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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를 1970년대에 보냈다. 텔레비전이 중산층 가정에까지 보급되던 시기다. 텔레비전은 보통 거실이나 안방이라고 부르던 부부 침실에 있었다. 부모는 저녁 9시 종합뉴스까지는 자녀의 텔레비전 시청을 묵인했다. 뉴스가 끝났는데도 텔레비전을 계속 보고 있으면, 부모의 잔소리를 각오해야 했다. 그게 싫은 자녀는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부모는 자녀가 방에서 공부하리라 짐작했다. 아니 기대했다. 하지만 자녀는 부모의 기대를 늘 배반한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 자녀에겐 라디오라는 탈출구가 있었다. 1970년대 중산층 가정에 텔레비전은 한 대뿐이었지만, 라디오는 웬만하면 여럿 있었다. 심야 라디오 방송은 청소년의 성장 각본이자 숨겨진 커리큘럼이나 마찬가지였다. 각자의 방에서 자녀는 정성을 다해 사연을 써서 방송국에 보냈고, 진행자는 각종 사연을 공감하며 읽어줬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는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사춘기에 접어들던 내게 밤은 나 자신에게 몰입하기에 안성맞춤인 시간이었다. 밤의 어둠은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이 강해질수록, 잠들지 않은 밤은 내면의 세계를 확장시켰다. 방송국에 보낼 사연이나 고민을 일기로 쓸 때에도, 항상 내겐 <밤을 잊은 그대에게>가 곁에 있었다. ‘밤을 잊은’ 시간을 매일 반복하며 나는 성인의 세계로 접어들었다. 

그 시절 또 다른 이유로 ‘밤을 잊은 그대’도 있었다. 1970년대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의 ‘그대’이다. 내가 ‘밤을 잊은’ 이유와 그들이 ‘밤을 잊어야’ 하는 이유는 달랐다. 수출주도 성장기의 시대, 상품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공장이 잠들지 않고 돌아가야 하는 시대였다. 밤을 잊도록 강요받은 청계천 노동자의 이야기를 김민기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사장님네 강아지는 감기 걸려서 포니 타고 병원까지 가신다는데 우리들은 타이밍 약 사다 먹고요 시다 신세 면할 날만 기다리누나.” 야간 노동이 밥먹듯 강요되던 그 시절, ‘밤을 잊은 그대’의 친구는 타이밍이라는 약이었다. 밤을 잊기 위해 그들이 먹었던 타이밍은 의학검색엔진에 따르면 타이밍 각성제, 흥분제로 분류되는 한 알에 무수카페인 50㎎이 들어있는 약이다. 효능은 졸음을 쫓는다고 되어 있다. 타이밍은 1970년대의 ‘밤을 잊은 그대’의 알레고리와도 같다.

자본은 잠들고 싶지 않다. 잠들어 있는 시간은 생산이 중단되는 시간이고, 생산이 중단되면 이윤도 중단된다. 인간은 밤에 잠들어야 일할 수 있는 능력, 즉 노동력을 회복할 수 있지만 자본은 잠들지 않아야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잠들지 않으려면 사람도 잠들지 말아야 한다. 자본주의는 어떤 사람에게 잠들지 않도록 강요한다. 잠들지 못하도록 사용하는 장치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 1970년대엔 타이밍 약이 필요했지만, 누구나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대엔 타이밍 약이 필요 없다. 

2019년 나는 가끔 아주 늦게 집으로 돌아가는데 내일 아침 식사가 걱정되면 잠들기 전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내일 아침거리를 주문한다. 자정 이전까지 주문하면 아침 7시에 현관 앞까지 어제 주문한 물건이 도착한다. 신기할 뿐이다. 첫 주문을 하던 날, 정말 그다음 날 아침 7시에 현관 앞에 어김없이 도착한 박스를 발견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중얼거렸다. “세상 참 편해졌네”라고.

이 마법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궁금해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 우렁각시 로봇이 발명되어 실생활에 투입되기라도 한 것인지 알고 싶어졌다. 불과 몇 번의 검색 끝에 2019년의 새벽 배송을 하는 ‘밤을 잊은 그대’가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었다. 이들은 주로 도시에 거주하는 20·30대의 사람이다. ‘밤을 잊은 그대’가 되기 위해서는 자동차가 있어야 하고, 스마트폰도 필요하다. 스마트폰을 통해 구인과 구직이 이뤄지고, 애플리케이션으로 업무가 진행된다. 그들은 같은 일을 하지만 서로를 모른다. 자신을 고용된 노동자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당연히 노동조합도 없다. 플랫폼을 통해 그때마다 서비스 계약을 맺는 논란 많은 전형적인 긱 이코노미(Gig Economy) 방식이다. 

자기 자동차로 배달을 하고 기름값도 자부담이고, 자기가 통신비용을 지불하는 자기 스마트폰을 사용하며 ‘밤을 잊은 그대’는 배달 건수당 돈을 받는다. 배달 건당 받을 수 있는 돈은 가변적이다. ‘밤을 잊은 그대’의 숫자가 부족하면 배송 단가가 올라가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내려간다. ‘밤을 잊은 그대’가 많으면 많을수록 ‘밤을 잊은 그대’의 건당 수익은 낮아진다. 

현대판 ‘밤을 잊은 그대’가 어떻게 일하는지를 현대의 방식으로 알고 싶으면 유튜브에서 새벽 배송을 검색하면 된다. 간헐적이고 비정기적으로 회사와 건당 계약을 맺는 ‘밤을 잊은 그대’는 자신이 용돈을 번다고 생각하지만, 이들이 용돈을 버는 플랫폼을 소유한 주체는 자본주의적 기업이다. 타이밍 약 없이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이런 방식으로 자본이 축적되어 간다. 우렁각시는 예나 지금이나 없다.

<노명우 |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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