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방해만 하지 마.”

그는 넥타이를 고쳐 매며 진만에게 말했다. 40대 초반이나 되었을까? 작은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 짧은 헤어스타일에 갈색 구두를 신은 남자였다. 그는 약속시간보다 15분 늦게 아파트 정문 입구에 도착했지만, 거기에 대해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진만을 한번 슬쩍 훑어보곤 인사 대신 방해 운운, 말부터 꺼낸 것이었다. 진만은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말은커녕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어쨌든 그는 직장 선배였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말할 틈도 주지 않았다. 그는 마치 여러 번 같은 집을 찾아왔던 집달리처럼 가장 가까운 아파트 동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아이들이 모두 학교나 유치원에 간 오전 9시15분, 혁신도시 내 신규 입주 아파트 단지는 한가롭고 평화로워 보였다. 일이 시작된 것이었다.

진만은 입사한 우유 회사의 내규에 따라 최초 3개월 동안 수습사원 신분으로 판촉 활동을 해야만 했다. 선배 사원과 2인 1조로 짝을 이뤄 정해진 구역 내 우유 배달 신청을 최대한 많이 받아내는 일이었다. 수습 기간엔 최저 시급에 해당하는 급여와 중식비, 교통비가 나왔고, 숙박비의 경우 따로 회사 영업 경비로 처리되었다. 실적에 따라 2개월 뒤부터 추가 수당을 더 받을 수 있었고, 부서 배치가 변동될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

“나이는?”

진만과 짝을 이룬 선배 사원이 아파트 현관 출입문 인터폰을 누르며 물었다. 그의 시선은 인터폰 화면을 향해 있었다.

“네? 아… 스물여덟 살입니다.”

“운전은? 1종이야, 2종이야?”

그와 진만 사이에 계속 인터폰 알림음이 흘렀다.

“면허는 아직….”

그의 인상이 확 구겨질 찰나, 인터폰에서 ‘누구세요?’하는 젊은 여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인터폰을 향해 고개를 숙인 후 말했다.

“어머니, 우유 공짜로 2개월 드시고, 뽀로로 매트도 하나 받아 보시라고 인사 올렸습니다.”

그는 좀 전 진만을 대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표정, 전혀 다른 음성으로 말했다. 그것은 마치 중국의 변검처럼 순식간에 가면을 바꾸는 기술처럼 보였는데, 그런데도 전혀 어색하거나 부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인터폰에서 ‘됐어요’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그는 다시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다른 층 인터폰을 눌렀다.

“사람들은 앞에선 김 과장이라고 불러. 성이 뭐야?”

“네… 저는 전 씨인데요.”

“좋아, 전 대리… 아침 9시부터 점심 먹을 때까지는 방문 판촉, 오후 2시부터 저녁 먹기 전까지는 좌판 판촉이야. 시키는 일만 하면 되고, 일 때려치울 거면 저녁에 숙소 들어가기 전에 미리 말해. 괜히 사람 번거롭게 만들지 말고.”

그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또다시 인터폰에서 ‘누구세요?’라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까보다 조금 더 나이 든 여자의 목소리였다.

“어머니, 우유도 공짜로 드시고 프라이팬도 하나 받아보시라고 인사 여쭙니다.”

그의 얼굴이 또 바뀌었다.

점심으로 김치찌개를 먹고 난 뒤부터 그와 진만은 아파트 단지 정문 입구에 플라스틱 탁자를 펼쳐 놓고 영업을 시작했다. 진만은 주로 유치원생과 함께 걸어오는 엄마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줬고, 김 과장은 그런 엄마들에게 말을 걸었다.

“어머니, 지금 드시는 우유와 저희 회사 우유하고는 이게 젖소부터 다르거든요. 젖소가 스트레스받고, 먹는 게 시원치 않으면 어떻겠어요? 아무리 무항생제니 유기농이니 해도 이게 저급 원유가 나올 수밖에 없거든요. 그게 다 아이들 입으로 들어가는 거잖아요? 저희 회사 젖소들은요, 얘네들은 그냥 포비 같은 애들이에요. 아시죠, 포비? 매일 뽀로로랑 노는 포비.”

포비는 백곰이 아닌가? 백곰과 젖소는 과연 무슨 관계인가? 먼 친척인가? 진만은 잠깐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김 과장은 오후에만 3건의 약정서를 새로 받아냈다. 그는 약정서를 쓰고 있는 젊은 엄마한테 ‘한 달에 3천원만 더 내면 요거트도 따로 넣어드린다’는 말도 했다.

저녁 6시 무렵, 그들 앞에 한 여자가 약정서를 들고 찾아왔다. 오후에 새로 우유 배달 신청 계약을 한 30대 여자였다.

“이거 좀 취소하려고요?”

탁자에 있던 서류들을 정리하던 김 과장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요?”

여자는 아무래도 일 년 뒤에 이사를 할 거 같은데, 24개월은 무리라고 말했다. 그때 가서 위약금 낼 일이 생길 거 같다고 말했다.

“안돼요.”

김 과장은 처음 여자를 만났을 때와는 또 다른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전산 입력 다 했거든요. 이미 대리점에서도 물량 주문 넣었구요.”

여자는 ‘여기 이 서류 뒤에 48시간 내 해지 가능’이라고 적혀 있지 않으냐고 따졌다. 여자의 목소리는 조금씩 올라갔다. 김 과장 얼굴 바로 앞에 서류를 내밀며 흔들기도 했다.

“아주머니.”

김 과장이 주위를 둘러보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오늘 여기서 하루 종일 떠들면서 3만원 벌었어요. 둘이 합쳐서 3만원.”

여자는 당황한 듯 굳은 자세로 김 과장을 바라보았다.

“해지하고 싶으면 내일 회사로 전화하시라구요. 우리 일당도 그때까지니까.”

김 과장은 그 말을 끝으로 플라스틱 탁자의 다리를 접었다. 진만도 말없이 그 일을 도왔다. 지금 김 과장에게 더 이상 못하겠다고, 그만두겠다고 말하면… 맞을까? 진만은 계속 망설였다. 그런 그들 앞에서 여자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만 가지. 전 대리.”

한쪽 팔에 서류를, 다른 쪽 팔에 프라이팬 박스를 든 김 과장이 앞서 걸어갔다. 진만은 접은 플라스틱 탁자를 들고 뒤따랐다. 확실히 포비는 아닌데… 이건 그냥 젖소인데… 저급 원유 나오는 젖소. 진만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뜬금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젖소 한 마리가 걸어가고 있었다. 아니, 두 마리.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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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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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달재앙 2019.12.20 16: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훠훠~ 서민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보니 절로 힘이납니돠~ 쩝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