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간다. 나무들은 이제 하늘을 향해 뻗었던 광합성 전진기지를 서서히 철수하고 있다. 물과 영양분이 들락거리던 지난 성하(盛夏)의 물관과 체관으로 한 켜의 나이테를 더한 나무는 작년보다 몸통을 더 키웠다. 공기 속의 삶을 선택한 나무들은 위로 높이 솟구치기 위해 밑동을 부풀린다. 나무가 생산하는 유기화합물의 90% 이상은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에서 비롯된다. 10%가 채 안되는 나머지는 뿌리를 통해 흡수하는 지각 속의 물에서 나온다. 그렇기에 땅에 뿌리를 박고 있지만 나무는 가히 대기권에 근거를 둔 생명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무는 어떻게 꼿꼿이 서게 되었을까?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식물은 리그닌(lignin)이라는 생체 고분자 화합물을 발명한 덕분에 수직 상승을 현실화시킬 수 있었다. 목재 혹은 나무를 뜻하는 라틴어, 리그눔(lignum)에서 유래한 리그닌의 화학구조를 보면 유달리 산소 원자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약 4억년 전 고생대 실루리아기에 산소를 접착제 삼아 생성된, 물에 녹지 않는 리그닌 화합물은 황무지였던 지표면을 푸르게 만들어 지구 풍광을 일신(一新)했다. 리그닌은 식물을 땅 위에 굳건히 서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잎의 표면적을 넓혀 태양 에너지를 맘껏 수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 어떤 생명체도 넘보지 못했던 대기권이라는 생태 지위를 차지한 나무는 빠르게 지구 대륙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곳으로 날개 달린 곤충과 새를 불러들여 꿀과 안식처를 제공했다. 이렇게 보면 결국 식물이 나무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대기 중에 존재하는 산소 덕분이다.  

식물뿐만 아니라 동물도 산소 덕분에 몸집을 키울 수 있었다. 식물의 리그닌에 필적하는 동물의 고분자 화합물은 콜라겐이다. 포유동물이 가진 단백질의 양을 100이라고 했을 때 콜라겐은 그중 약 25%를 차지한다. 단연 압도적이다. 콜라겐은 인간의 결합조직인 뼈나 연골에 주로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어디에나 다 있다. 머리카락이나 혈관에도 있다. 이 중에서 콜라겐이 부실했을 때 가장 직접적으로 타격을 받는 조직은 어디일까? 뼈, 이빨? 아니다. 바로 혈관이다. 

심장에서 전신으로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인간은 약 10만㎞가 넘는 혈관계를 구비하고 있다. 따라서 혈관벽을 튼튼하게 유지하는 일은 건강하게 살기 위한 지름길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콜라겐을 견고하게 구축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공들여 땋은 여자아이 삼단 머리처럼 콜라겐 다발은 세 줄의 콜라겐 기본단위로 이루어져 있다. 콜라겐 단백질 안에는 특별히 프롤린(proline) 아미노산이 풍부하다. 13%에 육박할 정도다. 세포들은 프롤린 분자에 산소와 전자 한 개를 붙인 수산기를 일종의 접착제로 사용하여 세 줄의 콜라겐 다발을 완성한다. 이렇게 콜라겐 다발을 만들 때도 산소가 꼭 필요하다. 하지만 콜라겐 다발에 구조적 안정성을 확고히 부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자가 필요하다. 

콜라겐 단백질에 전자를 전달해 주는 생체 물질은 다름 아닌 비타민C이다. 대항해 시대에 수많은 선원들의 목숨을 앗아가면서 요란스럽게 등장한 비타민C 결핍의 주요한 증상인 괴혈병은 대개 전자 하나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부실해진 콜라겐 단백질에서 비롯되었다. 비타민C의 정체를 밝힌 헝가리의 센트죄르지 박사는 연구 초반 저 물질을 확보하기 위해 소의 부신을 대량으로 추출했다. 부신(副腎)은 그 이름처럼 콩팥 위에 붙은 기관이며 아드레날린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을 만들고 분비한다. 아드레날린을 만들 때도 비타민C가 제공하는 전자가 필요한 것이다. 교과서에서 우리는 비타민C가 중요한 세포 내 항산화물질이며 활성산소로부터 세포를 보호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비타민C는 스트레스성 매개 물질인 아드레날린뿐만 아니라 근육의 운동 및 쾌감 본능을 매개하는 도파민 생합성에도 필요하다. 또한 에너지원으로 쓰기 위해 잘게 쪼갠 지방산을 미토콘드리아로 운반하는 카르니틴이라는 물질을 만들 때도 필수적이다. 괴혈병의 초기 증상은 권태감을 동반하는데 이 증상은 카르니틴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인간은 이렇게 중요하고 다양한 기능을 하는 비타민C를 스스로 만들지 못한다. 대신 싱싱한 채소나 과일을 먹어 필요한 양의 비타민C를 충족한다. 하지만 인간과 달리 지구상에 사는 대부분의 다세포 생명체는 스스로 비타민C를 만든다. 몇 종의 물고기와 새 그리고 박쥐 일부, 기니피그 및 영장류를 제외한 대부분의 동물들은 비타민C를 만드는 유전자와 효소 일습(一襲)을 갖추고 평생을 살아간다. 심지어 식물이나 버섯도 비타민C를 합성한다. 식물의 비타민C는 주로 광합성 과정에서 파생하는 활성산소를 제거한다고 알려졌지만 콜라겐과 신경전달물질의 합성에 참여하는 동물에서의 비타민C의 기능을 염두에 둔다면 이 화합물이 식물에서도 다양한 기능을 할 것이라고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식물이 왕성하게 성장하거나 과일이 익을 때 비타민C가 필요하다는 최신의 연구 결과는 이런 추론을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인류는 어쩌자고 비타민C라는 중요한 물질을 만드는 수단을 내팽개쳤을까? 과학자들은 아마도 우리 영장류 조상이 나무 위에서 잎과 과일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게 되면서 이런 생화학적 격변이 찾아오지 않았을까 합리적으로 추론한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사실 항산화제인 비타민C를 합성하는 동안 역설적이게도 세포 독성물질인 과산화수소산화물이 만들어진다. 주위에서 쉽게 비타민C를 확보할 수 있게 된 인간은 저 효소를 만드는 데 필요한 에너지와 탄수화물 재원도 절약하고 간접적으로나마 독성물질의 위험도 줄일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채소와 과일을 자주 먹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는 진화적으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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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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