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과 후금의 전쟁이 치열하던 1618년, 명의 강요로 파견한 조선의 강홍립 부대가 후금에 투항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를 빌미로 명에서 조선이 후금과 내통한다는 논의가 일자, 광해군은 이정귀를 사신으로 발탁한다. 1598년 조선이 왜를 끌어들여 명을 치려 한다는 무함이 있을 때 이정귀의 상주문으로 변론을 성사시킨 일을 떠올린 것이다. 이정귀는 광해군의 폐모 정청에 불참한 죄로 유배의 명을 기다리던 상황이었다. 국가 위기의 상황에서 광해군이 자신의 정치적 행보에 거슬리던 이정귀를 찾은 것은, 그가 지닌 ‘화국(華國)’의 능력 때문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화국은 문장력으로 나라를 빛낸다는 말이다. 동아시아에서는 문장이 외교 목적을 달성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현실정치가 힘으로 움직이는 것은 예나 이제나 다르지 않지만, 명분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그 힘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는 전통이 있었다. 이정귀가 올린 글은 매우 명쾌하였을 뿐 아니라 읽는 이의 눈물을 떨구게 할 만큼 감동적이었다. 그 문장력이 두 차례나 조선을 위기에서 구해낸 것이다.

오늘날 능력으로 나라를 빛내는 일에 무엇이 있을까.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분들이 많지만, 대중적으로 가장 주목을 받는 이들은 체육 선수다. 한국전쟁 직후 그 어렵던 시절, 원정으로만 치른 월드컵 예선전에서 일본을 완파한 축구대표팀 선수들만큼 국민의 자존심을 세워준 이가 있었을까. 박세리, 박찬호 선수의 낭보가 국가 부도의 시기를 버티게 해줬다는 분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국민체육진흥법’의 제1조가 “체육을 통하여 국위 선양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로 끝맺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심석희 선수의 용감한 고백 이후 여론이 들끓고 정치권에서도 구체적인 대책들이 제안되고 있다. 그러나 강한 기시감을 어찌할 수 없다. 여전히 강조되는 엄한 처벌과 인적 쇄신, 엘리트 체육의 개선 등이 다시금 공염불로 끝나지 않을까 걱정이다. 결과에만 찬사와 비난을 쏟아붓고 과정의 비위에는 적당히 눈감아주는 한, 우리는 체육계 폭력에 분노할 자격이 없다. 성과 지상주의가 만들어내는 폭력의 치외법권을 근절해야 한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 외교상의 문장력이라면 모를까, 체육의 최종 목적을 국위 선양에 두는 것은 옳지 않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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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