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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은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고 비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외교안보 사가(史家)들에겐 매우 귀중한 선물이 됐다. 특히 트럼프와 문재인 정부에 비판적인 외교안보 전문가들에게 볼턴은 좋은 먹잇감을 던져준 셈이다. 570쪽에 이르는 회고록에는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이미 파경에 이른 남북관계는 물론 한·미관계까지도 불편하게 만드는 인화성이 높은 내용도 적지 않다. 서울과 워싱턴 모두 볼턴의 회고록을 평가절하하거나 부인하는 것이 임시방편은 되겠지만 능사는 아닌 듯하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기 때문이다.

우선 냉전시절 소련의 속성을 예리하게 분석한 조지 케넌의 탁월한 보고서 ‘긴 전문’(Long Telegram)과는 대조적으로 볼턴의 회고록은 퇴조하는 미국 장래에 대한 깊은 고민보다는 트럼프 권력정치의 민낯을 엿볼 수 있는 한 편의 소극(笑劇)이었다. 초강대국 권력의 심장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고개를 젓게 하는 내용들이 편재(遍在)돼 있다. 17개월 동안 볼턴이 실제 보고 들었을 수만 가지 내용 중 일부만이 선택적으로 기억되고, 나아가 회고록이라는 지적 구조물로 단순화되긴 했어도 꼼꼼히 기록한 것을 토대로 볼턴은 작심한 듯 트럼프를 미국 국가이익을 해(害)하고 단일 패권권력 퇴조의 불길에 산소를 공급하는 위험한 인물로 묘사했다. 트럼프로선 졸지에 정치적 ‘프래깅’(장교 막사에 수류탄을 던지는 행위)을 당한 셈이다.

트럼프와 관련해서 오히려 이야기 톤을 줄였다고 주장하는 ‘폭로집’을 읽다가 “행복한 가정은 살아가는 모습이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괴로워하는 법이다”라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첫 구절이 떠올랐다. 미국식 애국주의를 철저하게 배신한 볼턴의 눈에 비친 트럼프 측근들이야말로 조현병 환자와 다름없었다. 통제가 되지 않는 대통령의 언행을 두고서 뒤에서 대통령을 능멸하는 측근들의 저급한 행태는 전통적인 미국 정치문명의 붕괴를 알리는 ‘탄광 속의 카나리아’였으며, 동시에 이들에게 볼턴의 회고록은 뼈아픈 증거자료로 남게 될 것이다.

유아독존적 매파 볼턴의 회고록은 미국의 단극패권이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전 세계에 알리는 21세기 횃불이기도 했다. 실제 오늘날 미국 번영과 위대함의 물적 토대가 된 다양한 인종 집단이 이제는 첨예한 정치사회적 갈등을 촉발하는 위험한 요소가 됐다. 트럼프는 이미 인종주의라는 화약고에 성냥을 그어댔으며, 미국 문명 전체로 곧 번질 기미다. 중국과 협력하여 신국제질서를 재건하기보다는 코로나19 사태에서 보듯 우선 자기 집부터 건사해야 할 딱한 처지에 놓였다. 그렇다고 이쯤에서 물러날 트럼프가 아니다. 리얼리티쇼 스타답게 트럼프는 지역과 계층, 집단 그리고 동맹국가들까지 편을 가르는 반문명적 깃발을 높이 들었다. 재선에 실패하더라도 특유의 화법으로 미국 사회를 더 날카롭게 갈라놓을 게 뻔하다. 자연히 한·미 동맹에도, 북한비핵화에도 불원간 전회(轉回)의 순간이 올 것이다.

회고록 저변에 흐르는 트럼프와 국가안보 참모들이 남북한을 보는 경사된 시선과 이들의 비핵화에 대한 몰이해는 읽는 내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키신저, 브레진스키, 헌팅턴이 지녔던 지극히 미국적인 세계관과, 한반도 문제를 미국외교의 장식품으로 간주하는 깃털처럼 가벼운 인식의 연장선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모두가 북·미 비핵화 협상 결렬 공모자이거나 훼방꾼들이었다. 이를 모르고 충동적 기질을 지닌 트럼프의 한 방만을 기대한 것이야말로 순진한 발상이었다.

김정은의 자발적 완전한 비핵화는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이 났다. 최근 여론조사에서도 우리 국민 10명 중 9명은 북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시시포스의 바위를 공허하게 다시 올려야 할 안타까운 순간이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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