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영영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여성과 남성이 같은 세상에서 사는 일이란 원래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다. 최근에 내가 겪은 몇 가지 경험에 비춰보면 그렇다.

물리적인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과 남성은 태어난 뒤로,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접하는 경험과 인식하는 세상이 다르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같은 일을 겪어도 완전히 다른 기억을 가질 수 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여성이 훨씬 더 위험한 세상에 살고 더 많은 차별을 받는다.

몇 년 전 일이다. 회사에서 야근을 마치고 택시를 탔다. 기사님에게 행선지를 이야기하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택시는 낯선 길로 가고 있었다. 주변에 가로등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순간 겁이 났다. 그러나 곧 별일 없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내가 택시 강도나 납치범이라면 술에 취하지도 않은 멀쩡한 남성을 범행 대상으로 삼을 것 같지 않았다. 다시 잠이 들었고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기사님에게 슬쩍 물어보니 본인이 아는 지름길을 택해서 왔다고 했다. 실제로 택시비도 조금 적게 나왔다.

집에 와서 아내와 이 짧은 해프닝에 대해 이야기해 보니 ‘남자라서 다행’이었다. 아내는 여성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쉽게 다시 잠들지는 못했을 것이라 했다. 맞다. 내가 여성이었다면 택시가 집 앞에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식은땀을 흘렸을 것이다. 어쩌면 한밤중에 이런 택시를 잡아탄 스스로를 탓했을지도 모른다.

여성·흑인 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캡틴 마블>. 월드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얼마 전 영화 <캡틴 마블>을 봤다. ‘페미니즘 영화’라며 일부 남성들이 관람을 거부하고 있는 작품이다. 우려와 달리 페미니즘 요소가 극의 전개를 해치지 않았다. ‘여자들은 할 수 없을 것이란 편견을 이겨내는 여주인공’은 너무나 교과서적이라 ‘진짜 이게 페미니즘 요소의 전부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난해 개봉해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다음달 개봉하는 <어벤져스: 엔드 게임>을 이어주는 영화로는 무난하다고 여겼다.

같은 영화를 보고 온 회사 여자 후배의 반응은 나와 달랐다. 평소 마블 영화를 즐기지 않았지만 <캡틴 마블>은 정말 재밌고 감동적으로 봤다고 했다.

특히 “여자는 조종사가 될 수 없어” “여자는 너무 감정적이야” “여자가 하기엔 무리야”라는 ‘조언’을 쉴 새 없이 받으며 자란 주인공이 이런 편견을 박살내고 우주 최강의 전사로 거듭나는 이야기가 가슴을 두드린 모양이었다. 이 후배는 ‘딸과 함께 볼 영화’를 찾고 있는 선배에게 <캡틴 마블>을 적극 추천하기도 했다.

최근 성폭력 처벌법 위반(카메라 등 이용 촬영)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방송인 정준영의 범행을 보는 시선에도 ‘온도차’가 있다. 획일적으로 재단하기는 어렵겠지만, 남성들은 대체로 정준영의 범죄를 ‘실재하는 위협’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아마도 ‘훨씬 더 중요한 사건이 많은데 왜 언론은 정준영 사건만을 다루나. 뭔가 음모가 있는 것 아니냐’고 주장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남성일 것이다. 반면 여성들에게 정준영의 범행은 언제라도 눈앞에 닥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러니 ‘다른 사건도 중요하지만, 이 사건 역시 엄청나게 중요한 사건이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다.

남성과 여성은 원래 다르게 태어난 존재이니 별 수 없다고 포기할 일은 아니다. 거창하게 세계 평화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족의 평화, 직장의 평화, 궁극적으로는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두 세계의 간극을 최대한 줄일 필요가 있다.

사실 방법은 이미 나와 있다. 여성들은 두 세계 간의 차이를 없애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 와중에 비판을 받고, 논란을 만들기도 했지만, 그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행동을 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럼 이제 공은 반대편에 있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에게 가야 한다. 아직 할 일이 많고, 갈 길이 멀다.

<홍진수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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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