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고통의 차별이 있다. 차별의 고통을 잘못 적은 것이 아니다. 차별이 고통을 낳는데, 그 고통조차도 차별적으로 다뤄진다는 뜻이다. 고통의 차별이 차별의 고통을 완성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 우리가 모든 고통에 차별 없이 감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인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개별 고통의 양을 최대한 정확히 측정할 수 있기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음의 높낮이를 정확히 잡아내는 절대음감처럼, 고통을 있는 그대로 감지하는 절대통감이라는 것을 갖추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런 상상을 조롱한다. 실제의 고통값에 비해 터무니없이 저평가되는 고통들이 있다. 몰랐던 것은 아닌데, 국민청원 게시글 하나가 새삼 이런 생각에 빠지게 했다. 

이미 보도된 대로 조주빈에게 살인을 청부한 공익근무요원이 죽이려고 한 대상은 고등학교 시절 담임교사의 딸이다. 피해자인 여성 교사가 직접 글을 올렸다. 제자에게 9년 동안 스토킹을 당했다. 교무실에 칼을 들고 나타났고, 아파트에 살해 협박 낙서를 남겼으며, 메일을 해킹하여 타인에게 피해자를 사칭했다. 피해자는 여러 해를 고통받다가 2018년 가해자를 고소했다. 그러나 가해자의 복역 기간은 고작 1년2개월이었다. 피해자는 그사이 주민번호와 이름을 바꾸고 직장과 거주지를 옮겼으나, 공익근무요원이 된 가해자는 피해자의 정보를 열람하고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딸을 죽이겠다고 협박했고 실제로 조주빈과 모의했다. 그래서 피해자는 죽지 않고 살기 위해 글을 올렸다고 했다. 

이 고통은 정당하게 다루어졌는가. 이런 경우 피해자는 최소 세 단계의 고통 계량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첫째, 경찰. 경찰은 강력범죄를 처리하느라 언제나 바쁘다. 스토킹이 충분히 ‘강력’하지 않은 범죄라고 생각하면 돌려보낼 수도 있다. 둘째, 검찰. 다행히 가해자를 기소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스토킹을 가볍게 여기는 현행법이 기다리고 있다. 법대로 구형된다고 해도 가해자에게는 복수심을 단련시키기에 좋은 기간 정도일 것이다. 셋째, 재판. 양형기준이라는 것이 있어 선고할 형량이 다시 조정되는데 여기서 가해자는 감경이라는 행운을 또 한 번 누릴 수 있다. 세 단계를 거치면서 피해자의 고통은 헐값이 된다. 그리고 이제 피해자는 가해자의 출소를 기다리며 시한부의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세 단계의 과정을 이렇게 망가뜨리는 것은 고통의 사회적 위계다. 고통의 무게를 측정하는 권한은 대체로 다수 가해자의 성별과 같은 성별을 가진 이들에게 있어 왔다. 입법과 양형의 과정에서 그들은, 경험의 한계 때문이든 성의의 부족 때문이든, 피해자의 고통을 정확히 측정하지 못한다. 9년 동안의 지옥과 1년2개월의 징역이 같은 값이라고 주장하는 법의 수학은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처벌의 정도는 고통의 양에 비례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법학 내재적 기준에 따르는 것일 테다. 그러나 우리는 우기고 싶다. 성착취나 스토킹의 대상이 되는 것과 살인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토록 다른 일인가? 피해자가 자살한다면 그것은 가해자의 살인 아닌가? 법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에 우리는 치가 떨린다. 

양심적 방관자들의 몫도 있다. 그들은 악(惡)과 추(醜)의 범주를 혼동한다. 악은 나쁜 것이니 싸워야 하고 추는 더러운 것이니 피해야 한다. 예컨대 정파적 이익을 위해 재난마저 이용하는 특정 언론사들이 추로 파악될 경우 혐오의 대상이 된다. 보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 것이므로.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한가? 마찬가지로 어떤 남성들이 성범죄 사건 앞에서 ‘나는 다르다’고 말할 때, 이는 그동안 자신이 악을 추로 분별해왔고, 더러운 놈들과의 ‘미학적 거리 두기’를 잘해왔다고 주장하는 일이 될 뿐이다. 선악 분별이 행해져야 할 곳에서 미추 분별이 행해지면, 피해자의 존재와 그들의 고통이 간과된다. 우리가 깨끗한 방관자가 되는 데 만족하는 동안 악은 점점 더 오만한 악이 될 것이다. 

아마도 2020년은 두 개의 전쟁을 치른 해로 기억될 것이다. 끔찍한 전쟁 서사에서 가끔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되는 때는 계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생명의 값이 똑같이 다루어질 때다.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우리는 고통을 차별하지 않는다. 사람을 살리겠다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그 일을 하기 위해 의료진과 공무원들이 달려갈 때, 그때만큼은 고통이 평등하게 느껴져 눈물이 난다. 그런데 다른 하나의 전쟁은 고통의 오랜 차별 때문에 발발했다. 하나의 전쟁은 모두의 싸움이었지만 다른 전쟁은 절반만의 싸움이었다고 기록되어선 안 되리라. 두 전쟁은 결국 같은 전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신형철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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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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