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을에서는 안나푸르나가 보였다. 아침에는 샘터에 쪼그리고 앉아 새파란 하늘에 솟아 있는 새하얀 봉우리를 보면서 이를 닦고, 밤에는 달빛 아래 푸르스름한 봉우리를 보면서 졸았다. 그 마을 아이들은 아침이면 흰 교복 상의에 짙푸른 치마나 바지를 입고 한 시간쯤 걸어서 학교에 갔다. 좁은 산길과 가파른 재를 넘고 넘어서 닿은 학교는 산허리에 우뚝 서 있었다. 교실에는 아이들이 빼곡했고, 교실 칠판에는 마치 나뭇잎을 그린 듯한, 산이나 나무를 나타내는 기호와 같은 네팔 글씨가 씌어 있었다.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는 아이들이 칠판에 적힌 글을 읽어 내려가는 맑은소리가 서늘한 산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네팔에 머물 때는 네팔어를 공부해야겠다 싶었지만, 일상으로 돌아온 뒤로는 까맣게 잊었다. 김포의 한 도서관 복도에 전시된 여러 나라 책 중 네팔 책을 보고는 십여 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네팔 풍경을 표지로 쓴 책에는 고딕체의 네팔 글씨가 선명히 박혀 있었지만, 무슨 책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네팔 옆에 전시된 몽골, 인도네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책 모두 단 한 글자도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 책들은 전시용이 아니었다. 벽에 ‘당신의 선택으로 도서관의 책을 산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여러 나라말로 ‘오래되거나 전문 도서, 유해 도서 등 도서관 부적합 도서는 밑으로 빼주세요’라 적혀 있었다. 그것을 보고서야 책이 놓인 탁자 아래 큰 종이상자가 하나씩 놓인 까닭을 알았다. 그러니까 도서관이 구매할 외서를 이곳에 드나드는 외국인들이 직접 고르도록 한 것이다.

책이 전시된 복도 쪽 교실에선 한국어 수업을 했고, 수업이 끝난 후 나온 이들은 탁자 앞에서 책을 뒤적였다. 대개 도서관 주변 공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다. 낯선 땅에서 낯선 말을 들으면서 살아야 하는 이들이 모국어로 된 책을 손에 든 기분은 어떨까. 나는 네팔 책을 보는 청년을 보면서 안나푸르나가 보이는 마을에 사는 흰 교복 입은 아이들을 떠올렸다. 그곳 아이들도 어른이 되어 열심히 살고 있겠구나 싶어 괜히 뭉클했다. 세상에 기여 따위를 하지 않아도, 어디선가 꼿꼿하게 살아있는 것만으로 감사하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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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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