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 갈아 종종 신문지에 붓글씨를 썼다. 못된 자들은 텔레비전 속에 우글거린다는 말이 있는데 신문에도 많이 들러붙어 있다. 얍삽한 얼굴에는 먹물로 죽죽 긋기도 했다. 말이 먹이고 붓이지 혼자만의 글씨요 솜씨였다. 물끄러미 지켜보던 부친이 한 말씀 하셨다. “야야, 날 비를 잘 쓰면 장개를 먼 데로 간다캤다.” 비(飛) 자는 어쩐지 균형을 잡기가 좀 어렵다. 말뚝 하나에 겨우 의지하는 천막 같아서 웬만해서는 멋이 나지 않는다.

춘천 지나 화천의 오지마을에 꽃잔치가 있다 하여 찾아가는 길. “초대합니다. 봄의 절정인 즈음, 꽃가람 화천 비수구미 숲속에 광릉요강꽃과 복주머니란이 만개했습니다. 환경부에서 지정한 멸종위기식물이 3000여 개나 꽃을 피웠습니다. 법적 지위도 그러하지만 꽃의 품격도 사뭇 다릅니다. 장소 : 비수구미 마을, 주최 : 광릉요강꽃보존회 장윤일, 노영대.”

날아갈 듯 아흔아홉 굽잇길을 넘어 飛水口尾(비수구미) 마을로 가는 동안 어쩌면 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에 전혀 관여한 바가 없다고 할 수 없는 비(飛) 자에 대한 궁리가 슬몃슬몃 일어났다. 나는 강원 춘천 출신의 색시한테 장가를 갔다. 부친한테 그런 말씀을 들었던 곳이 부산이었으니 잘 갔는지는 모르겠다만 아주 멀리 간 건 확실한 셈이겠다.

‘광릉요강꽃! 30여년을 지키고 증식해 온 3000촉의 꽃망울’이란 대형 현수막이 걸린 민박집으로 들어서니 공기와 느낌이 사뭇 달라진다. 이 집은 파로호가 숨겨둔 생태마을의 한복판으로 계곡트레킹에 이은 산채비빔밥으로 널리 호가 난 곳이다. 배낭을 풀고 바로 뒷사면으로 갔다. 세상에나, 하나만 보아도 눈이 홀릴 판인데, 3000촉이라니! 이 꽃들은 매우 특별하다. 특별하고도 신기해서 야생에서 광릉요강꽃을 만나면 나는 삼배의 예를 드린다. 개화시기가 마침 초파일 근처이기도 해서 산중에서 광릉요강꽃을 만났을 때 그 말고 달리 흔감한 기분을 표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여러 의미가 포개진 비수구미의 이 장관 앞에서는 삼천배가 아니라 구만배로도 모자랄 판이다. 오오, 내 마음 설설 끓게 만든 광릉요강꽃. 난초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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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