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지는 않지만 아내와도 같은 존재(不室而妻).’ 이덕무가 친구를 정의한 말이다. ‘피를 나누지 않은 형제(匪氣之弟)’라는 말은 익숙하지만, 친구관계를 부부에까지 견준 것은 과해 보인다. 18세기 조선에는 전생의 부부로 불린 친구도 있었다. 열 살 터울의 시인 신유한과 최성대는 서로의 시에 마음을 빼앗겨 평생 남다른 우정을 이어갔다. 두 사람이 방 안에서 즐겁게 나누는 대화 소리를 들은 주인집 노파가 꽃다운 여인을 숨겨둔 줄 알았다고 했을 정도다. ‘우정’이라는 어휘조차 낡게 느껴지는 오늘, 옛사람들의 우정에 대한 범상치 않은 일화들을 접하면 낡음이 낯섦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우정을 각별하게 여기는 전통의 출발도 <논어>에 있다. 공자가 감격스러운 어조로 처음 던진 말이 ‘배우고 익히는 기쁨’ ‘친구와 만나는 즐거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는 인품’이다. <논어>가 그리 체계적이지 않은 대화록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 첫머리에 이 세 가지가 놓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공자가 평생 애독한 <주역>의 “군자는 친구와 함께 배우고 익힌다”라는 구절에 이해의 단서가 보인다. 배움으로 인한 내면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즐길 수 있는 존재가 친구다. 이 즐거움만 있다면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가 난세에 비웃음을 당하면서 끝까지 꿈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 여기에 있다.

경제가 안 좋다고 하지만 물질적 풍요는 여전히 넘쳐나 보인다. 생활은 편리하고 누구나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시대다. 그런데 각자의 삶은 왜 이리 힘이 들까. 부의 편중과 기회의 불공정, 초고령사회 진입 등이 중요한 원인이겠으나, 그런 문제만 해결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가족과 마을이 무너지고 마음 나눌 대상이 사라진 자리에 인터넷이 만들어낸 새로운 관계망이 펼쳐진다. 그 신세계에서 소리 높여 속내를 토해 보지만, 그곳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또 다른 이익과 권력의 메커니즘이 광풍처럼 휘몰아친다. 박제가는 ‘말하고 싶다가도 만나면 말하지 않게 되는가, 하지 않으려던 말도 만나면 저절로 쏟아져 나오는가’를 보면 우정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공허한 대상이 아니라 내 말을 깊이 들어줄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일반 칼럼 > 송혁기의 책상물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월의 방정환  (0) 2019.11.06
고니와 닭  (0) 2019.10.23
다시, 친구가 필요한 시대  (0) 2019.10.14
참으로 구차한 시대  (0) 2019.09.25
이번 추석에는  (0) 2019.09.11
고단한 일상의 찌꺼기를 없애려면  (0) 2019.08.28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