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신천지’의 자체 추산 30만 교인 중에는 특히 청년세대의 비율이 높다고 들었다. 다른 교단에 비해 유난한 숫자라고 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의 학생들 중에도 그 근처까지 갔다가 빠져나온 사례들이 있다.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솔선할 일꾼이 필요하므로 애초부터 젊은층을 타깃으로 포교한다는 것이었다. 취미 활동 혹은 상담 프로그램으로 위장하여 마음의 빗장을 먼저 열고 교리는 그다음에 주입한다고도 했다. 이런 사전 정지(整地) 작업이 있다고는 해도 그다음 단계에 이윽고 접하게 될 그들의 교리는 정상적인 사유 능력의 소유자가 빠져들 법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늘어나는 확진자 숫자를 근심하는 한편, 나는 그 청년들에 대해서도 며칠을 생각했다.     

신앙 없는 문외한이지만 기독교는 이런 것이라고 알고 있다. 우선, 사상으로서의 기독교가 있다. 그것이 말 그대로 종교(宗敎), 즉 큰 가르침인 이유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의미는 삶의 표층이 아니라 깊이의 차원에 있으며 그 차원이 바로 신 그 자체다. “깊이에 대해 아는 사람은 신에 대해 아는 사람”(<흔들리는 터전>)이라는 파울 틸리히의 유명한 말을 나 같은 문외한도 알고 있다. 이 점에서 신학과 문학은 통하는 데가 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무크는 우리가 소설을 통해 삶의 본질에 대한 가장 심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평등하며 가장 민주적인 희망”(<소설과 소설가>)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실천으로서의 기독교가 있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기독교는 무조건적인 환대로서의 사랑을 지향한다. 가장 으뜸가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예수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했다(마가복음, 12:31). 더 나아가 원수마저도 사랑해야 한다고 하니, 거의 불가능한 사랑을 촉구하는 일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위대한 실천이 된다. 나 같은 필부조차도 숨 막히게 되뇌는 이런 구절이 있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稅吏)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마태복음, 5:46~7) 

그러므로 사상이자 실천으로서의 기독교를 제 삶의 근거로 삼는다는 것은 포근한 정신적 복지 프로그램의 수혜자가 되는 일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세속적 정신은 가닿을 수 없는 깊은 곳에서 실존의 의미를 추궁한다는 것이고, 평범한 사람은 감당하기 어려울 이타적인 삶을 살아낸다는 것이다. (기복(祈福)과 반공(反共)을 부르짖는 기독교란 그 자체가 일종의 모순이다.) 자부심 넘치는 합리주의자들은 ‘최악의 기독교’를 과녁 삼아 조롱 섞인 논박을 퍼붓고 그런 자신에게 도취되고는 하지만, 나는 이와 같은 ‘최상의 기독교’ 앞에서 내가 신앙을 갖지 않는 데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갖는 데에 실패한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하려 노력한다. 주변의 겸손하고 헌신적인 신앙인들을 경외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신천지는 저 두 가지 기독교의 본질을 정확히 거꾸로 구현하고 있는 것 같다. 좋은 종교가 현재에 대한 어려운 질문을 제공할 때 나쁜 종교는 미래에 대한 쉬운 답을 제공한다. 신천지는 묵시록 문학 전통에 속하는 요한계시록의 환상적 이미지들을 일대일 번역이 가능한 암호로 취급하는 천진한 성서 해석학을 휘두르며 그렇게 한다. 덕분에 헬조선의 불안한 미래가 장밋빛 종말로 대체될 수 있었다. 또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144,000’이라는 숫자를, 구원이라는 혜택을 누릴 수 있는 VIP 회원권의 장수로 치환하여 교인들에게 가슴 벅찬 소속감을 부여한다. 사회라는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기는커녕 내부에서 “서로 영광을 주고받으면서”(요한복음, 5:44) 특권의식을 향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가짜 미래의 유혹이 이 나라의 어떤 청년들을 사로잡았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거꾸로 말하면 이는 우리 사회가 그 청년들에게 그들이 합리적으로 상상하고 추구할 수 있는 미래의 가능성들을 제공하는 데 실패했다는 뜻이다. 문화인류학자 백영경의 강연에서 나는 사회적 위기의 효과 중 하나는 그 위기를 통해 ‘언제나 이미’ 위기 중에 있던 사람들의 존재가 비로소 드러난다는 데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 공동체의 어떤 이들은 이미 ‘미래 없음’이라는 재난을 살아왔다. (그리고 그중의 일부는 신천지를 찾아 떠나버렸다.) 현재의 재난은 그 재난 속의 재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재난을 극복한 뒤에 할 일은 계속 재난을 극복해 나가는 일일 것이다. 오랫동안 진행중이었던, 우리의 미래에 관한 재난을.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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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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