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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임을 위한 행진곡’은 행진곡이다. 역사를 전진하게 하고 그 자신도 거듭나는 노래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식에서 공개된 정재일 편곡 버전을, 훗날 고전이 될 작품의 초연 현장에 있는 기분으로 들었다. 원곡의 멜로디를 장조로 바꿔 부른 에필로그 파트에서 정훈희의 목소리로 박창학의 가사가 노래될 때는 기어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탁월한 예술가들 덕분에 새삼 이 노래에 대해 생각했다. 한자어 ‘존재’가 ‘있는 자’이면서 ‘있음’ 자체이기도 하듯이, 우리말 ‘임’도 ‘있는 자’로서의 ‘당신’을 뜻하면서 ‘~이다’의 명사형인 ‘임(있음)’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당신’을 위한 것이자 ‘있음’에 대한 것이기도 하리라. ‘어떻게 있을(살) 것인가’에 관한 노래라는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이 노래는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1982년 2월20일)을 기리기 위해 그로부터 몇 달 후 제작된 노래극 <넋풀이>의 마지막 곡이다. 함께 이승을 떠나는 두 영혼이 산 자들에게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의 ‘가나니’가 구전 과정에서 ‘나가니’로 바뀌었다. 한 논문이 지적한 대로 이 변화는 “노래의 주체 변화”를 가져왔다(정근식, ‘임을 위한 행진곡-1980년대 비판적 감성의 대전환’). 이제 이 곡은 ‘가는 자’를 보내며 투쟁의 길로 ‘나가는 자’의 노래, 그러면서 세상의 모든 살아 있는 이들에게 “산 자여 따르라”라고 호소하는 노래가 된 것이다. 그래서 세 개의 ‘임(있음)’의 형식이 여기에 담겼다. 가는 자(죽는 자), 나가는 자(싸우는 자), 산 자(따르는 자).

첫째, 가는 자의 삶의 형식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다. 사랑이 사적 영역에서 추구될 만한 행복이라면, 명예는 공적 영역에서의 성공일 것이다. 둘 다 포기했으면 됐지, (명예에 이미 포함돼 있는) 이름은 왜 또 빼앗겨야 한단 말인가. 한 사람이 존재했다는 사실의 완전한 말소까지 각오하겠다는 뜻이었겠으나 이 구절은 훗날 기괴한 방식으로 실현된 예언이기도 했다. 5월의 현장에 있었던 평범한 시민들이 2015년 이후 제 이름 대신 북한군을 가리키는 보통명사 ‘광수’라고 불리는 일도 생겼으니까 말이다. 다른 층위의 사례지만, 1980년 5월27일 새벽 도청에서 목숨을 걸고 마지막 마이크를 잡았던 박영순씨도 명예는커녕 오해와 낙인을 피하기 위해 본명을 감춘 채 살아온 터다. 

둘째, 나가는 자의 삶의 형식은 두 구절에 분산돼 있다.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나부끼는 깃발 앞은 죽음의 앞이고 내 죽음의 가능성도 지척에 있다. ‘흔들리지 말자’고 말해야만 했던 것은 모두가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산천은 역사의 준엄함이고, 역사는 사실의 두려움이다. 그것은 나에게 주어지는 질문이자 압력이 된다. 이때의 깨어남이란 그 질문과 압력을 외면할 수 없다는 깨달음일 것이다. 요컨대 저 두 구절에서 나가는(싸우는) 자의 주체성은 흔들림과 깨어남의 반복이다. 수시로 흔들리면서도 매번 깨어나야 하는 삶, 그것은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있다.

셋째, 산 자의 삶의 형식은 마지막 구절이 알려준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산 자는 ‘따르는’ 자다. 지난 4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을 자극한 구절이고, 따라 부를 때마다 ‘싸우는 자’를 ‘따르는 자’라도 되자고 자신을 다그쳐야만 했으리라. 40년이 지난 이제 ‘산 자’들이 따라야 할 것은 새삼 진실이다. 40년 전 광주의 진실과 그 가치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있다. 아는 자는 기억함으로써 살리는 자가 되고, 모르는 자는 왜곡함으로써 죽이는 자가 된다. 광주를 죽이는 자들이 괴물(사이코패스)인지 환자(망상증)인지 나는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의 창궐을 막아내는 것이 산 자들의 책무라는 것이다.  

5월 광주에서의 자신을 증언하는 분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누구라도 그때 그곳에 있었다면 자신처럼 행동했을 것이라는 말. 제 허물을 용서하기 위해 인간 전체를 용서해버리는 사람도 많은데, 그분들은 자신이 도달한 숭고함을 인간성 그 자체에 헌정하고 있었다. 많은 학자들의 말대로 ‘오월 공동체’는 개별성에서 연대성으로 도약하는 인간성의 한 극치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죽고 싸우고 따르는, 그런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지고한 경지 하나를 재현하는 노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인간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이 노래를 우리의 국가(國歌)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은 과분해서다. 이 노래가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자격이 없어서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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