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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에 찬 어느 배우가 대가에게 물었다. “감독님, 인생에 의미가 있나요?” 영화감독은 바로 대답했다. “없지.”

인생에는 의미가 없다.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의 생애는 지구상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자연 순환의 미미한 사건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의미 없이 살 수 없다. 삶의 의미는, ‘사회적 존재와 자연의 일부’ 이 인간의 두 가지 조건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기울기가 달라진다. 분명한 한 가지는 이름을 남기고 싶은 욕망, 이것이 만악의 근원인 대문자 역사(The History)라는 사실이다. 문재인 대통령처럼 “(퇴임 후) 잊혀지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사는 동안 자연을 덜 망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유일한 의미다.

지난 25일 김종철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아직 ‘고(故)’를 붙일 수가 없다. 선생님과 개인적 인연은 없다. ‘다행히’ 녹색평론 2020년 5월/6월호에, 선생님께서 내게 원고를 의뢰하셨다. 원고 때문에 메일이 오갔다. 김종철 선생님은 내게 ‘한국 사람’ ‘한국 사회’에 대한 행복한 경험을 선사하셨다. 최근 내가 접한 가장 윤리적인 분이셨다. 몇 차례 오간 짧은 메일에서도 문학, 역사, 예술 전반에 대한 논쟁을 원하셨다.

주지하다시피 선생님은 1991년 사재로 녹색평론을 창간하셨다. 2004년에는 녹색평론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직을 그만두셨다. 책을 만들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주변적 이슈’인 생태·인문을 주제로 한 정기간행물을 173호(2020년 7월/8월)까지 냈는데, 가장 어려운 문제는 경비가 ‘아니다’. 필자가 없다. 정말, 필자 구하기가 어렵다. 녹색평론에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을 만들지 못한, 만들지 않는, 만들고 싶지 않은 곳이 한국 사회다. 나는 이 이슈가 한국현대사를 요약한다고 생각한다.

녹색평론은 한 권 한 권이 단행본이었고, 선생님은 173권의 편저자셨다. 기획, 편집, 엮는 일보다 단독 저서 쓰기가 훨씬 편하다. 당신은 한국 사회의 일방향성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이들을 발굴하고 조직하셨다. 그 과정에서 자신 또한 한국 사회에서 드물게 ‘사상가’가 되셨다. 여전히 ‘한·일관계(식민 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는, 1950년대 출간된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전집(全集)을 읽고 주눅이 든 적이 있다. 내용은 불문하고, 일본에는 전집을 낼 수 있는 지식인들이 즐비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한국 사회에서 일관된 자기 생각을 열 권 이상 책으로 묶어 낼 수 있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김종철 선생님 외에 생각나는 이가 없다. 선생님께 이런 말씀을 드렸더니, “저를 너무나 왜곡되게 과대히 평가하시는 것은 대단한 실수입니다. 선생님(나)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라며 펄쩍 뛰셨다. ‘의미 없음’의 의미를 아시는 듯했다.

선생님의 글이 언제나 선물이었던 것처럼, 당신은 세상과 이별하면서도 선물을 주고 가셨다. 오십이 넘도록 나의 고민은 여전히 ‘진로’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뭘 먹고살아야 하나. 이것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내 삶은 언제나 임시방편이었고, 잘못과 민폐를 반복했다. 그러나 김종철 선생님의 삶과 죽음을 보면서, 나는 “세상에 놀라지 말고 할 수 있는 일만 하자”고 다짐했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돈이든 명예든 타인의 인정이라는 의미 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인생은 결국 죽음을 향한 가벼운 발걸음에 불과하다는 진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 죽음을 염두에서 잃어버린 순간, 타락은 필연이다.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은 삶과 죽을 운명이라는 두 가지 조건의 길항에서 나왔다. 근대 문명에 이르러서는 이 ‘갈등의 균형(생각하는 능력)’은 박살나고, 죽음은 자연사(自然事)가 아닌 삶의 대척에 서게 되었다.

삶은 무의미하지만 이 진실을 의식하면서 살 수는 없으므로, 사람들은 의미라는 가상의 장치를 만들었다. 그런데 물질문명이라는 ‘의미’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다. 우리는 마스크를 쓰고 더 큰 재앙을 대비하며 이 여름을 맞는다. 아수라의 한복판을 직시하던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세상이 망한 듯 나는 흐느껴 운다.

<정희진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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