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주는 몹시도 답답한 시간이었다. 기승을 부리던 폭염이나 일본과의 관계,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 때문만은 아니다. ‘전주 여인숙 화재…폐지 주워 쪽방 생활하던 노인 3명 사망’ ‘창문도, 에어컨도 없는 휴게실서 숨진 서울대 청소노동자’ ‘냉장고는 텅 빈 채…보호사각서 죽어간 탈북 모자’ ‘속초 아파트 건설 현장서 엘리베이터 추락…3명 사망·3명 부상’ ‘목동 빗물펌프장 사고’ 등 쏟아지는 기사를 보고 있자니 속이 타들어 갔다.

사람이 죽고 있다. 일을 하다가, 폭염에, 배를 곯다가, 쪽방에 불이 났는데 피하지 못해서. 그리고 뉴스 검색창에 오르지 않은, 미처 알아채지 못한 채 지나가는 수많은 죽음이 있다.

안전사회시민연대와 노년유니온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2일 서울 목동 빗물 펌프장 앞에서 사망 사고 참사 규탄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이석우 기자

죽음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은 예정돼 있다. 죽음을 살아가는 과정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잘 맞이하기 위한 지침서들도 쏟아진다. 그 방법과 시점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인간의 몸과 질병, 죽음에는 사회적 원인이 스며 있다. 김승섭 교수는 저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더 약한 사람들이 더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그래서 더 자주 아픕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소득이 없는 노인이, 차별에 노출된 결혼이주여성과 성소수자가 더 일찍 죽습니다”라고 했다.

개인적이지만은 않은 죽음이 시시때때로 목도된다.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노동자 김용균씨, 서울 지하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수리 작업을 하던 김모군, 과로에 쓰러진 수많은 집배원들, 5년 전 빈곤을 이기지 못한 송파 세 모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과 세월호의 사람들. 이들은 노동자의 안전이 보장받지 못하는 환경, 끊어지지 않는 빈곤의 악순환, 유해성분 물질이 안전한 제품으로 둔갑하는 구조, ‘가만히 있으라’로 응축되는 사회적 모순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러고 나서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죽음이 있다.

사회의 치부를 떠안은 비극에서 마취된 공동체를 본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빈곤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고,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야 한다고, 안전하게 살고 일할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부패한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여러 곳에서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고는 이내 사라져버리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은유 작가는 ‘현장실습생 르포집’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에서 말한다. “그동안 거리에서 장애인을 못 봤다면 장애인이 없어서가 아니라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만한 여건이 아니라서 그렇듯이, 지금까지 성폭력 피해자를 못 봤다면 그런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사실을 말해도 들어주는 사회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듯, 특성화고 학생도 그런 사회적 분위기와 맥락에 따라 자연스레 비가시화된다.” ‘일반’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순간의 충격파를 던지지만 그마저도 쉽게 잊혀지고 만다. 쏟아졌던 기사들도 이미 사라졌다. 존재, 메시지, 죽음마저도 휘발된다는 것은 절망적이다.

그래서 남은 이들이 기억해야 한다. 떠난 이가 남긴 궤적과 이 이후를 기록해야 한다. ‘그것 말고도 해야 할 다른 일이 많으니까, 경제가 어려우니까’라는 핑계들은 ‘그 정도 했으면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말에 다름 아니라고 외쳐야 한다. 앞서 언급한 책에서 김승섭 교수는 세월호 참사 관련 연구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렇게 밝혔다. “아픔이 기록되지 않았으니 대책이 있을 리도 없었겠지요. 그 참사의 원인을 제공했던 국가는 그 아픔을 개개인에게 넘긴 채, 계속 정권이 바뀌며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세월호 참사마저 그렇게 보내고 나면, 우리에게 공동체라고 부르는 무엇인가가 영영 사라져버리지는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개인의 죽음이 덧없이 잊혀지지 않는, 기억과 기록으로 각성한 공동체를 꿈꿔 본다.

<이지선 뉴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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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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