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아침상에 쑥국이 올라왔다. 향긋한 쑥 내음이 입맛을 돋운다. 쑥국은 예전부터 가족, 친지와 함께하는 봄나들이 음식으로 사랑받아 왔다. 이항복은 형제들과 어울리며 즐거웠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눈 밑에서 묵은 쑥 뿌리 싹트려 할 때면/ 향긋한 쑥국 작은 모임에 봄기운 가득했지”라고 노래했다. 조경은 “부엌 사람 쑥을 캐어 쑥국 끓이니/ 수저 가는 반찬마다 향기롭구나”라며 그 옛날 태평성대의 백성처럼 흥에 겨워 배를 두드린다고 하였다. 화창한 봄날의 행복한 정경이다.

그런데 정희득은 쑥국 끓이는 것을 보며 탄식한다. “여러 어르신들 물가에 모이셨고/ 지는 해는 저녁밥 지어라 재촉했지/ 작년 이맘때 즐기던 일 기억에 또렷한데/ 하늘 끝 먼 땅에서 눈물 쏟으며 쑥을 캐네.” 그는 정유재란 때 왜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 땅까지 끌려갔다. 겨울에 시작된 억류 생활이 해를 넘겨 음력 3월1일이 되던 날, 하인이 쑥을 뜯어온 것을 보고 지은 시이다. 포로가 될 때 모친과 아내는 바다에 몸을 던졌고, 부친과 아이들은 조선에 남겨졌다. 낯선 땅에도 봄은 오고 쑥이 돋는다. 하지만 쑥국을 나눌 가족은 곁에 없다.

부지깽이를 꽂아도 싹이 난다는 청명이 며칠 전 지났다. 중국 시인 두목(杜牧)이 “술집이 어디인지 물어보니/ 목동은 저기 살구꽃 마을을 가리키네”라고 낭만적으로 읊은 날이 청명이다. 하지만 정희성 시인은 유신 치하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황하도 맑아진다는 청명날/ 강 머리에 나가 술을 마신다/ 봄도 오면 무엇하리 /온 나라 저무느니.” 더없이 맑은 하늘이 이어지는 봄날, 코로나19로 일상을 잃어버린 오늘을 암울하게 떠올리게 한다.

단군신화의 웅녀가 격리를 견디며 마늘과 함께 먹었다는 것이 쑥이다. 한방에서 쑥은 매우 다양하게 쓰이는데, 특히 봄철에 유행하는 역병에 복용하는 약재로도 알려져 있다. 청명의 절기 음식인 쑥국과 쑥떡은 제철에 맞는 약이기도 한 셈이다. 정희성 시인의 시 <청명>은 이렇게 끝난다. “저물어 깊어 가는 강물 위엔/ 아련하여라 술 취한 눈에도/ 물 머금어 일렁이는 불빛.” 가족과 함께하는 쑥국 한 그릇에 일렁이며 빛나는 한 가닥 희망을 본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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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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