게 선거캠프와 새누리당 출신 친정부 인사들을 기관장으로 내리꽂았다. 그렇게 자리를 차지한 이들이 갖은 비리와 전횡을 일삼아 왔음도 익히 접하고 있다. 그들은 오로지 동일한 욕망으로 공동체를 이룬 무리이다. 자신들의 기득권과 권력, 자본을 확장하고 대를 이어 보존하고자 하는 탐욕으로만 점철된 강고한 카르텔이다.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은 최순실 게이트의 핵심인물인 차은택의 스승이란 이유로 장관에 임명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김형태 전 국립박물관 문화재단 사장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와 대통령 소속 문화융성위원회에서 활동한 이였는데 최근 성추행과 인사전횡 등으로 해임됐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대통령 관심사항인 전시를 추진하지 않는다고 진즉에 파리 목숨이 된 바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운영부를 관리하는 간부직엔 대선캠프에서 활약한 기업인이 추천한 인사가 낙하산 임용됐다는 설이 오래전부터 파다했다. 그리고 이 사람이 국내 미술상황에 대해 거의 무지할 수밖에 없고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못한 외국인 관장 뒤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을 실질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로 인해 서울관의 위상이 추락하고 전시 내용이 부실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김종덕 전 장관이 국립현대미술관장 공모에 응모해서 선별된 후보자를 선임하지 않고 미루다가 끝내 무산시키고 뜬금없이 낯선 외국인을 관장으로 선임한 배경을 이제야 알 것도 같다. 여타 미술관의 관장이나 문화재단 이사장 선임 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윗선과 연결된 문체부 관리들이 주축이 돼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진보나 좌파적 성향이 있다고 여겨지는 인사들을 적극 소탕하고 내치는 한편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해 입맛에 맞는 인사를 조직적으로 앉혀왔다고 본다.

그렇게 기관의 장이 된 이들이 각종 행사에 나와서 문화융성에 대해, 문화예술의 창조성에 대해 온갖 수사로 지껄이던 장면이 떠오른다. 공무원들은 그 ‘말씀’을 충실히 따르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주도해나갔다.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특정 예술인들을 속아내고 지원금을 차단하고, 직장에서 내쫓거나 검열을 일삼는가 하면 대통령 측근 인사를 심어주는 일을 충실히 집행한 대가로 승진하거나 해외 문화원 원장으로 영전돼 나갔다. 이게 우리나라 문화현실의 꼬락서니다. 이러한 문체부는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고 본다. 괴벨스나 매카시, 박정희가 지배했던 그 시대를 아직도 살고 있는 이 현실이 너무 참담하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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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은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발언 한 토막이었다. 어쩌다 ‘최순실의 폭주’가 가능한 사회가 됐는가를 고민하던 터였다. 채 전 총장은 며칠 전 김어준의 팟캐스트에 나와 3년 전 국정원 댓글 수사를 하다 내쳐진 과정을 토로했다. ‘왜 잘렸나’라고 묻자 “법대로 하다가”라고 대답했다. 검찰이 권력 말을 왜 잘 듣느냐는 물음에는 “말 잘 들으면 승진시키고 말 안 들으면 물먹이고. 검찰총장까지 탈탈 털어 몰아내고. 뭐 그러면서 엎드리게 되고. 결과적으로 검사들이 평범한 직장인으로 돌아갔기 때문 아닌가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성과 당부가 가슴에 닿는 술회다.

조직이 샐러리맨화하면서 사회 전체가 초식동물화하고 있다는 얘기는 검찰뿐 아니라 관계, 정계, 언론계에서 늘 농담처럼 듣는 얘기다. 채 전 총장의 말처럼 이미 체제순응형 사회가 된 것인가. 난세에 모난 정일 필요없고, 험한 세상 가늘고 길게가 미덕으로 얘기된 지 오래다. 하물며 위기가 상시화하고 생존이 정의라는 시대 아닌가.

[김용민의 그림마당]2016년 11월4일 (출처: 경향신문DB)

검찰이 강자에게 비굴하고 약자에게 군림한다는 것은 시민들에게 이미 익숙한 표현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 검찰의 잣대는 오로지 권력 편이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문제제기는 사표로 이어졌다. 정치인들은 또 어떤가. 집권여당, 특히 친박에게 시민은 안중에 없었고 주군만 존재했다는 것은 야당 진영만의 얘기가 아니다. 옳고 그름보다는 충성이 우선이었다. 그 충성도 맹목적이었다. 관료들은 어떤가. “너무 늦으면 저희가 난리납니다. (저는) 중간에서 확실하게 전달해드렸습니다.” 관료 출신 청와대 경제수석이 3년 전 CJ그룹 오너의 퇴진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전화 내용이다. 그가 과연 엘리트 공무원 출신 맞나.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설립과 기금 갹출과정에서 주연급 조연으로 활약한 정황이 드러나고 있는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대학교수에서 대권 캠프를 기웃거리다 박근혜 진영에 안착한 인물이다. 주류라고 뻐기는 언론은 또 어떤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나 공공성은커녕 대통령의 발언을 충실히 받아쓰기에 급급했다. 이들에게 중립성이 훼손되면 국가가 위험해진다는 말은 애초부터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는 표현일 수 있다.

