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 앗사리드’라는 사하라 사막의 청년. 프랑스 고속기차 테제베를 탄 후일담, <사막별 여행자>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버지의 단봉낙타보다 천배는 빠르고 백마리 낙타가 늘어선 카라반만큼이나 길다. 엄청난 속도 때문에 눈앞에 어떤 풍경도 보이지 않았다. 현기증이 일고 심장은 더 세게 고동쳤다. 시간을 관통하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더 이상 거리를 감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내 낙타들과 사막의 침묵 한가운데 누리는 낙타들의 평화롭고 느긋한 리듬으로부터 나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열차 승객들의 조용하고도 태연한 모습이 놀라웠다.”

빠른 강물에 빠지면 살아남기 어렵다. 문명조차도 날름 집어삼킨다. 속도 빠른 시대에 살면 제아무리 영웅이라도 이름 없이 사라진다. 역사는 역시 ‘느린 강’에서 비롯된다. 느린 강을 따라 걷다보면 배짱 두둑하고 맷집이 센 사내를 만나게 되리. 현명하고 강인한 여인이 손을 내미는 곳.

나는 우수리스크에 와 있다. 극동의 한쪽. 우리 겨레 고려인이 마을을 이루어 살던 땅. 추위에 맞서 두꺼운 벽채를 세우고 지붕엔 기와를 구워 얹기도 했다. 장작을 집어넣는 벽난로 페치카. 온기를 나누던 겨레의 심성을 느끼게 된다. 여기 ‘수이픈강’, 옛 발해 땅 솔빈부에 흐르던 ‘솔빈강’이 흐른다. 작가 푸시킨의 동상이 있는 이 마을 귀퉁이엔 안중근과 홍범도 비석이 나란히 있다. 권총이 새겨진 비석조차 비장하여라. 하루는 느린 강가에 위치한 헤이그특사 이상설 기념비에 보드카를 뿌려주었다. 보드카는 멀리 돌고래가 뛰노는 태평양으로 흘러갔다. 짧은 여름, 모두들 웃통을 벗고 일광욕. 강물에 수영도 한다. “죄송하지만 여기는 수영이 금지된 곳입니다.” 경찰이 물에 들어간 아가씨들을 나무라자 “아니 옷을 벗기 전에 말을 해야죠”. 경찰은 웃으며 “옷 벗는 것은 금지되지 않았는데요”. 안중근 대장도 이 강물에 말을 세워 물 먹이고, 수영도 했을 것이다. 사랑해본 사람들이 저항도 하고 혁명도 한다. 느린 강물을 보다가 나도 신발을 벗고 발을 담근다. 평화롭고 느긋한, 느린 강.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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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