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흰자위가 누렇게 변하는 황달은 간염에 걸렸을 때 나타나는 증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담즙 색소의 하나인 빌리루빈이 간에서 제대로 대사되지 않아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빌리루빈이 과다하게 쌓이면 청력 장애나 뇌성마비 등의 치명적인 질환을 일으킨다. 그렇다고 해서 빌리루빈을 완전히 없애는 게 능사는 아니다. 적당량의 빌리루빈은 유해산소를 제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암과 치매 등 치명적인 질환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이 유해산소 역시 체내의 세균 대사를 위해 소량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우리 몸이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는 비밀은 알면 알수록 신비롭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우리 몸뿐만이 아니다. 생태계를 구성하는 존재들 하나하나가 각자의 자리와 의미를 지닌다. 미생물부터 포유류까지 수많은 먹이사슬이 그물처럼 얽힌 구조에서 어느 한 종의 멸절은 전혀 예기치 않은 결과를 야기하곤 한다. 인간의 눈에 약육강식은 잔인해 보이지만, 그것을 통해 균형을 유지하는 생태계에서는 어떤 존재도 선과 악, 옳음과 그름으로 규정할 수 없다.

관건은 균형이다.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적정량을 유지한다면 모든 존재는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 문제는 일방의 입장을 기준으로 있어야 할 것과 없어도 될 것, 혹은 없애야 할 것을 함부로 구분하고 강제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인(仁)을 이루는 방법으로 공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서(恕)’였다. ‘서’는 상대 역시 나와 다름없는 마음을 지녔다는 사실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다. 용서와 관용을 넘어 적극적인 공감과 존중의 자세다. 그럴 때 모든 존재가 더도 덜도 아니고 각자 자신에게 마땅한 자리를 얻어 공생하는 세계를 그릴 수 있다.

공감과 상생은커녕 상대의 존재 자체를 용인하지 않으려는 ‘극혐’의 언어들이 난무하고 있다. 들여다보면 나름의 사연과 역사를 지니지 않은 존재는 없다. 물론 생태계와 달라서 인간사에는 선악과 시비의 판단이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최소한의 인정도 없이, 애초에 없었어야 할 존재로 상대를 규정한 위에서 과연 온당한 판단이 가능할까? 최상의 균형을 이루는 중용에는 고정불변의 답이 없다. 공감과 존중의 자세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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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