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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에 대한 경찰폭력으로 촉발된 미국 인종시위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구호가 “블랙 라이브스 매터(Black lives matter,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표현이다. 이 구호에 대해 일부 백인 극우들이 “올 라이브스 매터(All lives matter)”라는 구호를 내세우곤 하는 모양이다.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니 말이야 틀린 게 없지만, 이 말의 고약한 의도를 읽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정한 맥락과 배경을 가진 주장과 달리 아무 맥락 없이 보편타당하기만 한 의견은 대개 비겁하거나 악의적인 의도를 감추고 있다. 흑인 생명만 소중하냐, 백인 생명도 소중하다. 당신 의견만 옳으냐, 내 의견도 옳다.

비슷한 사례는 많다. 걸핏하면 벌어지는 여성혐오 범죄에 대해 “모든 혐오는 나쁘다”라고 점잖게 훈수하는 경우도 그러하다. 누가 왜 여혐을 표출하는지는 여기서 소거되어 있다. 점잖은 훈수꾼들은 여혐에 반대하는 여성 행동가들이 거울 투사의 방식으로 남혐을 되돌려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동물생명권과 환경파괴를 우려해 채식주의를 선택한 이에게 식물의 생명은 중요하지 않느냐고 반박하는 경우도 비슷하다. 사실 이들이 맥락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아니꼽고 불편하지만 대적할 논리가 없으니 만고에 틀릴 일이 없는 보편타당한 논리를 내세우는 것이다. 이들이 감추고 있는 속내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그래, 너 잘났다!”

‘너 잘났다’는 의외로 천하무적의 기운 센 무쇠팔이어서 사실과 맥락에 근거한 모든 의견들을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다. 이 팔을 장착하면 어떤 조잡한 의견, 비상식도 대등한 가치를 주장할 수 있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를 쓴 미치오 가쿠타니는 ‘가치들의 거짓 등가성’이라는 말로 이런 현상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정보 과잉으로 인한 선택의 자유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으로 인한 탈진실의 풍조가 이런 현상을 불러왔다는 게 그의 진단이지만, 여기에는 좀 더 오랜 연원이 있는 듯하다. 상식과 진실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믿는 것에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반지성의 풍조 뒤에는 가치들의 거짓 등가성만큼이나 시장의 등가적 교환 논리가 숨어 있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실체적 기반을 떠나 유통에서 가치를 획득하는 대상들로 화폐, 정보, 기호를 들고, 사실을 대리하는 이 모사적 대상들이 거꾸로 원본을 능가하는 것을 현대의 특징이라 말한 바 있다. 화폐와 의견이 같은 작동 원리와 계보를 가진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시장의 교환에 의해 가치를 부여받고 탄생했다는 점에서 그것들은 동종의 존재들이다. ‘교환 가능성’이야말로 이 시대의 가치를 발행하는 발권은행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가 말하는 다양성의 존중이나 가치의 평등도 다시 생각해볼 만하다. 기실 우리가 떠받드는 다양성 이념은 그것이 유래한 사실들의 차이를 지우고 모든 것을 개인적 가치로 치환하는 자유주의적 다양성의 또 다른 버전일 수 있다. 다양성이 모든 의견이 동등하다는 가치의 다양성으로 이해되는 순간, 그것은 개인의 고유성(singularity)이 아니라 언제나 교환할 수 있고 대체할 수 있는 복수성(plurality)으로 전락한다. 이렇게 되면 가치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다. 모든 의견과 가치들이 혼자 존재할 수 있는 대상이 되면 개인들도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사물이 된다. 어떤 가치든 자신의 가치를 높여야만 인정받고, 교환 관계에서 높은 값을 받을 수 있다. 자신의 믿음을 확증해줄 증거를 편집증적으로 찾아다니고, 관심이 떠나면 견디지 못하는 관종병을 앓고, 사사건건 자신의 얘기가 아닌가 걱정하는 자아왜소증 또는 자아비대증은 그 흔한 표현이다.

우리는 지금 경중은 다르지만 모두가 비슷한 병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실은 아무래도 상관없고 나만이 중요하다는 병 말이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heegone@aprilbook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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