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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작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전국에 수만명은 되겠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는 나의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다. 그 덕분에 나는 초등학생이던 때에 이미 ‘비비안 리’와 ‘클라크 게이블’을 정확하게 발음할 수 있었고(어쩌면 클라크 ‘케이블’이라고 발음했을지도 모른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테니까” 운운하는 대사를 외우기까지 했다. 어머니만큼은 아니겠지만 나에게도 이 영화는 아련한 향수의 대상이다. 고전 할리우드 영화를 볼 때 우리 모자(母子)는 언제나 백인이었다. 물론 이제는 안다. 내 또래의 어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이 영화는 나의 어머니가 가장 싫어한 영화였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워너미디어’의 스트리밍 서비스 ‘HBO 맥스’가 론칭되자 <노예 12년>의 각본가 존 리들리(John Ridley)는 LA타임스(6월8일자)에 글을 기고해 상영작 목록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아무리 선의로 만들어진 영화라도 주변화된 집단을 재현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있을 수 있는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경우는 단지 ‘부족함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남북전쟁 전의 남부를 영광스러운 것으로 ‘미화’하고 있다는 데에 이 영화의 “특별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노예제도의 참상을 무시”할 뿐 아니라 “유색인종에 대한 가장 고통스러운 고정관념”을 고착화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 영화에 제기된 수많은 항의의 가장 최근 버전일 뿐이다. 

저명한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도 <위대한 영화 1>(2002)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가치관과는 동떨어진 세계에서 만들어진 영화”라고 못 박았다. 그러면서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만들 가치가 없을 것이다. 만들어 보았자 거짓말로 점철된 작품일 것이다”라고 덧붙이기를 잊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작품의 성취 안에는 그 오류마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고, 당대의 한계조차도 진실하게 드러냈다는 데에 이 작품의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는 뜻이리라. 그의 말은 온건하고 합리적이다. 그러나 올바르지 않음의 가치조차 가치로 간주할 수 있는 여유는 제3자의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피해 당사자가 아니라 예술 애호가의 말이다. 

고전을 오늘의 시선으로 단죄하면 남아날 작품이 있겠느냐는 탄식도 그들의 말이다. 그 말은 예술의 가치에 대한 지극한 존중의 표명이겠지만 예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무시해도 좋은 고통이 세상에 있다는 선언으로도 들릴 수 있다. 예술을 위해 희생되는 것이 나와 내 가족의 생명이고 내가 속한 커뮤니티의 존엄이라고 상상해 보는 순간 누구든 예술 애호가이기를 멈출 것이다. 1982년의 어느 술자리에서 소설가 황석영은 한 신예 작가가 “이완용을 매국노라고 하지만 그는 당대의 명필이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된다”라고 말하자 이렇게 응수했다. “야, 우금치에서 일본군 총 맞아 죽은 동학농민군 돌쇠가 죽으면서 이완용이는 명필이다, 그러고 죽겠냐?” 죽어가는 돌쇠에게 이완용의 붓글씨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다.

이제 예술을 가장 사려 깊게 존중하는 방식은 그것을 둘러싼 어떠한 논란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되었다. ‘한 방울 규칙’(one drop rule)이라는 것이 있었다. 어떤 이의 족보에 흑인 개체가 한 사람만 있어도 그는 행정적으로 ‘흑인’으로 분류되어야 한다는, 지금은 폐지된 법률 규정이다. 한 방울만으로도 본질이 바뀐다는 ‘오염’의 은유를 활용해, 과거에는 노예 개체수를 늘리고 이후에는 혼혈 억제를 도모한 것이었다. 이 오류를 비틀어 가져온다면 약간은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 어떤 예술작품에도 흑인(혹은 누군가)의 피 한 방울은 들어 있다고 말이다. 완전무결한 작품은 없으며 모든 작품은 전쟁터다. 전쟁이 벌어진다는 게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 반대가 문제다. 전쟁이 불가능할 정도로 일방적인 지배 관계가 관철되고 있었다는 뜻이므로.

앞서 인용한 존 리들리의 글에서 더 중요한 부분은 그다음에 있으니 마저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그는 자신이 검열이라는 것을 믿지 않으며 따라서 이 영화의 영구 퇴출을 원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적절한 시간이 지난 뒤에 이 영화가 다시 돌아오길 바라는데, 단 노예제도와 남부연합이 진정 무엇이었는지 그 전체상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다른 영화들과 함께 목록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다른 목소리의 서사들과 대화적 관계 속에 놓여야 한다는 것인데, 달리 말하면 생산적 전장(戰場)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HBO 맥스는 이 영화에 대한 비판적 주석 작업이 더해져 상영될 수 있을 때까지 일시적으로 서비스를 중단하겠다고 밝힘으로써 존 리들리에게 신속히 응답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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