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18일 오후 9시 뉴스. 정몽준 후보와 노무현 후보의 단일화가 깨졌다는 소식이 전파를 탔다. 당시 나는 노무현 캠프에서 여론조사를 담당하는 실무자였다. 그전까지 우리는 2% 차의 신승을 예상했다. 자정 무렵 2% 차의 신승 예측을 유지한 채, 마지막 보고서를 전달했다. 실망하여 투표장에 가지 않을 유권자의 규모와 위기의식을 느끼고 결집하는 유권자의 규모가 비슷할 것으로 보았다. 결국 2.3% 차이로 이겼다. 2016년 총선. 선거전문가들은 민주당 100석 미만, 새누리당 150석 이상으로 점쳤다. 나는 민주당이 120석을 얻을 것으로 보았지만, 정작 언론 인터뷰에선 100석으로 예측하고 말았다. 총선 이후, 나는 망했고 민주당은 이겼다.

# 쏠림 현상은 없다. 이러한 현상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주로 업종 관계자와 전문가집단뿐이다. 최근 여론조사에 대한 다수의 문제 제기가 여기에서 출발하는데, 잘된 혹은 잘못된 여론조사 결과의 공표 그 자체로는 국민 여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생물학적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사회에서 일방적인 영향관계란 없다. 여론은 시스템사고를 한다. 어딘가에서 더해지면 또 어딘가에서 빠지기 마련이다. 여론조사가 여론을 만드는 일은 없다.

# 모든 여론조사에 안심번호(정보보호를 위한 임시생성 단기번호)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20년 전만 해도 어느 조사회사에 의뢰해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공개된 집 전화번호로 조사했기 때문에 특별한 표본추출(조사대상 일부를 뽑는 방법)도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 사태 이후 한국 경제가 IT경제로 전환되면서 무선전화 보급률은 급속도로 높아졌고, 여론조사의 비극이 시작됐다. 공개되지 않은 무선전화 번호의 표본추출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정당과 언론의 선거조사는 안심번호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지금도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조사는 유선전화만 사용할 수 있다. 어두운 밤에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길을 찾는 셈이다.

# 10%를 위해 90%를 희생하는 회사는 없다. 여론조사회사는 공공기관과 민간기업 등이 주요 고객이다. 이들이 차지하는 매출 규모는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대략 90%다. 이 때문에 의도적으로 특정 정당, 특정 후보에게 유리한 여론조사를 한다는 것은 벼룩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일이며, 공신력이 생명인 조사회사엔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이념적 편향으로 여론조사를 한다는 의심도 편견에 가깝다.

# 조사 방법마다 차별성은 있다. 정당은 공천조사, 판세조사를 주로 ARS(자동응답시스템)로 한다. 전화면접조사와 비슷한 효과를 내면서도 저렴하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선 ARS 결과가 선행지표 역할을 한다. 또 투표율이 낮은 선거에서 높은 예측률을 자랑한다. 반면에 전화면접조사는 리스트조사(제한된 명단의 조사) 등 높은 수준의 응답률과 많은 문항이 필요한 조사에 유용하게 쓰인다. 또 개표방송 시, 개별 선거구 결과를 예측하기 위한 투표소 조사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전화면접조사를 병행한다.

# 비슷한 조사의 결과 차이는 당연하다. 조사의 방법 및 시점, 표본추출 방식, 미세한 질문내용의 차이 등이 결과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통계적 오차 외에도 통신선 품질, 조사원의 숙련도 및 성실성 등 조사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언론보도, 정치행태, 여론조사는 한배를 탄 사이다. 배 어느 한쪽이라도 공공성에 구멍이 나면 모두 가라앉는다. 남 탓해 봤자 누워서 침 뱉기 십상이다.

수시로 진행되는 정당과 공공기관의 여론조사에 응답하는 것은 정당 후보와 정부 정책을 사전에 결정하고 조율하는 비밀회의에 참여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도 자신의 주권을 4만2000배(4200만 유권자/1000샘플)로 키워서 말이다. 그러니 여론조사에 응답하자. 여론조사는 공학이 아니라 일상의 민주주의다.

<최정묵 | 비영리공공조사네트워크 공공의창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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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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