이쯤 되면 관위(官威·조그만 힘도 휘두르며 존재감 과시), 불위(不爲·부패도 저지르지 않지만 일도 하지 않음), 홀유(忽悠·교묘한 말로 포장하기), 간객(看客·강 건너 불구경 하기) 등 중국 사회를 상징하는 복지부동 표현들은 한국 사회에 그대로 옮겨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한국 사회의 민도가 고작 이 수준인가. 윗선의 부당한 압력에 버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가. 하다못해 소극적인 태업이라도 할 배포는 없어진 것인가.

보도를 종합하면 최순실은 사실상 ‘비밀 사설 정부’ 역할을 했다. 최순실의 ‘폭주’는 ‘박근혜 대통령의 전능함’에서 비롯된다. 이를 감안하면 최순실의 폭주가 아니라 박근혜의 폭주라 해야 마땅하다. 검찰총장을 간단히 제압하고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는 의원을 겨냥해 시민에게 배신을 응징해달라고 요구하는 뻔뻔함을 감안하면 공포를 정치에 이용할 줄 아는 ‘전제군주’임이 틀림없다. 따지고보면 ‘부역’이란 용어가 새삼 주목받는 것 자체가 5년 단임 대통령 시대가 아닌 전체주의 시절이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변에 돌격 앞으로를 마다않는 이들이 가득한 상황에서 대통령이 체제순응형 초식사회를 흔드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초식사회를 깨운 것은 역설적으로 최순실과 대통령이다.

이미 언론은 두 재단의 실력자로 최순실이라는 이름을 찾아냈고, 최순실의 독일 내 유령회사도 밝혀냈다. 최순실의 태블릿PC에 담겨 있는 국정농단 내용도 내보냈다. 경쟁하면서 새 사실을 찾아내고 진실을 파헤쳐가고 있다. 1970년대 금권정치가 활개치며 썩어 문드러져 가던 일본이 그나마 버틴 것은 언론의 합리적인 문제제기와 이를 받아들여 성역없이 수사한 검찰 때문이다. 다나카 가쿠에이 당시 총리를 낙마시킨 것은 100만엔짜리 잉어가 떼지어 놀던 정원이 딸린 별장을 사들인 점에 의구심을 가진 탐색보도에서 시작했다. 록히드 스캔들의 배후에 도사린 다나카 전 총리의 그림자를 간파하고 이를 파헤친 것도 언론과 검찰이었다.

진부한 얘기지만 ‘물은 괴면 썩는다’. 더 진부한 얘기지만 ‘관행화한 방식은 부정해야 산다’. 이런 진부함이 여전히 회자되는 것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언론에 이어 시민항쟁이 시작됐다. 채 전 총장은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검사들이 쥔 칼자루는 법을 우습게 알고 제멋대로 날뛰는 놈들을 죽이라고 국민이 빌려준 것이다.” 그들의 순서이자 신뢰를 회복할 마지막 기회다.

박용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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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어제 검찰에 소환됐다. 우 전 수석 조사를 위한 특별수사팀이 출범한 지 두 달 보름 만이다. 우 전 수석은 변호사 시절 ‘몰래 변론’, 가족회사 자금 횡령, 강남 처가땅 특혜 매각, 경기 화성땅 차명 보유, 공직자 재산 허위신고, 의경 아들의 ‘꽃보직’ 압력 등의 비리를 저질렀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검찰은 그동안 우 전 수석 수사에 손을 놓고 있었다. 검찰 수사는 오히려 이석수 전 청와대 특별감찰관이나 우 전 수석의 비리 의혹을 보도한 경향신문과 조선일보를 겨냥했다. 윤갑근 대구고검장 등 이른바 ‘우병우 사단’이 수사를 맡은 것부터가 문제였다. 오죽했으면 우병우의 ‘셀프수사’라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지 않았다면 검찰은 이미 우 전 수석에게 면죄부를 주고 사건을 종결했을 것이다.

