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는 관계는 없다.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국제관계에서는 더 말할 나위 없다. 최근 우리는 그동안 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한·미관계의 변곡점을 지나고 있는 듯하다. 한·미동맹은 냉전적 안보상황의 산물이다. 6·25전쟁이 아니었으면 한·미동맹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미국과 중국이 패권경쟁을 벌이고 있는 새로운 안보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일본의 수출통제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처리과정에서 드러난 일본 편향적 태도, 그리고 주한미군 주둔비용 6조원을 요구하는 미국은 우리에게 매우 낯설다. 이런 미국의 태도 변화는 한국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있다는 것, 아니 이미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중 패권경쟁에 직면한 미국은 우리보다 먼저 한·미동맹의 내용과 형식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한·미관계를 바라보는 과거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미국의 태도를 우리 정부가 한·미동맹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데에서 비롯된 징벌적 조치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한·미동맹이라는 형식보다는 그 안에 무엇이 어떻게 담기는가가 더 중요하다.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면 손해를 보는 것이 국제관계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정부는 아무런 대가 없이 GSOMIA를 연장함으로써, 안보상황의 변화에 합당하게 한·미동맹의 형식과 내용을 조율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다. 미국은 최근 들어 부쩍 한·미·일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중국과의 패권경쟁에 한국과 일본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미국이 주장하는 한·미·일관계는 우리에게 명백한 손해를 초래한다. 당연한 우리의 몫을 주장해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고 있다. 우리 지식인과 위정자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하고 있다.

미국이 지금과 달리 한국에 우호적인 자세를 취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특히 미국이 주한미군 주둔비용으로 6조원을 요구한 것을 트럼프 대통령의 비상식적 일탈행위로 인식해서는 안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미국에 한국이 과거와 같은 가치동맹이 아니라 강압적으로 눌러서라도 복속을 시켜야 하는 대상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엄혹한 국제정치의 무대에서는 미국의 호의적인 행동을 기대하는 것보다 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더라도 대비할 수 있는 태세를 취해야 한다. 과거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몫이 된다.

미국에 대해 정당한 이익을 따져야 한다고 하면, 미국을 버리고 중국 편을 들자는 것이냐고 몰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과의 이해관계를 합당하게 조정하자는 정당한 주장을 중국 편을 들자는 것으로 치환해버리는 것은, 뿌리 깊은 사대의식의 발로이다. 우리의 지식인과 위정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우리가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하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에 우리가 국권을 상실한 것은 강대국을 확실하게 붙들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19세기 말 대한제국은 부지런히 중국, 러시아, 미국 혹은 일본과 굳건한 관계를 만들어 보고자 했다. 우리가 국권을 상실한 것은 강대국과 확고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지닌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서 가장 강력한 강대국인 일본을 꼭 붙잡은 대가는 식민지배였다. 그런 역사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21세기 한국의 지식인과 위정자들은 여전히 19세기 말 대한제국의 경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잘나가는 강대국 하나를 꽉 붙잡아야 한다는 사람들은 역사의 교훈을 배우지 못했거나 아니면 잘못 배운 것이다.

냉전과 달리 미·중 패권경쟁시대에서는 어느 한 편을 든다고 해서 안전을 보장받기 쉽지 않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국 아니면 중국이라는 지금까지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분별력이다. 

독자적인 활동공간과 영역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적 사고가 중요하다. 어느 한쪽에 속하면 반대급부로 불이익을 받게 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편에 지나치게 기울 때 반대급부로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치명적일 수도 있다.

내 운명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주한미군 철수라는 말에 언제까지 끌려다니기만 할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다. 그것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미국도 한국을 예측 가능한 상대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한설 예비역 육군준장·순천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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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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