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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미니픽션]‘1001’

경향 신문 2020. 6. 26. 10:33

1001구역에 신원미상자가 들어왔다.

경비원은 신원미상자가 80대 할머니로 노숙인이거나, 손 회장이라고 전했다. 이 소식을 들은 1001구역 관리소장 이씨는 당황했다. 그 어느 쪽이든 문제였기 때문이다. 입구 경비에 따르면 이번 일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출입기기 점검 시간에 발생했다. 경비 네 명이 기기를 살피는 동안 할머니가 열린 틈 사이로 들어왔다. 한손은 종이상자를 끌고 다른 손은 뒷짐을 진 채. 이를 뒤늦게 발견한 경비원이 소리쳤다. “어딜 들어가요!”

그러나 할머니는 그런 외침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할머니를 붙잡았다. 그러자 할머니가 경비를 노려보았다. 경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노려보지? 그런데 가만, 할머니가 누군가를 닮았다. 혹시 손 회장?

손 회장은 전 세계 체인점을 4000개나 가진 ‘꿀떡’ 대표로 이 구역 최고 부자였다. 그러나 올해 교체된 경비들은 손 회장을 가까이서 볼 기회가 없었다. 그저 한 장의 사진으로 알려진 손 회장의 외모는 특별했다. 굽은 허리, 새하얀 머리, 자글자글한 주름. 경비는 붙잡은 손을 얼른 놓고, 90도로 인사했다. “들어가십시오!”

소장 이씨는 신원미상 할머니가 종이상자를 깔고 앉아 있다는 다리 위로 뛰어갔다. 근처에서 할머니 행동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이씨는 할머니가 손 회장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할머니가 보유한 종이상자 브랜드가 ‘굳이’도, ‘루비똥’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비원이 손 회장에게 버릇없이 굴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스러웠다. 그러나 다른 고민이 생겼다. 곧 폴이 할머니를 발견할 터였다. 폴은 매일 관리사무소에 찾아와 사사건건 불만을 제기하는 입주자였다. 때론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른 채 단지 폴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사과해야 했다. 하지만 이번 건은 사과로 끝나지 않을 일이었다. 노숙인 무단침입이라니.

이씨가 관리하는 1001구역은 부(富)에 따라 입주자격을 얻는 곳이다. 이 구역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은 1호에 사는 지구상 1% 부자 폴이고, 가장 부유한 사람은 001호에 사는 0.01% 부자 손 회장이다. 1%부터 0.01%까지 사는 1001구역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노숙인을 쫓아내는 일도 쉽지 않았다. 노숙인 할머니가 이미 자리를 깔아버린 상태라서 그를 무력으로 추방하면 인권문제가 생길 게 뻔했다. 잠들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전에 다른 구역 소장으로 있을 때도 노숙인 무단침입 사건이 있었다. 이씨는 당시 일을 해결해준 인력사무소에 연락했다. 잠시 후 양복을 입은 건장한 사내 다섯 명이 1001구역으로 들어왔다.

1호에 사는 폴은 믿을 수 없었다. 행색이 초라한 할머니가 1001구역에 있었다. 게다가 할머니가 자리 잡은 곳은 이 구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라이언스 다리 위였다. 폴은 관리사무소에 뛰어갔다. 소장 이씨를 혼쭐낼 참이었다. 그런데 폴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씨가 외쳤다. “그 소식 듣고 오신 거죠? 다리 위에 전설의 손 회장님이 계시다는 소식!”

이씨는 폴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놓치지 않고 그에게 손 회장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엔 할머니와 흡사하게 생긴 주름이 자글자글한 여자가 있었다. “그럼 그렇지.” 폴은 혼잣말을 하며 나왔다. 손 회장이라면 꿀호떡으로 세계를 평정한 이 구역 최고 부자가 아닌가. 폴은 다시 다리로 향했다. 최빈곤층에서 최부유층으로 성공했다는 전설의 손 회장을 실물로 볼 기회였다. 할머니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머리 위엔 신문지를 덮은 상태로. 폴은 할머니 주변을 맴돌았다. 인기척에 할머니가 신문을 걷었다. 그는 화들짝 놀라는 척하며 할머니 얼굴을 보았다. 과연 할머니는 범상치 않아 보였다. 폴을 노려보는 눈빛은 집게로 찌르듯 무시무시했고, 저 자글자글한 주름은 이 구역 사람에게 흔하지 않아서 오히려 초월적으로 느껴졌다. 폴은 수줍어하며 말을 건넸다.  “소문대로 멋지십니다.”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할머니가 중지를 치켜들었다. 폴은 당황스러웠지만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어떤 가르침을 받고 싶은 제자가 자세를 잡듯이 할머니의 상자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둘러보니 근거리에 건장한 사내 다섯 명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폴이 보기에 할머니는 티 안 나게 경호를 받고 있었다. 더 깊은 존경심이 일었다. 할머니 얼굴을 다시 보았다. 폴은 생각했다. ‘한 사람의 얼굴을 이렇게 자세히, 경외의 눈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할머니는 폴에게 관심이 없었다. 다시 신문을 펼쳐 얼굴을 덮었다. 이내 단잠에 빠졌다. 할머니가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폴은 생의 여유에 대해 생각했다. 오후 햇살이 뜨거워질 무렵엔 신문지 위에 손차양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때 멀리서 할머니를 지켜보던 사내들이 다가왔다. 상자 모서리를 잡았다. “하나, 둘!” 그들의 구호에 잠든 할머니가 들렸다. 마치 공중 양탄자에 탄 것만 같았다. 폴은 감탄했다. 역시 햇살을 피해 좋은 곳으로 모시는구나. 할머니의 종이상자가 1001구역 출입문으로 향하는 걸 보며 폴은 그 옛날 왕의 행차를 떠올렸다.

<김재아 소설가·<꿈을 꾸듯 춤을 추듯>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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