우 전 수석은 최순실 국정농단에도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K스포츠재단을 통해 롯데그룹에서 70억원을 뜯어낸 최순실씨가 검찰의 롯데 압수수색 직전 서둘러 돈을 반납한 과정이 석연치 않기 때문이다. 검찰 수사 상황을 손금 보듯 알고 있는 우 전 수석의 도움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직무유기 책임도 크다. 우 전 수석이 제 역할을 했다면 최순실씨의 각종 패악질은 미수에 그치거나 진작에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우 전 수석이 최순실씨와의 인연 때문에 민정수석으로 발탁됐다는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주장도 있다.

검찰은 우 전 수석 사건을 기존 수사팀이 아닌 특별수사본부에 맡겨 몰래 변론 등 개인 비리는 물론 최순실씨와의 커넥션 의혹까지 철저하게 파헤쳐야 한다. 이것이 나라가 살고, 검찰도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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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쓴 <불멸의 신성가족>은 법조계 이너서클의 실체를 파헤친 역저다. 출간 시기는 이명박 정권 때인 2009년이다. 지금쯤 속편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진경준·홍만표 이야기가 아니다. 청와대 주변 부나방들 얘기다.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법학자인 손기병 교수(가명)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양극화는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 때문에 일어난다고 지적합니다. 실력주의, 업적주의로 번역되는 메리토크라시는 능력을 스스로 증명한 사람만이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체제입니다. 처음 이 용어를 사용한 마이클 영에 따르면 메리토크라시는 지능지수와 노력에 의해 수월성(merit)을 획득한 사람들에 의한 지배를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메리트를 오직 시험에 의해서만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전형적인 메리토크라시 사회라는 것이 손 교수의 주장입니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6년 10월 11일. 출처: 경향신문 DB

시험은 사람의 열정과 재능을 평가하는 많은 수단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시험 외에도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열정과 재능을 폭넓고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 시험 결과조차 부모의 배경, 학교와 교육시스템이라는 비능력적 요인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은 터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하에서는 메리토크라시 비판도 사치로 여겨진다. 메리토크라시마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오장육부’로 불린다는 최순실씨가 대표적 사례다. 왜 최씨는 대통령의 친동생도 넘기 어렵다는 청와대 문턱을 내 집처럼 넘나드는가. 왜 그의 딸은 개인 승마연습 때도 한국마사회에서 감독을 파견하는 일이 가능한가. 왜 그의 딸을 위해 명문대가 학칙을 개정했다는 말까지 나오는가.

광고감독 차은택씨도 마찬가지다. 2000년대 CF계의 ‘미다스 손’이었다고 하나 일반인에겐 생소했던 그가 어떻게 ‘문화계 황태자’로 등극할 수 있었는가.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의 아들은 또 어떤가(우 수석은 메리토크라시의 통과의례인 사법시험이라도 거쳤다고 치자). 다른 젊은이들은 운전도 못해 불안한데, 그는 ‘코너링’이 유난히 좋다는 이유로 서울경찰청 차장의 운전병이 된다. 이들이 보유한 수월성의 실체는 ‘대통령과 가깝다’(혹은 ‘대통령과 가까운 사람과 가깝다’)는 것뿐이다. 시험을 통과하지도, 선거로 선출되지도 않은 ‘박근혜 친목모임’ 출신에게 부와 명예와 권력과 편리가 집중되는 것은 비정상이다.

박 대통령이 지난 7일 코리아 가상현실(VR) 페스티벌을 찾았다. 대통령은 “기가 막힌다” “대단하다” “놀라움의 연속”이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다음 세대의 반은 가상현실에서 살면서 거기서 배우고, 또 반은 현실에서 사는 이런 세상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했다”는 소감을 피력했다. 대통령은 감탄할 이유가 없다. 최순실, 차은택, 최씨의 딸, 우 수석의 아들은 실재 인물이다. 하지만 그들이 속한 세계는 이 글을 쓰는 나와, 읽을 독자들이 속한 현실이 아니다. 일종의 가상현실이다. 대통령도 그들과 함께 가상현실 속에 살고 있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800억원 모금이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세상, 특정 광고감독이 특정 대기업 방송광고의 절반 이상을 ‘자연스럽게’ 독식하는 세상. 일반 시민은 상상조차 어렵지만 ‘짐은 곧 국가’라 여기는 대통령에겐 딱히 이상할 게 없다. 그러니 최순실 의혹을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으로 일축하며 의혹 제기가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혼란을 가중시킨다”고 몰아붙이지 않았겠나. 무력한 시민은 이 가상현실의 성에 입장할 수 있는 티켓을 얻고 싶다. 어떻게 하면 이런 세상에 한 자리 끼어들 수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메리토크라시는 왜곡된 시스템이다. 그러나 메리토크라시마저 무력화시키는 ‘박근혜크라시’는 왜곡을 넘어 최악이다. 박근혜크라시에는 메리토크라시에 적용되는 최소한의 규칙조차 없기 때문이다. 권력자와의 거리가 돈과 힘을 결정하는 유일한 요소인 나라는 민주공화국이 될 수 없다. 아니 왕자·공주의 나라보다도 나쁘다. 많은 군주국은 왕실의 특권을 허용하는 대신 군 복무 등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요구한다. 최순실과 차은택은 집권당의 엄호 속에 국정감사 출석조차 면제받는다. ‘박근혜의 신성가족’끼리 모여 사는 가상현실을 깨부수려면,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그런데최순실은?”(※)

