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들어갈 때만 해도 세상이 불의하고, 알 수 없는 음모로 가득 찬 곳으로 보였다. 그런 세상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었다. 세상에 속지 않는데 도움이 되리란 판단으로 전공도 정치학으로 선택했다. 기자를 한 이유의 하나도 속지 않을 직업이라는 막연한 믿음 때문이었다. 세상의 한가운데 뛰어들어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면 속을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런 기대는 정당을 처음 취재하기 시작하자마자 난관에 부닥쳤다. 세상 전부에 대한 의심과 부정의 정신으로 충만했던 그 시절 정당의 주장은 모두 당리당략에 따른 거짓말 같았다. 거짓말을 모아서 어떻게 기사를 쓰지? 진실은 어디에 꼭꼭 숨어 있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찾을 방법도 몰랐다.

그래도 그때는 준거가 될 만한 이념이 있었고, 모두가 동의하는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거대한 사상이 떠난 자리에는 당면 현안과 쟁점, 고만고만한 사건의 조각만이 어지러이 나뒹굴었다. 진실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던 인물·집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정보는 넘쳐나고 현안은 복잡하지만, 일일이 따져볼 능력과 시간이 없는 시민에게 정당, 언론, 시민단체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시민을 대신해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점차 신뢰를 잃어갔다.

특히 시민과 여론을 대변한다는 정당과 언론은 정치적 양극화와 분열을 확대 재생산하는 기계가 되었다. 그 결과, 세상은 당파와 진영으로 쪼개지고, 서로는 서로에게 다른 세상 사람이 됐다. 진실은 제한된 공간과 시간에만 통용되는 한시성을 띠었다. 이런 세계에서 ‘사실’은 존중받지 못한다. ‘그 말이 사실인가?’가 아니라, ‘그는 어느 편인가?’라고 묻는 게 문제 해결에 더 효과적이다. 남의 생각을 바꾸고 싶으면 논리적 설득을 할 게 아니라, 같은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부족의 시대로 돌아갔다.

그건 인간의 본성 같기도 하다. 진화론은 무리 짓기를 선호한다. 오랜 수렵채집기 동안 인간은 홀로 살기보다 집단을 이루며 생존 가능성을 높였다. 그래서인지 어떤 경우는 진실이 너무 많다. 진실 찾기가 어려운 것은 진실이 너무 희귀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일지 모른다.

1989년 5월 수배중인 조선대생이 숨진 채로 발견됐다. 실족에 의한 익사라는 경찰 발표에 의혹이 제기되자 국회는 조사특위를 구성, 현지 조사를 했다. 특위를 취재하던 그때 진실의 부재, 혹은 모호성에 꽤 놀랐다. 당시 특위에 출석한 목격자들의 증언은 제각각이었다. 그들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장면을 보았으면서도 다리 위에 있던 자동차와 사람의 수를 다 달리 말했다. 그럼에도 모두 자신이 본 것만이 사실이라고 했다. 하나의 사건에 4개의 진실이 경쟁하는 영화 <라쇼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버드대학 경영대학원 수업 때 한 교수가 학생들에게 각자 자기 전화번호 뒤의 두 자리 번호를 적은 다음 유엔 회원국 중 아프리카 국가가 몇 개인지 추정해 써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전화번호 숫자가 큰 학생이 추정한 국가 수도 컸다. 사람은 자기에게도 속는다. “법과 소시지 만드는 과정은 모르는 게 좋다”고 한 비스마르크 말처럼 내 생각도 해쳐 보면 외부에서 주입된 것, 남의 생각을 짜깁기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세상 한가운데 던져진 ‘나’라는 존재도 믿을 게 못된다.

세상에 속지 않겠다는 젊은 날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나이 들어서야 깨닫는다. 세상에 속지 않는 법은 없다. 속기 쉬운 존재라는 인간의 운명을 이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내가 틀리고 남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겠다. 세계사는 소수의견이 다수의견으로 바뀌어온 역사다. 그것도 모르고 세상을 다 아는 양 얼마나 잘난 체하며 섣부르게 심판하고 따졌는가?

세상은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 구성된 대립물이 아니라 조금씩 맞고 틀린 것들이 어지럽게 뒤섞인 덩어리다. 하나의 진실이 있다고 믿는 건 맹목이며, 그걸 강요하는 건 폭력이다. 인간은 진리에 꽁꽁 묶인 존재가 아니라, 알 수 없는 세상을 향해 한발 한발 흔들리며 나아가는 불안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어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민영규의 ‘떨리는 지남철’)

<이대근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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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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