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나 무슨 대소사에 기웃거리는 일에서 자유로워졌다. 세상에 남은 인연이 있다면 잔정을 느끼는 사이, 잔정을 나누는 사이뿐. 가령 물을 한 컵 달라고 하면 컵받침에 건네주는 손길이라든지, 어디 멀리 떠나는 여행길에 여비를 쥐여주는 거친 손의 친구에게 마음이 스민다. 그 친구를 위해 선물을 고를 때 가슴이 뛴다. 잔핏줄에 잔정이 돌아야 세상 살맛이 생겨난다. 

중국도 시골로 갈수록 정이 많고 눈물이 많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도 술을 권하고 담배를 권한다. 어떤 할머니는 백세쯤 되어 보였는데, 길에서 쪼그려 담배를 권하는 이들을 보고 나무랐다. “어이 젊은이들. 담배가 무엇이 좋다고 여태 피우나. 나도 작년에 끊었다네.” 건너편 담벼락엔 정이 무척 많은 할아버지가 서 계셨다. 마침 정거장 곁이어서 담벼락에 자전거를 대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 괴로웠다. 담이 기우뚱할 지경이었다. 세우지 말라고 해도 말을 듣지를 않아. 그래서 할아버지는 잔정을 베풀기로 했다. “여기 세워둔 자전거를 공짜로 드립니다.” 담벼락에다 써 붙였더니 그날 한 대도 남지 않고 자전거가 모두 사라지는 기적. 신종 폐렴의 진원지로 중국을 겨냥하여 혐오하는 말들이 사납구나. 중국에 친척이나 친구가 있는 사람들은 입조심을 한다. 그러고도 정 많은 사람은 불행한 일이 닥치면 원망과 공포가 아니라 보호의 기도와 사랑의 기운을 그러모은다.  

지중해 변방에서 태어난 작가 칼릴 지브란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보스턴의 시리아촌에서 지브란은 바느질 일감을 날랐다. 어머니와 형과 누이가 연달아 결핵으로 죽었다. 청년은 하나 남은 여동생을 데리고 골방을 전전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전시했지만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이때 이방인을 향해 정을 보인 여인 메리 헤스켈을 만나게 된다. 또박또박 잉크를 찍어 감사와 시심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편지는 시인의 우정이고 잔정이었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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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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