※트위터·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그런데최순실은?’ 해시태그 붙이기 캠페인이 일고 있다. 게시물을 올릴 때마다 ‘최순실 의혹’을 상기하자는 취지다. 해시태그란 #(해시) 기호 뒤에 단어·문구 등을 띄어쓰기 없이 붙여 씀으로써 분류·검색을 쉽게 하는 메타데이터이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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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로 알려진 최순실씨 의혹이 불거졌다. 최순실씨는 박 대통령의 오래전 멘토였던 고 최태민 목사의 딸이자, 박 대통령의 국회의원 초기 비서실장이었던 정윤회씨의 전 부인이다. 박 대통령과의 관계 이외에 특별한 직책이랄 게 없는 최씨가 지난해 말부터 미르, K스포츠재단을 잇따라 설립, 순식간에 대기업들로부터 800억원이라는 출연금까지 모았다는 게 의혹의 줄거리다. 이 과정에 안종범 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개입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야당들이 “제2의 일해재단(전두환 전 대통령이 퇴임 후 활동을 위해 설립한 재단)이고 박근혜 재단”이라며 진상규명을 벼르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청와대는 모든 의혹을 부인하고, 새누리당은 진상규명을 위한 관련자들의 증인채택에 반대하면서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20일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인 최순실씨가 재단 설립과 운영에 개입한 것으로 드러난 서울 강남구 논현동 K스포츠재단 출입구에 간판이 걸려 있다. 정지윤 기자

지난해 10월과 올 1월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설립 과정을 보면 권력형 비리의 냄새가 물씬 난다. 두 재단 모두 설립 신청 다음날 기다렸다는 듯 문화체육관광부가 설립허가를 내준다. 평균 3주일 정도 걸리는 것에 비교하면 초고속이다. 더욱 의심스러운 것은 재단 설립 시 제출하는 창립총회 회의록이 가짜라는 사실이다. K스포츠재단 창립총회에서 임시의장을 맡은 것으로 돼 있는 정모씨는 당시 해외에 있었다. 누군가 이 일을 기획하고, 정부를 움직여 일사천리로 허가해주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들 재단에 출연금이 모이는 과정도 의문투성이다. 삼성, SK, 현대차 등 국내 10대 대기업을 포함, 19개 기업이 두 재단에 800억원에 이르는 돈을 출연했고 이를 주도한 곳은 전경련이다. 극우 보수단체인 어버이연합에 활동비를 댄 것과 똑같은 행태이다. 고용창출을 하라고 해도 좀처럼 돈을 내놓지 않는 재벌이 800억원이나 되는 거금을 자발적으로 출연했다니 소가 웃을 일이다. 안종범 수석이 재단 모금 과정에 개입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대통령의 지인인 최씨가 아는 사람들을 내세워 재단을 설립하고, 권력이 뒤에서 밀어줬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더불어민주당 조응천 의원은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박 대통령의 브로치와 목걸이 등도 최씨가 청담동에서 구입해 전달한 것으로 확인했다”며 “우병우 민정수석의 발탁이나 헬스 트레이너 출신인 윤전추 행정관의 청와대 입성도 최씨와의 인연이 작용했다는 얘기가 있다”고 주장했다. 오래전에 끝났다는 대통령과 최씨와의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고 볼만한 정황이 있다. 지난 6월 박 대통령의 프랑스 국빈방문 중 한·불 융합요리 행사에 미르재단이 참여하는 등 여러 행사에 두 재단이 참여했다. 신생 재단이 이런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청와대는 부인과 무시로 일관하고 있다. 청와대는 임기 말 권력 누수를 걱정하는 듯한데 이런 사건을 의혹으로 남기는 것이야말로 레임덕을 자초하는 일이다. 새누리당이 최씨와 안 수석, 전경련 관계자를 증인으로 채택하려는 야당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도 시민을 무시하는 처사다. 이번 사건은 권력자 주변 인물이 재단이나 단체를 만들어 이권을 챙기는 낯익은 수법을 연상케 한다. 당사자들이 떳떳하다면 스스로 해명하고 의혹을 벗을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국회의 국정조사와 특별검사의 수사로 밝힐 수밖에 없다. 결코 그냥 넘길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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