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근대사 문제를 풀어보자. 

일제강점기에 국내에서 일어난 3대 독립운동은? 정답은 3·1운동(1919), 6·10만세운동(1926), 광주학생운동(1929)이다. 이들 운동은 모두 국가적으로 기념하는 날일까? 정답은 ‘아니다’이다. 3·1운동, 광주학생운동은 국가기념일이지만 6·10만세운동은 아니다. 현재는 그날의 거사를 주도한 학교 중 하나인 서울 중앙고가 해마다 기념식을 여는 날짜일 뿐이다. 일반인들은 6·10만세운동을 1987년 ‘6·10민주항쟁’으로 착각하기 일쑤다.

지난해 11월 중순쯤 중앙고 동기인 박찬승 한양대 교수(사학)로부터 이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어떻게 6·10만세운동이 국가기념일이 아닐 수 있지? 황당했다. 6·10만세운동이 천대를 받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웠다. 

6·10만세운동은 왜 국가기념일이 되지 못했을까?

먼저 일제의 축소 왜곡을 꼽을 수 있다. 3·1운동으로 혼쭐이 난 일제는 순종의 장례를 앞두고 전국에서 군인과 경찰을 차출해 서울 곳곳에 배치했다. 시위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시위가 일어나자 축소하려고 노력했다. 서울에서 잡힌 학생·시민이 210여명에 달했지만 실제 실형을 내린 사람은 11명에 불과했다.  

다음으로 ‘레드 콤플렉스’다. 많은 사람이 6·10만세운동을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도 일제의 술책 결과다. 일제는 재판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시위로 몰고 갔다. 

엄청난 왜곡이다. 6·10만세운동은 세 갈래로 기획됐다. 첫째가 고려공산청년회 권오설의 노총계다. 권오설은 천도교와 함께 시위를 도모하다 발각돼 3일 전인 6월7일 경찰에 검거됐다. 둘째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성향 학생들이 참여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사직동계다. 연희전문 이병립, 중앙고보 이선호·류면희 등이다. 셋째는 민족주의 성향의 통동계다. 중앙고보 박용규, 중동학교 곽대형 등이다. 

시위를 주도한 것은 사직동계와 통동계다. 노총계는 시위에 참여하지 못했는데도 일본의 교묘한 빨간색 덧씌우기가 여전히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기에 분단이라는 현실도 한몫했다. 우리는 이념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보는 데 익숙하다. 그래서 우리가 애써 외면했다고 하면 지나칠까.

6·10만세운동이 비록 규모 면에서 3·1운동 등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 의미와 파장은 이들 운동에 못지않다. 특히 극단적 분열과 대립이 자심한 요즘 현실에서는.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출범부터 이념과 방법론의 갈등으로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1926년 무렵에는 분열이 최고조였다. 한마디로 임시정부는 식물상태였다. 

그러한 와중에 일어난 6·10만세운동은 임정에 통합의 메시지를 주었다. 7월 상해에서 열린 6·10만세운동에 대한 연설회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은 주의와 이념을 초월한 민족적 ‘대혁명당’을 조직하자고 주창했다. 조선공산당 김단야는 6·10만세운동이 천도교와 노동계, 학생조직이 통일전선을 이뤄 추진됐다며 사회주의 운동이 아닌 순연한 민족적 독립운동이라 규정했다. 6·10만세운동은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운동세력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6·10만세운동은 국내 독립세력에게도 통합의 계기가 됐다. 이듬해 2월 탄생한 신간회가 그것이다. 안재홍·이상재·신채호 등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인사들이 ‘민족 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이름으로 신간회를 만들었다. 6·10만세운동은 광주학생운동으로 연결된다.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말에 이어 어제 발표한 올해 업무계획에서도 6·10만세운동 국가기념일 지정 추진을 밝혔다. 보훈처는 국회에 계류 중인 지정 촉구 결의안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국가기념일 지정은 대통령령으로 하는 것인 만큼 정부가 의결하면 되는 것이다. 정쟁에만 매몰된 국회의 움직임만 기다리는 정부의 태도가 미덥지 못하다.  

국가기념일 지정은 6·10만세운동 복권의 작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출발조차 하지 못하고 정부의 조치를 마냥 기다려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승철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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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